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28화

첫 서리 내리던 날의 고백

창밖으로는 희뿌연 안개가 도시를 감싸고 있었다. 첫 서리가 내렸다는 아침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지우는 찬 손으로 오래된 일기장을 어루만졌다. 두꺼운 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고, 낡은 종이에서는 희미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할머니 순자 씨의 체취가 배어 나오는 듯했다.

오늘은 꽤 오랫동안 망설였던 페이지를 펼칠 차례였다. 지난밤 꿈속에서까지 할머니의 흐느낌이 들리는 듯해 좀처럼 잠들 수 없었다. 지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심장이 작은 새처럼 불안하게 콩닥거렸다. 드디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먹물이 번져 글씨가 희미해진 부분이 보였다. 그곳에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해 겨울, 작은 동생의 손

할머니의 글씨는 여전히 정갈했지만, 이 부분만큼은 어딘가 흐트러져 있었다. 마치 펜을 든 손이 심하게 떨렸던 것처럼, 잉크 자국마다 고뇌의 흔적이 역력했다.


“1953년 12월 18일, 삭풍이 몰아치던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매서웠다. 눈은 그치지 않고 쌓였고, 쌀독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아침마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도 사치가 되어버린 나날. 나는 온몸으로 한기를 막으며 방 한구석에서 덜덜 떨고 있는 어린 혜정이의 작은 손을 잡았다. 손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창백한 얼굴에는 열꽃이 피어 있었고, 마른기침은 끊이지 않았다.

의원은 돈이 없으면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약국 앞을 서성이며 약병을 들여다보는 것조차 죄스러웠다. 그때, 멀리서 민준 오라버니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 대신 근심이 가득했다. 그는 내게 말했다. ‘순자야, 이대로는 안 된다. 혜정이를 살려야 해.’

오라버니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의 재봉 기술을 인정해주는 일본의 어느 공방에서 일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조건은 가혹했다. 일본으로 떠나면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고, 그곳에서 벌어오는 돈은 가족의 빚과 혜정이의 치료비로 모두 충당될 것이었다.

나의 꿈은 무엇이었던가. 고운 비단으로 저고리를 짓고, 꽃수를 놓아 세상의 아름다움을 옷에 담는 것. 민준 오라버니와 함께 작은 양장점을 열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물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눈앞의 혜정이의 숨결 앞에서 무의미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날 밤새도록 울었다. 내 꿈은 저문 길가의 등불처럼, 희미하게 빛나다 꺼져가는 듯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혜정이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그 작은 손을 잡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나의 꿈을 팔아서라도, 내 동생을 살려야 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민준 오라버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의 빛이 스치는 것을 보며, 나는 피눈물을 삼켰다. 나의 스무 살 겨울은 그렇게, 영영 끝이 났다.”

지우의 딜레마

일기장의 글귀는 지우의 가슴을 짓눌렀다. 할머니의 희미한 글씨는 선명한 이미지로 지우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어린 할머니가 찬 바람 속에서 동생의 손을 잡고 서 있던 모습, 그리고 민준 오라버니의 안타까운 얼굴. 눈앞의 삶과 바꾼 꿈의 무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웠다.

지우는 일기장을 덮고 눈을 감았다.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할머니가 들려주던 옛이야기 속에서는 단 한 번도 이런 고통스러운 선택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할머니는 늘 강하고 쾌활한 분이셨고, 손녀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미소만 보여주셨다. 그 미소 뒤에 이런 슬픔이 숨어 있었다는 것을, 지우는 이제야 알게 된 것이다.

얼마 전, 지우는 꿈에 그리던 파리 유학 기회를 얻었다. 오래된 가구들을 재탄생시키는 업사이클링 아티스트의 길을 걷고자 했던 지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였다. 하지만 동시에, 홀로 계신 어머니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몇 년 전부터 고질적인 병을 앓아오셨던 어머니는 이제 지우의 보살핌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평생을 바쳐 지켜온 오래된 목공소를 이어받을 사람도 지우뿐이었다.

엇갈린 길, 끝나지 않는 고민

어머니의 목공소는 할머니 순자 씨가 젊은 시절 고된 일본 생활에서 돌아와 처음으로 정착했던 곳이었다. 할머니는 그곳에서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고, 작은 소품들을 만들며 생활력을 키웠다. 그리고 그곳에서 할머니의 재봉 기술은 어머니에게로, 어머니의 손재주는 지우에게로 이어졌다. 목공소는 단순한 일터가 아니라, 세대에 걸쳐 이어져 온 가족의 역사이자 영혼이 깃든 공간이었다.

지우는 파리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싶었다.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공소의 낡은 나무 냄새, 어머니의 고된 숨소리, 그리고 할머니의 일기장에서 읽은 절절한 희생은 지우의 발목을 붙잡았다.

‘나는 과연 할머니처럼, 나의 꿈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까?’

창밖 안개는 더욱 짙어져 갔다. 마치 지우의 마음속 혼란처럼, 모든 것을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일기장을 다시 펼치자, 마지막 페이지의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그 글은 할머니의 것이 아니라, 작은 손글씨로 덧붙여진 어머니의 것이었다.


“어머니는 늘 말씀하셨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지만, 가장 중요한 건 후회하지 않는 마음이란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한 선택은, 결코 헛되지 않으니.’ 나는 어머니의 그 말을 믿는다.”

안개 속 한 줄기 빛

어머니의 덧글. 지우는 다시 한번 눈물이 핑 돌았다. 할머니는 그 고통스러운 선택을 후회했을까? 일기장 어디에도 후회라는 단어는 없었다. 그저 작은 동생을 살리고자 했던 간절함, 가족을 지키고자 했던 굳건한 의지만이 가득했다.

어머니의 글은 할머니의 삶이 결코 희생으로만 점철된 것이 아니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지우의 어머니, 그리고 지우 자신에게까지 이어져 온 끈이었다.

지우는 천천히 일어섰다. 몸을 덮었던 차가운 한기가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파리의 화려한 예술 세계, 혹은 어머니의 낡은 목공소. 어느 쪽이든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지우의 고민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포기만이 능사는 아닐지도 몰라. 할머니의 재봉 기술이 새로운 길을 찾았듯, 목공소에서도 나만의 예술을 꽃피울 수 있지 않을까?’

지우는 천천히 어머니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안개 낀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오래된 목공소의 삐걱거리는 문이 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문 안에는 할머니의 눈물과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고 지우의 새로운 시작이 함께 숨 쉬고 있을 터였다. 다음 장의 이야기는, 이제 지우의 손에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