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갈수록 창밖 세상은 더 고요해졌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시작된 눈송이들은 어느새 세상을 온통 하얀 비단으로 덮어가고 있었다. 한지연은 캔버스 앞에 놓인 붓을 내려놓았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듯했다. 그녀의 눈은 캔버스에 그려진 희미한 풍경이 아니라, 그 위에 덧씌워진 오래된 기억 속 풍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열려 있는 노트북이 희미한 빛을 내고 있었다. 화면에 떠 있는 문장은 지연의 심장을 얼음처럼 굳게 만들었다. ‘해외 파견 근무, 최소 3년… 거절할 수 없는 조건.’ 그 아래에는 어린 동생의 진단명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거대한 얼음덩어리처럼 그녀의 목을 조여 왔다.
차가운 달빛 아래서
지연은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작업실은 온기로 가득했지만, 그녀는 마치 한겨울 한가운데 서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붓질을 멈춘 지 한참인데도 손에서는 물감 냄새 대신 알 수 없는 비릿한 철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녀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리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습관처럼 손에 잡힌 낡은 머그잔에는 희미하게 지워진 그림이 남아 있었다. 눈사람 두 개가 서로 손을 잡고 서 있는 그림. 오래전, 민호가 장난스럽게 그려 선물했던 것이었다.
“지연아, 우리도 저 눈사람들처럼 영원히 함께하자. 어떤 겨울이 와도, 어떤 눈보라가 쳐도 절대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거야.”
그때 민호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했다.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날은 유난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이었다. 풋풋한 사랑을 시작하던 두 청춘은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비웃듯 서로의 미래를 맹세했다. 그들의 약속은 순백의 눈송이처럼 아름답고 견고해 보였다. 그러나 지금, 그 약속은 무거운 짐이 되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동생의 병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더 이상 손쓸 방도가 없다는 의사의 말은 지연의 세상을 무너뜨렸다. 유일한 희망은 해외의 전문 병원에서 진행하는 첨단 치료뿐이었다. 그 치료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요구했고, 지연에게 주어진 해외 파견 제안은 그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민호와의 관계, 그리고 지금껏 쌓아온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지만, 몸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는 가시지 않았다. 그녀는 창가로 다가섰다.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힌 밤하늘 아래, 눈은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마치 그녀의 눈물처럼.
예고 없는 방문
“지연아, 아직 안 자?”
그때였다.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민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금 민호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민호는 이런 갑작스러운 방문을 할 때면 늘 환한 미소와 함께 그녀의 손에 따뜻한 무언가를 쥐여주곤 했다. 오늘도 분명 그랬을 터였다.
“늦었잖아. 어쩐 일이야?” 지연은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녀의 등 뒤로 민호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따뜻하고 익숙한 체온이 느껴졌다. 민호는 지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턱을 어깨에 기댔다. 그의 품에서는 막 구운 빵 냄새와 그만의 편안한 향기가 났다.
“오늘 프로젝트 발표 잘 끝났어. 이제야 한숨 돌린다. 너랑 같이 축하하고 싶어서.”
민호의 목소리에는 뿌듯함과 행복이 가득했다. 그는 꿈에 그리던 자신의 건축 디자인이 최종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고 온 참이었다. 지연은 그의 성공을 누구보다 진심으로 기뻐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에는 축하 대신 씁쓸한 고통이 파고들었다. 그녀의 결정은 그에게 이 축복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게 할 것이었다.
“잘됐다, 민호야. 정말 축하해.”
애써 밝은 목소리를 내보려 했지만, 지연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다. 민호는 그녀의 어깨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따뜻한 손이 지연의 뺨을 감쌌다. 민호의 눈은 달빛처럼 부드러웠지만, 그 깊은 곳에는 지연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과 염려가 서려 있었다.
“무슨 일 있어? 네 얼굴이 안 좋아. 뭔가 고민 있는 것 같은데.”
지연은 차마 민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였다. 민호의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 촉감은 너무나 다정해서, 지연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
“아니야… 그냥, 오늘 하루 종일 그림이 잘 안 그려져서.”
그녀는 얼버무렸다. 민호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지연을 돌려세우고,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의 입술은 따뜻했지만, 지연은 그 온기가 자신에게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슬픔에 몸을 떨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내가 있잖아.”
민호의 위로는 그녀의 심장을 더욱 아프게 했다. ‘내가 없으면, 네가 없으면.’ 그 말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민호의 행복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순간만은 그가 아무것도 모르기를 바랐다.
엇갈린 침묵
다음 날 아침, 지연은 민호가 챙겨준 따뜻한 국밥을 앞에 두고도 한 숟가락도 뜨지 못했다. 민호는 그런 지연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명랑한 발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이 모든 행복이 그녀의 손에서 부서질 것이라는 예감이 자꾸만 그녀를 괴롭혔다.
“오늘 저녁에 시간 돼? 우리 축하 파티 겸, 네 작업실에 쌓인 재료 정리도 좀 도와줄까?” 민호가 현관에서 돌아보며 물었다. 그의 눈은 반짝였다.
지연은 차마 ‘안 돼’라고 말할 수 없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간을 그녀는 거절할 수 없었다. “응, 좋아. 미리 연락 줘.”
민호가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텅 빈 집안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 침묵은 그녀에게 더욱 깊은 심연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결국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해외 파견 계약서’라는 제목이 선명한 파일. 그녀의 손가락은 서명 버튼 위에서 망설였다. 동생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민호의 미소도. 두 개의 그림자가 교차하며 그녀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했다.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서윤하였다. 지연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윤하는 지연의 대학 선배이자, 해외 파견을 제안한 회사 임원이었다. 그녀는 지연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연아, 아직 고민 중이야? 네 동생 치료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았어. 이 기회를 놓치면… 알잖아.” 윤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단호함이 묻어 있었다.
지연은 눈을 감았다. 차가운 눈꽃이 쏟아지던 그날, 민호와 함께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라 맹세했던 그 약속은, 이제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가혹한 딜레마가 되어버렸다. 그녀는 자신의 미래와, 사랑하는 이의 행복, 그리고 가족의 생존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손은 천천히, 그러나 단호하게 서명 버튼을 향해 움직였다. 바깥은 여전히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