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37화

창밖으로는 늦가을의 쓸쓸함이 내려앉고 있었다. 저물녘의 붉은 노을은 짧게 타오르다 이내 회색빛 장막 뒤로 숨어버렸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긁히는 소리를 냈다. 나는 오래된 앨범을 무릎에 올린 채 소파에 파묻혀 있었다. 사진 속 사람들의 얼굴은 젊고, 환했고, 세상의 어떤 그늘도 드리워지지 않은 듯했다. 그 시절의 내가 이제는 너무나도 멀리 떨어진 별처럼 느껴졌다.

“밤아.”

나지막이 이름을 부르자, 내 발치에 웅크리고 잠들어 있던 검은 고양이, 밤이가 가늘게 귀를 씰룩였다. 녀석은 늘 그랬듯, 내가 자신을 부르면 단번에 알아채곤 했다. 밤이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깊은 밤하늘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밤이의 부드러운 털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녀석은 기분 좋다는 듯 목을 길게 빼며 내 손에 턱을 기대었다.

“세월이라는 게 참 이상하지? 어제 같던 일들이 어느새 까마득한 옛날이 되어버리고, 또 어떤 순간들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처럼 선명한데….”

내 손길 아래서 밤이의 골골거리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녀석의 눈빛은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마치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듯한 깊이를 담고 있었다. 나는 앨범 속 한 장의 사진에 멈춰 섰다.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내 모습과, 그 옆에 서 있는 한 남자.

“이 사람은… 내가 아주 어렸을 때 나에게 기타를 가르쳐주셨던 아저씨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들려주곤 하셨지.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떠나셨어. 아무런 작별 인사도 없이.”

밤이가 내 손을 핥았다. 축축하고 따뜻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때는 그게 너무 슬펐어. 왜 아무 말도 없이 가셨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온갖 생각에 잠 못 이루던 밤이 많았지.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알게 되었어. 모든 이별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고,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을 때가 있다는 걸. 하지만 그 슬픔의 잔해들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있는 것 같아.”

밤이는 내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라 앨범 위에 제 몸을 기댔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차가워진 앨범 종이를 덮었다.

‘사라지는 모든 것은 새로운 형태로 돌아오는 법이지.’

밤이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에 울렸다. 환청인지, 아니면 정말로 녀석이 내게 말을 걸고 있는 건지, 이제는 구별조차 되지 않았다. 처음엔 그저 내가 녀석의 행동을 내 멋대로 해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밤이의 ‘말’은 너무나 명확하고 구체적이며, 내 마음을 꿰뚫는 통찰력을 담고 있었다.

“사라지는 것이 돌아온다고? 하지만 그게 똑같은 모습은 아니잖아. 아저씨는 돌아오지 않았어. 어린 시절의 나도, 저 사진 속 시간도 다시는 오지 않아.”

‘모든 이별은 다음 만남을 위한 준비일 뿐이야. 빛이 사라져야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별이 빛나는 것처럼. 하나의 끝은 또 다른 시작의 씨앗이지.’

밤이는 촉촉한 코로 내 손바닥을 툭 건드렸다. 녀석의 따스한 눈빛은 내 안에 응어리져 있던 오래된 슬픔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네 말은, 내가 아저씨와의 이별을 겪었기 때문에 다른 소중한 인연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뜻이야? 마치 너처럼?”

나는 밤이를 꽉 안았다. 녀석은 싫지 않은 듯 몸을 맡기며 고롱거렸다. 밤이와의 만남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녀석은 어느 날 갑자기 내 삶에 불쑥 찾아와, 메말라가던 내 마음에 따뜻한 물길을 내주었다. 녀석과의 대화는 때로는 철학적이었고, 때로는 유머러스했으며, 때로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나의 깊은 감정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곤 했다.

‘너는 너무 많은 것을 붙잡으려 애써. 붙잡으려 할수록 손안에서 부서지는 것이 삶이란 걸 알면서도. 차라리 놓아주면, 그것은 더 아름다운 형태로 너의 곁에 머물게 될 수도 있어.’

밤이의 말은 늘 나를 흔들었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고, 내가 외면하려 했던 감정들과 마주하게 했다. 나는 앨범 속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어린 시절의 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 그 미소는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사진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아저씨와의 아름다운 추억도 마찬가지였다. 육체적인 이별은 있었지만, 그가 내게 남긴 음악과 따뜻한 기억은 여전히 내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네 말이 맞아. 나는 너무 애썼어.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으려 애쓰고, 변하지 않는 것을 갈망하고… 그래서 늘 슬펐던 것 같아.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어쩌면 그 모든 이별과 변화가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을지도 몰라.”

밤이는 내 품에서 빠져나와 앨범 위를 가로질러 갔다. 녀석의 부드러운 발바닥이 사진 위를 스쳐 지나갔다. 마치 과거의 상흔을 지우고 새로운 길을 내주는 것처럼.

나는 앨범을 덮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그 기억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는 나 자신을 만드는 데 기여한 소중한 조각들이었다.

창밖은 완전히 어두워졌고, 싸늘한 밤공기가 유리를 두드렸다. 하지만 내 마음속은 왠지 모르게 따스한 온기로 채워지는 듯했다. 밤이의 존재가 주는 위로와 깨달음은 언제나 나를 새롭게 했다.

“밤아, 고마워.”

내가 속삭이자 밤이는 나를 올려다보며 길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기대어 몸을 웅크렸다. 어둠 속에서 녀석의 초록색 눈동자가 별처럼 반짝였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사라지는 것들을 뒤로 하고, 지금 이 순간의 충만함 속에서, 우리는 함께였다. 그리고 이 순간이 또 다른 시작이 될 것임을 나는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