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첫사랑을 찾는 탐정 – 제137화




오래된 희망의 흔적

김현우는 낡은 전단지를 손에 쥐고 있었다. ‘희망의 새싹’ 자원봉사 프로그램. 십오 년 전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빛바랜 종이였다. 그의 첫사랑, 이수진의 이름이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전단지 뒷면에 흐릿하게 쓰인 주소였다. “늘푸른마을 경로당.” 수진의 옛 하숙집 주인이 몇 년 전 이사를 가며 버리려던 짐 속에서, 현우가 끈질긴 설득 끝에 건져 올린 상자에서 나온 것이었다. 손때 묻은 물건들 사이에서 이 전단지를 발견했을 때, 그의 심장은 마치 멈췄다가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하는 듯했다.

수진은 언제나 따뜻한 사람이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깊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현우는 그녀가 이런 자원봉사 활동을 했을 거라 짐작했지만, 이렇게 구체적인 증거를 찾은 것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이 경로당에 그녀의 마지막 흔적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 불씨처럼 피어올랐다. 이 오랜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거짓된 희망에 지쳐왔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이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그녀의 손때 묻은 물건에서 나온 명백한 단서였다.

***

그는 서울의 구도심을 향해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은 익숙지 않은 좁은 골목길로 그를 이끌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은 십오 년 전의 기억과 겹쳐지며 아릿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재개발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지만, 여전히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래된 상점들과 주택들이 남아 있었다. 수진과 함께 걷던 길, 그녀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는 것만 같았다. 매번 새로운 단서를 좇아 낯선 길을 갈 때마다 현우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이번엔 정말일지도 몰라.’

마침내 ‘늘푸른마을 경로당’이라는 낡은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벽돌 건물은 낡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왁자지껄한 어르신들의 웃음소리가 그를 맞았다. 한쪽에서는 바둑을 두는 소리가, 다른 쪽에서는 TV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가락이 어우러졌다.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이 평화로운 공간에 자신의 오랜 상실감을 들이미는 것이 실례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저… 실례합니다.”

안에서 인자해 보이는 중년 여성, 박미자 경로당 사무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은 온화했지만, 오랜 세월의 지혜가 담겨 있었다.

“어머, 웬일이세요? 누구 찾아오셨나요?”

현우는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조심스럽게 수진의 이름을 꺼냈다.

“혹시, 이수진이라는 분을 기억하시는지요. 십오 년 전쯤, 이곳에서 자원봉사를 하셨던 분입니다.”

***

박 사무장의 얼굴에 순간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미소 뒤에는 알 수 없는 아련함이 스쳐 지나갔다. “이수진 양이요? 아유, 그럼요! 어찌 잊겠어요.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는 더 예뻤던 아가씨였죠. 어르신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어요.”

현우는 가슴이 저릿했다. 맞다, 수진은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빛나는 존재. 박 사무장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수진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이곳에서 정말 열심히 봉사했어요. 특히 이금자 할머니라고, 가족 없이 혼자 지내시는 분이 계셨는데, 수진 양이 그 할머니를 친할머니처럼 따랐죠. 매일 와서 말벗도 해드리고, 손수 반찬도 만들어 오고….”

이야기는 현우가 몰랐던 수진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가 알던 수진은 늘 밝고 긍정적이었지만, 이렇게 헌신적인 면모는 어렴풋이 짐작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박 사무장의 표정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말이죠… 수진 양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어요. 아무런 기별도 없이. 한동안 어르신들이 많이 걱정하셨죠. 특히 이금자 할머니는 애가 타서 매일 수진 양을 찾으셨고요.”

“갑자기 사라졌다구요?” 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가 기억하는 수진의 이별도 갑작스러웠다. 아무런 이유도 설명도 없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네. 떠나기 며칠 전부터 좀 불안해 보였어요. 웃어도 예전 같지 않고,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죠. 그러더니 어느 날 갑자기 사무실로 찾아와서는, 죄송하다며 ‘집안 사정으로 당분간 사라져야 할 것 같다’고만 말하고는 가버렸어요. 전화도 받지 않고, 문자도 보내지 않고요. 이금자 할머니도 많이 섭섭해하셨죠….”

‘사라져야 할 것 같다.’ 현우의 뇌리에 박히는 말이었다. 수진이 자의로 그를 떠난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쫓기듯 혹은 어떤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잠적해야 했다는 암시였다. 그녀가 단순히 그를 잊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면서도, 동시에 그녀가 겪었을 고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혹시, 이금자 할머니께서는 아직 여기 계신가요? 수진이에 대해 뭔가 더 알고 계실 수도….”

현우의 말에 박 사무장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이금자 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여기서 지내시다가 건강이 안 좋으셔서 근처 요양원으로 옮기셨다가….”

희망의 불씨가 사그라지는 듯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이 사라졌다니. 현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늦게 찾아왔네요.”

“아니에요. 수진 양을 이렇게 오랫동안 찾아주시는 분이 계시다는 게… 정말 수진 양이 좋은 인연을 만났었나 봐요.” 박 사무장이 위로하듯 말했다. “참, 그러고 보니 수진 양이 이금자 할머니께 특별한 선물을 드린 적이 있었어요. 직접 뜨개질해서 만든 목도리였는데….”

현우의 귀가 번쩍 뜨였다. “목도리요?”

“네. 아주 예쁜 목도리였어요. 거기에 수진 양이 직접 자수를 놓았는데, 이상한 문양이랑 날짜가 새겨져 있었죠. 할머니는 그 목도리를 보물처럼 아끼셨어요. 요양원에 가실 때도 꼭 가지고 가셨고요. 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계속 그 목도리를 소중히 간직하셨을 거예요. 할머니가 계시던 요양원은… ‘푸른숲 요양원’이었죠. 혹시 그 목도리에 무슨 의미라도 있었을까….”

‘푸른숲 요양원.’ 현우는 박 사무장이 알려준 요양원 이름을 재빨리 수첩에 메모했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목도리에 수놓아진 문양과 날짜. 그것이 수진이 남긴 메시지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강하게 밀려왔다.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어쩌면 그녀의 행방을 좇을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일 수도 있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무장님.” 현우는 진심으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박 사무장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꼭 찾으시길 바라요, 수진 양. 그 착한 아가씨가 어디서든 잘 지내야 할 텐데….”

경로당을 나서는 현우의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수진이 마냥 그를 떠난 것이 아니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사라져야 했다’는 사실이 그의 오랜 슬픔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다. 이제 그의 탐정 본능은 그 목도리의 문양과 날짜에 집중할 터였다. 푸른숲 요양원, 그곳에서 또 다른 진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