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단풍으로 붉게 물든 산기슭을 감싼 안개가 자욱했다. 가을 공기는 코끝을 쨍하게 스쳤고,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어둠 속에서 숙소의 불빛만이 오렌지색으로 아련하게 빛났다. “자, 다들 일어날 시간이다! 오늘은 지리산 정기를 듬뿍 받을 날이야!” 아빠의 우렁찬 목소리가 고요를 깨뜨렸다. 시계는 겨우 여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는 이미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있었다. 늘 그렇듯 아빠의 무리한 계획에 투덜거리면서도, 가장 먼저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여보, 그렇게 소리 지르면 다른 방 손님들 다 깨겠어요. 애들도 좀 더 자게 놔두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셋째 민지(6세)가 먼저 부스럭거리며 이불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으응… 엄마, 아직 깜깜해…” 칭얼거리는 목소리. 둘째 진호(10세)는 이미 눈을 비비며 벌떡 일어났다. “와! 아빠, 오늘 등산하는 거야? 제일 먼저 올라가는 사람이 소원 들어주는 거지?” 그의 눈은 호기심과 경쟁심으로 반짝였다.
첫째 소라(16세)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미동도 없었다. 사춘기 소녀에게 새벽 등산은 그야말로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소라야, 해 뜨는 거 보면 정말 예쁠 거야. 인생샷 하나 건져야지!” 엄마가 이불을 살짝 들추자, 소라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비췄다. “아, 엄마… 제발…”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오히려 여유로웠다. 할머니는 이미 따뜻한 물에 차를 우려 마시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창밖의 어둠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이맘때 산이 제일 멋있지. 색깔 봐라, 색깔. 곱게 물든 게 꼭 새색시 볼 같아.” 할머니의 정감 어린 목소리가 투덜거리는 아이들의 소음을 잠재웠다.
온 가족이 등산복을 입고 숙소 앞마당에 모였다. 가볍게 아침을 해결하고 출발하려는데, 민지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칭얼거렸다. “민지야, 어제 저녁에 아이스크림 너무 많이 먹었지?” 엄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민지의 배를 쓰다듬었다. 한바탕 화장실 소동 끝에, 겨우 출발할 수 있었다.
산 초입은 가벼운 산책로 같았다. 붉고 노란 단풍잎들이 길 위에 카펫처럼 깔려 있었고, 맑은 새소리가 상쾌한 아침을 알렸다. 진호는 이미 저 멀리 달려 나갔다. “아빠! 제가 일등!”
“야, 진호야! 조심해! 길 놓치면 어쩌려고 그래!” 아빠가 소리쳤지만, 진호는 이미 코너를 돌아 사라진 뒤였다. 소라는 이어폰을 꽂고 터덜터덜 걸었다. 가끔 휴대폰으로 풍경 사진을 찍는 듯했지만, 여전히 표정은 뚱했다. 민지는 아빠의 손을 잡고 “힘들어!”를 연발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서 속도를 맞췄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힘드시면 쉬었다 가시게요.”
“괜찮아, 괜찮아. 젊었을 때보다는 못하지만, 아직 이 정도는 거뜬해. 너희 아버지가 젊었을 때 나 끌고 다니던 산 생각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할머니는 피식 웃으며 할아버지와 눈빛을 교환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경사가 점점 가팔라지기 시작했다. 민지는 결국 아빠 등에 업혔고, 소라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이어폰을 빼지 않았다. 그때였다. 아빠가 문득 주위를 둘러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어? 진호가 안 보이네?”
“아까 저기 계단 올라갈 때까지는 봤는데…” 엄마도 당황한 표정이었다. 온 가족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진호는 워낙 활동적이라 앞서 가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렇게 한동안 보이지 않은 적은 없었다. “진호야! 진호야!” 아빠가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다. 산이 텅 빈 듯 메아리만 돌아왔다.
소라가 이어폰을 빼며 물었다. “진호 어디 갔어요?” 그녀의 목소리에도 걱정이 묻어났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도 얼굴빛이 변했다. “어디 다친 건 아니겠지? 혼자 다른 길로 간 건가?”
아빠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내가 너무 풀어줬나… 길을 잃었을 리는 없는데…”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엄마는 침착하게 휴대폰을 들었지만, 산이라 통화가 잘 되지 않았다.
“진호가 없어졌어요? 엄마, 진호 형아 어디 갔어요?” 민지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소라가 등산 지도를 휙 펼쳤다. “여기, 중간에 갈림길이 있어요. 진호는 분명 저기 전망대 표시 있는 데로 갔을 거예요. 아까부터 높은 데 올라가고 싶다고 했잖아요.”
소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빠는 지도를 낚아채듯 들고 그 갈림길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엄마와 할머니, 할아버지는 민지를 안고 뒤따랐다. 소라는 왠지 모를 책임감에 아빠의 뒤를 바짝 쫓았다.
가파른 길을 한참 올라갔을까, 저 멀리 작은 전망대 같은 곳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진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진호야!” 아빠의 외침에 진호가 번개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잔뜩 겁에 질린 표정과 함께, 울다가 멈춘 듯한 눈물 자국이 선명했다.
“아빠! 엄마!” 진호는 가족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리며 달려왔다. 아빠는 진호를 꽉 끌어안았다. “이 녀석아, 어디 갔었어! 걱정했잖아!”
“흐윽… 저… 제가 여기 올라오면 제일 먼저 해 뜨는 거 볼 수 있다고 해서… 혼자 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무서웠어요…” 진호는 엉엉 울면서도 손에 꽉 쥐고 있던 작은 나뭇가지 하나를 내밀었다. “이거… 아빠 주려고 예쁜 나뭇가지 주웠는데…”
아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 녀석아…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진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켰다. 소라는 진호의 머리를 콩 쥐어박았다. “바보, 다음부터는 꼭 같이 다녀야지!” 하지만 그 말 속에는 걱정과 안도감이 뒤섞여 있었다.
할머니가 진호의 눈물을 닦아주며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살다 보면 가끔 길을 잃을 때도 있는 법이야. 하지만 결국 가족은 다시 만나게 되어 있어. 안 그래?”
진호가 겨우 울음을 그치자, 가족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진호가 맨 앞에서 달리지 않았다.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옆으로는 소라가 걷고, 뒤에는 민지와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가 따랐다. 아까의 소동 덕분인지, 가족은 전보다 더 끈끈하게 연결된 듯했다.
드디어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단풍으로 물든 산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저 멀리 구름이 낮게 깔려 신비로운 장관을 연출했다. 햇살이 구름 사이를 뚫고 쏟아져 내리면서, 온 세상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와…” 소라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지만, 이번에는 사진을 찍는 대신 그저 눈앞의 풍경을 말없이 담았다. 진호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봤고, 민지는 아빠 품에 안겨 “예쁘다!”를 외쳤다.
할머니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래서 산에 오는 거야. 온갖 시끄러운 걱정 다 내려놓고, 그저 눈앞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으니 말이야.”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감쌌다. “여보, 정말 오길 잘했지? 다들 고생 많았어.” 엄마는 피곤한 얼굴에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힘들었지만… 좋네요.”
산 정상에서 싸온 김밥을 나눠 먹었다. 평소 같으면 시시하다고 투덜거렸을 소라도, 오늘만큼은 맛있게 먹었다. 진호는 아까 주웠던 나뭇가지로 장난을 치다가, 갑자기 아빠에게 내밀었다. “아빠, 이거 아빠 거예요.” 아빠는 웃으며 나뭇가지를 받아들었다. 나무의 옹이진 마디와 붉게 물든 잎이 그대로 붙어 있는, 투박하지만 아름다운 나뭇가지였다.
하산하는 길은 오를 때보다 훨씬 가벼웠다. 이제는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힘들고 지친 순간도 있었지만,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이 풍성한 기쁨으로 이어짐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왁자지껄한 수다가 이어졌다. 진호는 아까 길을 잃었을 때 본 다람쥐 이야기를 과장해서 늘어놓았고, 소라는 휴대폰으로 찍은 풍경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주며 해맑게 웃었다.
저녁 노을이 지는 산길을 걸어 내려왔을 때, 가족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묘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숙소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따뜻한 저녁 식탁에 둘러앉으니,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오늘 정말 파란만장한 하루였지?”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민지는 이미 식탁에 엎드려 잠들어 있었다. 진호는 오늘 있었던 일을 그림일기로 그리겠다고 연필을 든 채 꾸벅꾸벅 졸았다. 소라는 피곤했는지 드물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밖을 응시했다.
할머니는 잠든 민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인생도 이 산길 같아.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지. 하지만 결국엔 이렇게 다시 모여서 함께 웃고, 다음 날을 또 기대하는 게 인생이지 않겠니.”
할아버지도 고개를 끄덕이셨다. “가족이 함께라면, 어떤 길이든 갈 수 있지. 시끌벅적해도 괜찮아. 그게 우리 가족의 맛이니까.”
엄마는 따뜻한 국을 떠서 아빠에게 건넸다. 아빠는 그 국을 받아 들고 환하게 웃었다. 하루 종일 시끄럽고, 투덜거리고, 때로는 걱정으로 가슴 철렁했던 순간들이 있었지만, 결국 이 모든 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버무려져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이 되는 순간이었다. 창밖의 어둠 속에서, 가족의 웃음소리가 밤하늘로 스며들었다. 내일은 또 어떤 시끌벅적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 가족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