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훈은 낡은 종잇조각을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20년 만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이름과 주소.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게 했던 갈증이 이제 막바지에 다다른 듯했다. 종이 위에는 그의 첫사랑, 수현의 이름 옆에 낯선 성씨가 덧붙여져 있었다. 그리고, 한적한 교외의 주소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서울을 벗어나는 고속도로 위, 차창 밖 풍경은 맹렬히 뒤로 내달렸지만, 지훈의 마음은 오히려 정지된 시간 속에 갇힌 듯했다. 그는 지금껏 수현을 찾기 위해 발버둥 쳤던 지난 세월을 되감았다. 탐정이라는 직업은 그에게 수현의 흔적을 쫓을 명분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의 삶을 오롯이 그 그림자 속에 가둬버렸다. 그 모든 시간이 이 종잇조각 하나로 응축되는 기분이었다. 이제는, 그 지독한 그림자가 마침내 실체를 드러낼 시간이었다.
도착한 곳은 강변을 따라 이어진 조용한 마을이었다. 오래된 듯하면서도 깔끔하게 정돈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나뭇잎 스치는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그가 가진 주소는 마을 끝자락,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단층집이었다. 붉은 벽돌의 외벽과 작지만 정갈한 마당이 인상적인 집. 마당 한쪽에는 작은 작업실처럼 보이는 유리 온실이 딸려 있었다.
지훈은 차를 길가에 세우고 한참을 응시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지금 저 문을 두드리면,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간이 돌아올까? 아니면, 전혀 다른 현실이 그를 맞이할까?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상상했던 재회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물 젖은 포옹, 잊힌 약속을 되새기는 애틋한 대화, 혹은 낯선 이의 싸늘한 시선. 무엇이든 좋았다. 그저, 그녀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었다.
망설임 끝에 그는 차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집으로 향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대문 앞에서 멈춰 서서 초인종을 누르려던 순간, 작업실 유리창 너머로 한 여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햇살 아래, 길게 늘어뜨린 머리칼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틀림없었다. 그의 기억 속, 20년 전의 수현이, 세월의 흔적을 조금 더하고 그곳에 서 있었다. 그의 손이 흙으로 빚어진 조형물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우아한 손끝을 따라 움직이는 듯했다.
그녀는 물레 앞에 앉아 흙을 빚고 있었다. 섬세한 손길로 흙덩이가 서서히 형태를 찾아가는 모습이, 마치 그의 잊힌 기억을 복원하는 것 같았다. 지훈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작업실 문이 열리며 한 남자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저 다 했어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수현의 허리를 감쌌다. 수현은 뒤를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은 지훈이 꿈속에서 수없이 그려왔던 바로 그 미소였다. 따뜻하고, 평온하며, 모든 것을 감싸 안는 듯한. 하지만 그 미소는, 아이의 엄마로서 지어진 미소였다. 그의 첫사랑이 아닌, 한 아이의 엄마 수현의 미소.
지훈은 눈앞의 장면에 얼어붙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그녀를 찾아 헤맸던 모든 시간이 이 한 순간을 위해 존재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 시간들이 이제는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슴속에 품었던 그녀는, 이미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던 수현은 문득 고개를 들어 마당 쪽을 바라보았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 닿을까 두려웠다. 아니, 어쩌면 닿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의 시선은 잠시 허공을 헤매다 다시 아이에게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의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무치게 느꼈다. 20년 전, 그가 놓쳐버린 손길은 이제 그에게 닿을 수 없는 곳에 있었다.
수현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작업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고, 지훈은 다시 홀로 남았다. 그의 발아래에는 붉은 흙 한 조각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실에서 나온 것일까. 그는 그 흙 조각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아직 축축한 그 흙에서 왠지 모를 온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체온이 남아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때, 옆집 대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연세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할머니는 지훈을 보고 빙긋 웃으며 물었다.
“총각, 혹시 옆집 사시는 분 찾으세요? 수현 씨는 지금 아이랑 잠깐 쉬는 시간이라.”
지훈의 심장이 다시 쿵 떨어졌다.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수현의 이름을 불렀다. 낯선 성씨가 아닌, 그가 기억하는 그 이름. 지훈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아, 네… 저기, 혹시… 수현 씨가 언제부터 여기에 사셨나요?”
“음, 한 5년 됐나? 원래는 이 동네 출신이 아닌데, 무슨 큰 병을 앓았었다고 들었어. 그래서 도시 생활 정리하고 내려와서 조용히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 아이도 그때 데리고 왔고. 참 착한 아가씨야. 혼자서 아이 키우느라 고생이 많지.”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고? 지훈은 할머니의 말에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그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남편은? 아이의 아버지는 어디에? 그리고 ‘큰 병’이라니? 그가 알던 수현의 삶에 드리워진 새로운 그림자들이었다.
지훈은 할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를 건네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차에 기대어 선 채, 그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수현은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기억 속 수현과는 너무나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강인했고, 평온했으며, 무엇보다 이미 새로운 가족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겪었을 고통의 흔적들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
그는 들고 있던 붉은 흙 조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손바닥에서 흙은 서서히 마르기 시작했다. 첫사랑을 찾아 헤맨 긴 여정의 끝에, 그는 비로소 한 조각의 진실을 마주했다. 그 진실은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녀를 찾아냈지만,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는 역설.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그의 탐정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사건은, 그를 찾아낸 바로 그 순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