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희미한 달빛만이 아슬아슬하게 내려앉았다. 지은은 침대맡 스탠드의 따뜻한 불빛 아래, 손때 묻은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펼쳐 들었다. 붉은색 표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마치 그 안에 담긴 이야기들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듯했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할머니의 글씨를 따라가다 보니 지은은 어느덧 이 익숙한 종이 냄새마저 사랑하게 되었다.
오늘 펼쳐든 페이지는 유난히 글씨가 흐트러져 있었다. 잉크가 번지고, 종이가 살짝 울어 있는 것이, 할머니가 이 글을 쓸 당시 얼마나 격렬한 감정에 휩싸였을지 짐작게 했다. 1957년 겨울, 그 해의 기록이었다.
1957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브
차가운 바람이 심장까지 얼리는 밤. 온 세상이 축복과 기쁨으로 들떠 있는 이때, 내 안에는 오직 죄책감과 슬픔만이 가득하구나. 도윤 씨를 만난 것은 내 삶의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고, 그와의 사랑은 나를 온전히 불태웠다. 하지만 이 찬란함 뒤에 닥쳐온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
세상이 우리를 허락하지 않았고, 숨죽인 사랑의 대가는 너무나 잔인했다. 배가 불러오고,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이 비수가 되어 박힐 때마다 나는 절망 속으로 가라앉았다. 도윤 씨는 내 손을 잡고 도망치자 했지만, 나는 그의 앞길을 막을 수 없었다. 이미 홀로 된 몸으로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고, 그에게도 짐이 될 수는 없었다. 그건 사랑이 아니라 죄악이었다.
오늘, 나는 아이를 보냈다. 조산원에서 막 태어난 아기는 핏덩이처럼 작고 연약했지만, 그 작은 숨결에서 나는 도윤 씨의 눈빛을 보았다. 그의 코를 닮았고, 내 입술을 닮은 것 같았다. 한 번도 제대로 품에 안아보지 못하고, 그 작은 손을 잡지 못하고,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한 채… 나는 아이를 ‘좋은 곳’으로 보냈다. ‘좋은 곳’이 대체 어디일까.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내 손에서, 과연 그곳이 좋은 곳일 수 있을까.
차갑게 식은 방에서 홀로 남은 나는,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이 눈이 내 죄를 씻어줄 수 있을까. 아니, 내 영혼에 새겨진 이 상처는 영원히 아물지 않을 것이다. 평생을 이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리라. 작은 아가, 부디 평안하기를. 그리고 나를 용서하지 말기를. 이 어미의 잔인함을…
지은의 손이 떨렸다. 일기장이 바닥으로 떨어질 뻔한 것을 간신히 붙잡았다. 할머니의 글씨는 울음으로 얼룩져 읽기 힘들었지만, 그 속에 담긴 절절한 고통은 지은의 심장을 찢어놓는 듯했다. 할머니에게 숨겨진 아픔이 있을 거라 짐작은 했지만, 설마 아이를 잃은 것이 아니라, 아이를 직접 보냈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것도 젊은 시절, 사랑하는 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할머니는 평생을 자식들에 대한 헌신과 희생으로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런 할머니에게 이토록 거대한 비밀과 상처가 있었다는 사실에 지은은 망연자실했다. 일기장에는 그 이후로도 몇 페이지에 걸쳐 아기에 대한 그리움과 죄책감이 흐릿한 글씨로 이어져 있었다. ‘복순이’, ‘만복이’… 할머니는 아이에게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이름을 번갈아 부르며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단 한 번도 안아보지 못한 아이에게, 가상의 이름을 지어주며 평생을 가슴앓이했던 것이다.
지은은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할머니의 웃음 뒤에, 강인한 표정 뒤에 이런 깊고 아린 상처가 숨어 있었으리라고는. 그 시절의 가혹한 현실과 사회적 시선이 얼마나 한 인간을, 한 여인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그리고 그 결정을 내린 할머니의 마음은 또 얼마나 무너져 내렸을까.
문득, 지난번 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던 낡은 상자가 떠올랐다. 거기에는 빛바랜 아기 배냇저고리 한 벌과 작은 노리개가 들어 있었다.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모두 정리했어야 할 물건이었지만, 묘한 기시감에 잠시 보관해두었던 것이다. 설마… 그 배냇저고리가?
지은은 벌떡 일어나 다락방으로 향했다. 먼지가 쌓인 상자들을 헤치고, 마침내 그 상자를 찾아냈다.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자, 희미한 옛날 풀냄새와 함께 낡은 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그 배냇저고리였다. 작고 여린, 한번도 제대로 입혀보지 못했을 그 옷.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천 주머니가 있었다. 주머니 안에는 녹슨 은반지와 함께, 닳아 해진 종이 조각 하나가 들어있었다. 종이에는 연필로 희미하게 한 글자가 쓰여 있었다.
‘성’
성? 성씨일까, 아니면 이름의 일부일까. 지은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얽히는 실타래 같았다. 할머니는 그 아이를 좋은 곳으로 보냈다고 했지만, 어쩌면 그 아이는 살아남아 어딘가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가슴 한구석에서 솟아났다.
그렇다면, 나의 할머니에게는 숨겨진 또 한 명의 자식이 있었던 걸까. 어쩌면 나에게는 알지 못하는 삼촌이나 이모가 있는 걸까. 지은은 떨리는 손으로 종이 조각을 쥐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할머니의 평생 염원을 담은 유일한 단서였다. 이제 이 단서가 지은의 손에 쥐어졌고, 그녀는 이 퍼즐의 조각들을 맞춰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고요한 밤, 지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빛나고 있었다. 길고 긴 세월 속에 묻혀 있던 할머니의 비밀이,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은은 할머니가 평생 지고 살았던 짐을, 이제 자신이 함께 짊어져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성’이라는 한 글자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