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빛 아래의 약속
밤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고요하고 선명했다. 마치 우주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질 듯, 수많은 별들이 검푸른 벨벳 위에 보석처럼 촘촘히 박혀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스튜디오 안은 따뜻한 조명 아래, DJ 지훈의 잔잔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늦은 시간에도 빛을 잃지 않는 수많은 사연들이 놓여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입니다. DJ 지훈입니다. 이 깊은 밤, 잠 못 이루는 당신의 곁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148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지훈은 나지막이 읊조리듯 오프닝 멘트를 이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게 해주는 것이 별이라면, 우리의 인생 속에서도 그런 별 같은 존재들이 분명 있을 겁니다. 오늘은 그 별, 어쩌면 잊고 지냈던 당신의 별에 대한 사연을 먼저 만나볼까요?”
별빛아래 할머니의 사연
지훈은 손때 묻은 봉투 하나를 집어 들었다. ‘별빛아래 할머니’라는 닉네임으로 보내진 사연이었다. 봉투 안에는 곱게 접힌 편지지와 함께, 빛바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낡고 흐릿했지만, 두 아이가 손을 잡고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은 여전히 따스한 기운을 전하고 있었다.
“첫 번째 사연, ‘별빛아래 할머니’께서 보내주신 글입니다.”
지훈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지며 편지 속 문장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DJ 지훈 씨, 안녕하세요.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는 것이 쑥스럽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밤, 유난히 맑은 하늘을 보니 오래전 잊었던 별 하나가 떠올라 용기를 내어 봅니다.
저는 어릴 적, 동네 뒷산 작은 동굴을 ‘우리만의 별자리 연구소’라고 불렀어요. 그곳은 저와 단짝 친구 은서만의 비밀 공간이었죠. 우리는 매일 밤 몰래 동굴에 모여 작은 손전등 불빛 아래서, 책에서 본 별자리 그림을 따라 그리곤 했습니다.
은서는 늘 반짝이는 눈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어요. “선아야, 저기 저 별들은 꼭 나중에 우리가 다시 만나면 함께 이름을 지어주자.” 그러면 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돌멩이에 약속의 의미로 우리만의 별 문양을 새겨 넣었죠.
우리는 꼭 다시 만나, 우리가 지어준 별들을 찾아보자고 약속했었어요. 마치 그 별들처럼, 우리의 우정도 영원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죠.
하지만 은서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서울로 갑작스럽게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그 흔한 전화번호 하나 교환하지 못했던 시절이었으니, 은서와의 연락은 그렇게 뚝 끊기고 말았죠.
그 약속은 아직도 제 가슴 한구석에 별똥별처럼 박혀 있네요. 살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은서와의 그 약속만큼은 잊히지 않습니다.
이 밤, 혹시 은서도 저처럼 이 별들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그리고 언젠가 우리 둘만의 ‘별자리 연구소’를 기억하며, 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요?
부디 은서가 이 라디오를 듣고 있다면, 제가 아직 그녀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경남 통영에서 ‘별빛아래 할머니’ 선아 드림
지훈은 사연을 다 읽고 잠시 침묵했다. ‘별빛아래 할머니’ 선아 씨의 절절한 그리움이 스튜디오의 공기마저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는 잊고 지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어딘가에 묻어둔 채 시간의 먼지를 뒤집어쓴 추억들을 떠올렸다. 누구나 가슴속에 묻어둔,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빛나는 추억이 하나쯤은 있겠지.
“선아 할머니의 사연을 읽으며, 저는 잊고 지냈던 어떤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누구나 가슴속에 묻어둔,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빛나는 추억이 하나쯤은 있겠죠. 어린 시절의 순수한 약속은 어른이 되어서도 우리를 움직이는 힘이 되기도 합니다.”
지훈은 자신의 감상을 짧게 덧붙였다.
“은서 씨가 이 방송을 듣고 계시기를 저 또한 진심으로 바랍니다.”
예상치 못한 목소리
그때, 콜 인 램프가 깜빡이기 시작했다. 늦은 시간이라 상담 전화보다는 예약된 사연이나 음악 신청이 많았던 터라, 지훈은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별밤 라디오입니다. 말씀하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작고 떨렸지만, 그 속에는 왠지 모를 깊은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밤늦게 죄송합니다. 저, 방금 사연을 들으면서 너무 놀라서 전화드렸어요. 제가 이런 곳에 전화를 해보는 건 처음이라…”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지훈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
“저는… 김은희라고 합니다. 통영에 살지는 않았지만, 그… ‘별빛아래 할머니’ 사연에 나오는 은서와 저도 비슷한 기억이 있어서요. 어린 시절 단짝 친구와 숨겨둔 동굴, 그리고 별자리 연구소… 그곳에 있던 작은 조약돌들, 기억하세요? 우리는 그 조약돌에 각자의 별명을 새기고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었죠.”
지훈은 그녀의 말에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연에는 조약돌 이야기는 없었다. 그건 오직 선아 할머니와 은서만이 알 수 있는 비밀이었다. 그는 콜 인 램프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김은희 씨… 그 조약돌에 어떤 별명을 새기셨는지, 혹시 기억나시는지요?”
수화기 너머의 여인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리고는 아주 조용히,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하나는 ‘새벽 별’, 다른 하나는… ‘저녁 별’이라고 새겼어요. 그리고 그 위에 작은 하트 무늬를 그려 넣었죠. 새벽이 오면 저녁 별은 사라지고, 저녁이 오면 새벽 별은 지지만… 우린 다시 만날 거라고.”
지훈은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목소리는 은서였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가 심장을 울렸다. 그는 침착하게 마이크를 향해 말했다.
“김은희 씨… 그 사연을 보내주신 분께서는 통영에 사시는 ‘별빛아래 할머니’, 선아 씨입니다. 혹시… 선아 씨에게 남기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스튜디오 안은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속에서 별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다만, 수십 년의 세월이 담긴 먹먹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선아야… 보고 싶다.”
아주 짧고 간결한, 그러나 모든 그리움이 담긴 한 마디였다.
“라디오를 듣고 있을 선아에게 이 한마디만 전해주세요. 내가… 약속을 잊지 않았다고. 그리고… ‘새벽 별’이 ‘저녁 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다고.”
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끊었다. 그의 눈가에는 알 수 없는 감동의 물기가 스며들었다. 그는 차분하게 다음 곡을 소개했다. 오랜 그리움과 재회의 희망이 담긴 재즈 피아노 선율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밤의 위로
음악이 흐르는 동안, 지훈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밤하늘의 별들이 이 작은 스튜디오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듯한 기분이었다. 오늘 밤, 두 별이 다시 서로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직접적인 재회는 아니었지만, 이 라디오를 통해 그들은 수십 년 만에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잊혀지지 않은 약속의 끈을 다시 붙잡았다.
음악이 끝나고, 지훈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따뜻하고 깊어졌다.
“별이 빛나는 밤, 우리는 때로는 잊고 지냈던 별들을 다시 찾아내곤 합니다. 어쩌면 그 별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에, 라디오의 주파수를 타고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지도 모르죠.”
“오늘 밤, ‘별빛아래 할머니’ 선아 씨와 은서 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진심으로 이어진 인연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요. 어쩌면 아직 찾지 못한 당신의 별도,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서 당신을 향해 빛을 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밤, 당신의 별이 당신에게 닿기를 바랍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지훈이었습니다.”
지훈은 클로징 멘트를 마치고 마이크를 내렸다. 스튜디오의 불빛은 여전히 따스했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방금 만난 두 사람의 별빛 같은 이야기가 밤하늘처럼 깊이 박혀 있었다. 창밖의 별들은 여전히 묵묵히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들 중 하나는, 분명 선아와 은서의 약속을 기억하며,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을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