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59화

서울의 겨울은 언제나 회색빛으로 시작해, 서서히 하얀 비단으로 변해갔다. 하윤은 작업실 통유리 너머로 잿빛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붓을 든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눈앞의 캔버스에는 반쯤 그려진 설경이 희미하게 펼쳐져 있었다. 전시회 마감은 코앞인데, 그녀의 마음은 좀처럼 그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며칠 전, 그녀의 작업실 우편함에 도착한 정체불명의 작은 상자 때문이었다. 겉봉에는 발신인도, 주소도 없이 그저 낡은 우표 하나만이 붙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 한 장과, 그녀가 어릴 적 아꼈던 작은 유리 눈꽃 장식품이 들어있었다. 사진 속에는 앳된 얼굴의 하윤과, 그녀보다 조금 더 큰 한 소년이 활짝 웃고 있었다. 둘의 뒤편으로는 가지마다 눈꽃을 가득 매단 겨울나무가 흐릿하게 보였다. 오래 전, 모든 것을 잃은 줄 알았던 그 사진이었다.

“서진…”

그녀의 입술에서 저절로 흘러나온 이름은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 아이와 함께했던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영원히 기억하리라 맹세했던, 그러나 찢겨진 기억의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져버린 약속이었다. 그 약속은 언제나 하윤의 가슴 한켠에 아릿한 통증으로 남아있었다. 사진을 보낸 이는 누구일까. 혹시 서진일까? 아니면 그 날의 진실을 아는 누군가일까? 혼란과 기대가 뒤섞여 그녀의 심장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때, 작업실 문이 조용히 열리고 강우가 들어섰다. 그는 항상 그녀의 그림자처럼 묵묵히 하윤의 곁을 지켜주는 존재였다. 커피 한 잔을 내밀며 그의 시선이 하윤의 손에 들린 사진에 닿았다.

“또 그 사진을 보고 있었군요.”

강우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하윤은 어딘가 미묘한 변화를 느꼈다.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깊고 복잡해 보였다.

“어떻게 알았어요?”

하윤의 물음에 강우는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요즘 당신이 평소와 같지 않다는 걸요. 날씨도 한몫하는 것 같고요. 오늘 밤부터 폭설이 예보되어 있어요.”

폭설. 그 단어는 하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 폭설. 그날도 그랬지.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쏟아지던 눈.

그녀는 강우에게 사진을 건네며 물었다. “강우 씨는 혹시 이 아이를 알아요?”

강우는 사진을 받아들고 한참을 응시했다. 그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가,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글쎄요. 오래된 사진 같은데… 기억에 없습니다.”

그의 대답은 너무나 평범했지만, 하윤은 어딘가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강우의 손끝이 사진 속 소년의 얼굴을 스치는 것을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마치 아는 사람을 알아보려는 듯한 그 짧은 망설임이 하윤의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 사진, 어디서 구했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강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군가 보냈어요. 발신인도 없이. 그냥… 갑자기.”

강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당신에게 이상한 일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군요. 조심해야 할 것 같아요.”

그의 걱정 어린 말에도 하윤의 마음속에는 의문의 안개가 더욱 짙어졌다. 강우가 과연 그녀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또한 그 날의 희생자 중 한 명이었을까?

작업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붓을 들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계속해서 강우에게로 향했다. 강우는 그녀의 설경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았는데도… 슬픔이 느껴지는군요.”

“끝내지 못했으니까요. 완성될 수 없는 약속처럼.” 하윤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강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하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어쩌면, 완성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완성시켜야 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요.”

그의 말은 하윤의 심장을 꿰뚫었다. 완성시켜야 할 때. 그 때가 지금이라는 말일까? 강우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그녀는 막 질문을 던지려는데, 강우가 갑자기 밖을 가리켰다.

“첫눈이 내리기 시작하네요.”

하윤은 강우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보았다. 회색빛 하늘에서 작은 눈송이들이 솜털처럼 부드럽게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금세 창밖 풍경은 하얗게 물들어갔다.

하얀 눈꽃이 내리던 날, 우리는 다시 만날 거야. 영원히 함께할 거야.

어린 서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했다. 그때, 강우가 사진을 그녀의 손에 다시 쥐여주며 말했다.

“하윤 씨, 제가 할 말이 있어요. 당신이 알아야 할 아주 중요한 진실이에요. 오늘 밤…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폭설처럼 쏟아져 내릴 거예요.”

창밖의 눈발은 점점 더 거세지며 시야를 가렸다. 세상 모든 소리가 눈송이에 묻히는 듯했다. 하윤은 강우의 굳은 얼굴과, 쏟아지는 눈송이 사이에서 자신이 서 있던 그 날의 약속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약속이 단순히 두 아이의 맹세가 아닌, 더 거대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음을 직감했다. 폭설이 예고된 오늘 밤, 그녀의 찢겨진 기억들이 비로소 제자리를 찾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진실이 과연 그녀를 자유롭게 할지, 아니면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밀어 넣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윤은 떨리는 손으로 유리 눈꽃 장식품을 꽉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