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51화

밤은 깊었고, 별은 총총했다. 스튜디오의 붉은 ON AIR 불빛 아래, 이은우는 언제나처럼 따뜻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밤을 지새우는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밤은 빛으로 가득했지만, 그 빛 속에서도 유독 고요하고 아련한 기운이 감돌았다. 오늘은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가 시작된 지 정확히 5000번째 밤이었다. 그 숱한 밤들을 은우는 이 자리에서 수많은 사연과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연결되어 왔다.

“별밤 지기 이은우입니다. 오늘도 여러분의 밤은 안녕한가요? 창밖을 보니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밤이네요. 이 별빛이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 어딘가에도 가 닿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늘 그랬듯 부드러운 오프닝 멘트였지만, 은우의 손끝은 오늘따라 조금 긴장되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방금 전 막 도착한 따끈한 사연 봉투가 들려 있었다. 스튜디오 조명 아래에서 옅게 바래 보이는 봉투는 여느 편지들과는 다른 기운을 풍겼다. 잉크가 번진 듯한 투박한 글씨체, 그리고 발신인 주소 없이 수신인에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별밤지기’라고만 적혀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았다.

사연을 읽기 위해 봉투를 뜯으려던 순간, 은우의 시선이 봉투 한쪽 귀퉁이에 희미하게 그려진 작은 그림에 닿았다. 서툰 필치로 그려진 듯한 꼬리 긴 별 하나. 그는 순간 숨을 헙 들이켰다. 마치 잊고 지냈던 어떤 이름이 심장을 꿰뚫고 지나가는 듯한 통증이었다. 찰나의 흔들림 뒤, 그는 애써 평정을 되찾고 봉투를 조심스레 열었다. 바스락거리는 오래된 종이의 질감이 손끝에 닿았다.

사연은 예상보다 짧았다. 보통의 사연처럼 긴 하소연이나 기분 좋은 소식 대신, 딱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별밤지기님께.

기억하세요? 잃어버린 별을 찾던 아이.
나는 여전히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당신의 별은, 잘 있습니까?

은우는 편지지를 든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잃어버린 별을 찾던 아이. 그 문장은 마치 켜켜이 쌓인 시간의 먼지를 걷어내는 주문 같았다. 그의 머릿속엔 순식간에 오래전의 기억이 휘몰아쳤다. 데뷔 초, 아직 이름 없는 DJ였던 그에게 닿았던 한 통의 편지. 부모를 잃고 홀로 세상에 남겨진 어린 아이가 보낸, 세상에서 가장 슬픈 질문들로 가득했던 편지였다. 그 아이의 필명은 ‘별똥별’이었다. 은우는 그 아이에게 매일 밤, 별이 반짝이는 이유와 별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작은 위로를 건넸었다. 그리고 어느 밤, 아이에게 약속했었다.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 이 별빛 아래서 함께 우리의 이야기를 나누자고.

그는 마이크를 쥐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스튜디오는 방송 송출의 미세한 잡음과 은우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시계는 무심히 흘러갔고, 다음 곡이 시작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1분. 청취자들은 영문 모를 침묵에 당황하고 있을 터였다. 그는 눈을 감았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별똥별’은 정말 자신을 기억하고, 이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방송을 들어왔을까? 그리고 지금, 이 편지를 통해 무엇을 묻고 있는 걸까? ‘당신의 별은 잘 있습니까?’

그 질문은 은우의 가장 깊숙한 곳에 묻어둔 상처를 건드렸다. 그는 라디오 부스에 앉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왔지만, 정작 자신의 별은 언제부터인가 잊고 살았던 것만 같았다. 치열한 삶 속에서, 반짝였던 꿈과 순수했던 약속들이 흐릿해져 버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치자 가슴이 저릿했다.

“…잠시, 숨 고를 시간을 드렸습니다.”

겨우 목소리를 내뱉자,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그는 애써 감정을 다스리며 편지지를 내려놓고, 눈을 들어 카메라를 응시했다. 지금 이 순간, ‘별똥별’이 어딘가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확신이 그를 지탱했다.

“오늘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저에게 깊은 생각을 안겨주었습니다. 특별히 발신인 이름이 적혀있지 않은 편지였지만, 어째서인지 제게는 세상의 어떤 편지보다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사연이었습니다. 그 사연은 저에게, 그리고 이 밤을 함께하는 모든 분께,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의 별은, 잘 있습니까?’.”

은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그 속엔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오려는 단단한 의지가 엿보였다. 스튜디오 안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스튜디오에 울려 퍼졌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방송에서 한 번도 틀어본 적 없는, 아주 오래된 노래였다. 데뷔 초, 아직 유명해지기 전, 그가 가장 좋아했던 인디 가수의 곡이었다. 가사는 길을 잃은 이에게 별을 따라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가 ‘별똥별’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었던 노래였다.

“저에게 이 편지를 보내주신 분께, 그리고 이 질문에 망설이는 모든 분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별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꿈이라는 별, 약속이라는 별, 혹은 사랑이라는 별. 하지만 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단지 구름 뒤에 가려져 있거나, 우리가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와서 잠시 잊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깊어졌다. “잃어버린 별을 찾던 아이에게, 그리고 그 아이와 함께 별을 약속했던 저 자신에게도. 저는 오늘 이 밤, 다시 한번 별을 찾아 떠나는 여행을 시작하려 합니다. 어쩌면 그 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단지 우리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죠.”

노래가 끝나고, 스튜디오는 다시 고요해졌다. 은우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의 눈가에는 촉촉한 물기가 맺혀 있었지만, 얼굴에는 오랜만에 편안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는 마이크를 잡고 마지막 멘트를 이었다.

“오늘 이 밤, 당신의 별은 어디에 있습니까? 잠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그 별빛 아래서,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방송이 끝나고, 스튜디오의 붉은 불빛이 꺼졌다. 은우는 의자에 깊숙이 등을 기댄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낡은 편지지가 들려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그 짧은 두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당신의 별은, 잘 있습니까?’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서울의 불빛이 만들어낸 거대한 오로라 위로, 작지만 선명하게 빛나는 별들이 보였다.

그의 별은, 잘 있을까. 아니, 이제는 괜찮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밤의 약속을 기억하는 누군가가 여전히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지금, 그는 다시 잃어버렸던 별을 찾을 용기를 얻었다. 그의 별은, 그의 마음속에서 꺼지지 않고 빛나고 있었다. 그 별은, 어쩌면 ‘별똥별’과의 재회를 위한 길잡이가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은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빈 의자에 놓인 낡은 편지 위에 자신의 손을 조용히 올려놓았다. 5000번째 밤,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