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53화

첫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투명하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순백의 장막을 드리웠고, 세상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서연은 창가에 서서 손바닥에 닿는 유리창의 차가운 감촉을 느꼈다. 흩날리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저마다의 서사를 품고 땅으로 향하는 듯했다. 그 서사 속에는 분명, 오래전 잊지 못할 약속의 순간도 함께 내려앉고 있을 터였다.

찬란하게 빛나던 그 겨울날, 소년은 소녀의 손을 잡고 수북이 쌓인 눈밭을 걸었다. “서연아, 약속해 줘. 어떤 일이 있어도, 다시 꼭 여기서 만나자. 우리, 이 눈꽃처럼 영원히 함께하자.” 준호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것이었지만, 그 진심은 서연의 심장에 깊이 새겨졌다. 그때는 몰랐다. 그 약속이 자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붙들어 매고, 또 얼마나 절절하게 갈망하게 만들 줄은. 그저 순수한 믿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십수 년이 흘렀지만, 매년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그 약속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서연의 가슴을 맴돌았다. 오늘은 유독 그 기억이 선명했다. 지난밤, 꿈속에서 다시 준호의 얼굴을 보았다. 희미했지만, 그 따뜻한 미소만은 여전했다. 어쩌면 그건 단순한 꿈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예지몽 같은 것. 서연은 알 수 없는 예감에 휩싸였다.

그녀의 휴대폰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발신자는 지은이었다. 지은은 서연이 오랫동안 의지해 온 친구이자, 준호와의 약속을 유일하게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서연아, 지금 어디야?” 지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한껏 상기되어 있었다. “갑자기 왜?” 서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아니, 그게… 내가 아는 분이 미술관에 계시거든? 거기 전시실에서 우연히 옛날 그림을 발견했는데… 너한테 꼭 보여줘야 할 것 같아서.”

그림? 서연은 의아했다. 자신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그러나 지은의 다급한 목소리에는 그 어떤 거절도 허락하지 않는 절박함이 배어 있었다.

“알았어. 지금 갈게.”

서연은 두꺼운 코트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온 세상은 눈으로 덮여 마치 다른 차원으로 이동한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 속 깊숙이 스며들었다. 발밑에서 눈이 밟히는 소리가 사각거렸다. 그 소리는 과거의 발자국 소리와 겹쳐 들리는 듯했다.

미술관은 도심의 번잡함과는 동떨어진, 고요한 성역 같았다. 지은은 2층 전시실 앞에서 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기대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서연아, 이쪽이야.” 지은은 서연의 손을 잡아끌고 전시실 안쪽으로 향했다. 오래된 유화들이 나란히 걸린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에 위치한 작은 공간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낡고 빛바랜 그림 한 점이 마치 다른 세상의 일부처럼 놓여 있었다. 액자도 없이, 그저 오래된 나무판에 그려진 듯한 소박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림을 본 순간, 서연은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그림 속에는 눈 덮인 언덕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언덕 위에는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그 오두막은… 그녀와 준호가 어린 시절 비밀 아지트로 삼았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림의 중앙에는 흐릿하게 형체가 잡히는 두 아이가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아이들의 모습은 희미했지만, 그들의 손을 맞잡은 모습만은 뚜렷했다. 그들의 위로는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이건…” 서연은 말을 잇지 못했다.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림 속 풍경은 너무나도 선명하게 그녀의 기억 속 약속의 장소와 일치했다.

지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 그림, 아주 오래전에 그려진 거래. 작가는 불명이고, 우연히 창고에서 발견됐다고 하더라. 그런데 이 그림 뒷면에 뭔가 쓰여 있어.”

지은은 조심스럽게 그림을 들어 올렸다. 그림의 뒷면에는 퇴색된 잉크로 꾹꾹 눌러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그림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글씨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서연에게. 이 눈꽃이 다시 내리면, 약속했던 곳에서 너를 기다릴게. 설령 내가 많이 변했더라도, 너만은 나를 알아봐 주길 바라. 나는 늘 그곳에 있을 거야. 나의 유일한 희망. – 준호.’

글씨는 준호의 필체였다. 조금 더 성숙해진 듯했지만, 분명 그의 것이었다. 서연은 그림을 든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림은 바닥으로 떨어질 뻔했지만, 지은이 재빨리 받아 들었다.

준호… 준호가 남긴 메시지였다. 그것도 바로 ‘이 겨울 눈꽃이 내리는 날’에 발견된 메시지였다. 그가 이 그림을 그렸다는 말인가? 아니면 누군가 대신 그렸을까? 그리고 ‘약속했던 곳’은 어디를 말하는 걸까? 그 오래된 오두막?

서연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혹은 잊으려 애썼던 모든 감정들이 마치 잠자던 거인이 깨어나듯 맹렬하게 그녀를 덮쳤다. 희망, 그리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두려움. 그가 진짜 살아있을까? 그가 정말 이 메시지를 남겼을까? 하지만 그의 필체였다. 그의 진심이 담긴 글이었다.

“서연아, 괜찮아?” 지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지 않아. 이건… 이건 진짜야. 준호가 남긴 거야.”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오랜 절망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 강렬한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는 그림 속 눈 덮인 오두막을 다시 응시했다. 그리고 준호의 메시지를 되뇌었다. ‘나는 늘 그곳에 있을 거야.’

문득, 그녀의 시선은 그림 속 오두막 바로 아래, 희미하게 그려진 작은 조약돌 하나에 멈췄다. 아이들이 어릴 적, 중요한 약속을 할 때마다 그 자리에 특별한 돌멩이를 묻곤 했다. 그 돌멩이에는 어린 시절의 비밀스러운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 속 돌멩이는 다른 돌멩이들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무언가 새겨진 듯한 흔적이 있었다.

서연은 지은에게 그림을 돌려주고는 전시장 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지은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불렀다. “서연아, 어디 가는 거야?”

서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눈은 결연한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약속했던 곳. 준호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내가 가야 할 곳은, 바로 그곳이야.”

창밖으로는 여전히 눈꽃이 흩날리고 있었다. 서연의 심장은 거친 파도처럼 요동쳤다. 십수 년 전,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이 마침내 해묵은 침묵을 깨고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과연 그곳에는 누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소년의 모습은 아니겠지만, 어쩌면 그녀가 그토록 기다리던 준호의 그림자라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완전히 다른 진실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