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잎 날리는 언덕
오랜 겨울의 침묵을 깨고, 봄은 매년 어김없이 찾아왔다. 올해의 봄은 유독 잔인할 정도로 따스했다. 햇살은 옅은 금빛으로 마당을 가득 채웠고, 살랑이는 바람은 멀리서 피어난 매화와 복사꽃 향기를 실어 날랐다. 지우는 마루에 앉아 눈을 감았다. 살갗을 스치는 바람결이 마치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손길처럼 느껴졌다. 그 부드러움 속에 늘 그랬듯, 알 수 없는 슬픔의 조각들이 스며들어 있었다.
“할머니, 바람이 따뜻해요.” 지우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건너편 방에서는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마른 기침은 겨울 내내 할머니를 괴롭혔고, 봄이 되어서야 조금 잦아들었다. 지우는 할머니의 건강이 걱정스러웠지만, 동시에 그녀가 봄을 기다리는 이유 또한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매년 봄이 오면 더욱 창백해졌다가도, 묘한 기대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마치 봄바람이 어떤 소식을 가져다줄 것이라 믿는 사람처럼.
마루 아래 뜰에는 이제 막 연둣빛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오래된 감나무는 아직 앙상한 가지만 뻗고 있었지만, 그 아래 심어진 철쭉은 봉오리를 터뜨릴 준비를 마친 듯 탐스러웠다. 이 모든 것이 생명의 약동이었지만, 지우의 마음 한켠에는 늘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자리했다. 십수 년 전, 이 봄날처럼 화사했던 날 사라진 어린 동생, 은서 때문이었다.
은서가 사라진 후, 지우의 삶은 한 계절에 멈춰버린 듯했다. 다른 계절은 그저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일 뿐, 봄이 오면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어쩌면 은서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 혹은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을 거라는 절망. 그 두 감정 사이에서 지우는 매년 봄을 맞았다.
할머니의 마른 등
“지우야, 이리 와 앉아라.”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힘이 없었다. 지우는 일어나 할머니의 방으로 향했다. 방 안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낡은 가구들과 세월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었다. 할머니는 창가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햇살이 창을 넘어 할머니의 마른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 작은 어깨가 너무나 연약해 보여 지우는 가슴이 아려왔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괜찮다. 그저… 바람 소리가 오늘따라 요란해서 말이다.” 할머니는 희미하게 웃었지만, 그 눈빛은 먼 곳을 응시하는 듯했다. 마치 바람이 실어 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는 것처럼.
할머니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늘 똑같았다. 은서가 마지막으로 놀던 마당 구석의 흙더미. 그곳에는 이제 새롭게 심은 라일락 나무가 작게 자라고 있었다. 지우는 할머니의 곁에 앉았다. 따스한 햇살이 할머니와 자신을 감쌌지만, 그 속에는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듯했다.
“오늘, 하윤이가 온다고 했지요?” 지우가 화제를 바꾸려 노력했다. 하윤은 이웃집 딸이자, 어릴 적부터 은서와 함께 뛰어놀던 지우의 친한 동생이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우와 할머니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었다.
“응. 일찍 온다고 했다. 네가 좋아하는 송편도 좀 해온다고.” 할머니의 입가에 겨우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는 사라지고, 할머니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봄바람이… 오늘따라 이상하게 느껴지는구나.”
이상하다는 말은, 할머니가 무언가를 감지하고 있거나, 혹은 불안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지우는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앙상하고 주름진 손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발걸음. 하윤이 온 것이 분명했다. 지우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윤이 오면 할머니의 얼굴에 잠시나마 웃음꽃이 필 테니까.
예상치 못한 방문객
“할머니! 오빠! 저 왔어요!”
하윤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할머니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하윤은 해맑게 웃으며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녀의 손에는 따끈한 송편이 담긴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할머니, 어떠세요? 봄 햇살 받으니까 좀 나으세요?” 하윤은 할머니 옆에 앉아 이마를 짚었다. “음, 열은 없으시네요. 오빠, 할머니 송편 드시고 기운 내시라고 해요!”
하윤의 활기찬 모습에 방 안의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지우는 하윤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하윤은 송편을 접시에 담아 할머니께 권했다. 할머니는 한입 베어 물고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맛있구나, 하윤아.”
바로 그때였다. 마당 쪽에서 낯선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발, 한 발. 망설이는 듯한, 그러나 단호한 발걸음이었다. 지우는 고개를 들어 방문 밖을 보았다. 잠시 후, 그림자가 마루에 길게 드리워졌다.
“혹시… 이 댁이 김지우 씨 댁 맞습니까?”
낮지만 또렷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지우와 할머니, 하윤은 동시에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마루 끝에 키가 훤칠한 중년 남성이 서 있었다. 깔끔한 양복 차림에, 손에는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지우는 일어서서 남자에게 다가갔다. “네, 제가 김지우입니다만… 누구신지요?”
남자는 지우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한국 아동 실종 재단에서 나왔습니다. 김은서 양 건으로 찾아뵈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우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할머니의 손에서 송편이 떨어져 바닥에 굴렀다. 하윤은 놀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십수 년 동안 그토록 기다렸던, 혹은 두려워했던 이름이 이 봄날, 이 마당에서 불려졌다.
바람이 전한 이름
“은서… 라니요?” 할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재단 직원은 고개를 숙였다. “말씀 드리기 조심스럽습니다만…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확보하게 되어 직접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지우는 숨을 들이쉬었다. 수십 번 상상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이 되자,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희망과 절망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감정들이 격류처럼 몰려왔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지우는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남자는 방으로 들어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는 가방에서 서류 몇 장과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지우는 이미 숨 쉬는 법을 잊은 듯했다. 할머니는 손을 움켜쥔 채 직원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윤은 지우의 어깨를 잡고 있었다.
“지난달, 해외 입양인들의 뿌리 찾기 프로그램을 통해 연락이 한 건 들어왔습니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자신이 한국 출신이며, 어린 시절 이름이 ‘은서’였다고 주장하는 여성이었습니다.”
지우의 눈앞이 아찔해졌다. 해외 입양인이라니. 은서는 실종 당시 겨우 다섯 살이었다.
“저희가 확보한 자료들과 대조한 결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이 사진을 보시겠습니까?”
직원은 오래된 듯한 흑백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사진 속에는 작은 여자아이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단발머리에 커다란 눈망울. 입가에는 수줍은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지우의 눈이 사진에 고정되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은서?” 할머니의 입에서 작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사진 속 아이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지우의 기억 속 은서였다. 하지만 동시에, 낯선 옷차림과 배경은 이질감을 느끼게 했다.
“이 아이가… 은서라고요?” 지우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저희도 조심스럽습니다만, 현재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입니다. 유전자 검사를 제안해 왔습니다.”
직원의 말에 할머니는 사진을 움켜쥐었다. 늙고 마른 손이 사진을 부들부들 떨며 감쌌다. 할머니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은서야… 내 새끼… 살아있었구나….”
그 한마디에 지우의 눈가에도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 사라진 지 십수 년.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적인 생각들이 지우를 갉아먹었다. 하지만 이제,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작은 사진 한 장을 통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봄바람이 실어 온 소식은 단순히 소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굳게 닫혀 있던 문을 여는 열쇠였고, 얼어붙었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생명이었다.
“어디… 어디에 있다는 말이오….” 할머니가 흐느끼며 물었다.
직원은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현재 그분은… 캐나다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에 상당한 혼란이 있다고 합니다.”
캐나다. 기억의 혼란. 새로운 사실들이 지우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재회가 아닐 것이라는 예감. 십수 년의 세월이 흐른 만큼, 많은 것들이 변해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지우의 마음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감정은, 희망이었다. 작은 씨앗에서 움터 올라 마침내 꽃망울을 터뜨리는 생명력처럼, 지우의 마음속에도 작은 희망이 피어났다.
지우는 할머니의 어깨를 감쌌다. 그의 눈빛은 흔들렸지만, 결연했다. 이 봄바람이 전해준 소식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오랜 세월 침묵했던 강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강물은 어떤 길을 거쳐 흘러갈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