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52화

서연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새벽의 푸른빛 아래, 세상은 온통 하얀 수의를 입고 있었다. 어젯밤 내린 눈은 모든 소음을 삼키고 고요만을 남겼다. 마치 그녀의 마음속 격랑이 잠시 멈춘 듯했다. 하지만 그 고요 속에서, 지훈의 목소리가 아물거렸다. “미안해…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

그의 설명은 변명처럼 들렸고, 그 변명은 또 다른 상처를 낳았다. 지난 밤, 예상치 못하게 마주친 지훈은 엉망이 된 얼굴로 그녀에게 필사적으로 말을 걸었다. 그의 눈에 비치던 절박함이 진짜였음을 그녀는 안다. 하지만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난 자신도 진짜였다.

침대 곁 탁자에 놓인, 낡은 오르골을 손가락으로 쓸었다. 어릴 적, 겨울 눈이 내리던 날, 지훈이 직접 깎아 만들어 준 자작나무 오르골이었다. 조악하지만 정성 가득했던 눈꽃 문양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 안에 담긴 멜로디는 이제 너무나 아련해서, 다시 돌려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멜로디와 함께했던 약속들은 마치 오래된 서리꽃처럼, 햇살 아래에서 스러질 듯 위태로웠다.

휴대폰 액정이 반짝이며 현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오늘 점심 어때요? 서연 씨가 좋아하는 그 갤러리 카페, 눈 내리는 모습이 참 예쁘겠네요.’ 따스하고 사려 깊은 현우의 메시지는 늘 그녀의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그는 고요한 호수 같았다. 지훈이 폭풍 같았다면, 현우는 잔잔한 위로였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좋아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적어도 잠시나마 이 복잡한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얼어붙은 온기

갤러리 카페는 현우의 말처럼 눈 내리는 창밖 풍경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잔을 양손으로 감싸 쥐었지만, 서연의 손끝은 여전히 시렸다. 현우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처럼 그녀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고, 그녀의 감정을 존중해 주었다.

“서연 씨, 오늘따라 더 분위기 있어 보이네요. 눈 때문인가?”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서연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그냥… 생각이 많아서요.”

“혹시… 지훈 씨 때문인가요?” 현우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그 질문 속에는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서연의 마음 한구석에 지훈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서연은 잠시 침묵했다. 현우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지훈과의 복잡한 과거는 그들만의 엉킨 실타래였다. “그냥… 모든 게 복잡해요. 제가 뭘 해야 할지, 뭘 믿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에 든 커피잔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서연 씨 마음이 편안해지는 선택을 하세요. 그게 어떤 것이든, 저는 항상 서연 씨 편입니다.” 그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녀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안정감에 잠시나마 위안을 얻었다. 어쩌면 이 편안함이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녀는 품속에 있던 작은 자작나무 눈꽃 참을 꽉 쥐었다. 그 참은 오래전 지훈이 오르골과 함께 깎아 준 것이었다. 마치 그들의 관계처럼, 이제는 흐릿하고 낡았지만 여전히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카페 문이 열리고 차가운 겨울바람이 스며들었다. 서연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지훈이 서 있었다. 어젯밤보다 더욱 초췌해진 얼굴, 굳게 다문 입술. 그의 시선은 곧장 서연에게로 향했다. 현우의 존재를 본 그의 눈빛에는 고통과 질투, 그리고 어딘가 체념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이지훈 씨.” 현우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서연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지훈은 현우를 외면하고 서연에게 다가왔다. “서연아, 잠깐만. 나랑 이야기 좀 해.” 그의 목소리는 애원하는 듯했다.

서연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현우는 그녀에게 선택권을 주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결국 서연은 조용히 일어났다. “현우 씨, 미안해요. 잠시만요.”

카페 밖으로 나오자 칼날 같은 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눈발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그녀 앞에 섰지만,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 많아?” 서연은 애써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서연아… 나 정말 너한테 할 말이 많아. 어젯밤, 네가 화를 내는 건 당연해. 하지만 제발 내 이야기 좀 들어줘. 내가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는지…” 지훈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정말… 너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모든 걸 혼자 짊어져야 한다고.”

“보호? 날 보호하는 게, 내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거였어? 날 그렇게 지독하게 혼자 두는 게 보호였냐고!” 서연의 감정이 폭발했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분노와 슬픔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뜨겁게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운 눈발이 그 위로 내려앉아 이내 사라졌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서연은 황급히 피했다. 그의 눈에 깊은 상처가 스쳤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서연아. 그때 난 너무 어렸고, 상황은 내가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었어. 모든 걸 너에게까지 짊어지게 할 수 없었어. 내가 사라져야만, 네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어.”

그의 말은 어딘가 진실처럼 들렸지만, 여전히 불완전했다. 그는 무엇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려 했는가? 무슨 상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궁금증과 동시에 깊은 의문이 그녀를 짓눌렀다.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마치 어떤 거대한 비밀에 갇힌 사람처럼.

사라지지 않는 약속

“서연아, 약속해.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헤어지지 않는 거야. 내가 널 꼭 지켜줄게. 이 눈꽃이 녹아내려도, 우리의 약속은 절대 변치 않을 거야.”

어린 지훈의 맑은 눈빛이 선명했다. 그의 손바닥 위에 내리던 하얀 눈송이들이 반짝였다. 갓 내린 눈밭 위에 우리의 발자국이 가지런히 찍혀 있었다. 그는 조그만 손으로 내 손을 잡고 해맑게 웃었다. 그날은 정말 눈꽃이 펑펑 내리던 겨울날이었다.

서연은 흐느낌을 참으며 지훈을 바라보았다. “그 약속은…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었어?”

지훈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니, 서연아. 아니었어. 그 약속은 내 삶의 전부였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잊어본 적 없어. 그래서 내가 다시 돌아온 거야.”

그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지만, 서연은 더 이상 흔들릴 수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혼자 감당해야 했던 그리움과 아픔이 너무 컸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믿음이라는 덧없는 것에 자신을 맡길 용기가 없었다. “다시 돌아온다고 뭐가 달라져? 넌 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졌잖아. 그리고 이제 와서…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서연아, 내가 그동안 겪었던 일들, 그리고 네게 말하지 못했던 모든 것들을 다 이야기하고 싶어. 모든 오해를 풀고 싶어. 단 한 번만, 나에게 시간을 줘. 아니, 너에게 나를 이해할 시간을 줘.” 지훈은 간절하게 애원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촛불 같았다. 언제라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

서연은 지훈의 간절함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그의 절박한 눈빛은 과거의 지훈과 겹쳐 보였다. 그때도 그는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약속은 결국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는 이제 그 파편 위에서 다시 발을 내디딜 자신이 없었다. 아니,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섰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히는 눈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지훈이 뒤에서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녀는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제는 정말 끝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 약속도, 그 사람도.

기억 속의 한 발자국

서연은 발걸음을 재촉해 익숙한 골목으로 들어섰다. 낡은 벽돌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 할머니가 살던 집이었다. 이제는 빈집이 되어버린 그곳은 그들의 추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공간이었다. 지훈과 함께 숨바꼭질을 하고, 눈사람을 만들고, 할머니가 끓여주신 뜨거운 팥죽을 먹던 기억들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녹슬어버린 대문 앞에 섰다. 차가운 쇠붙이를 만지자 어린 시절의 온기가 아련하게 되살아났다. 대문은 잠겨 있었지만, 담벼락 너머로 보이는 작은 마당에는 눈이 소복하게 쌓여 있었다. 그 위로, 한두 발자국 정도의 희미한 발자국이 나 있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발자국은 마치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당 한가운데에 멈춰 있었다.

그 순간, 서연은 알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대로 도망쳐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직감이 들었다. 지훈이 왜 그렇게 필사적이었는지, 그가 숨기고 있는 진실이 무엇인지, 그녀는 이제 외면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고통과 혼란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게 설령 더 큰 상처를 남길지라도,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었다.

서연은 휴대폰을 꺼내 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손끝이 떨렸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밤 9시.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놀이터에서 봐. 모든 걸 다 말해줘. 네가 왜 그렇게 사라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왜 이제야 돌아왔는지. 모든 걸… 다 말해줘.’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마치 거대한 무게를 덜어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동시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이 오래된 약속의 얽힌 실타래를, 오늘 밤, 기필코 풀어내야만 했다. 차가운 눈발이 다시 그녀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시리게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그 차가움이 그녀의 결심을 단단하게 다져주는 것만 같았다.

서연은 낡은 대문을 등지고 돌아섰다. 눈 쌓인 길 위에 그녀의 발자국이 새롭게 찍혔다. 그 발자국은, 오래된 약속을 향한, 아프지만 결연한 한 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