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가락이 낡은 회중시계의 용두를 어루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수많은 밤들을 지새우며 익숙해진 것이었다. 지훈은 창백한 달빛이 스며드는 작업실, 아니 이제는 ‘시간의 성소’라 불려도 무방할 그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벽에는 과거의 연대기와 가능성 있는 미래의 갈래들이 복잡하게 얽힌 차트가 너덜너덜하게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읽다 만 고서들과 알 수 없는 기호가 새겨진 부품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의 눈은 깊은 우물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수없이 시간을 되돌려온 대가는 그의 정신에 옅은 안개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어떤 기억들은 선명했지만, 어떤 기억들은 파스텔 톤의 그림처럼 희미해져 갔다. 그는 자신이 누구였는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 가끔은 헷갈렸다. 하지만 단 하나, 뼛속 깊이 새겨진 사실은 변치 않았다. 수현을 구해야 한다는 것. 단 하나뿐인 여동생, 수현. 그녀의 미소를 다시 보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오늘 밤, 그 대가는 아마도 최후의 것이 될 터였다.
지훈의 손에 들린 시계는 더 이상 단순한 기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의지를 빨아들이고, 그의 절망을 동력으로 삼는 살아있는 존재 같았다. 은빛 케이스는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고, 내부의 복잡한 톱니바퀴들은 마치 심장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용두를 천천히 감았다. ‘째깍, 째깍…’ 평소와 다른 둔탁한 소리가 불안하게 울렸다. 시계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경고음일까.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박동했다.
“지훈아!”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며 예지의 목소리가 공간을 찢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방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눈은 불안과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붉어진 눈가는 그녀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를 찾아 헤맸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안 돼… 제발, 멈춰.” 예지는 그의 손에 들린 시계를 보고 경악했다. 그녀는 그 시계가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훈이 삶의 모든 것을 걸고 매달린, 그리고 동시에 그의 모든 것을 갉아먹는 마성의 물건.
지훈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멀리,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예지야…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그의 목소리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수백 년을 살아온 늙은 현자의 음성 같았다.
“어떻게 왔냐니! 네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뻔히 보이는데! 네가 이럴 때마다 내 심장이 얼마나 찢어지는지 알아? 이번엔… 이번엔 정말 달라.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야.” 예지는 그에게 다가서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지훈의 팔은 더 차가웠다. 생기가 사라진 얼음 같았다.
“나는… 마지막 기회를 잡아야 해. 이번에 실패하면… 수현이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 의사들도 포기했어. 내가 찾은 단서는 이게 마지막이야. 그녀의 병이 시작된 그 순간, 아니 그 이전으로 돌아가야 해. 근원을 바꿔야만 해.”
지훈은 지난 몇 주간 잠도 자지 않고 파고들었던 고대 문헌의 조각들을 가리켰다. 그 조각들 속에는 이 시계의 진짜 힘을 끌어내는 방법, ‘근원의 시간’으로 돌아가는 열쇠가 숨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방법은… 시계가 사용자의 존재 자체를 담보로 삼는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근원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지훈아, 너는 이미 셀 수 없을 만큼 시간을 되돌렸어. 우리는 몇 번의 삶을 살았는지조차 잊어버렸어. 네 기억은 뒤죽박죽이고, 가끔은 나조차 알아보지 못해. 수현이가… 너를 이렇게 망가뜨리는 걸 원할 것 같아?” 예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녀는 지훈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앙상하게 마른 뺨, 깊게 팬 눈가의 주름, 그의 젊은 시절의 흔적은 이제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사라져도… 수현이만 살아있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녀가 행복하게 웃는 세상이라면, 나는… 사라져도 괜찮아.” 지훈의 눈에도 한 줄기 눈물이 흘렀지만, 그는 그 눈물을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이 세상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아니, 상관있어! 네가 없으면 그 행복이 무슨 소용인데? 수현이는 네가 사라진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 지훈아, 나는 알아. 네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너 자신을 버리려 하면 안 돼.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의 삶을 살아야 해.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함께 이겨내는 것이 진정한 삶이야!” 예지는 절규하듯 외쳤다. 그녀는 그를 끌어안았다. 제발, 제발 가지 말라고, 그의 옷깃을 붙잡고 매달렸다.
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예지의 체온이, 그녀의 절규가 그를 현실로 끌어당기는 듯했다. 수없이 많은 시간선 속에서, 예지는 늘 그의 곁에 있었다. 때로는 연인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그의 존재를 기억하는 유일한 목격자로. 그녀는 그의 유일한 닻이었다. 그가 시간을 거슬러 표류하지 않도록 잡아주는.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수현의 가녀린 모습이 너무나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병실 침대에 누워 힘없이 웃던 그녀의 얼굴. 그 미소를 다시 건강하게 피어나게 할 수만 있다면… 지훈은 용두를 돌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시계의 톱니바퀴들이 더욱 격렬하게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빛 케이스의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깜빡였다.
“예지야… 미안해.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야.”
그는 품에서 낡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그 안에는 고대의 문자가 새겨진 작은 수정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근원의 시간’으로 향하는 열쇠였다. 그가 이 조각을 시계의 숨겨진 홈에 끼워 넣자, 시계는 갑자기 굉음을 내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푸른빛이 방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번져나갔다.
“안 돼! 지훈아! 제발!!!” 예지는 필사적으로 그를 막으려 했지만, 시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에너지 파동이 그녀를 뒤로 밀쳐냈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졌고, 그녀의 눈앞에서 지훈의 형체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이 마치 모래처럼 부서져 내리는 것 같았다.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왜곡되기 시작했다. 벽에 걸린 차트가 일그러지고, 책들은 글자들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지훈의 모습이 점점 더 투명해졌다. 그는 마지막으로 예지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에는 미안함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평화로움이 담겨 있었다. 드디어… 마침내 이 지옥 같은 반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일까.
“기억해줘… 날…” 그의 목소리는 찢어진 비단처럼 갈라져 나왔다. 그리고는 푸른빛의 폭풍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콰앙! 시공간이 뒤틀리는 굉음과 함께, 푸른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차가운 달빛만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고 있었다. 예지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텅 빈 공간을 바라봤다. 지훈은 사라졌다. 그가 들고 있던 시계도 함께 사라졌다.
그녀의 눈물은 메말랐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도 잠시, 뇌리를 스치는 낯선 감각에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지훈과의 수많은 기억들이… 마치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어떤 기억들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그의 목소리가, 그와 함께했던 순간들이 마치 안개처럼 사라지려는 듯했다. 그가 ‘기억해줘’라고 말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가 근원으로 돌아간 대가로, 그의 존재 자체가 시간선에서 지워지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그의 이름을 되뇌었다. ‘지훈… 지훈…’ 하지만 이름조차 입술 위에서 낯설게 맴돌았다. 마치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의 이름처럼. 그녀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이대로 그를 완전히 잊어버린다면… 그가 바랐던 수현의 행복한 미래 속에서, 지훈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그가 겪었던 모든 고통, 모든 희생이 무의미해지는 것이다. 그녀는 흐릿해지는 기억의 파편들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시간의 물결은 너무나 거대했다. 그리고 그 물결 속에서, 그녀의 눈앞에 흐릿한 환상이 스쳐 지나갔다. 건강한 모습의 수현이 환하게 웃는 얼굴.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 아름다웠지만, 예지의 가슴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행복하지만… 무언가 결여된, 텅 빈 행복이었다.
시간의 성소는 이제 아무도 없는, 낡은 작업실로 돌아왔다. 벽의 차트들은 그저 의미 없는 낙서처럼 보였고, 바닥의 부품들은 평범한 고철 조각일 뿐이었다. 마치 이곳에서 어떤 기적도, 어떤 절규도 없었던 것처럼. 남겨진 것은, 오직 예지의 텅 빈 마음과, 희미해져 가는 사랑의 잔해뿐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머지않아 그 잔해마저도 시간의 흐름 속에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