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기차에서 만난 낯선 인연 – 제160화

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식탁에 놓인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옅은 갈색 종이봉투는 마치 그 안에 담긴 무거운 진실을 묵묵히 간직하려는 듯, 아무런 표정도 없이 그곳에 존재했다. 서연은 맞은편 소파에 앉아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등 뒤로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녀의 어깨를 더욱 작고 위태롭게 만들었다.

지훈은 겨우 숨을 들이쉬었다. 방금 전 의사에게서 들었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최후의 선택입니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외면할 수도 없습니다.” 그의 손은 봉투를 향해 뻗어갔지만, 차마 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봉투를 여는 순간, 그들이 겨우 부여잡고 있던 희미한 희망마저 산산조각 날 수도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열어봐, 지훈아.”

서연의 목소리는 너무나 고요해서, 마치 빗소리에 섞여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지훈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어떤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 슬픔도, 절망도 아닌,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텅 빈 소리였다. 그것이 지훈을 더욱 아프게 했다.

“서연아…”

그는 겨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서연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 위로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빛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 눈빛 속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함께, 지훈을 향한 미안함과 사랑이 뒤섞여 있었다.

“이제 그만 고민하자. 내가 더 이상 너를 힘들게 하는 건 싫어.”

서연의 말은 칼날처럼 지훈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힘들게 한다니. 그녀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모든 이유였다. 그녀를 만난 그 밤기차 안에서, 어둠 속을 가르며 달리는 기차의 흔들림 속에서 서로에게 기댄 그 순간부터, 서연은 지훈의 세상이 되었다.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을 함께 헤쳐오며 더욱 단단해진 줄 알았던 그들의 사랑이, 지금 이토록 무기력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지훈은 천천히 봉투를 뜯었다. 봉투가 찢어지는 얇은 소리가 고요한 공간에 크게 울렸다. 꺼내든 몇 장의 서류에는 복잡한 의학 용어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훈의 눈은 오직 하나의 문장에 꽂혔다. ‘치료 성공률, 15%. 생존 가능성, 미지수.’

지훈의 손에서 서류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덜덜 떨리는 그의 손은 봉투를 꽉 쥐었다. 15퍼센트.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희망이 고작 15퍼센트라니. 그리고 그마저도 서연의 몸에 엄청난 고통을 동반할 것이었다. 어쩌면 그 고통이 그녀를 더 빨리 지치게 만들지도 몰랐다.

“지훈아.”

서연이 다가와 무릎을 꿇고 앉아 지훈의 손을 잡았다. 차갑고 여윈 손이었다. 지훈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아직은 여기에, 자신의 곁에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것 같아.”

서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눈물은 지훈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지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녀를 꽉 끌어안고 싶었다. 자신마저 무너져 내릴 것 같아서, 그는 겨우 고통을 삼켰다.

“무리하지 말자, 지훈아. 우리 이제 그만 멈출 때도 된 것 같아.”

“무슨 말이야, 서연아. 멈춘다니? 나는 너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훈의 목소리가 격앙되었다. 그는 서연을 조금 떨어뜨려 놓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 속에는 체념과 함께, 알 수 없는 결심이 서려 있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밤기차 기억나? 그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기대도 없이, 그저 우연히 스쳐 지나갈 인연인 줄 알았잖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었고, 너무 많은 짐을 지게 됐어.”

“짐이라니! 서연아,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너는 내게 짐이 아니라, 내 삶의 전부야.”

지훈은 그녀의 양 어깨를 꽉 잡았다.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했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단호한 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더 이상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젠 나를 놓아줘, 지훈아.”

지훈의 귀를 의심했다. 놓아달라니.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들의 모든 시간을, 모든 추억을, 모든 미래를 끝내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밤기차를 함께 타고 달리며 서로의 손을 잡고 밤하늘의 별을 헤아리던 시간들,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아픔을 나누던 그 모든 순간들이 그녀의 이 한마디로 사라질 리 없었다.

“서연아, 그게 무슨 말이야. 농담하지 마.”

“농담 아니야. 나는 네가 더 이상 고통받는 걸 볼 수가 없어. 이 병이 나를 갉아먹는 것처럼, 너의 삶도 갉아먹고 있잖아.”

“아니야! 나는 괜찮아.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제발, 제발 나를 떠나지 마.”

지훈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가녀린 어깨가 그의 품 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그들의 처음 만남은 어둠 속을 가르던 기차 안에서의 우연이었다. 그리고 그 기차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절벽 끝에 다다른 것만 같았다.

서연은 지훈의 등에 손을 얹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지훈아. 나 없이도…”

그 말은 지훈의 심장을 산산조각 내는 비수가 되어 박혔다. 그의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가 그녀에게서 들을 수 있는 최악의 말이었다. 밤은 깊어가고, 빗소리는 더욱 거세게 창문을 때렸다. 그들의 밤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