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공기를 갈랐다. 매서운 칼날 같았던 한기가 무색하게, 산모퉁이 작은 빵집 안은 훈훈한 온기로 가득했다. 새벽부터 오븐이 내뿜는 열기는 밤새 얼어붙었던 유리창에 김을 서리게 했고, 갓 구운 빵 냄새는 코끝을 간지럽히며 온 마을을 포근하게 감쌌다. 은서 씨는 오늘따라 유난히 고소하게 피어오르는 곡물 빵의 향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길고 긴 겨울의 초입,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작은 한기가 스며드는 계절이었다.
최근 며칠, 빵집을 찾는 손님들의 발걸음이 조금은 무거워 보였다. 따뜻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도 쉬이 입을 열지 못하는 이들이 많았다. 은서 씨는 그들의 표정에서 쓸쓸함과 함께, 왠지 모를 걱정을 읽어냈다. 이 산동네는 겨울이 오면 더욱 고립되는 법이었다. 이웃과의 온기가 더욱 절실해지는 시기였다.
따뜻한 마음을 굽다
은서 씨의 시선은 빵집 문을 향했다. 며칠째 보이지 않는 얼굴이 있었다. 산 중턱 너머 홀로 사시는 박 할머니였다. 늘 새벽같이 내려와 따뜻한 호밀빵 하나와 국화차를 드시던 할머니가 보이지 않자, 은서 씨의 마음 한구석이 자꾸만 아렸다. 이웃에게 폐 끼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시던 분이었기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셨을까 걱정이 앞섰다.
그날 아침, 은서 씨는 평소보다 더 많은 정성을 들여 빵을 구웠다. 투박하지만 속은 촉촉하고,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는 통곡물 빵이었다.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시는 빵이었다. 빵을 반죽하는 손길에는 할머니를 향한 걱정과 따뜻한 위로가 고스란히 담겼다. 이 따뜻한 빵이 할머니의 얼어붙은 몸과 마음에 작은 위안이라도 되기를 바랐다.
“할머니, 괜찮으실까…”
갓 구워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식힘망에 올리며 은서 씨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가게 문을 열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산 중턱의 할머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설원 위 작은 발자국
결국 은서 씨는 결심했다. 빵집 문을 잠시 닫고, 박 할머니 댁으로 향하기로.
오븐에서 막 꺼낸 통곡물 빵 두 덩이와 따뜻한 보온병에 담은 뜨거운 호박죽, 그리고 작은 보온 도시락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조림을 정성껏 담았다. 가게 문에는 ‘잠시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쪽지를 붙여두고, 두꺼운 외투를 걸친 채 바구니를 들고 나섰다. 쌀쌀한 바람이 볼을 스쳤지만, 마음만은 따뜻했다.
산길은 어제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설원 위에 은서 씨의 작은 발자국이 하나둘씩 새겨졌다. 숨을 헐떡이며 오르막길을 한참 걸었을 때, 저 멀리 박 할머니 댁의 지붕이 보였다. 그러나 창문에서는 불빛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할머니! 계세요? 은서예요!”
대문 앞에서 몇 번을 불렀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손으로 대문을 밀어보니, 잠겨 있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마당으로 들어섰다. 마당에도 사람의 흔적이 없었다.
“할머니!”
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은서 씨는 화들짝 놀라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방, 따뜻한 위로
방 안은 냉기가 가득했다. 불도 지피지 않은 듯 싸늘한 공기 속, 박 할머니는 이불을 잔뜩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계셨다.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한쪽 팔에는 깁스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어쩌다 이렇게…”
은서 씨는 놀란 마음을 가다듬고 할머니 옆에 무릎을 꿇었다.
할머니는 기침을 콜록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런, 젊은 아가씨가 웬일이야… 어쩌다 넘어져서 팔을 삐끗했어. 병원에 다녀오긴 했는데, 몸이 으슬으슬해서 도통 일어날 수가 없네… 누구한테 연락하기도 미안하고…”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평생 남에게 신세 지는 것을 싫어했던 할머니의 자존심이 무너진 순간이었다.
“왜 말씀을 안 하셨어요… 전화라도 하시지…”
은서 씨는 할머니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손끝에서부터 전해지는 냉기에 그녀의 마음이 더욱 아팠다.
“자, 할머니. 일단 이거 좀 드세요. 따뜻한 호박죽이랑 빵 가져왔어요.”
은서 씨는 얼른 가져온 바구니를 풀었다. 방 한가운데 작은 상을 펴고, 보온병에서 김이 솟아나는 호박죽을 그릇에 따랐다. 갓 구운 통곡물 빵도 먹기 좋게 찢어 할머니 앞에 놓았다. 그리고 작은 휴대용 버너를 꺼내 따뜻한 차를 끓였다. 빵집에서 늘 맡던 따뜻한 빵 냄새와 구수한 호박죽 향이 차가운 방 안에 퍼져나가자, 할머니의 얼굴에 미미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말없이 호박죽을 한 숟가락 떠먹었다. 오랜만에 들어오는 따뜻한 음식에 할머니의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은서 씨… 이렇게 찾아와 줄 줄은… 몰랐네…”
할머니의 목소리는 흐느낌에 떨렸다.
은서 씨는 할머니의 어깨를 조용히 감싸 안았다. “무슨 말씀을요. 할머니, 저희는 가족이나 다름없어요. 언제든지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다음부터는 제가 매일 올게요. 혼자 아프지 마세요.”
산모퉁이 작은 기적
그날 오후, 박 할머니의 방은 온기로 가득 찼다. 은서 씨는 할머니의 이불을 뽀송하게 말려 새로 깔아드리고, 방을 따뜻하게 데웠다. 할머니는 은서 씨가 가져온 빵과 호박죽을 맛있게 드시고 오랜만에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산길을 내려오는 은서 씨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웠다. 문득, 그녀는 생각했다. 빵집의 ‘기적’이란 단순히 맛있는 빵을 굽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차가운 세상 속에서 따뜻한 온기를 나누고, 이웃의 아픔을 알아주고, 말없이 건네는 작은 위로의 손길.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 아닐까.
빵집의 불빛은 어둠이 내린 산모퉁이 마을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은서 씨는 다시 빵집 문을 열고 따뜻한 온기가 새어 나오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마음속에도 작은 기적이 피어나고 있었다. 내일은 또 어떤 이웃에게 따뜻한 빵과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을까. 산모퉁이 작은 빵집의 온기는 그렇게 차가운 겨울을 녹이며, 또 다른 기적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