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71화

밤의 별들이 속삭이는 멜로디

라디오 부스 안은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이미 자정을 넘긴 도시의 불빛들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그 위로는 셀 수 없는 별들이 쏟아져 내릴 듯 반짝이고 있었다. 헤드폰을 낀 채 모니터를 응시하던 지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잠시 멈췄다. 그녀의 눈은 스크롤을 내리던 사연 목록의 한 지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오래전, 함께 별을 보던 그 언덕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그날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작은 불빛 하나 없이 오직 별빛만 가득했던, 그날처럼.”

사연은 평범한 재회를 바라는 내용이었지만, 지우의 심장은 쿵, 하고 한 박자 내려앉았다. ‘작은 불빛 하나 없이 오직 별빛만 가득했던’. 그 문장이 그녀의 잊고 있던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 언덕. 그 약속.

그 언덕 위의 별 아래서

지우에게도 그런 언덕이 있었다. 도시 외곽, 인적 드문 곳에 자리한 작은 동산. 스무 살 무렵, 꿈 많던 시절의 민준과 지우는 자주 그곳을 찾았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며 저마다의 꿈을 이야기했고, 미래를 약속했다. 민준은 기타리스트가 되어 무대 위에서 자신만의 음악을 연주하겠다고 했고, 지우는 그런 민준의 음악을 세상에 알리는 라디오 피디가 되겠다고 했다. 둘은 서로의 꿈을 응원하며, 언젠가 꼭 성공해서 다시 이 언덕에서 만나 별을 보며 웃자고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하지만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민준은 유학을 떠났고, 연락은 점점 뜸해졌다. 처음에는 매일 밤 별을 보며 그의 성공을 빌었지만, 이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지우는 라디오 피디의 꿈을 이뤘지만, 민준과의 약속은 어느새 마음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였다. 아니, 잊었다고 생각했다.

오늘 이 사연을 보기 전까지는.

잊혀진 멜로디, 다시 울리다

“사연과 함께 신청곡이 있습니다. 민준킴의 ‘밤하늘을 스치는 별처럼’입니다.”

모니터에 뜬 신청곡 정보를 본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민준킴. 설마? 민준의 영어 이름은 ‘Kim Min-jun’이었다. 그리고 ‘밤하늘을 스치는 별처럼’은 민준이 스무 살 때 만들었던 자작곡의 제목이었다. 데모 버전으로 겨우 녹음했던 그 노래는 단 한 번도 세상에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 이 노래를 신청했다는 것은…

그의 음악이 세상에 알려졌다는 뜻인가? 그리고 그 사연의 주인공이, 어쩌면…

지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손이 떨려 마우스를 제대로 잡을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라디오에서 흘러나올 그 노래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십 년 전 잊었던 약속의 증표이자, 어쩌면 다시 이어질지 모를 인연의 실마리였다.

“다음 곡은 청취자 이지훈님의 신청곡, 민준킴의 ‘밤하늘을 스치는 별처럼’입니다.”

디제이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이내 익숙하면서도 낯선 멜로디가 라디오 부스를 가득 채웠다. 풋풋했던 청춘의 감성과 꿈이 고스란히 담긴, 맑고 투명한 기타 선율과 섬세한 보컬. 지우는 눈을 감았다. 모든 순간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 언덕, 그 별빛, 그리고 민준의 미소.

노래가 끝나자, 지우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스 밖으로 향했다.

별빛 아래, 다시 쓰는 이야기

깊은 밤, 도시의 불빛을 뒤로하고 지우는 낯익은 언덕길을 올랐다.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은 어둡고 고요했지만, 하늘에는 별들이 셀 수 없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마치 십 년 전 그날처럼.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언덕 정상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언덕 위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지우는 허탈감에 주저앉았다. 역시 너무 섣불렀던 걸까.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이름이 같고, 노래 제목이 같다고 해서…

그때, 저 멀리 언덕 아래쪽 벤치 옆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잠시 앉아 쉬다 간 것처럼. 지우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보았다. 벤치 위에 놓인 것은 오래된 기타 피크 하나였다. 그리고 피크 옆에는 작은 쪽지가 놓여 있었다.

“혹시라도 네가 올까 봐. 기다리고 있었어. 언젠가 다시, 이 별빛 아래에서 만나자. 그때는 우리가 함께 만든 음악을 들려줄게. – 민준”

지우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정말 이곳에 왔었다. 자신을 기다렸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만날 수 없었지만, 이것으로 충분했다. 잊었던 약속이 다시 살아났고, 끊겼던 인연의 실마리가 다시 연결되었다.

밤하늘의 별들은 여전히 묵묵히 빛나고 있었다. 지우는 쪽지를 가슴에 품고 고개를 들었다. 어두웠던 언덕 위에서, 그녀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멜로디가 조용히 흐르기 시작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는, 다시 만날 그날을 위한 희망의 주파수를 쏘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