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사진관에서 생긴 일 – 제164화

사진관의 창문으로 스며드는 늦은 오후의 햇살은 늘 그렇듯 공기 중의 미세한 먼지 입자들을 금빛으로 물들이며 춤추게 했다. 지훈은 빛줄기 사이로 어렴풋이 보이는 할머니의 오래된 카메라들을 바라보았다. 묵직한 렌즈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가죽 케이스. 할머니는 저 카메라들로 수많은 사람들의 시간을 붙잡아 두었다. 그리고 지금, 지훈의 손에는 그 수많은 시간 중에서도 유독 이질적이고 낯선 한 장의 사진이 들려 있었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는 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이 담겨 있었다. 스무 살 남짓 되었을까, 지금과는 다른, 어딘가 불안하고 쓸쓸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잘생겼지만 어딘가 그늘진 표정의 남자. 가장 지훈의 마음을 붙잡은 것은, 두 사람이 서 있는 배경이었다. 사진관이 아니었다. 울창한 숲이 우거진 산자락 아래, 허름한 오두막집 앞에서 두 사람은 어색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손은 남자의 소매 끝을 살짝 잡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 애처로웠다.

이 사진은 어제, 할머니가 생전에 아끼던 낡은 나무 상자 속에서 발견되었다. 사진관의 모든 기록과 유품을 정리하던 지훈은 상자 바닥에 숨겨져 있던 작은 봉투를 찾아냈고, 그 안에 이 사진 한 장만이 고독하게 잠들어 있었다. 상자 속 다른 물건들은 모두 사진관과 관련된 것이었지만, 이 사진만은 이질적인 섬처럼 떠 있었다.

지훈은 할머니의 과거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았다. 엄하고 강인했으며, 늘 사진관에 모든 것을 바쳤던 분. 할머니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홀로 이 사진관을 지켜왔다. 지훈은 어릴 적부터 할머니에게서 단 한 번도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이 남자는 할머니가 평생 숨겨온 비밀의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훈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때, 오래된 문이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사장님, 계세요?”

최 여사였다. 사진관의 단골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손님 중 한 분. 곱게 빗어 넘긴 은발에 단정한 옷차림,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짓는 분이었다. 최 여사는 몇 주 전, 돌아가신 남편과의 마지막 사진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었다.

“네, 어서 오세요, 최 여사님. 마침 연락드리려던 참이었어요. 찾으셨던 필름 확인 끝났습니다.” 지훈은 황급히 사진을 서랍 속에 숨기고 최 여사를 맞았다.

“아이구, 정말 고마워요. 매번 수고만 끼치네.” 최 여사는 지훈이 건넨 봉투를 받아 들고는 흐릿한 눈으로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오래된 흑백사진 속에는 젊은 시절의 최 여사와 그녀의 남편이 다정하게 웃고 있었다. 시간의 무게가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그나저나, 사장님 할머니는 잘 지내셨는지 모르겠네. 제가 아는 한 가장 강인하고 멋진 분이셨는데.” 최 여사가 사진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사진관에 처음 왔을 때가, 아마 스무 살 즈음이었을 거예요. 그때 할머니가 이 사진관을 시작하셨던가, 아니면 막 물려받았던가… 아무튼 그때는 지금처럼 번듯하지 않았지. 조그마한 방 한 칸짜리 사진관이었는데… 그래도 할머니는 늘 웃고 계셨어요. 힘들었던 시절 이야기 같은 건 한 번도 안 하셨지만, 눈빛에서 다 읽혔지.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싶었어.”

지훈은 최 여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힘들었던 시절’. 할머니의 ‘과거’에 대한 언급은 늘 지훈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할머니가 그러셨어요. 여기 오기 전에, 아주 멀리서 왔다고.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고요. 그래서 그랬나, 할머니는 이 사진관에 유독 애착이 많았지.”

“멀리서요?” 지훈은 얼핏 흘려들은 할머니의 옛 이야기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이 동네 출신이 아니라고 했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응. 난 자세히는 몰라. 워낙 말씀이 없으셨으니까. 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하나 있어. 처음 이 사진관에 왔을 때, 할머니 방에 아주 오래된, 낡은 자개함이 하나 있었어. 귀한 물건 같지는 않았는데, 할머니가 애지중지하셨지. 한번은 내가 물어봤더니, ‘옛날에, 아주 먼 곳에서 가지고 온 유일한 물건’이라고 하셨어. 그러면서 뭔가 슬픈 표정을 지으셨지… 그 자개함, 지금은 없나?”

지훈은 최 여사의 말에 멍해졌다. 자개함.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할 때, 지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낡은 자개함을 발견했었다. 사진이 들어있던 나무 상자와는 별개로, 할머니의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던 작은 함이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지훈의 손을 한참 붙들게 했던 물건이었다. 그 자개함이 할머니의 ‘먼 곳’에서 온 유일한 물건이라고? 그리고 그 안에 텅 비어 있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지훈은 서랍 속 사진을 다시 꺼냈다. 울창한 숲, 허름한 오두막. 그리고 젊은 할머니와 낯선 남자. 최 여사의 말과 사진이 묘하게 겹쳐졌다. 할머니는 그 ‘먼 곳’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이 사진관으로 왔던 것일까? 그리고 그 자개함은, 어쩌면 그 ‘먼 곳’의 흔적을 담고 있던 유일한 증거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비록 텅 비어 있지만.

“최 여사님, 혹시 할머니가 이 사진관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세요?” 지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 여사의 기억 한 조각이 할머니의 베일에 싸인 과거를 푸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최 여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 그런 이야기는 안 하셨는데. 그냥 ‘고생 많이 했다’는 말만 가끔 하셨지. 하지만… 아, 그러고 보니, 한번은 할머니가 내게 농담처럼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 ‘나도 한때는 산골 아가씨였다네’ 하고. 그때 나는 웃어넘겼는데, 혹시 그게 농담이 아니었을까?”

산골 아가씨. 지훈은 다시 사진 속 배경을 바라보았다. 숲이 우거진 산자락의 오두막. 모든 것이 퍼즐처럼 맞춰지는 듯했다. 할머니는 정말 산골에서 왔고, 그곳에서 이 남자와 어떤 관계를 맺었으며,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와서 사진관을 열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왜 이 모든 것을 숨겨야만 했을까?

최 여사는 남편의 사진들을 소중히 봉투에 담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사장님 덕분에 우리 남편 사진 잘 보관하게 되었네. 고마워요.”

최 여사가 문을 닫고 나간 후, 사진관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지훈의 마음속은 폭풍우가 몰아쳤다. 할머니의 비밀. 평생토록 감춰왔던 과거. 이 흑백 사진 한 장과 최 여사의 파편적인 기억들이 거대한 실타래의 끝을 풀어낸 느낌이었다.

지훈은 사진 속 할머니의 불안한 눈빛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옆모습에서 묘한 불안감을 읽었다. 이 사진 속에는 단순히 옛 연인의 추억 이상의 것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할머니가 평생을 혼자 지내며 이 사진관을 지켜온 이유가, 바로 이 사진 속에 숨겨진 어떤 사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지훈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지훈은 사진을 들고 오래된 지도책을 펼쳤다. ‘산골 아가씨’, ‘멀리서 왔다’. 이 두 단어를 실마리 삼아, 할머니의 고향을 추적해보기로 결심했다. 그 오두막은 어디였을까?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그리고 할머니는 왜 모든 것을 뒤로하고 이곳으로 와야만 했을까? 이 낡은 사진관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이 이제야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지훈은 자신이 할머니의 가장 아픈 과거를 파헤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두려우면서도, 멈출 수 없는 호기심에 휩싸였다. 다음 걸음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사진 속 오두막집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