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167화

밤은 깊었고, 창밖으로는 먹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희미한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고요한 어둠만이 지혜의 방을 감쌌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창문을 긁는 소리가 마치 지혜의 마음속을 헤집는 소리 같았다. 오랜 시간 가슴 한편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감정의 응어리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자, 스스로 풀지 못했던 오랜 회한이었다.

지혜는 테이블 위에 놓인 낡은 일기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손때 묻은 표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종이 냄새. 이 일기장 속에는 할머니의 삶의 조각들이, 지혜가 미처 알지 못했던 깊은 지혜와 따스한 위로가 담겨 있었다. 오늘은 어떤 이야기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까. 어쩌면 오늘이야말로, 오랜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를 안고 지혜는 조심스럽게 일기장을 펼쳤다.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기자, 오래된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수십 년 전, 할머니가 이 페이지에 어떤 마음을 담았을지 상상하며 지혜는 어느 날짜에 멈춰 섰다. 잿빛으로 바랜 글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1957년 겨울, 그 해의 눈물

“세상 모든 것이 얼어붙는 것만 같았던 겨울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는 듯했고, 마음속에도 시린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아버지는 또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병상에서 기침을 멈추지 않으셨고, 어린 나는 텅 빈 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버리곤 했다. 왜 우리를 두고 떠나셨을까.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혼자 감당하게 하셨을까. 밤마다 베개를 적시던 눈물 속에서 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키워갔다. 그 마음은 얼음처럼 단단해져서, 녹아내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글 속에서 지혜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겨진 자신을 뒤로하고 아버지가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났을 때의 그 막막함과 배신감. 지혜는 자신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감정들이 할머니의 글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할머니도 자신처럼, 버려졌다는 절망감 속에서 무수한 밤을 지새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메어왔다.

어느 비 오는 날의 깨달음

“그렇게 아버지를 미워하며 몇 해가 흘렀을까. 어느 날, 시장에서 장을 보던 길이었다. 소나기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골목 어귀에서 나는 허름한 차림의 남자를 보았다. 깡마른 어깨에 잔뜩 젖은 옷, 고개를 숙인 채 무엇인가를 끌고 가는 모습이 어딘가 익숙했다. 가까이 다가갔을 때, 빗물에 씻겨 내린 얼굴 위로 깊게 패인 주름과 피로에 지친 눈빛이 보였다. 아버지였다. 우리를 떠났다고 생각했던 아버지는, 도시의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누군가의 짐을 져 나르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으며, 어쩌면 우리 몰래 멀리서나마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그 순간, 내 안의 모든 원망과 분노가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떠났다’는 말이 ‘버렸다’는 말이 아니었음을, 그저 당신도 당신의 짐을 지고 가느라 우리에게까지 손을 내밀 여력이 없었음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빗줄기가 창문을 세차게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혜의 눈에도 뜨거운 눈물이 솟아났다. 할머니의 글 속에서 비로소 아버지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머니를 잃은 후, 지혜의 아버지 역시 얼마나 막막했을까. 그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사랑하는 이를 잃은 한 남자로서 얼마나 외롭고 힘겨운 싸움을 했을까. 지혜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입장에서 그의 삶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자신을 두고 떠나버린 이기적인 존재로만 치부했을 뿐이었다.

용서,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리고 처음으로 그의 삶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용서라는 것이 누군가의 잘못을 덮어주는 행위가 아니라, 내 안에 갇힌 나 자신을 해방시키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동안, 가장 고통받은 것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원망과 분노의 사슬에 묶여 자유롭지 못했던 내 영혼을 풀어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용서였다. 물론 그 모든 상처가 한순간에 아물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움 대신 이해와 연민을 선택했을 때, 내 마음에 새로운 공간이 생겨났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공간에 사랑과 평화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문장을 읽는 순간, 지혜의 가슴 속에서 오랫동안 짓눌려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 나는 듯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할머니는 그저 아버지를 용서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었던 오랜 짐을 내려놓으라고, 진정한 자유를 얻으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비로소 지혜는 자신의 삶을 묶고 있던 보이지 않는 끈이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지난 시간 동안 아버지를 미워하느라, 어쩌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행복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창밖의 비는 더욱 거세졌지만, 지혜의 마음속은 거짓말처럼 고요하고 투명해졌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늦었을지라도, 지금이라도 닫힌 마음의 문을 열어야 했다.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용서라는 선물을 자신에게 주어야 했다. 지혜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고, 테이블 위에 놓인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화면 속에는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아버지의 이름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그녀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연결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찾아온, 새로운 시작의 전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