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나무의 그림자
그날 저녁, 바람은 유난히 차가웠다.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첫 서리라도 내릴 듯, 공기는 투명하고 날카로웠다. 은수는 마당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늙은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수십 년을 그 자리에 뿌리내려 온 그 나무는 이제 앙상한 가지 끝에 몇 안 되는 잎사귀만을 매달고 있었다. 가을의 끝자락, 생명의 쇠락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이었다.
“새벽아,” 은수는 무릎에 기대어 골골거리는 새벽이의 부드러운 등을 쓸어주었다. 새벽이는 한때 떠돌이의 삶을 살았던 것이 무색할 만큼, 이제는 은수의 품이 가장 편안한 안식처가 된 듯했다. “저 나무도 우리처럼 나이를 먹는구나.”
새벽이는 눈을 반쯤 감고 고개를 살짝 들어 은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초록색 눈동자에는 언제나처럼 잔잔한 이해가 담겨 있는 듯했다. 마치 그 눈빛이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지요, 인간’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은수는 새벽이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온기가 마음속 깊이 스며들었다.
저 나무는 은수의 유년 시절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아버지가 직접 심으셨다고 했다. 어린 은수가 나무 밑에서 소꿉놀이를 하고, 책을 읽고, 때로는 슬픔에 겨워 울기도 했던 수많은 순간들을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찾아온 새벽이와 은수가 나누었던 모든 대화의 증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 나무는 병들어 있었다. 전문가들은 회생이 어렵다고 했다. 가지가 마르고 껍질이 갈라지는 것을 보며 은수는 오랜 친구를 잃는 듯한 상실감에 젖어 있었다.
“나무를 잘라내야 한대.” 은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너무 오래 방치하면 다른 나무들한테도 안 좋고, 언젠가는 부러져서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새벽이는 고개를 들어 다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은수처럼 슬픔에 잠겨 있는 듯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초연함을 담고 있는 듯했다. 은수는 새벽이의 눈빛에서 강인한 자연의 순리를 읽었다.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사라지는 것. 그 모든 과정이 그저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하지만 인간인 은수에게는 그 자연스러움이 때로 너무나 큰 고통으로 다가왔다.
“새벽아, 너는 괜찮니?” 은수는 문득 궁금해졌다. 길 위에서 수많은 생과 사를 목격했을 새벽이에게, 하나의 생명이 스러져가는 과정은 어떤 의미일까. “익숙한 것이 사라진다는 건… 늘 아픈 일이야. 그렇지?”
새벽이는 은수의 손등에 머리를 비볐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은수의 무릎을 밟고 어깨 위로 올라섰다. 녀석은 은수의 목덜미에 따뜻한 숨을 불어넣으며 귓가에 조용히 골골거렸다. 그 진동이 은수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것은 위로였고, 침묵의 포옹이었으며, 말 없는 격려였다.
은수는 어깨 위의 새벽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고, 다시 창밖의 나무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앙상한 가지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마치 나무가 마지막 작별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아련하게 들렸다.
“알아, 새벽아.” 은수는 작게 속삭였다. “모든 건 변하고, 모든 건 사라지지. 하지만 그 자리에는 또 새로운 것이 피어날 수도 있다는 걸…”
새벽이는 고요히 은수의 품에 안겨 있었다. 녀석의 따뜻한 체온이 은수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어쩌면 새벽이는 그 오랜 나무가 사라진 자리에 또 다른 생명이 움트고, 새로운 기억들이 쌓여갈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사라지는 것 자체가 새로운 시작의 일부라는 것을, 은수에게 조용히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밤은 깊어가고, 늙은 나무의 그림자는 길고 어둡게 마당을 드리웠다. 그 그림자 속에서 은수와 새벽이는 말 없는 대화를 이어나갔다. 슬픔 속에서도 피어나는 작은 희망, 그리고 변하지 않는 이별과 만남의 순리에 대해. 새벽이의 눈빛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며, 은수의 마음에 작은 불씨를 피워 올렸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할 준비가 되었다고, 그렇게 속삭이는 듯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