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56화

고요함이 깊어지는 시간. 자정의 공기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와 함께 스튜디오 안으로 스며들었다.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들이 물에 젖은 수채화처럼 아련했다. 지우는 헤드폰을 고쳐 쓰고 마이크를 향해 작은 숨을 내쉬었다. 따뜻한 차 한 잔의 김이 모니터 화면을 살짝 흐리게 만들었다.

“안녕하세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지우입니다.”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수많은 밤의 풍경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의 목소리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쓸쓸함과 그리움이 묻어나는 듯했다. 밤사이 내리는 비처럼,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감정들이 스멀스멀 피어나는 밤이었다.

시간을 담은 필름

지우는 낡은 가죽 상자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며칠 전, 잊고 지냈던 창고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물건이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편지들과 함께 낡은 필름 카메라, 그리고 수십 장의 오래된 사진들이 들어있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유난히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 앳된 얼굴의 자신과, 옆에서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한 남자아이. 그리고 그들 뒤로는 ‘은하수 사진관’이라는 간판이 보였다. 오래된 아날로그 사진관이었다.

“오늘 첫 곡은요, 비 오는 밤에 듣기 좋은 곡이죠. 루시아의 ‘강’입니다.”

음악이 흘러나오는 동안, 지우는 사진 속 은하수 사진관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가장 친했던 친구, 아니 어쩌면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를 강준. 준이와 지우는 그곳에서 비밀 아지트처럼 드나들었다. 낡은 카메라로 서로의 모습을 찍어주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며, 언젠가 꿈을 이루면 꼭 다시 와서 함께 사진을 찍자고 약속했었다. 그 약속은 아직도 그녀의 마음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어느 밤산책자의 이야기

음악이 끝나고, 지우는 준비된 사연을 읽기 시작했다. 오늘 밤 그녀의 마음을 더욱 흔드는 것은, 바로 한 청취자의 사연이었다. 닉네임 ‘밤산책자’님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DJ 지우님, 안녕하세요. 저는 오늘 며칠째 잠 못 이루고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자주 가던 동네의 작은 사진관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에요. 그곳은 제게 단순한 사진관이 아니었습니다. 오래된 나무 계단을 오를 때마다 퀴퀴하면서도 향긋한 필름 약품 냄새가 나던 곳. 낡은 커튼 뒤에서 처음 사진을 찍던 날, 저는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어요.

그곳에서 저는 한 친구와 함께 어른이 되면 꼭 다시 와서 ‘시간을 초월한 사진’을 찍자고 약속했습니다. 어떤 모습이든, 그 시간이 되면 찾아와서 함께 카메라 앞에 서자고. 하지만 어른이 된 우리는 각자의 길을 걷느라 바빴고, 그 친구는 이제 제 곁에 없습니다. 그 사진관이 사라진다는 소식을 듣고 무작정 달려갔지만,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다가 결국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 문을 열면,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마주할 것 같아서 두려웠어요. 지우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곳에 들어가야 할까요, 아니면 이대로 과거를 과거로 남겨두어야 할까요?

사연을 읽는 지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밤산책자님의 사연은 마치 그녀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준이와 약속했던 은하수 사진관. 그곳이 아직 있을까? 있다면, 자신도 그 문을 쉽게 열 수 있을까? 두려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은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것이었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을 했다.

“밤산책자님, 사연 정말 감사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과거의 장소를 두려워하는 건, 그곳이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우리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우리는 그때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마주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 아닐까요.”

지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듯 조용히 말을 이었다.

“저는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장소가 주는 추억의 무게가 너무 커서, 다시 찾아가는 것이 망설여지는 그런 곳.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곳이 사라진다고 해서 우리의 기억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하는 것은, 단순히 낡은 풍경이 아니라, 그 시간 속에서 뜨겁게 꿈꾸고, 사랑하고, 아파했던 우리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비로소 그 과거와 화해하고, 또 다른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지 않을까요?”

지우는 말을 잠시 멈추고 다음 곡을 틀었다. 이 밤, 그녀의 마음을 울리는 또 하나의 곡.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였다.

빗소리, 그리고 용기

음악이 흐르는 동안, 지우는 낡은 사진 속 ‘은하수 사진관’의 간판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다. 준이와 함께 찍었던 그 사진. 어린 시절의 순수한 꿈과 풋풋한 약속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어쩌면, 밤산책자님이 말한 것처럼, 자신도 그 사진관에 대한 미련과 두려움으로 계속해서 그곳을 외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핸드폰에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오래된 번호였다. 망설이다가 문자를 열어보니, 짧은 메시지와 함께 사진 한 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낡은 간판이 철거되고 있는 건물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바로 ‘은하수 사진관’이었다.

지우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곳이, 정말 사라지고 있었다. 문자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지우야, 은하수 사진관이 결국 문을 닫는대. 네가 알면 슬퍼할까 봐 소식 전한다. – 준.”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수십 년 만에 온 준이의 문자.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추억의 장소. 빗소리가 더욱 거세게 스튜디오 창문을 때렸다. 하지만 지우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밤산책자님에게 했던 자신의 말이, 이제는 자신에게 하는 말이 되어 돌아왔다.

“여러분,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도 밤산책자님처럼, 혹은 저처럼 망설이고 있는 어떤 장소나 기억이 있나요?”

지우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단단하고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그곳이 사라지기 전에, 혹은 너무 늦기 전에, 한번쯤은 용기를 내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 문을 열고 들어가 무엇을 마주하든, 그것은 결국 지금의 우리를 이루는 소중한 조각이 될 테니까요.”

방송이 끝나자마자 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빗소리는 여전히 창밖을 감싸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은 왠지 모르게 고요해졌다. 핸드폰을 들고 망설임 없이 준이에게 답장을 보냈다. “고마워, 준아. 다음에 차 한잔 하자. 할 이야기가 많을 것 같네.” 그리고 지우는 은하수 사진관이 있던 옛 동네의 주소를 검색했다. 내일 아침, 비가 그치면 가장 먼저 그곳으로 가보리라 결심했다. 비록 텅 빈 터만 남아 있을지라도, 그곳에서 과거의 자신과 조용히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밤은 깊어지고,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지우의 마음속에는 한 줄기 빛이 다시 피어나는 밤이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부디 오늘 밤도, 여러분의 마음속 별이 환하게 빛나기를 바라며, DJ 지우는 물러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