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53화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계절이었다. 잎새들이 마지막 힘을 다해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며, 나는 한 해의 끝자락에 선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시작과 끝을 향해 달려가는 이치 속에서, 유독 나만은 제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런 날이면 늘 그랬듯이,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퇴근길, 늘 지나는 골목 어귀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색빛 털에 제법 윤기가 흐르는, 한때는 바스러질 듯 여렸던 그 길고양이였다. 녀석의 눈은 여전히 별빛을 담은 듯 깊고, 날카로우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녀석은 나를 보자마자 몸을 비비며 다가왔다. 차가워진 손으로 녀석의 덥수룩한 털을 쓰다듬으니, 보드라운 감촉이 마음의 한기를 조금이나마 녹여주는 듯했다.

“또 이렇게 추워졌네. 시간 참 빠르지, 녀석아.”

나는 길고양이에게 말을 건넸다. 내 목소리에는 오늘의 피로와 함께 옅은 쓸쓸함이 묻어났다.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 가만히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게 물들었던 단풍잎들이 마지막 힘을 잃고 흩날리는 풍경 위로,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가을이 이렇게 짧았었나 싶어. 찰나 같아. 마치 내 젊은 날처럼 말이야.”

나는 웃음 섞인 한숨을 쉬었다. 녀석은 고개를 돌려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시선은 늘 그랬듯이 복잡한 나의 감정을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녀석의 눈빛 속에서 나는 한 시절의 아쉬움,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회한, 그리고 다가올 겨울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들을 읽어냈다.

녀석은 천천히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진 마른 잎새 하나를 툭 건드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 행동은 마치 ‘무엇이 그리 아쉬운가. 떨어지는 잎새도 다음 계절을 위한 준비일 뿐’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는 녀석의 침묵 속에서 나만의 해석을 덧붙였다.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녀석은 몸짓과 눈빛으로 말을 하고, 나는 그 속에 나 자신의 마음을 투영하여 답을 찾아가는 과정.

“너는 매년 이 계절을 맞이하면서도, 이렇게 차분할 수 있니? 나는 왜 늘 익숙해지지 않을까.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마음이 왜 이렇게 약해질까.”

녀석은 내 무릎에 머리를 기댔다. 따뜻한 체온이 바지를 통해 전해져 왔다. 그 순간, 나는 어쩌면 내가 길고양이에게서 찾고 있는 것은 거창한 해답이 아니라, 그저 지금 이 순간의 따뜻한 온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삶이 아무리 덧없고, 시간이 아무리 빠르게 흘러간다 해도, 결국 남는 것은 이런 사소하고 소중한 순간들의 연속이 아닐까.

“너는 늘 혼자서도 잘 해내는 것 같아. 이 추운 겨울도, 너는 또 어떤 방식으로든 이겨낼 테지. 나는 그게 가끔은 부럽기도 해. 혼자서 꿋꿋이 서는 너의 모습이.”

내가 어둠 속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녀석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내 손을 핥았다. 거친 혀의 감촉이 오히려 부드럽게 느껴졌다. 녀석의 눈빛은 이번에는 ‘혼자서 꿋꿋이 서는 것은 너도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 역시 매일 혼자서 치열한 하루를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길고양이가 나에게 보여주는 것은, 나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나의 강인함이었을지도 모른다.

녀석은 잠시 내 손에 머물다, 이내 다시 바닥에 웅크렸다. 그리고는 작게 ‘골골’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어두워지는 골목에 작은 파동을 만들며 퍼져나갔다. 이 소리는 길고양이가 보내는 가장 따뜻한 위로였다. 삶이 아무리 예측 불가능하고, 앞날이 아무리 막막해 보여도, 결국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의 안온함이라는 것을 녀석은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나는 길고양이의 부드러운 털을 다시 한번 깊이 쓰다듬었다. 녀석의 등줄기를 타고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내 안의 얼어붙었던 슬픔을 조금씩 녹여주는 것 같았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어쩔 수 없지만, 새로운 계절이 오듯, 내 안에도 또 다른 시작이 찾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녀석과의 대화는 늘 그렇게, 나를 절망의 끝자락에서 건져 올리는 작은 구명보트와 같았다.

“고마워, 녀석아. 네 덕분에 오늘 하루도 잘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녀석도 함께 일어났다. 그리고는 짧게 ‘야옹’하고 울며,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녀석의 발자취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온기는 여전히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길고양이와의 대화는 물리적인 소리의 교환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는 순간이며, 침묵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깊은 교감이었다.

차디찬 바람이 다시 불어왔지만, 더 이상 쓸쓸하지 않았다. 나는 녀석이 남기고 간 온기를 품은 채, 나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일 또다시 이 골목에서 녀석을 만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길고양이의 삶은 늘 유동적이고,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녀석이 이 겨울을 잘 이겨내고, 또다시 언젠가 나의 길목에 나타나 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그날, 또다시 녀석과 깊은 침묵 속 대화를 나눌 것이다.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영원히 남는 것은 결국,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는 따뜻한 온기임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