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의 심장이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울렸다. 낡은 손목시계의 초침 소리마저 온몸의 피를 요동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드디어 이곳이었다. 지난 몇 달간 그를 밤잠 설치게 했던 흐릿한 사진 속 배경, 수많은 증언의 조각들이 가리키던 단 하나의 장소. 도시의 번잡함에서 한 발짝 벗어난, 고요한 골목 끝에 자리한 작은 서점 겸 카페.
유리문 너머로 따스한 노란빛이 새어 나왔다. 오래된 원목 테이블과 벽을 가득 채운 책들, 그리고 희미하게 풍겨오는 커피와 종이 냄새. 그 모든 것이 그의 기억 속 수아의 취향과 너무나도 완벽하게 일치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56번째 장을 맞이한 이 길고 지루하며 때로는 잔인했던 추적의 끝이, 과연 어떤 얼굴로 그를 기다리고 있을까. 희망의 미소일까, 아니면 체념의 눈물일까.
그는 마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듯, 대학 시절의 어느 오후를 떠올렸다. 벚꽃 잎이 흩날리던 캠퍼스 벤치, 수아의 손에 들려 있던 낡은 시집,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언젠가 나만의 작은 책방을 가질 거예요, 오빠”라고 속삭이던 그녀의 목소리. 그 약속은 그의 마음속에 영원히 각인되어 사라진 첫사랑을 찾는 북극성이 되었다. 수많은 길이 막히고 절망이 그를 덮쳐올 때마다, 그는 그 꿈을 붙잡고 다시 일어섰다.
정우는 천천히 유리문에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손잡이가 그의 손에 닿는 순간, 쨍그랑하는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가게 안을 훑었다. 몇 명의 손님들이 띄엄띄엄 앉아 책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카운터에는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검은색 앞치마를 두르고 커피 머신 앞에서 능숙하게 움직이는 여자.
숨이 턱 막혔다. 그녀의 뒷모습은 수아였다. 지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듯, 예전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차분해진 어깨선. 그래도 그 익숙한 머리 모양과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집중하는 모습은 변함없었다. 정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지난 십여 년간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의 모든 세포가 그녀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빈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도 보지 않고 그저 그녀를 응시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다가가 이름을 부르고 싶었지만, 발이 땅에 붙어버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자신을 기억할까? 그녀는 행복할까? 그의 나타남이 그녀의 평화로운 일상을 깨트리게 될까? 수없이 되뇌었던 질문들이 마치 거대한 파도처럼 그를 덮쳤다.
그때였다. 카운터 옆에 놓여있던 작은 문이 스르륵 열렸다. 갓난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가 총총걸음으로 문밖으로 나왔다. 아이는 작은 인형을 꼭 끌어안고 카운터로 다가갔다.
“엄마!”
작은 아이의 목소리가 가게 안을 맑게 울렸다. 수아는 순간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 미소는 정우가 기억하는 모든 순간보다도 더 따뜻하고, 더 깊고, 더 행복해 보였다. 그녀는 아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무릎을 굽혀 눈을 맞췄다.
“어휴, 우리 공주님. 엄마 바빠서 이따가 놀아준다고 했잖아.”
수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다정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정우에게는 낯선,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의 무게와 사랑이 담겨 있었다. 아이는 해맑게 웃으며 수아의 앞치마를 잡고 흔들었다. 수아는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가게 한구석으로 가서 책을 함께 골라주기 시작했다.
정우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찾아 헤매던 첫사랑은 바로 저기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삶은 이미 새로운 장을 넘겨, 자신과는 전혀 다른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책을 읽어주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완벽한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정우는 감히 그 안에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울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을 난도질하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이것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끝인가. 그녀의 행복을 확인하는 것이 그의 탐정으로서의 임무였을까.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인 컵을 잡았다. 컵은 차가웠지만,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떴다. 다시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아이에게 시집 한 권을 보여주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것은 정우가 그녀에게 처음 선물했던, 그들의 추억이 담긴 바로 그 시집이었다.
그는 자리에 못 박힌 듯 앉아 있었다. 일어서서 그녀에게 다가가야 할까? “수아야!” 하고 소리쳐 그녀의 모든 것을 되돌려 놓아야 할까? 아니면, 조용히 이 자리에서 사라져 그녀의 아름다운 새로운 삶을 방해하지 않아야 할까? 지난 수십 년의 염원이, 지난 55화의 모든 이야기가, 이 한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그의 손이 주머니 속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더듬어 꺼냈다. 벚꽃이 흩날리던 캠퍼스에서 함께 찍었던, 앳된 두 남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었다. 그는 사진 속의 수아와 눈앞의 수아를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카운터가 아니었다. 찢어질 듯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그는 종소리 없이 문을 열고 다시 차가운 골목길로 나섰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의 발걸음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 순간, 서점 안에서 아이의 작은 목소리가 정우의 귓가에 닿았다.
“엄마, 저 아저씨 방금 우리 쳐다보고 있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