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준은 차에서 내렸다. 낡은 표지판이 흔들리는, 오래된 골목의 끝. ‘한지민 공방’이라는 간판이 그의 눈앞에서 아득하게 일렁였다. 179화에 걸친 기나긴 여정의 끝이, 혹은 새로운 시작이 바로 이 문 너머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의 심장을 미친 듯이 요동치게 만들었다. 며칠 밤낮으로 이어졌던 끈질긴 추적 끝에, 그는 마침내 이 작은 도예 공방이 잃어버린 첫사랑, 이지우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확신에 도달했다. 아니, 확신이라기보다는 기적에 가까운 직감이었다.
창문 너머로 흙먼지 가득한 작업실 풍경이 희미하게 보였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물레를 돌리는 모습, 그리고 그 옆에서 섬세한 손길로 도자기를 다듬는 여인의 옆모습. 민준의 시선은 그 여인에게 고정되었다. 긴 머리카락을 느슨하게 묶고, 작업복 차림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우아함이 흐르는 그녀. 사진 속 지우와 놀랍도록 닮은 얼굴이었다. 심장이 멎는 듯했다. 멈췄던 숨을 겨우 내쉬며, 민준은 조심스럽게 공방 문을 열었다.
딸랑,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고요했던 작업실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민준에게로 향했다. 노인은 흙 묻은 손을 닦으며 그를 맞았고, 여인은 하던 작업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민준의 세상은 멈춰 섰다.
“…지우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수년간 수천 번 되뇌었던 이름이, 마치 생애 처음 발음하는 단어처럼 낯설게 울렸다. 여인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짙은 눈썹 아래로 깊어진 눈매, 오뚝한 콧날, 살짝 도톰한 입술까지. 모든 것이 그가 기억하는 지우였다. 세월의 흔적이 약간 더해졌지만, 그 본질적인 아름다움은 변치 않았다.
여인은 잠시 멍하니 민준을 바라보다가, 이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손님… 누구를 찾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녀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어딘가 낯설었다. 민준이 기억하는 지우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이지우… 맞잖아. 나 김민준이야. 기억 안 나? 우리… 우리 강가에서 처음 만났잖아.” 민준은 애타게 설명했다. 지갑에서 낡은 사진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풋풋했던 스무 살 시절, 그들의 환한 미소가 담긴 빛바랜 사진이었다. “여기 봐, 우리잖아. 벚꽃 흐드러지던 그날, 우리…”
여인은 사진을 받아들었다. 길고 섬세한 손가락이 사진 위를 스쳤다. 그녀의 눈빛에는 혼란과 더불어 희미한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사진 속 자신과 민준의 모습을 번갈아 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사진 속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지우가 아니라, 한지민입니다.”
한지민. 그 이름이 민준의 귓가에 차갑게 박혔다. 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건 그가 상상했던 재회와 너무나도 달랐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니, 알아보지 못하는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모르는 걸까? 잃어버린 지난 세월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우야… 아니, 지민 씨… 기억이 정말 안 나는 거야? 나한테는 정말 소중한 추억들이야. 같이 듣던 노래, 함께 걷던 길, 약속했던 미래까지… 모두 다 가짜였던 거야?” 민준의 목소리는 애원하듯 떨렸다.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는 억지로 삼켰다. 지금 울어서는 안 되었다. 그녀에게 더 설득해야 했다.
한지민은 불편한 기색으로 민준을 바라봤다. “정말 죄송하지만,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에 대해 말씀하셔도… 저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혹시 착각하신 건 아닐까요? 저는 어린 시절 사고로 기억의 일부를 잃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찾으시는 분은 아닐 겁니다.”
사고로 기억을 잃었다는 말에 민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에게는 절망적인 소식이었지만, 동시에 그녀가 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지에 대한 유일한 설명이기도 했다. 절망과 희망의 가느다란 줄이 엉켜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깊은 눈동자 안에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슬픔, 혼란,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동공. 그녀의 반응은 진심처럼 보였다. 수년간의 수색이 결국 헛된 것이었단 말인가. 마침내 찾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란 말인가.
노인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다가와 민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젊은이, 마음은 알겠지만, 지민이는 정말 기억을 못 해. 안쓰럽지만, 더 이상 폐를 끼치지는 말아 주게.”
민준은 거의 울상이 되어 고개를 숙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주저앉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그는 겨우 몸을 돌렸다. 공방 문을 향해 몇 걸음 옮기던 순간,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한지민에게 닿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가 건넨 빛바랜 사진을 쥐고 있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인 동작으로, 엄지손가락으로 사진 속 민준의 얼굴을 스윽 어루만졌다.
그 순간, 민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의 그 행동은 너무나 익숙했다. 지우가 생각에 잠기거나, 무언가에 집중할 때 보이던 버릇이었다. 그녀는 종종 손에 쥔 물건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곤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정확히 그 버릇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그녀의 무의식 속에 아직 이지우가 살아있다는 증거일까? 그녀의 눈빛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지만, 그 짧은 찰나의 손길에서 민준은 절망의 심연 속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다. 그의 첫사랑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기억이 잠시 길을 잃었을 뿐이었다.
민준은 공방 문을 나섰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절망은 희미해지고, 새로운 의지가 그를 가득 채웠다. 그녀가 기억을 잃었다면, 그는 그녀가 잊어버린 모든 것을 다시 찾아 줄 것이다. 이것은 끝이 아니었다. 이건… 시작이었다. 이지우를 되찾기 위한, 김민준의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이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랐다. 그의 눈은 뜨거웠지만,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결의에 찬, 뜨거운 눈물이었다. 그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줄 단서, 그녀의 사고에 대한 진실, 그리고 그녀의 진짜 이름을 되찾아 줄 모든 퍼즐 조각을 찾아낼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