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낡은 일기장 – 제58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펼쳤을 때, 나는 이미 수많은 비밀과 마주했었다. 지우 엄마의 출생의 비밀, 할아버지와의 애틋했던 사랑, 그리고 해묵은 오해들까지. 하지만 오늘 마주할 페이지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도 할머니의 가슴을 찢었을, 가장 깊은 상처의 기록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오후 세 시, 창문으로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는 겨울 햇살은 희미했지만, 일기장 위로 떨어지는 그림자처럼 나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낡은 종이에서 풍겨오는 세월의 냄새는 나를 아득한 과거로 이끌었다. 할머니의 필체는 이전과는 다르게 더욱 가늘고 힘겨워 보였다. 마치 울면서 쓴 글씨처럼, 곳곳에 얼룩진 흔적들이 눈에 띄었다.

1952년 1월 17일, 부산 피난처에서

미영아, 내 어린 동생 미영아.

네 손을 놓았던 그 겨울 밤이 벌써 이십 년이 다 되어가는구나. 스무 해를 품고 산 이 죄책감은 단 하루도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피난민들로 아수라장이던 부산 부두, 얼어붙은 몸으로 너를 업고 겨우 도착했던 그곳에서, 넌 굶주림에 허덕이며 자꾸만 내 품을 파고들었지.

언니는 그때, 너무나 어리고 어리석었단다. 겨우 스물 하나, 뱃속에는 지우 엄마가 있었고, 굶주린 너와 나, 그리고 뱃속의 아이까지 모두 살릴 길은 없어 보였어. 군인 아저씨들이 운영하는 임시 보호소에서 배급을 받기 위해 몇 날 며칠을 줄 서서 기다리던 중, “아이 한 명만 더 맡길 수 있다면…”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언니는 이기적인 선택을 했단다.

엄마는 전쟁 통에 이미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소식이 끊겼으니, 나에게 남은 유일한 피붙이는 너였는데… 언니는 네 작은 손을 잡고, “미영아, 언니 잠깐 다녀올게. 여기서 얌전히 기다려야 해.” 하고는, 끝내 돌아가지 못했지.

그때 네 얼굴을 기억한다. 언니를 올려다보던 그 맑고 까만 눈동자, 얇은 잠바 사이로 느껴지던 네 작은 어깨… 그게 너를 본 마지막 모습이었어. 그 뒤로 아무리 찾아 헤매도 너는 어디에도 없었지. 임시 보호소는 곧 철수했고, 난 그 혼란 속에서 네 이름 석 자만 목 놓아 불렀단다. 미영아, 미영아…

네가 살아 있다면 이제 환갑이 넘었을 나이겠구나. 언니는 네게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단 한 번이라도, 살아서 네 얼굴을 마주하고 싶었어. 언니가 얼마나 너를 그리워하며 살았는지, 얼마나 너를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는지, 말해주고 싶었단다.

언니는 늘 너를 가슴에 품고 살아왔어. 미안하다, 미영아. 정말 미안하다…

일기장 위로 뚝, 뚝, 뜨거운 눈물이 떨어졌다. 할머니의 글씨가 번지고, 나의 시야도 함께 흐려졌다. 나는 입술을 깨물어 흐느낌을 참아냈다. 할머니의 고통이, 마치 내 고통인 양 심장을 저며왔다.

할머니는 평생을 미영이라는 이름의 어린 동생을 가슴에 묻고 사셨던 것이다. 내가 아는 할머니는 늘 조용하고 인자하셨지만, 가끔씩 허공을 응시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그저 ‘나이가 드셔서 그러려니’ 했다. 그 한숨 속에 이토록 뼈아픈 사연이 숨어있었을 줄이야.

문득, 어릴 적 엄마가 희미하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머니에게 어릴 적 잃어버린 동생이 있었대. 전쟁 통에 헤어졌다고만 들었어.” 그때는 그저 옛날이야기처럼 들렸을 뿐, 할머니가 그토록 직접적인 선택과 고통 속에 그 동생을 잃으셨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혼란스러운 전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진 비극인 줄로만 알았다.

나는 일기장을 소중히 덮고 일어났다. 마음속에는 할머니를 향한 연민과 함께, 이루 말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다. 할머니는 그 이야기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으셨다. 홀로 감당했을 그 거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의 무게를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거실로 나가자 엄마가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엄마의 등 뒤에서 나는 망설였다. 이 이야기를 엄마에게, 할머니의 딸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까. 엄마는 할머니의 뱃속에 있던 아이였다. 할머니가 미영을 떠나보내고 지켜낸 생명. 엄마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엄마.”

내 목소리는 예상보다 떨렸다. 엄마는 뜨개질바늘을 내려놓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니, 지우야?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니?”

나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엄마는 의아한 표정으로 일기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내가 펼쳐놓은 1952년 1월 17일 자 페이지를 읽기 시작했다. 엄마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이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엄마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글썽이는 눈빛으로 엄마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이게 정말이니? 우리 엄마가… 이런 일을 겪으셨단 말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평생 미영 이모를 그리워하셨어.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엄마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흐느꼈다. “엄마는… 내게 이 이야기를 제대로 해주신 적이 없었어. 그저, ‘전쟁 통에 언니가 어릴 때 헤어진 동생이 하나 있단다’ 정도만… 그런 깊은 사연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엄마는 일기장을 가슴에 품고 오열했다. 할머니의 슬픔이 엄마에게도 그대로 전이되는 듯했다.

“어쩌면 좋아… 우리 엄마가 평생을 얼마나 힘드셨을까. 나는 그걸 모르고… 딸로서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의 어깨가 들썩였다. 나 역시 억눌렀던 감정들이 터져 나와 엄마 옆에 앉아 함께 울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숨겨진 아픔의 증언이었고, 살아남은 자의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한참을 울고 난 뒤, 엄마는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때… 아주 오래전, 엄마가 미영 이모를 찾으려고 애쓰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어. 전쟁이 끝난 뒤 수십 년 동안, 피난 갔던 사람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문에 광고도 내고… 하지만 워낙 어린 나이에 헤어져서, 어떤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지.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걸로 알아.”

엄마의 말에서 나는 희미한 희망의 끈을 발견했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완전히 절망했던 것이 아니었다. 할머니가 수십 년을 찾아 헤매셨던 그 동생, 미영 이모. 어쩌면 아직 살아계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가슴 한켠에서 피어났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할머니의 이 못다 한 그리움을 우리가 풀어드려야 할 것 같아.”

엄마는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모든 단서는 할머니의 일기장 속에 있을 거야. 아니면, 할머니가 생전에 아끼셨던 물건들 속에. 어쩌면 미영 이모의 아주 어릴 적 사진 한 장이라도 남아있을지 몰라.” 나는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다시 펼쳤다. 할머니의 글씨가 내 눈에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할머니는 그토록 찾고 싶어 하셨던 미영 이모의 흔적을, 무의식중에 어딘가에 남겨두셨을지도 모른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할머니의 방을 다시 찾았다. 어제와는 다른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물건 하나하나에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있었고, 그 속에 미영 이모를 향한 그리움이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낡은 장롱, 오래된 서랍장, 침대 머리맡의 작은 협탁… 나는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흔적을 뒤지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마지막 바람이 담긴 이 일기장은, 이제 나에게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미래를 향한,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나서는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었다.

과연 할머니의 오래된 물건 속에서, 미영 이모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실마리는, 70년의 세월을 넘어선 만남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나의 심장은 미지의 기대감과 함께, 거대한 숙제를 받아든 듯 요동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