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도시의 새벽 공기를 가르며, 김민준의 차는 오래된 골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가로등 불빛 아래 희미하게 드러난 ‘시간의 흔적 갤러리’라는 낡은 간판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이름처럼, 이곳은 과거의 파편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192번째 발걸음, 192번째 희망, 그리고 192번째 실망의 가능성. 그의 심장은 언제나처럼 불안과 기대로 동시에 요동쳤다.
수십 년간 이어진 유진을 향한 그의 탐색은 이제 너무나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왔다. 때로는 한 줌의 실마리가 거대한 절망으로 이어졌고, 때로는 거의 포기 직전에 예상치 못한 단서가 나타나 꺼져가던 불씨를 다시 살리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낡은 상자 속에서 발견된 한 장의 엽서. 20년 전, 유진이 그에게 보냈던 그림 엽서와 거의 흡사한 화풍의 작품이 최근 이 갤러리에서 전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민준은 주저 없이 이곳으로 향했다.
갤러리 문은 아직 굳게 닫혀 있었지만, 유리창 너머로 어슴푸레 보이는 전시 공간은 이미 그에게 압도적인 분위기를 선사했다. 캔버스 위를 떠도는 색채들, 조각상들의 고요한 침묵. 모든 것이 유진의 섬세한 손길을 닮아 있었다. 민준은 심호흡을 하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마치 첫사랑을 처음 만나러 가던 그 순간처럼, 온몸의 감각이 곤두서고 손끝이 떨려왔다.
그림 속의 속삭임
오전 10시 정각, 갤러리 문이 열리고 민준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하면서도 은은한 물감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전시된 그림들은 대부분 추상화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깊은 사색과 감정을 담고 있었다. 민준은 발소리도 내지 않으려 조심하며 천천히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이 중에 유진의 그림이 있을까? 그의 눈은 마치 돋보기처럼 한 점 한 점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가장 안쪽 전시실에서, 민준의 발걸음이 멈췄다. 푸른빛과 회색빛이 뒤섞인 대형 캔버스 위에는, 낡은 나무 흔들의자가 창가에 놓여있는 풍경이 그려져 있었다. 단순한 구도였지만, 그림 속 흔들의자에는 짙은 그리움과 쓸쓸함이 배어 있었다. 그리고 창밖으로는, 그들이 함께 거닐던 작은 골목길과 비슷한 풍경이 아련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민준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유진.”
무의식중에 그의 입에서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 그림, 이 감성, 이 모든 것이 너무나 유진 다웠다. 그는 그림의 제목을 확인했다. ‘회상(回想)’. 작가 이름은 ‘서윤’. 유진의 이름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필체, 그리고 그림 하단에 아주 작게 새겨진 표식. 어릴 적 유진이 비밀 일기장에 몰래 그려 넣곤 하던 작은 별 모양의 문양이었다.
민준은 숨을 헐떡였다. 드디어. 마침내. 오랜 시간 헤매던 길 끝에서 그가 찾던 단서를 발견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림 앞에서 망부석처럼 서 있는 그에게,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림 앞에서 그렇게 오래 머무는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군요.”
뒤를 돌아보니, 낡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백발의 여인이 온화한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갤러리 관장인 강 여사였다.
강 여사의 이야기
강 여사는 민준의 눈에 담긴 간절함을 읽었는지, 조용히 차를 내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서윤 작가님 말이지요. 몇 달 전 이사를 가셨어요. 연락처도 남기지 않으셨고요. 신비주의 작가셔서 원래 그런 편이긴 합니다만.”
민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또다시 한 발 늦은 것인가. 하지만 강 여사의 다음 말에 그는 다시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그분, 참 특이한 분이셨어요. 그림을 그리는 방식도, 색을 쓰는 방식도… 묘하게 그리움을 담고 있었죠. 그리고 당신처럼 그 그림을 알아보는 분이 한 분 더 있었어요.”
“누구요?”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강 여사는 따뜻한 차 한 모금을 마시고는 먼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감았다.
“서윤 작가님이 전시를 여시던 날이었을 겁니다. 한 여인이 조용히 갤러리를 찾아왔어요. 그분도 이 ‘회상’이라는 그림 앞에서 한참을 서 계시더군요.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는데, 마치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듯한 표정이었죠.”
“그 여인이… 어떻게 생겼었습니까? 유진이었을까요?” 민준의 목소리는 갈라졌다. 간절함이 묻어났다.
“음…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아요. 마스크를 쓰고 계셨고,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요. 하지만 그분에게서 묘한 슬픔과 동시에 따뜻함이 느껴졌습니다. 서윤 작가님과도 잠시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때 제가 얼핏 들었던 말이 있어요.”
강 여사는 민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윤 작가님이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언제라도 돌아올 곳은 여기니, 너무 걱정 마.’ 그리고 그 여인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떠나셨죠.”
민준은 혼란스러웠다. 서윤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유진이, 또 다른 익명의 유진을 만났다는 말인가? 아니면 서윤이 유진이고, 그 여인은 다른 인물이거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작가님의 본명은… 혹시 아시나요?” 민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강 여사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선 모두들 서윤 작가님으로 알고 있었어요. 다만, 이사 가시기 전에 제게 작은 상자 하나를 맡기셨어요. 언젠가 이 그림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이 있다면, 전해달라고요.”
민준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강 여사는 안쪽 방으로 들어가 잠시 후 낡고 작은 나무 상자 하나를 들고 나왔다. 상자 위에는 ‘회상을 기억하는 이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시간이 멈춘 상자
민준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빛바랜 사진 몇 장, 말린 꽃잎 몇 개, 그리고 작은 유리병에 담긴 흙 한 줌이 들어 있었다. 사진들은 낡은 필름 카메라로 찍은 듯, 20여 년 전의 풍경과 어린 시절의 자신과 유진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손때 묻은 사진 속에는, 장난기 넘치던 유진의 미소와 어색하게 웃고 있는 어린 민준의 모습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밑바닥에는, 얇은 종이 한 장이 접혀 있었다. 민준은 종이를 펼쳤다. 유진의 맑고 또렷한 필체로 쓰인 짧은 문장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 모든 그림들은 당신을 위한 편지입니다. 그리고 제가 돌아올 곳은, 아직도 그 언덕 위의 작은 오두막집입니다.’
민준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언덕 위의 작은 오두막집. 그들의 어린 시절 아지트였다. 낡고 허름했지만, 세상의 모든 비밀을 나누고 꿈을 키우던 그들만의 공간. 유진은 그곳으로 돌아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상자 속의 흙은 분명 그 오두막집 마당의 흙일 터였다. 그리고 그 언덕은, ‘회상’ 그림 속 창밖 풍경과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서윤은 유진이었다. 그리고 유진은, 이 모든 시간을 견디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강 여사님.”
민준은 상자를 품에 안고 강 여사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20년의 세월, 수많은 단서와 수많은 좌절 끝에, 마침내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은 기분이었다. 그의 심장은 이제 불안이 아닌, 벅찬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고 있었다. 민준은 갤러리를 나와 차에 올랐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오직 한 곳을 향해, 그의 첫사랑이 기다리고 있을 그 언덕 위의 작은 오두막집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수많은 질문이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단지 그녀를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잃어버린 시간의 조각들을 맞춰 나갈 순간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직감하며, 그의 차는 미지의 길을 향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