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장막이 깊어지고, 도시의 소음조차 숨을 죽이는 자정 무렵. 지우는 작은 창문 너머로 쏟아지는 별빛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래된 탁상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 설의 목소리였다. 언제부턴가 이 밤의 위로가 없으면 잠들 수 없게 된 지우의 작은 의식이었다.
몇 달 전, 지우는 낯선 도시에서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태어나 자란 이 작은 마을로 돌아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 변한 듯 변하지 않은 골목들. 그녀의 마음속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면 그 공허함이 매일 밤 라디오를 켜게 하는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별이 쏟아지는 추억
“오늘 밤, 당신의 하늘에는 어떤 별이 뜨고 있나요? 혹시 잊고 지내던 오래된 추억의 별이 반짝이고 있지는 않은가요?”
DJ 설의 잔잔한 질문이 흐르자, 지우는 무심코 손에 들고 있던 낡은 앨범을 펼쳤다. 빛바랜 사진들 속에서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시절의 지우와 한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민준. 이름만 되뇌어도 아릿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그녀의 첫 별 친구였다.
그들은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줄곧 붙어 다녔다. 특히 민준은 별에 미쳐 있었다. 아버지에게 선물 받은 작은 굴절 망원경을 가지고 매일 밤 지우를 불렀다. 둘은 마을 뒷산 언덕에 숨겨진 그들만의 아지트에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흙냄새와 풀벌레 소리, 그리고 손에 닿을 듯 쏟아지던 별빛이 그들의 유년기 전부였다.
“봐, 지우야. 저기 저 큰 곰자리 옆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별 보여? 저게 바로 우리가 만든 별자리야!”
민준은 언제나 새로운 별자리를 찾아내곤 했다. 자신과 지우의 이름을 따서 ‘지민자리’라고 이름 붙인 별자리를 보여주며 신이 나 재잘거렸다. 그날 밤, 유난히 밝던 별똥별이 길게 꼬리를 그리며 떨어지던 순간, 민준은 지우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우리, 어른이 돼서도 매년 이맘때면 꼭 여기, 지민자리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도 별똥별이 떨어지면 소원을 빌자.”
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만 같았던 약속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무정하게 흘렀고, 민준의 가족이 갑작스럽게 도시로 이사를 가면서 그들의 약속은 흐릿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그 후로 민준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어쩌면 그 약속을 기억하는 것은 이제 지우 혼자뿐일지도 모른다는 쓸쓸함이 그녀의 가슴을 짓눌렀다.
어둠 속 한 줄기 빛
“잊혀진 약속은 그저 사라지는 걸까요? 아니면, 언젠가 다시 빛을 발할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DJ 설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지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말에 지우는 숨을 멈췄다. 이어 라디오에서는 잔잔한 기타 선율과 함께 옛 가요가 흘러나왔다. 그 노래는 민준과 지우가 어릴 적 함께 흥얼거리던 노래였다.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지우는 앨범을 덮었다. 눈앞에 펼쳐진 밤하늘이 아까보다 더 또렷하게 느껴졌다. 저 별들 중 어딘가에 민준이 이름 붙여주었던 ‘지민자리’가 있을까? 그 약속을 잊지 않고 바라볼 때마다 떠올렸을까?
가슴속에서 작은 불씨가 피어올랐다. 이대로 방구석에 앉아 후회와 그리움에 갇혀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 어쩌면, 어쩌면 그녀의 발걸음이 향할 곳이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었다.
지우는 벌떡 일어났다. 잠옷 차림 그대로, 얇은 가디건 하나를 걸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어두운 시골길을 따라 그녀는 마을 뒷산 언덕으로 향했다. 발밑의 자갈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별이 춤추는 언덕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자, 탁 트인 시야가 펼쳐졌다. 어둠 속에서 조용히 숨 쉬는 마을의 희미한 불빛이 저 아래 아득하게 반짝였다. 그리고 그 위로는,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장엄함이 지우를 압도했다. 도시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별들의 군무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지우는 숨을 고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기억 속의 그 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 아래 낡은 벤치는 없었지만, 나무의 굵은 줄기에는 어릴 적 민준과 함께 새겨 넣었던 ‘지우♡민준’이라는 낙서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세월의 흔적만큼 지워졌지만, 손가락으로 더듬으니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하늘을 가로지르며 길게 빛나는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치 누군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지우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오래도록 잊고 지내던, 아니, 잊은 척했던 약속.
그녀는 더 이상 민준이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와의 재회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이 언덕에 다시 와서, 잊고 지내던 자신을 마주하고, 잃어버렸던 별똥별을 다시 보았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우는 하늘을 향해 작게 미소 지었다. 밤공기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따뜻한 온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문득, 저 넓은 하늘 어딘가에서 민준도 지금 자신과 같은 별을 바라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들의 약속은 이 별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었다.
별똥별은 떨어지고 사라졌지만, 그 순간의 약속과 기억은 그녀의 마음속에 또 하나의 별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지우는 발걸음을 돌려 언덕을 내려왔다. 어두운 길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였다. 그리고 다음날, 그녀는 앨범 속 민준의 사진을 보며, 어쩌면 다시 찾아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용기를 품게 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가 가져다준 새로운 시작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