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196화

깊어가는 밤, 스튜디오 안은 옅은 숨소리마저 거대한 침묵 속에 잠기는 듯했다. 지혜는 헤드폰을 통해 자신의 나직한 목소리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것을 들으며, 눈앞의 마이크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은 언제나처럼 그녀의 감각을 깨웠다. 모니터의 푸른빛만이 유일한 생명처럼 깜빡이고, 그 빛이 드리운 그녀의 얼굴 위로 한 통의 사연이 길게 스크롤되었다. 제목은 <별빛나무>였다.

“안녕하세요, 디제이님. 저는 오늘 밤 유난히 별이 빛나는 창밖을 보며 편지를 씁니다. 오랜만에 방을 정리하다가 낡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어요. 그 안에는 어릴 적 친구와 주고받았던 빛바랜 쪽지들, 초등학교 졸업 앨범, 그리고 고장 난 필름 카메라가 들어있더군요. 먼지를 털어내자마자 잊고 살았던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어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모든 순간들이 제 마음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디제이님도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문득, 잊혀진 줄 알았던 별들이 다시 빛나는 것 같은 밤입니다.”

지혜는 사연을 읽는 내내 눈을 감았다. 그녀의 귓가에는 잔잔한 배경 음악이 흐르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어린 시절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낡은 상자. 빛바랜 쪽지. 잊고 살았던 시간들. <별빛나무>님의 사연은 오래된 서랍 속 깊이 잠들어 있던 그녀 자신의 상자를 흔들어 깨웠다. 아주 오래전, 별이 쏟아지던 어느 여름밤의 기억이었다.

그날은 유난히 습하고 더웠던 여름밤이었다. 빌라 옥상, 열기로 데워진 콘크리트 바닥에 얇은 돗자리를 깔고 은우와 지혜는 나란히 누워있었다. 도심의 빛 공해 속에서도 그날따라 별들은 존재감을 과시하듯 빛나고 있었다. “지혜야, 저 별들 좀 봐. 우리가 진짜 작은 먼지 같지 않냐?” 은우가 길쭉한 팔을 뻗어 하늘을 가리켰다. 그때의 은우는 언제나 기이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아이였다. “저 별 중에 우리 이름 붙여줄 별 하나 골라볼까?”

그렇게 둘은 한참을 올려다보다가, 카시오페아와 북두칠성 사이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은 별 무리를 찾아냈다. “저건, 저건 우리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절대 잊지 말자고 약속했던 꿈들을 지켜주는 별자리야. 우리만의 ‘별자리 나무’라고 부르자.” 은우의 진지한 표정에 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별자리 나무. 우리 나중에 어른이 되면, 이 나무 아래서 다시 만나자.”

그 약속은 순수하고 맹목적이었으며, 동시에 깨지기 쉬운 유리 조각 같았다. 시간이 흐르며 별자리 나무는 기억의 숲 가장자리에 놓인 희미한 풍경이 되었다. 서로 다른 길을 걸었고, 새로운 꿈을 꾸었다. 하지만 오늘 밤, <별빛나무>님의 사연이 바람처럼 불어와 그 숲의 잠자는 잎들을 흔들었고, 잊혀진 줄 알았던 별자리 나무는 다시금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혜는 서서히 눈을 뜨고 마이크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것을 애써 감추며 말을 이었다.

“네, 저도 그런 밤이 있습니다. 잊고 지냈던 순간들이 문득 오늘의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밤. 그때의 꿈들이 지금의 나를 비추는 밤 말이죠. 아마도 이 밤,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낡은 상자 속에서 빛바랜 추억들을 꺼내보고 있을 겁니다. 지금 이 노래는 그 모든 소중한 기억들에게 바칩니다. 어쩌면 잊혀진 줄 알았던 그 별들이, 다시금 우리 마음속에서 빛나기를 바라면서요.”

지혜는 다음 곡을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과 첼로의 깊은 울림이 스튜디오를 가득 채웠다. 먼 기억 속의 공기처럼 아련하고, 동시에 따뜻하게 감싸 안는 멜로디였다. 그 노래가 흐르는 동안 지혜는 잠시 헤드폰을 벗고 눈을 감았다. 마치 어린 시절의 자신과 은우가 다시금 옥상에 누워 그들만의 별자리 나무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음악이 끝나고 짧은 마무리 멘트 후, 방송은 무사히 끝이 났다. 시계는 어느덧 새벽 두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스튜디오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섰을 때, 밤공기는 예상보다 차가웠지만 왠지 모르게 상쾌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자 아까보다는 희미했지만 여전히 수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는 익숙하게 정문에서 나와 골목길로 들어섰다.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 늘 지나치던 작은 갤러리가 있었다. 오늘따라 그곳의 쇼윈도에 시선이 멈췄다. 따뜻한 조명 아래, 액자에 담긴 한 장의 사진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광활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한 그 사진 속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이 은하수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별들 사이에, 희미하지만 분명히 그녀의 눈길을 끈 작은 별 무리가 있었다. 마치 누가 일부러 표시해둔 것처럼, 그 별들은 다른 별들과는 다른 독특한 형태로 모여 있었다.

지혜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그건 바로 어린 시절 은우와 그녀가 함께 이름 붙여주었던 ‘별자리 나무’의 형상이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사진 아래쪽을 응시했다. 사진의 오른쪽 하단, 아주 작게 새겨진 서명과 함께 작은 그림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 어린 은우가 자신만의 그림일기장에 자주 그려 넣던, 세 개의 점이 나란히 이어져 별똥별처럼 보이는 작은 그림이었다.

지혜는 발걸음을 멈추고 갤러리 쇼윈도 앞에 한참을 서 있었다. 차가운 유리창 너머로 빛나는 사진 속 ‘별자리 나무’와 그 아래의 작은 그림이, 잊혀진 줄 알았던 시간의 조각들을 맞춰주는 듯했다. 맹세코, 이런 사진을 본 적도, 이곳에 이런 갤러리가 있었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길이었다. 한참 동안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차가운 밤공기 속에서 그녀의 가슴은 오래된 난로처럼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잊혀진 줄 알았던 그 별들이, 다시금 그녀의 삶 속에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지혜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