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93화

겨울의 한복판, 세상은 다시 한번 은빛으로 물들었다.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송이는 하늘에서 부서지는 작은 빛의 조각들 같았다. 지훈은 오래된 나무 창틀에 기댄 채, 희미한 가스등 불빛 아래 눈이 쌓이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멎은 듯 고요한 밤이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속은 폭풍 전야처럼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등 뒤, 작은 방에서는 서연이 얕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와 병색 짙은 얼굴이 떠올라 지훈의 심장을 죄어왔다. 지난 몇 달간, 서연은 조금씩, 아주 미묘하게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피곤한 기색인 줄 알았다.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해서겠거니, 잠 못 이루는 날들이 많아서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드리워진 그림자와 창백해진 뺨은 단순한 피로 이상의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서연아…”

지훈의 낮은 한숨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는 그녀의 변화를 모를 리 없었다. 밥을 제대로 먹지 않고, 자주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때로는 밤새 뒤척이는 소리가 그의 잠을 깨웠다. 질문을 던지려 하면 언제나 희미한 미소로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둘러댔다. 그 미소가 오히려 지훈을 더 아프게 했다.

지훈은 창가에서 물러나 조심스럽게 방으로 향했다. 서연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는 너무나 가늘어서, 마치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았다. 지훈은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가운 그녀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작고 부드러웠던 손은 이제 뼈마디가 도드라져 보였다. 그의 온기가 그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지훈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그 순간, 서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열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그녀의 눈동자가 지훈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미안함과 깊은 슬픔이 그 안에 서려 있었다.

“지훈아… 왜 잠들지 않고…”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힘이 없었다. 마치 얇은 유리 조각처럼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았다.

“네가 아파하고 있는데 어떻게 내가 잠들 수 있겠어.”

지훈은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간절함과 함께 답답함이 섞여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 침묵을 견딜 수 없었다. 이대로 그녀가 점점 더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나에게 말해줘, 서연아. 무엇이 너를 이토록 힘들게 하는지.”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눈이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하얀 눈꽃은 세상을 감싸 안으며 모든 소음을 삼키고, 두 사람만의 작은 공간을 더욱 깊은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미안해, 지훈아…”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너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짐이라니… 네가 나에게 짐이 되는 날은 없어.” 지훈은 떨리는 목소리로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무슨 일인지, 무엇이든 말해줘. 우리 함께 헤쳐나가자고 약속했잖아.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 그날의 약속, 기억해?”

그날이었다. 처음으로 세상이 하얗게 변하던 날. 어렸던 두 사람은 낡은 오두막 앞에서 손을 맞잡고 영원히 함께할 것을 맹세했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고, 함께 모든 것을 이겨내겠다고. 순수했던 그들의 약속은 지금, 이 차가운 겨울밤에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서연은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어깨가 흐느낌에 따라 흔들렸다. 지훈은 그녀를 품에 안았다. 가늘어진 몸, 떨리는 숨결. 그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 아팠다.

“지훈아… 나, 사실은… 오래전부터… 아니, 다시 시작된 것 같아.”

그녀의 말은 마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칼날 같았다. ‘다시 시작된 것 같아’라는 말은 지훈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이었다. 서연은 어린 시절부터 희귀병을 앓았고, 기적적으로 회복했지만, 늘 재발의 위험을 안고 살았다. 그 사실은 두 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에 언제나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지훈은 그녀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픔과 절망, 그리고 다시 시작될지도 모르는 긴 싸움의 예감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니야, 서연아. 아니야…” 그는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믿음을 잃은 듯 힘이 없었다. “우리… 우리 다시 이겨낼 수 있어. 분명히… 이겨낼 수 있을 거야.”

서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눈빛에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지훈아, 이번엔… 달라. 의사 선생님이… 이제 더 이상 방법이 없다고… 하셨어.”

그 말은 지훈의 세상 전체를 무너뜨렸다. 그의 귀가 멀어지는 듯했다. 눈앞의 모든 풍경이 일그러지고, 차가운 눈꽃이 아닌 불꽃이 터지는 것처럼 아득했다. 방법이 없다고? 그들의 모든 희망과 꿈, 겨울 눈꽃 아래 맹세했던 그들의 약속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아니… 거짓말이지? 서연아, 거짓말이라고 말해줘.”

지훈은 그녀의 얼굴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의 눈에는 절규가 가득했다. 서연은 지훈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저 핏기 없는 얼굴로, 눈물 범벅이 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 미소는 체념과 함께, 지훈을 향한 끝없는 사랑을 담고 있었다.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는 듯한 슬픈 미소였다.

“지훈아… 우리, 마지막으로 같이 눈을 맞자. 처음처럼…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처럼.”

그녀의 손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차가운 그녀의 손길이 지훈의 뜨거운 눈물을 식혔다. 그날의 약속,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은 이제 잔혹한 운명 앞에서 마지막 시험대에 오르게 되었다. 지훈은 그녀를 더 이상 놓을 수 없었다. 어떤 운명이라도, 어떤 절망이라도, 그는 그녀의 곁을 지킬 것이었다. 겨울 눈꽃은 여전히 하염없이 내렸다. 그들의 시간을,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온 세상에 고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