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찾아온 길고양이와의 대화 – 제196화

차창 밖으로 흐르는 먹구름은 지수의 마음속 풍경과 다르지 않았다. 며칠째 이어지는 눅눅한 공기와 무채색 하늘은 꼭 잊고 싶었던 오래된 상처를 다시 덧나게 하는 듯했다. 찻잔 속 커피는 이미 식어버린 지 오래였고, 지수는 그저 멍하니 창밖만 응시하고 있었다. 손에 쥐고 있던 펜은 언제 마지막으로 움직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날이었다.

그때였다. 창문 아래 화단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야옹…”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울음소리. 지수는 고개를 돌렸다. 빗방울이 드문드문 맺힌 유리창 너머로, 젖은 흙 위를 천천히 걸어오는 별이의 모습이 보였다. 여느 때처럼 당당한 발걸음이었지만, 오늘은 유독 털끝이 살짝 젖어 있고 눈빛에는 무언가 깊은 사연이 담겨 있는 듯했다. 지수는 문득 별이가 이 우울한 날씨 속에서 어디를 헤매다 왔을지 궁금해졌다.

지수는 스르륵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안으로 훅 불어왔지만, 지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별이는 기다렸다는 듯 좁은 창틀 위로 사뿐히 뛰어올랐다. 지수는 따뜻한 물을 데워 작은 그릇에 부어주었다. 별이는 언제나 그랬듯 허겁지겁 마시지 않았다. 대신, 먼저 지수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았다. 마치 지수의 내면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눈빛에 지수는 순간 아무것도 숨길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별이야, 너도 오늘은 기분이 별로구나?” 지수는 나직이 속삭였다. 별이는 대답 대신, 지수의 손목에 자기 머리를 살짝 비볐다. 그 작은 접촉이 얼어붙었던 지수의 마음에 아주 미세한 균열을 만들었다.

그러다 별이가 툭, 하고 무언가를 내려놓았다. 지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별이가 가져온 작은 물건으로 향했다. 그것은 닳고 닳은, 하지만 한때는 아름다운 빛을 발했을 법한 조개껍데기 단추였다. 진주처럼 은은한 광택을 잃었지만, 여전히 그 형태는 또렷했다. 동그란 모양에 가장자리가 살짝 파인, 아주 오래된 디자인이었다.

지수는 조심스럽게 단추를 집어 들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묘한 울림을 주었다. 그리고 그 순간, 마치 낡은 필름이 돌아가듯 지수의 머릿속에 오래된 기억의 한 조각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오래된 코트, 그리고 잃어버린 약속

십대 시절의 지수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할머니의 낡은 코트를 기억해냈다. 그 코트는 할머니가 젊은 시절 가장 아끼던 옷이었다고 했다. 무릎까지 오는 길이의 진한 회색 코트였는데, 유독 단추들이 반짝이는 조개껍데기로 되어 있어 지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할머니는 그 코트를 입고 소풍을 가거나, 아주 특별한 날에만 외출하셨다. 지수는 어린 마음에 할머니의 그 단추를 꼭 가지고 싶어 했다.

“할머니, 나중에 이 단추 나 주면 안 돼?” 어린 지수가 조르자 할머니는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 단추는 아주 특별한 단추란다. 이걸 달고 있으면, 할머니가 언제나 너와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거야. 네가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되었을 때 줄게.”

그 약속은 흐릿한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했다. 할머니는 몇 년 후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지수는 할머니의 코트와 단추는커녕 슬픔에 잠겨 제대로 된 작별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그 후로 할머니의 유품들은 정리되었고, 그 코트가 어떻게 되었는지 지수는 끝내 알 수 없었다. 그저 잊고 싶었을 뿐이었다. 잊으면 덜 아플 것이라고 믿었다.

그 후로 지수는 할머니의 단추를 떠올리는 것을 애써 피했다. 그것은 지수에게 잊어버린 소중한 사람과 지키지 못한 약속, 그리고 죄책감의 상징과도 같았다. 오늘날까지도, 지수의 마음 한구석에는 그 코트의 단추가 덩그러니 놓인 채, 쓸쓸하게 먼지만 쌓여가고 있었다.

별이의 침묵의 위로

지수는 손에 든 단추를 내려다보았다. 할머니의 코트에 달려 있던 단추와 놀랍도록 흡사했다. 물론, 이 단추가 그 단추일 리는 없었다. 하지만 별이가 가져온 이 작은 조약돌 같은 단추는 지수의 잊고 싶었던 기억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후회와 그리움이 뒤섞인 뜨거운 물방울이 지수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할머니…”
지수는 목이 메어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의 약속을 잊고,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조차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자책이 밀려왔다. 그때 별이가 지수의 무릎 위로 조용히 올라왔다. 작은 몸이 지수의 떨리는 허벅지에 기대어 따뜻한 온기를 전했다. 별이는 지수의 눈물을 핥아주지는 않았지만, 그저 묵묵히 그 곁을 지켰다.

별이의 커다란 눈동자는 지수의 눈물을 담아냈다. 언어 없이도 모든 것을 이해하는 듯한 그 깊은 시선은 지수의 마음을 관통했다. 마치 “울어도 괜찮아, 모든 기억은 소중한 거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지수는 별이를 품에 안았다. 별이의 부드러운 털과 고르지 못한 숨소리가 지수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수많은 ‘대화’를 나누었지만, 이렇게 깊고 직접적으로 지수의 내면을 건드린 적은 없었다. 별이는 단순히 길고양이가 아니었다. 지수에게 별이는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는 신비로운 존재, 잊고 싶었던 기억을 상기시키고, 때로는 가장 아픈 진실을 마주하게 하는 메신저였다.

눈물을 멈춘 지수는 손에 든 단추를 다시 보았다. 이 작은 단추는 할머니의 코트에 달린 단추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지수에게 할머니와의 기억, 그리고 그 약속을 다시 한번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는 노력 대신, 지금 이 순간 남아있는 소중한 것들을 더욱 아끼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고마워, 별이야.” 지수는 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이는 만족스러운 듯 골골송을 불렀다. 창밖의 먹구름은 여전히 짙었지만, 빗줄기는 한결 가늘어져 있었다. 지수의 마음속에 드리워졌던 오랜 그늘도 별이의 따뜻한 온기 덕분에 한 뼘 정도는 걷혀진 것 같았다.

지수는 단추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는 더 이상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의 기억을, 그리고 자신을. 별이는 지수에게 잊고 지냈던 용기를 선물한 셈이었다. 다음번 대화에서는 또 어떤 깨달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수는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며, 별이와 함께할 다음 순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