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 제199화

창밖은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밤새도록 내린 눈은 모든 소음을 집어삼키고 도시를 거대한 솜털 이불로 덮어놓았다. 아침 햇살이 눈부신 설원을 비추자, 수많은 눈꽃들이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며 제각기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서지원은 뜨거운 김이 오르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창가에 섰다. 또다시 겨울, 또다시 눈. 10년 전, 그 약속의 날도 이토록 눈부시게 하얀 눈이 내렸더랬다.

그때의 지원은 스무 살의 풋풋한 얼굴에 막연한 꿈과 희망을 품고 있었다. 강하준과 함께 쌓아 올린 눈사람 옆에서,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이 눈이 다 녹아도, 우리 마음은 변치 않을 거야. 함께라면 어떤 겨울도 따뜻할 테니까.”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불확실함도 없었고, 지원은 그 눈빛을 믿었다. 그 약속은 단순한 말 한마디가 아니었다. 척박한 현실 속에서 그녀가 붙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별빛이자, 어두운 길을 밝히는 등불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잔인하게도 그 순수했던 약속 위에 수많은 시련의 눈보라를 몰고 왔다. 하준은 몇 년 전 예기치 않은 사고로 긴 병원 생활을 해야 했고, 그 사이 그들의 꿈은 잠시 미뤄졌다. 그의 곁을 지키며 지원은 수없이 마음을 졸였고, 가끔은 약속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주저앉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하준의 흐릿한 의식 속에서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던 그 희미한 목소리가, 차가운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을 더듬던 그 간절함이 그녀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제 하준은 기적처럼 회복했지만, 아직 완전히 예전의 그로 돌아오지는 못했다. 물리적 상처는 아물었으나, 보이지 않는 마음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를 감싸고 있었다.

“지원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하준 씨는 강한 사람이야.”

뒤에서 들려오는 친구 수현의 목소리에 지원은 현실로 돌아왔다. 수현은 따뜻한 머플러를 목에 두르고 있었고, 그녀의 손에는 지원이 좋아하는 과일 타르트가 들려 있었다. 지원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알아. 그런데… 이 눈을 보면 자꾸 그날이 생각나서 그래. 하준이가 힘들어할 때마다, 내가 이 약속을 너무 붙잡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었어.”

수현은 지원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건 하준 씨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 약속은 너희 둘의 희망이었잖아. 그게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 못했을지도 몰라.” 수현의 말에 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그 약속은 단순히 미래를 기약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갈 힘이었다.

오후가 되자 눈발은 다시 거세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세상은 더욱 아련하고 몽환적인 풍경으로 변해갔다. 지원은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길게 이어지다가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또인가. 그는 요즘 자주 전화를 받지 않았다. 회복 후 시작한 새로운 프로젝트에 몰두하며 자신을 더욱 몰아붙이는 듯했다. 그녀는 그의 노력을 이해했지만, 동시에 그의 마음이 점점 더 멀어지는 듯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녀는 메시지를 남겼다. “하준아, 오늘 눈이 참 많이 와. 혹시 기억나? 10년 전 그날… 우리 약속. 잘 지내고 있지? 연락 기다릴게.”

메시지를 보내고 나자,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듯 허전했다. 그는 이 약속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그가 기억하더라도, 그 약속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믿을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생각들이 눈송이처럼 뒤엉켰다. 지난 10년 동안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녀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 감내해야 했던 외로움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연 그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니었을까.

밤이 깊어지고,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원은 거실 불을 끈 채 창밖의 설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그녀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는 강하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망설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지원아… 미안해, 늦어서.” 그의 목소리는 조금 지쳐 있었지만, 듣고 싶었던 그 온기가 실려 있었다.

“괜찮아. 많이 바빴어?” 지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하준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응, 많이 바빴어. 그리고…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했어.”

지원에게는 그 침묵이 마치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가 뭘 생각해 본다는 걸까. 우리 약속? 아니면… 나? 불안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녀는 침착하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마치 사형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마침내 하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지원아, 나 지금 너희 집 앞이야.”

지원이는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지금… 여기?” 그녀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눈밭에 덩그러니 서 있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코트 깃을 세우고, 한 손에는 작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하얀 눈꽃 송이들 사이에서, 그의 모습은 마치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왜 갑자기 온 것일까. 그녀의 메시지를 받고 결정을 내린 걸까. 이 늦은 밤에… 어떤 결정을.

지원이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지만, 그녀는 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하준의 얼굴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 슬퍼 보였지만, 동시에 굳건한 결심이 서려 있었다.

“하준아…” 그녀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불안감과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준은 그녀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눈으로 덮여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겨울에도 피어나는 강인한 흰색 꽃들이 아름답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원아, 미안해. 내가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너를 외롭게 했어. 하지만… 그건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시간이었어.”

그의 말에 지원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한 시간? 대체 무슨 약속? 그녀는 혼란스러웠지만, 동시에 그의 진심이 느껴지는 말에 귀 기울였다.

하준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진심이 담겨 있었다. “내가 사고 후 가장 절망했을 때, 너는 나에게 약속의 의미를 다시 일깨워줬어. 그래서 나는… 그 약속을 너에게 더 완벽하게 돌려주고 싶었어.”

그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우리 약속했지, 이 눈이 다 녹아도 변치 않겠다고. 그리고 함께라면 어떤 겨울도 따뜻할 거라고. 지원아, 나 아직 너에게 할 말이 많이 남았어. 이제 막 시작된 나의 겨울, 너와 함께라면 모든 상처를 녹여내고 새로운 봄을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아.”

눈송이가 그의 머리카락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지만, 그의 눈빛은 예전의 강하준처럼 뜨겁게 빛나고 있었다. 지원은 그제야 지난 몇 달간의 하준의 고뇌와 침묵이 단순한 회피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차가운 눈송이와 뒤섞여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은, 지난 시간의 모든 불안과 절망을 씻어내는 듯했다. 하준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부드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그의 품은, 여전히 포근하고 따뜻했다.

“하준아…” 지원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난… 난 네가 그 약속을 잊은 줄 알았어.”

하준은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어떻게 잊겠어. 내 삶의 모든 이유가 거기에 있는데.

눈은 여전히 펑펑 쏟아져 내렸다. 두 사람의 발밑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가고 있었다. 이토록 길었던 겨울 밤, 그들의 약속은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지는 듯했다. 하지만 하준이 말한 ‘더 완벽한 약속’은 아직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약속이 그들을 어떤 길로 이끌지, 지원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그의 품에서 그녀는 어떤 겨울도 두렵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새로운 장을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