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바람이 전해준 소식 – 제63화

오래된 툇마루에 앉아 지우는 봄볕을 쬐고 있었다. 해묵은 고목에서 막 움튼 연둣빛 새잎들이 눈부셨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세상이 기지개를 켜듯 활짝 피어나고 있었지만, 지우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시린 얼음덩이 같았다. 7년. 재현이 사라진 지 정확히 7년이 흐른 봄이었다. 매년 봄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그때마다 지우는 작은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빌었다. 그러나 매번 봄바람은 희망 대신 쓸쓸한 침묵만을 전해줄 뿐이었다.

마을 어귀에 드리운 안개는 아침마다 짙어졌다 걷히기를 반복했고, 그 속에서 지우는 사라진 동생의 흔적을 찾아 헤매는 꿈을 꾸곤 했다. 꿈에서 깨면 손에 잡히는 것은 차가운 이불뿐이었다. 어머니는 병세가 깊어지셨고, 누나 민아는 애써 밝은 척했지만, 그녀의 눈빛 속 깊은 곳에는 지우와 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재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기다림은 희미한 촛불 같아서, 한 번의 세찬 바람에도 꺼질 듯 위태로웠다.

그날 오후, 마을 장터는 평소보다 활기가 넘쳤다. 외지에서 온 약재상이 희귀한 약초를 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지우는 어머니의 약재를 사러 장터에 나섰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서 약재상에게 다가가려는 순간, 그녀의 시선은 한 늙은이가 들고 있던 조그만 나무 인형에 닿았다. 그것은 특별할 것 없는 인형이었다. 거칠게 깎인 나무 조각에 얼기설기 붙여진 끈, 한쪽 날개가 어설프게 부러진 모양새가 투박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묘하게도 재현이 어린 시절,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마다 손에 쥐고 다니던, 그리고 언젠가 스스로 깎아 만들겠다던 오리 인형과 너무나도 흡사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지우는 마치 홀린 듯 늙은이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 그 인형… 어디서 구하신 건가요?”
늙은이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며칠 전, 낯선 젊은이가 강가에 쓰러져 있기에 물과 음식을 주었더니, 사례로 건넨 것이네. 자신은 먼 길을 가야 한다며, 이 인형이 언젠가 길을 잃은 누군가를 찾아줄 것이라 하더군. 그 말에 이 늙은이도 마음이 짠하여 간직하고 있었지.”

‘길을 잃은 누군가를 찾아줄 인형…’ 그 말에 지우의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재현이 어릴 적, 잃어버린 물건을 찾을 때마다 “이 오리 인형이 길을 알려줄 거야”라고 중얼거리던 습관이 있었다. 그 인형은 재현의 손길이 분명했다. 똑같이 거친 나무결, 한쪽 날개가 살짝 부러진 모양새까지. 지우의 눈은 금세 뜨거워졌다. 눈물이 차올라 세상이 흐릿하게 번졌다. 7년의 세월 동안 메말랐던 눈물이 마침내 제 길을 찾은 듯 솟아났다.

“그 젊은이… 어떻게 생겼나요? 혹시… 왼쪽 뺨에 작은 흉터가 있었나요?” 지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너무 흔들려 제대로 된 질문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늙은이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랬던 것 같네. 흐릿해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상처 같은 흔적이 있었지. 그리고 말수가 적고 눈빛이 깊었어. 어딘가 상처받은 듯한…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듯한 강인함이 느껴지는 젊은이였네.”

재현이었다. 틀림없었다. 7년 전, 불의의 사고로 왼쪽 뺨에 작은 흉터가 생긴 재현이었다. 그는 살아있었다. 수없이 상상했던 재회는 이렇게 예고 없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봄바람이 불어와 지우의 뺨을 스쳤다. 차가운 눈물 자국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그 바람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오랜 침묵을 깨고 도착한, 마침내 지우에게 닿은 재현의 소식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고, 눈물이 앞을 가려 늙은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지우는 눈앞의 늙은이에게 감사의 말을 전할 새도 없이, 인형을 받아 들고 집으로 달려갔다.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이 사라진 듯,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툇마루에 앉아 바느질을 하던 민아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지우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지우는 말이 아닌 눈물로, 그리고 꽉 쥐고 있는 나무 인형으로 모든 것을 설명했다. 인형을 건네받은 민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인형의 투박한 나뭇결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한때 재현의 손끝에서 생명을 얻었을 나무 조각, 그 속에 담긴 사라진 동생의 흔적. 민아의 얼굴에서도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인형을 받아 들고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봇물처럼 흘러내렸다. “재현이… 재현이가 살아있었어….”

두 자매는 말없이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굳게 닫혀 있던 희망의 문이 비로소 열리는 순간이었다. 슬픔과 기쁨, 안도와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들이 그들을 휘감았다. 어쩌면 이 인형은 재현이 자신을 찾아달라는 마지막 신호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려왔다.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은 다시 살아있는 색깔로 채워지는 듯했다.

밤이 깊도록 두 자매는 잠들 수 없었다. 재현이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 어디로 향하는 길이었는지, 지금은 무사한지 수많은 의문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이었다. 봄바람이 전해준 이 작은 소식은, 메마른 대지에 내리는 단비처럼 두 자매의 마음을 적셨다. 이젠 막연한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찾아 나설 시간이었다. 지우는 굳게 다짐했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어떤 절망적인 상황이 펼쳐져도, 반드시 재현을 찾아내리라. 닫혔던 희망의 페이지가 다시 열리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속에서 꺼져가던 작은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