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며 창밖은 깊은 남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번지는 도시의 불빛은 쓸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빛들은 지우의 마음에 겹겹이 쌓인 그리움을 더욱 선명하게 비추는 듯했다. 며칠째 계속되던 흐릿한 날씨 탓인지, 아니면 가을이 깊어지는 소리 없는 재촉 때문인지, 지우의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미세한 파동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따뜻한 차를 한 잔 끓여 창가에 앉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온기가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나갔지만, 마음속 차가운 공기까지 데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때였다. 문득 따뜻한 온기가 발등에 닿았다. 깜짝 놀라 내려다보니, 언제 왔는지 솔이 지우의 발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가만히 지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솔의 눈은 언제나처럼 깊고 고요했다. 길고양이의 삶이 새겨놓은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눈동자에는 지우가 감추려 애쓰던 모든 감정들이 투명하게 비치는 것만 같았다. 지우는 조용히 무릎을 굽혀 솔의 등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손바닥에 전해지자, 지우의 얼어붙었던 마음에 작은 균열이 생기는 것을 느꼈다. 솔은 익숙한 듯 몸을 지우에게 더 바싹 기댔고, 이내 나직한 골골송을 시작했다.
“솔아, 너도 아는구나.”
지우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지우의 턱을 가볍게 비볐다. 그 작은 행동 하나에 지우는 잊고 있었던 오래된 기억의 조각들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비 오는 날 할머니의 부엌에서 맡았던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 할머니는 언제나 지우가 시무룩해 보이면 말없이 지우의 손을 잡아주곤 하셨다. 따뜻하고 주름진 손은 지우의 작은 손을 감싸 안았고, 그 온기만으로도 지우는 세상의 모든 시름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꼭 그랬었는데.”
솔의 골골송은 계속되고 있었다. 마치 ‘괜찮아, 괜찮아’ 하고 속삭이는 것처럼. 지우는 눈을 감았다. 할머니의 희미한 미소, 나지막한 목소리, 그리고 언제나 지우의 편이었던 그 큰 사랑이 솔의 작은 몸짓과 겹쳐졌다. 지우는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그리움의 무게를 다시금 느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지우는 그 빈자리를 감히 마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픔을 외면하는 것이 곧 잊는 것이라 착각하며 살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솔은 달랐다. 솔은 지우가 감추고 싶어 하는 슬픔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 주는 것 같았다. 그 어떤 판단도, 그 어떤 충고도 없이, 그저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솔은 지우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다. 길고양이인 솔에게는 어쩌면 더 많은 상처와 이별의 기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였을까. 솔의 침묵은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 더 깊은 공감으로 다가왔다.
지우는 솔을 품에 안았다. 솔의 부드러운 털에 얼굴을 묻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솔 특유의 흙냄새 같은 것이 느껴졌다. 지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솔은 아무 말 없이 지우의 품에서 가만히 있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솔은 다시 고개를 들어 지우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핥았다. 그 촉촉하고 따뜻한 감촉은 마치 어린 시절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우의 눈물을 닦아주던 기억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고마워, 솔아.”
지우는 솔의 작은 귀에 속삭였다. 솔은 지우의 말뜻을 알아듣는다는 듯, 가늘게 눈을 뜨며 지우의 품에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창밖을 보며 지우는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대화는 꼭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서로의 따뜻한 온기만으로도, 때로는 세상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슬픔과 기쁨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솔은 지우에게 그런 존재였다.
그날 밤, 지우는 솔을 품에 안고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지우는 할머니와 함께 따뜻한 봄날의 들판을 걷고 있었다.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며 지우의 손을 잡았고, 그 옆에는 솔이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함께 걷고 있었다. 지우의 마음속 켜켜이 쌓여있던 그리움의 응어리들은 솔과의 대화를 통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 길고양이 솔은 그렇게 지우의 삶에 예상치 못한 위안과 치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그들의 조용한 대화는, 밤이 깊어질수록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