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조용한 공기가 갤러리 복도를 감쌌다. 낮은 조도의 간접 조명 아래, 매끈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은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초여름 밤의 습기를 잊게 할 만큼 쾌적한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서은우는 눈앞의 전시 작품들을 스쳐 지나갔다. 색색의 추상화들이 벽에 걸려 있었지만, 은우의 눈은 그저 그림의 형태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의 내면은 고요한 호수 아래 감춰진 거대한 빙산처럼 묵직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받은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탄산 기포가 혀끝에서 터지며 미약한 알코올 향을 남겼다. 이 밤의 목적은 취기가 아니었다. 그저, 지루할 틈을 채워줄 도구일 뿐. 은우는 손에 든 얇은 초대장을 다시 확인했다. ‘강지혁 개인전 오프닝 리셉션’. 웃음이 나왔다. 웃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오랜 세월 침묵했던 복수의 서곡이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몇 걸음 더 옮기자, 리셉션 홀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저마다 우아한 복장으로 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드는 모습. 성공한 디자이너 강지혁의 인맥을 과시라도 하듯, 이름 있는 예술가들과 기업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강지혁.
    그때와 변함없이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얄팍한 우정에 은우의 전부를 걸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아니, 우정이라 믿었던 것은 그저 지혁의 탐욕스러운 그림자에 불과했다. 은우의 꿈, 열정, 그리고 아이디어. 모든 것을 강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집어삼켰고, 그것을 발판 삼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 환호와 찬사 속에서.

    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과거의 비릿한 기억을 억눌렀다.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밤을 견뎌냈다. 무너져 내린 모든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아, 더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냈다. 이제 그 칼날을 휘두를 때가 왔다.

    “어이, 은우 씨! 여기 계셨네요!”

    낯익은 목소리에 은우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명 갤러리의 큐레이터, 윤지민이었다. 그녀는 은우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지민 씨, 늦었네요.”
    “어휴, 죄송해요. 마지막까지 일이 좀 꼬여서. 그래도 서은우 작가님 보러 달려왔잖아요.”

    지민은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며 은우의 팔짱을 끼었다. 은우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풀고는 어깨를 툭 쳤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제 막 시작이니까.”
    “맞아요, 오늘 강지혁 작가님 작품 진짜 대박이에요. 특히, 저기 중앙에 있는 ‘환영의 숲’이요. 보셨어요?”

    지민의 시선이 홀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설치미술로 향했다. 숲의 형상을 본뜬 구조물 사이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은우의 눈에는 그것이 거대한 독버섯처럼 보였다. 저 작품은, 분명 은우가 수년 전, 지혁에게 보여줬던 미완의 스케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내면의 숲’이라 이름 붙였던 아이디어.

    “아직요.” 은우는 덤덤하게 말했다. “천천히 둘러보려고요.”
    “그러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강 작가님이 지금쯤 저쪽에서 사람들하고 인사 나누고 계실 거예요.”

    지민은 은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홀 중앙을 향해 나아가자, 지혁의 웃음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왔다. 심장이 차갑게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이 밤의 첫 번째 막이 오르고 있었다.

    “강 작가님! 이쪽이에요!”

    지민의 목소리가 터지자, 지혁의 시선이 은우에게로 향했다. 순간, 지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에 스친 것은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불쾌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가면을 썼다.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혹시…?”

    은우는 아무 말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초라했던 은우는 더 이상 없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져진 단단함,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의 비범함이 은우의 표정에서 흘러나왔다.

    “강지혁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에는 얼음처럼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다.

    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은우를 완전히 알아본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 서은우?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의 말 속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은우는 그 경계심을 읽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 불안감이 너를 갉아먹을 첫 번째 씨앗이 될 테니.

    “지민 씨 덕분에요.” 은우는 자연스럽게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민 씨가 이 전시회를 꼭 보러 오라고 권유하더군요. 특히 강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아, 네! 제가요! 서은우 작가님은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이시잖아요. 마침 지혁 작가님도 같은 계열이라 생각해서 소개시켜드렸는데,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셨네요?” 지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웃었다.

    지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은우와 지민 사이를 오갔다. ‘서은우 작가님’,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 이 단어들이 지혁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맴도는 것이 눈에 선했다.

    “서은우 작가라니…?” 지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은우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강 작가님처럼 말이죠.”

    지혁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경계심을 넘어선 의구심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은우는 천천히 샴페인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톡 쏘는 탄산이 다시 혀끝을 자극했다.

    “참, 강 작가님. 이번 ‘환영의 숲’ 말입니다.” 은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인상 깊더군요. 특히 그 구조와 빛의 활용이요. 제가 예전에 스케치했던 ‘내면의 숲’과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더욱이 놀랐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린 듯 흔들렸다. 주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은우와 지혁, 둘만의 세계가 된 것 같았다. 지민은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지혁은 말을 더듬었다.
    은우는 그의 말을 자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차가운 얼음처럼 지혁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아, 물론 제 스케치는 미숙한 습작이었죠. 강 작가님 덕분에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탄생한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언젠가… 강 작가님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아이디어가 강 작가님의 손을 거쳐 어떻게 피어날지… 정말 기대됩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했지만, 그 속에는 숨 막히는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함께 작업할 기회’, ‘내 아이디어’. 그 단어들이 지혁의 심장을 죄는 족쇄가 되어 울렸다.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들통난 자의 절망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화려한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은우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과거의 기억들을 보았다. 비열한 미소, 자신만만한 조롱, 그리고 무너져 내리던 은우의 세계.

    복수는 차가운 음식이라고 했던가. 은우는 이제 막 애피타이저를 내놓았을 뿐이었다. 본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갤러리의 화려한 조명 아래, 강지혁의 ‘환영의 숲’은 이제 그에게 진정한 ‘환영(幻影)’이자 피할 수 없는 지옥이 될 터였다.

    은우는 작게 속삭였다.
    “자, 이제 시작이야, 지혁아.”

    그 말은 오직 지혁의 귓가에만 맴도는, 감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속삭임이었다.
    지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식은땀을 흘리며 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홀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지혁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는 마치, 거대한 폭풍의 눈동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폭풍은, 은우의 손끝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사방은 핏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노을이 아니었다. 도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화염과 폭발이 빚어낸 지옥의 색채였다. 부서진 고층 빌딩의 뼈대가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하늘을 긁었고, 지면은 파헤쳐진 살점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진, 좌측 3도! 매복 확인!”

    통신망을 찢는 사령관 강혁의 다급한 목소리에 진은 반사적으로 [돌격병]의 조종간을 틀었다. ‘돌격병’이라 불리는 진의 기체는 제국군이 자랑하는 유려한 ‘제국 기사’ 메카와는 거리가 멀었다. 녹슨 장갑 곳곳에는 급조한 보강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엔진은 쿨링액이 끓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겨우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투박한 철덩어리는 자유를 향한 평민들의 열망을 담아 수많은 전투를 버텨낸 상징이었다.

    철컥거리는 구동음과 함께 기체가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빌딩 잔해 뒤편에서 튀어나온 제국 보병들이 휴대용 대전차 로켓을 조준하는 것이 보였다.

    “젠장!”

    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어깨에 장착된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우르르르릉!’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굵은 탄환들이 불을 뿜으며 쏟아져 나갔다. 콘크리트 파편과 비명이 뒤섞이며 제국 보병들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훌륭하다, 진! 그대로 전진. 목표는 제7 에너지 증폭기. 저곳만 마비시키면 이 구역의 제국군 통신망과 방어막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다운된다. 그때 본대가 돌입할 것이다.”

    강혁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이번 작전은 반란군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회였다. 제국 수도의 외곽을 코앞에 둔 이 최전선에서, 제대로 된 반격 한번 없이 계속 밀리기만 한다면 사기는 바닥을 칠 터였다.

    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조종간을 꽉 쥐었다. 이 작은 승리가, 언젠가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릴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티는 매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제7 증폭기는 저희가 접수합니다!”

    진의 옆으로는 동료들의 기체, ‘척후병’과 ‘수호자’가 바싹 붙어 이동하고 있었다. 척후병의 조종석에서는 동료 지혁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낡고 삐걱거리는 기체들 사이에서도 전우애만큼은 굳건했다.

    “젠장, 저놈의 제국 기사들은 지겹지도 않나!”

    수호자의 조종사, 미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그들의 전방, 무너진 고가도로 너머에서 은색으로 번쩍이는 제국 기사 두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기사는 매끄러운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레이저 포와 충격 도끼를 장비하고 있었다.

    “후퇴는 없다! 목표는 저 증폭기다!” 진은 단호하게 외쳤다. “지혁, 우회해서 증폭기 건물로 직접 침투할 수 있는지 확인해라! 미나, 나와 함께 저놈들을 막는다!”

    “알았어, 진! 하지만 이놈들, 지난번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데?” 미나가 엄살을 부리듯 투덜거렸다.

    “걱정 마, 미나! 우리가 더 단단하다!”

    진은 망설임 없이 [돌격병]을 제국 기사들을 향해 돌진시켰다. 낡은 엔진이 끓어오르듯 최고 출력을 뿜어냈다. 지면이 [돌격병]의 육중한 발걸음에 쿵, 쿵 울렸다.

    제국 기사 한 대가 팔에 장착된 레이저 포를 진에게 겨눴다. 순식간에 푸른빛 에너지 구체가 발사되었고, 진은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회피했다. 에너지 구체는 진의 뒤편에 있던 잔해 더미에 명중했고,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시에 개틀링 포를 다시 발사했다. ‘우르르르릉!’ 탄환이 제국 기사의 어깨 장갑에 명중했지만, 단단한 특수 합금 장갑에는 흠집만 낼 뿐이었다.

    “쳇, 소용없나!”

    그때, 미나의 [수호자]가 다른 제국 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수호자]는 두터운 방어력과 강력한 근접 무기, 거대한 강철 방패를 주무기로 삼는 기체였다. 미나는 방패를 앞세워 제국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며 거리를 좁혔다.

    “이거나 먹어라! 녹슬어 빠진 고철 덩어리!”

    미나가 조종간을 꺾자 [수호자]는 어깨에 장착된 대형 숄더 태클로 제국 기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콰아앙!’ 금속이 뒤틀리는 굉음과 함께 제국 기사가 휘청거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미나는 팔에 장착된 충격 도끼를 휘둘렀다. ‘챙그랑!’ 도끼가 제국 기사의 다리 장갑을 스쳤지만, 깊은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젠장, 단단하기는 드럽게 단단하네!” 미나가 다시 투덜거렸다.

    진은 제국 기사가 미나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제국 기사들은 이미 그들의 전술을 파악한 듯 움직였다. 한 대가 미나를 견제하는 동안, 다른 한 대가 빠르게 진의 경로를 차단하며 거대한 충격 도끼를 휘둘렀다.

    “위험해, 진!” 미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진은 기체를 뒤로 빼려 했지만, 제국 기사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콰직!’ [돌격병]의 팔 장갑에 충격 도끼가 그대로 박혔다. 억센 금속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조종석 내부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좌측 팔 구동계 이상! 출력 20% 감소!”

    진은 이를 악물었다. 통증이 없는 곳은 없었다. [돌격병]은 진의 몸과 같았다. 부상을 입은 기체를 움직이는 것은 마치 자신의 부상당한 팔다리를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진은 망가진 팔로 제국 기사의 도끼를 억지로 밀어내려 했다.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파크와 함께 [돌격병]이 거칠게 떨렸다. 그는 제국 기사의 육중한 몸체에 매달리듯 버텼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 이쪽은 침투 경로 확인! 제7 증폭기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 그때, 지혁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좋아, 지혁! 그대로 진행해! 미나, 나를 엄호하면서 증폭기 건물 입구 쪽으로 유인해!” 진은 재빨리 판단했다.

    “알았어, 진!” 미나의 [수호자]가 전열을 정비하며 다시 제국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방패를 이용한 견제와 충격 도끼로 경로를 막는 데 집중했다.

    진은 부상당한 [돌격병]을 이끌고 미나의 뒤를 따랐다. 제국 기사들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레이저 포탄이 연신 진의 주변에 작렬했고, 충격파가 [돌격병]을 뒤흔들었다.

    간신히 제7 증폭기 건물 입구에 다다른 순간, 지혁의 [척후병]이 건물 내부에서 연막탄을 터뜨리며 나타났다. 흰 연기가 순식간에 건물 입구를 뒤덮었고, 제국 기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진! 미나! 어서 들어와!” 지혁이 외쳤다.

    진은 망설임 없이 연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돌격병]의 육중한 몸체가 건물 입구를 간신히 통과했다. 뒤이어 미나의 [수호자]도 연막을 뚫고 들어왔다. 연막 뒤편에서는 제국 기사들의 분노에 찬 엔진 소리가 울렸다.

    건물 내부는 어둡고 거대한 기계 장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국군의 에너지 증폭기였다.

    “지혁, 시스템 해킹 시작해! 미나, 입구 봉쇄 준비! 제국 기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진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지혁은 [척후병]의 팔을 개조한 해킹 장비를 거대한 제어 패널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척후병]은 전투보다는 정찰과 전자전 능력이 특화된 기체였다.

    “시간이 얼마 없어, 진! 이 건물 방어 시스템이 곧 제국군에게 재활성화될 거야!” 지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 건물 입구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쾅!’ 제국 기사들이 건물을 뚫고 들어오려는 듯 입구를 공격하는 소리였다.

    “젠장! 생각보다 빠르잖아!” 미나가 방패를 들어 입구를 향해 겨누며 외쳤다. [수호자]의 팔에 장착된 용접기가 불꽃을 뿜으며 입구를 용접하기 시작했지만, 제국 기사들의 공격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진은 [돌격병]의 망가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른쪽 팔의 개틀링 포는 살아 있었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 지혁, 서둘러!”

    진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제7 증폭기 내부의 거대한 에너지 코어를 향해 개틀링 포를 조준했다. 코어를 직접 파괴할 수는 없었다. 증폭기에 과부하를 걸어 시스템을 다운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강혁 사령관님, 제7 증폭기 시스템 해킹 중! 잠시 후 모든 시스템 마비됩니다!” 진은 통신망에 대고 보고했다.

    “훌륭하다, 진! 그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다!” 강혁의 목소리에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우르르르릉!’ 진은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굵은 탄환들이 에너지 코어 주변의 제어반과 보조 시스템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스파크가 튀고, 전선이 끊어지며 ‘삐이익!’ 하는 고주파음이 건물 내부를 가득 채웠다.

    ‘콰아앙!’ 마침내 미나가 막고 있던 입구의 방어막이 뚫리고, 제국 기사 두 대가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의 눈동자처럼 빛나는 센서가 진과 지혁을 향해 번뜩였다.

    “진, 시스템 셧다운까지 10초! 9, 8…” 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국 기사 한 대가 진을 향해 레이저 포를 발사했다. 진은 기체를 굴려 겨우 피했지만, 레이저 포탄은 에너지 코어 바로 옆의 제어 패널을 명중시켰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코어의 빛이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젠장, 위험하다!”

    또 다른 제국 기사가 충격 도끼를 휘두르며 진에게 달려들었다. 진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돌격병]의 망가진 팔을 겨우 들어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진!” 미나가 절규하듯 외쳤다.

    ‘콰직!’ 충격 도끼가 [돌격병]의 어깨 장갑에 그대로 박혔다. 조종석이 심하게 흔들렸고, 진의 몸이 충격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1초! 셧다운!”

    지혁의 외침과 동시에, 건물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거대한 에너지 코어의 빛이 폭주하듯 밝아졌다가, ‘쉬이이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모든 빛을 잃었다. 모든 기계음이 멈추고, 건물은 암흑과 정적에 휩싸였다.

    성공이었다. 제7 에너지 증폭기가 마비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건물 밖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땅이 울리고, 천장의 잔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르르르릉….’

    어둠 속에서, 진은 겨우 고개를 들어 건물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마비된 증폭기 너머, 핏빛 노을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제국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산을 깎아 만든 듯한 육중한 실루엣이었다. 엄청난 압도감이 진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건… 대체…?” 미나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떨렸다.

    그 거대한 존재의 어깨에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섬뜩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제국 기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제7 증폭기는 마비되었지만, 그들은 이미 새로운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력하며, 절망적인 존재와…

    진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막 작은 승리를 쟁취했다고 생각했지만, 제국은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절망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낡고 거친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시온은, 콧등에 걸린 바이저 너머로 탁한 풍경을 응시했다. 거대한 먼지 폭풍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크로폴리스 행성의 대기는 아직도 붉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폐쇄된 격납고 안인데도, 흙먼지는 끊임없이 바닥을 굴러다니며 웅장했던 과거의 흔적들을 무의미하게 쓸고 있었다.

    “이번에도 헛걸음인가, 비트.”

    시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옆에서 붕붕거리는 드론에게 전달됐다. ‘비트’라는 이름의 소형 정찰 드론은 푸른빛 센서로 주변을 스캔하며 ‘삐릭, 삐리릭’ 하는 기계음을 냈다. 마치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시온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들의 무덤이었다. 한때는 은하계를 가로지르던 최첨단 운송선들이었고, 전투함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녹슨 고철 덩어리가 되어, 서로 기대거나 무너져 내린 채로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안은 어둠과 미세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끈적한 유기물로 가득했다. 바로 이곳이 그들의 삶터이자, 생존을 위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코멧호’의 워프 드라이브에 장착될 동력 코어. 며칠 전, 알 수 없는 전자파 교란으로 코멧호의 핵심 부품이 손상됐다. 이대로는 아크로폴리스 성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죽어가는 행성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수리해야 했다.

    “대상 함선, A-712 화물 수송선. 마지막으로 부품이 확인된 곳은 격납고 델타-7 구역입니다. 하지만… 구조물 붕괴로 진입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비트의 합성 음성이 이어졌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스캐너도 이미 같은 정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델타-7. 그곳은 한때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번화했던 우주항이었지만, 지금은 핵전쟁의 상흔과 시간의 풍화가 뒤섞여 거대한 미궁이 되어 있었다. 방사능 수치도 다른 곳보다 훨씬 높았다.

    “진입이 어렵다는 건, 아직 다른 놈들이 손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해. 가자.”

    그녀는 다 허물어진 화물선의 잔해를 타고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발 밑에서는 녹슨 철판이 삐걱거렸고, 흩어진 잔해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헬멧 안에서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방호복 안은 습기와 땀으로 축축했다. 고통스러운 등반이었지만, 그녀는 익숙한 듯 묵묵히 몸을 움직였다.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마침내, 거대한 함선 잔해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시온의 눈앞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함선 내부가 드러났다. 아마 핵폭격 당시의 충격으로 생긴 균열일 것이다. 붉고 탁한 먼지 너머로, 함선 내부의 어둠이 끊임없이 그녀를 손짓했다.

    “내부 방사능 수치, 외부보다 30% 높습니다. 진입 시 주의 필요.” 비트가 경고했다.

    “알아. 다른 선택지는 없어.”

    시온은 허리춤에 매달린 밧줄을 꺼내 단단히 고정시킨 후, 거대한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밧줄은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그녀의 발이 무언가에 닿았다. 함선 내부의 바닥이었다.

    사방은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시온은 헬멧에 부착된 라이트를 켰다. 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철골 구조물과 정체불명의 잔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서는 거대한 전선 다발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었고, 바닥은 먼지와 부서진 패널들로 뒤덮여 있었다. 썩은 쇠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스캐너를 켜서 동력 코어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델타-7 중앙 제어실’이라는 표시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쪽이야, 비트.”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발밑에서는 부서진 유리 조각이나 금속 파편들이 ‘바스락,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 넓은 함선 안에서, 자신들 외에 다른 존재가 있다면? 그 생각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권총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오랜 시간 동안 폐허에서 살아남으면서 터득한 본능적인 경계심이었다.

    “삑! 미확인 생체 신호 감지. 거리 50미터. 이동 속도 느림.”

    비트의 경고음이 낮게 울렸다. 시온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미확인 생체 신호. 이 함선에는 어떤 것들이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돌연변이 생명체, 혹은 그녀처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다른 생존자. 어느 쪽이든 위험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라이트를 끄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웅크린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철컥, 철컥. 느릿하고 불규칙적인 금속 마찰음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듯했다. 공포는 아니었다. 그저 피곤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또 싸워야 하나.

    “삑! 신호, 정지. 은폐 상태로 전환.”

    비트의 음성과 함께 주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시온은 숨을 죽였다. 그녀 역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희미한 발소리가 멎은 곳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고 둔탁한 몸집이었다. 마치 여러 개의 금속 조각들을 덧붙여놓은 듯한 형태. 그것은 이빨이 돋아난 거대한 금속 턱을 가지고 있었고, 곳곳에서 파란색 섬광이 번쩍였다. 고대의 보안 드로이드였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온몸에 뒤엉킨 녹과 이끼,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센서 등은 그 드로이드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파괴된 시스템 속에서 생존 본능만을 가지고 무의미하게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온은 가만히 기다렸다. 불규칙한 빛을 내뿜는 드로이드는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잠시 정지했다가, 이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드로이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다시 라이트를 켰다.

    “젠장, 이런 낡은 놈들까지 살아남아서….” 그녀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델타-7 중앙 제어실은 이 폐허의 심장부나 다름없었다. 긴 복도를 지나고, 무너진 통로를 우회하고, 때로는 환풍구를 기어서 통과했다. 마침내 그녀의 스캐너가 목표 지점을 가리켰다. 거대한 철문이 부서져 반쯤 열려 있었다. 문 주변에는 불에 탄 흔적과 함께 알 수 없는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제어실은 폭격의 직격탄을 맞은 듯 처참했다. 모든 것이 녹고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익숙한 형태의 동력 코어 하나를 발견했다.

    거대한 제어판 한가운데, 찌그러진 보호 케이스 안에 그것이 박혀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손상되지 않은 채로.

    “찾았다.” 시온의 목소리에 희미한 안도감이 섞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력 코어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멀티 툴을 꺼내 부서진 패널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드르륵, 쨍그랑’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부품들은 단단히 녹슬어 있었고, 떼어낼 때마다 사방으로 먼지가 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코멧호의 워프 드라이브를 고치지 못하면, 이 행성에서 영원히 썩어 죽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이 그녀의 심장을 채찍질했다.

    “삑! 경고! 외부 방사능 수치 급격히 상승 중! 함선 구조물 붕괴 위험 감지!” 비트의 경고음이 전보다 훨씬 다급하게 울렸다.

    “젠장!”

    시온은 땀으로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며 마지막 연결 부위를 끊어냈다. ‘파지직!’ 하는 섬광과 함께 동력 코어가 케이스에서 분리됐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것을 품에 안았다. 무겁고 차가운 금속 덩어리.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생명줄이었다.

    “서둘러, 비트! 탈출 경로를 탐색해!”

    “확인! 가장 가까운 탈출구까지 200미터!”

    시온은 동력 코어를 단단히 쥔 채 제어실을 빠져나왔다. 진동이 느껴졌다. 함선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복도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고, 천장에서 거대한 금속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복도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달렸다. 방호복의 무거움은 그녀의 속도를 늦췄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의 몸을 밀어붙였다. 발밑의 잔해들이 무너져 내렸고, 그녀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마다 비트가 날아와 그녀의 어깨를 밀며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쪽입니다! 점프!”

    비트의 지시와 함께 시온은 무너진 바닥의 틈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녀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맞은편 구조물을 붙잡았다. 팔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끌어올렸다. 뒤편에서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함선 내부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격납고 외부로 몸을 던졌을 때, 아크로폴리스의 붉은 먼지 속에서 코멧호의 희미한 불빛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코멧호의 출입구로 향했다.

    함선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헬멧을 벗어던졌다. 땀과 먼지로 뒤덮인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이 빌어먹을 행성에서… 겨우 살아남았네.”

    그녀는 동력 코어를 조종석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걸 제대로 장착하고, 워프 드라이브를 재가동해야 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성공이었다.

    “비트, 주변 통신 채널에 혹시 다른 신호는 없어? 아주 희미한 것이라도.” 시온은 혹시 모를 희망을 찾듯 물었다. 이곳 아크로폴리스는 죽은 행성이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호가 그녀의 잠 못 드는 밤을 흔들곤 했다.

    비트는 조용히 푸른 센서를 깜빡이며 통신 채널을 스캔했다. 잠시 후, ‘삐릭-‘ 하는 작고 희미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아주 약해서, 노이즈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신호였다.

    “미약한 신호 감지. 발신지 불명. 반복되는 코드 패턴 분석 중.” 비트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지만, 시온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코드 패턴? 어떤 코드인데?”

    “분석 중입니다… 코드 패턴: 조난 신호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매우 오래된 형식입니다.”

    시온은 멍하니 우주 저편을 응시했다. 조난 신호. 아주 오래된.
    이 망가진 성계의 어딘가에, 자신들 외의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더 큰 절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신호였다. 그녀의 눈에 피로와 함께 새로운 결의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워프 드라이브 수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저 신호를 따라간다.”

    코멧호의 엔진은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황폐해진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여정은, 이제 겨우 시작될 참이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조용한 공기가 갤러리 복도를 감쌌다. 낮은 조도의 간접 조명 아래, 매끈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은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초여름 밤의 습기를 잊게 할 만큼 쾌적한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서은우는 눈앞의 전시 작품들을 스쳐 지나갔다. 색색의 추상화들이 벽에 걸려 있었지만, 은우의 눈은 그저 그림의 형태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의 내면은 고요한 호수 아래 감춰진 거대한 빙산처럼 묵직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받은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탄산 기포가 혀끝에서 터지며 미약한 알코올 향을 남겼다. 이 밤의 목적은 취기가 아니었다. 그저, 지루할 틈을 채워줄 도구일 뿐. 은우는 손에 든 얇은 초대장을 다시 확인했다. ‘강지혁 개인전 오프닝 리셉션’. 웃음이 나왔다. 웃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오랜 세월 침묵했던 복수의 서곡이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몇 걸음 더 옮기자, 리셉션 홀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저마다 우아한 복장으로 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드는 모습. 성공한 디자이너 강지혁의 인맥을 과시라도 하듯, 이름 있는 예술가들과 기업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강지혁.
    그때와 변함없이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얄팍한 우정에 은우의 전부를 걸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아니, 우정이라 믿었던 것은 그저 지혁의 탐욕스러운 그림자에 불과했다. 은우의 꿈, 열정, 그리고 아이디어. 모든 것을 강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집어삼켰고, 그것을 발판 삼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 환호와 찬사 속에서.

    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과거의 비릿한 기억을 억눌렀다.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밤을 견뎌냈다. 무너져 내린 모든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아, 더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냈다. 이제 그 칼날을 휘두를 때가 왔다.

    “어이, 은우 씨! 여기 계셨네요!”

    낯익은 목소리에 은우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명 갤러리의 큐레이터, 윤지민이었다. 그녀는 은우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지민 씨, 늦었네요.”
    “어휴, 죄송해요. 마지막까지 일이 좀 꼬여서. 그래도 서은우 작가님 보러 달려왔잖아요.”

    지민은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며 은우의 팔짱을 끼었다. 은우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풀고는 어깨를 툭 쳤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제 막 시작이니까.”
    “맞아요, 오늘 강지혁 작가님 작품 진짜 대박이에요. 특히, 저기 중앙에 있는 ‘환영의 숲’이요. 보셨어요?”

    지민의 시선이 홀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설치미술로 향했다. 숲의 형상을 본뜬 구조물 사이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은우의 눈에는 그것이 거대한 독버섯처럼 보였다. 저 작품은, 분명 은우가 수년 전, 지혁에게 보여줬던 미완의 스케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내면의 숲’이라 이름 붙였던 아이디어.

    “아직요.” 은우는 덤덤하게 말했다. “천천히 둘러보려고요.”
    “그러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강 작가님이 지금쯤 저쪽에서 사람들하고 인사 나누고 계실 거예요.”

    지민은 은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홀 중앙을 향해 나아가자, 지혁의 웃음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왔다. 심장이 차갑게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이 밤의 첫 번째 막이 오르고 있었다.

    “강 작가님! 이쪽이에요!”

    지민의 목소리가 터지자, 지혁의 시선이 은우에게로 향했다. 순간, 지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에 스친 것은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불쾌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가면을 썼다.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혹시…?”

    은우는 아무 말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초라했던 은우는 더 이상 없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져진 단단함,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의 비범함이 은우의 표정에서 흘러나왔다.

    “강지혁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에는 얼음처럼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다.

    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은우를 완전히 알아본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 서은우?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의 말 속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은우는 그 경계심을 읽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 불안감이 너를 갉아먹을 첫 번째 씨앗이 될 테니.

    “지민 씨 덕분에요.” 은우는 자연스럽게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민 씨가 이 전시회를 꼭 보러 오라고 권유하더군요. 특히 강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아, 네! 제가요! 서은우 작가님은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이시잖아요. 마침 지혁 작가님도 같은 계열이라 생각해서 소개시켜드렸는데,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셨네요?” 지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웃었다.

    지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은우와 지민 사이를 오갔다. ‘서은우 작가님’,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 이 단어들이 지혁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맴도는 것이 눈에 선했다.

    “서은우 작가라니…?” 지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은우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강 작가님처럼 말이죠.”

    지혁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경계심을 넘어선 의구심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은우는 천천히 샴페인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톡 쏘는 탄산이 다시 혀끝을 자극했다.

    “참, 강 작가님. 이번 ‘환영의 숲’ 말입니다.” 은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인상 깊더군요. 특히 그 구조와 빛의 활용이요. 제가 예전에 스케치했던 ‘내면의 숲’과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더욱이 놀랐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린 듯 흔들렸다. 주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은우와 지혁, 둘만의 세계가 된 것 같았다. 지민은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지혁은 말을 더듬었다.
    은우는 그의 말을 자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차가운 얼음처럼 지혁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아, 물론 제 스케치는 미숙한 습작이었죠. 강 작가님 덕분에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탄생한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언젠가… 강 작가님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아이디어가 강 작가님의 손을 거쳐 어떻게 피어날지… 정말 기대됩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했지만, 그 속에는 숨 막히는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함께 작업할 기회’, ‘내 아이디어’. 그 단어들이 지혁의 심장을 죄는 족쇄가 되어 울렸다.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들통난 자의 절망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화려한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은우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과거의 기억들을 보았다. 비열한 미소, 자신만만한 조롱, 그리고 무너져 내리던 은우의 세계.

    복수는 차가운 음식이라고 했던가. 은우는 이제 막 애피타이저를 내놓았을 뿐이었다. 본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갤러리의 화려한 조명 아래, 강지혁의 ‘환영의 숲’은 이제 그에게 진정한 ‘환영(幻影)’이자 피할 수 없는 지옥이 될 터였다.

    은우는 작게 속삭였다.
    “자, 이제 시작이야, 지혁아.”

    그 말은 오직 지혁의 귓가에만 맴도는, 감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속삭임이었다.
    지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식은땀을 흘리며 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홀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지혁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는 마치, 거대한 폭풍의 눈동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폭풍은, 은우의 손끝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 던전 탐험 상세한 애니메이션 대본 및 스토리보드

    # 애니메이션 대본 & 스토리보드

    ## **제목: 잊혀진 심연의 서곡 (Prelude to the Forgotten Abyss)**

    **장르:** 던전 탐험, 고대 유적 미스터리, 판타지

    ### **장면 1: 심연으로의 진입**

    **배경:** 아득히 깊은 지하 동굴, 인간의 발길이 닿지 않은 듯한 미지의 공간. 눅눅한 공기와 흙냄새가 가득하다.

    **음악:** 낮고 웅장하며 신비로운 분위기의 오케스트라 사운드. 고대 문명의 신비로움을 표현하는 동양적 선율이 가미됨.

    **쇼트 1**
    **장면:** 짙은 어둠 속에서 스포트라이트처럼 강렬한 손전등 빛이 흔들린다. 렌즈 플레어가 강하게 번진다.
    **액션:** 거대한 종유석과 석순으로 가득한 지하 동굴의 단면이 드러난다. 카메라가 빠르게 움직이며 공간의 규모를 보여준다.
    **음향:** (SE) 촉촉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희미한 바람 소리.

    **쇼트 2**
    **장면:** 좁고 불안정한 암벽 길을 조심스럽게 내려가는 세 사람의 모습. 그들의 실루엣이 손전등 불빛에 길게 드리운다.
    **액션:**
    * **카인 (Kain):**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 낡았지만 잘 관리된 가죽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묵직한 탐사용 도끼를, 다른 손으로는 로프를 잡고 앞장선다. 그의 표정은 노련함과 경계심이 섞여 있다.
    * **엘리시아 (Elysia):** 날렵한 몸매의 젊은 여성. 가벼운 천 재질의 탐사용 복장을 입고, 허리춤에는 단검과 몇 개의 주머니가 달려있다. 눈빛은 호기심과 결의로 빛난다. 그녀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도, 주변을 탐색하듯 두리번거린다.
    * **리온 (Rion):** 안경을 쓴 마른 체격의 젊은 남성. 그의 등에는 고대 언어 서적과 탐사 도구가 가득한 배낭이 메어져 있다. 손에는 마력이 깃든듯한 수정 램프를 들고 주변을 비춘다. 그의 표정은 약간의 피로와 지적 흥분으로 물들어 있다.
    **음향:** (SE)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는 소리, 로프가 암벽에 스치는 소리. 발소리.

    **쇼트 3**
    **장면:** 엘리시아의 얼굴 클로즈업. 땀방울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지만, 그녀의 눈은 반짝인다.
    **대사:**
    **엘리시아:** (나직하게, 살짝 흥분된 목소리) “드디어… 여기까지 온 건가. 이 정도 깊이의 유적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음향:** (BGM) 신비로운 분위기 유지.

    **쇼트 4**
    **장면:** 카인이 잠시 멈춰 서서 손짓으로 일행을 세운다. 그는 탐사용 도끼의 날카로운 끝으로 동굴 바닥의 흙을 긁어낸다.
    **액션:** 흙 속에 묻혀 있던 거친 석재 조각이 드러난다. 그것은 자연적인 돌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흔적을 가지고 있다.
    **대사:**
    **카인:** (낮고 굵은 목소리) “멈춰. 이 주변부터는 땅의 성질이 바뀌었어. 일반적인 동굴이 아니야.”
    **음향:** (SE) 도끼가 돌을 긁는 소리, 작은 돌 부스러지는 소리.

    **쇼트 5**
    **장면:** 리온이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땅을 살핀다. 그의 수정 램프에서 푸른빛이 희미하게 흘러나와 주변을 비춘다.
    **액션:** 그는 흙을 헤치고 드러난 석재를 만져본다. 이내 그의 얼굴에 놀라움과 확신이 스친다.
    **대사:**
    **리온:** (약간 떨리는 목소리) “확실해요, 카인 씨. 이건… 고대 건설 기술의 흔적입니다. 이 정도 깊이에 이런 거대한 구조물이 존재했다니…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음향:** (SE) 리온이 흙을 만지는 소리. (BGM) 긴장감 서서히 고조.

    **쇼트 6**
    **장면:** 카메라가 위로 팬(pan)하며 동굴 천장을 비춘다. 천장은 거대한 돔 형태로, 인공적으로 다듬어진 듯한 흔적이 어렴풋이 보인다. 먼지 쌓인 틈새로 희미한 빛줄기가 내려온다.
    **액션:** 먼지 입자들이 빛줄기 속에서 춤추듯 떠다닌다.
    **음향:** (SE) 조용히 떨어지는 먼지 소리.

    **쇼트 7**
    **장면:** 엘리시아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깊은 숨을 내쉰다. 그녀의 눈빛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하다.
    **대사:**
    **엘리시아:** (나지막이) “…이 모든 게, 땅속에 묻혀 있었다니.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잊혀진 걸까.”
    **음향:** (BGM) 신비로움과 경외감 극대화.

    ### **장면 2: 첫 번째 비밀의 문**

    **배경:** 고대 유적의 초입. 거대한 석재 통로가 모습을 드러낸다. 통로의 벽면에는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음악:** 이전보다 더 웅장하고 압도적인, 동시에 어딘가 음울한 분위기의 음악. 고대 문명의 위대함과 그들의 멸망을 동시에 암시한다.

    **쇼트 8**
    **장면:** 팀이 넓은 광장 같은 공간으로 들어선다. 그들의 손전등 빛이 닿는 곳마다 엄청난 크기의 석재 기둥과 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액션:** 먼지가 자욱하고 공기는 무겁다. 발소리가 텅 빈 공간에 메아리친다.
    **음향:** (SE) 발소리 메아리치는 소리, (BGM) 공간의 압도감을 표현하는 웅장한 사운드.

    **쇼트 9**
    **장면:** 엘리시아의 시점으로 카메라가 천천히 움직인다. 벽면에 새겨진 정교하지만 기괴한 문양들을 따라간다. 문양들은 기하학적인 도형과 알 수 없는 생명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액션:** 문양 중 일부는 희미하게 푸른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음향:** (SE) 벽면에 손가락이 스치는 듯한 희미한 마찰음, (BGM) 미스터리한 분위기 증폭.

    **쇼트 10**
    **장면:** 리온이 문양들 가까이 다가가 손으로 더듬는다. 그의 안경 너머 눈빛은 빛을 발한다.
    **대사:**
    **리온:** (숨을 헐떡이며) “이건… 단순히 장식이 아니에요. 이 문양들은… 고대 심연 종족의 언어이자, 그들의 마법 문양입니다. 멸망한 줄로만 알았던, 전설 속 존재들의 유적이었어!”
    **음향:** (SE) 리온의 거친 숨소리, (BGM) 놀라움과 긴장감.

    **쇼트 11**
    **장면:** 카인이 주변을 경계하며 사방을 살핀다. 그의 도끼가 언제든 휘둘러질 준비가 된 듯하다.
    **대사:**
    **카인:** “심연 종족… 시대를 앞서간 기술과 미쳐버린 주술을 다뤘다는 그들 말인가? 듣던 대로 불길한 기운이군.”
    **음향:** (BGM) 위협적인 분위기 조성.

    **쇼트 12**
    **장면:** 카메라가 천천히 이동하며 광장의 끝을 비춘다. 그곳에는 압도적인 크기의 거대한 석문이 서 있다. 문은 하나의 바위산처럼 굳건하며, 틈새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게 닫혀 있다.
    **액션:** 문 한가운데에는 섬뜩할 정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발광하는 룬 문양이 새겨져 있다. 룬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맥동한다.
    **음향:** (SE) 희미한 에너지 흐름 소리, (BGM) 경외감과 함께 고조되는 긴장감.

    **쇼트 13**
    **장면:** 세 사람의 얼굴이 차례로 클로즈업된다.
    * **엘리시아:** 경외감과 함께 문에 이끌리는 듯한 표정.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문을 향해 뻗어진다.
    * **리온:** 지적 호기심과 전율로 가득 찬 표정. 눈동자가 룬 문양을 분석하듯 움직인다.
    * **카인:** 경계심과 의심, 그리고 이 거대한 문이 품고 있을 미지에 대한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
    **대사:**
    **엘리시아:**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저 문… 무언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리온:** (흥분하여) “이건 단순한 문이 아니야! 봉인이야!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동시에 안의 것을 완벽하게 숨겨버리는 고도의 마법 봉인!”
    **카인:** (단호하게)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엘리시아. 저것은 단순한 문이 아닐뿐더러,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을 품고 있을 수도 있어.”
    **음향:** (BGM) 절정으로 치닫는 긴장감.

    ### **장면 3: 심연의 울림**

    **배경:** 봉인된 석문 앞. 발광하는 룬 문양이 공간을 신비로운 푸른빛으로 물들인다.

    **음악:** 웅장함 속에 섬뜩함이 스며든다. 고대의 마법이 깨어나는 듯한 효과음과 함께 점차 고조된다.

    **쇼트 14**
    **장면:** 리온이 조심스럽게 석문 가까이 다가간다. 그는 손에 들린 수정 램프를 룬 문양에 가져다 댄다.
    **액션:** 램프의 푸른빛과 룬 문양의 빛이 반응하듯 일렁인다. 리온의 손이 문양 위를 스치자, 섬광과 함께 문양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난다.
    **음향:** (SE) 지직거리는 마력의 흐름 소리, 공기가 진동하는 소리. (BGM) 긴장감 최고조.

    **쇼트 15**
    **장면:** 룬 문양들이 갑자기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양들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서로 연결되고 조합된다.
    **액션:** 문 전체가 거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며 흔들린다. 주변의 먼지가 흩날리고, 작은 돌 부스러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대사:**
    **카인:** (급하게 소리친다) “리온! 위험해! 물러서!”
    **음향:** (SE) 석문이 굉음을 내며 진동하는 소리, 돌 부스러지는 소리.

    **쇼트 16**
    **장면:** 엘리시아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카인을 막으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여전히 룬 문양에 고정되어 있다. 그녀의 눈빛이 푸른빛으로 물든다.
    **액션:** 엘리시아의 몸에서 희미하게 푸른 기운이 피어오르는 듯하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문신 같은 무늬가 잠시 빛을 발한다.
    **대사:**
    **엘리시아:** (멍하니) “…열려…야 해…”
    **음향:** (BGM) 엘리시아의 내재된 힘을 암시하는 신비로운 선율이 순간적으로 강조된다.

    **쇼트 17**
    **장면:** 룬 문양들이 하나의 거대한 심장처럼 박동한다. 그 박동에 맞춰 석문 전체가 서서히, 엄청난 마찰음을 내며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액션:** 문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드러난다. 어둠 속에서 희미한 빛이 깜빡인다.
    **음향:** (SE) 거대한 석문이 천천히 열리는 끔찍한 마찰음, 흙과 돌이 부서지는 소리. (BGM)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쇼트 18**
    **장면:** 문이 완전히 열리자, 안쪽에서 거대한 공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곳은 어둠 속에 잠겨 있지만, 멀리 떨어진 중앙에서 푸른빛의 거대한 수정 기둥이 솟아올라 희미하게 빛나고 있다.
    **액션:** 수정 기둥은 고대 마력의 심장처럼 규칙적으로 맥동하며, 그 빛이 유적 전체를 감싸는 듯하다. 그 빛을 따라 정교하게 조각된 알 수 없는 기계 장치들이 어렴풋이 보인다.
    **음향:** (SE) 문이 완전히 열리는 굉음, (SE) 수정 기둥에서 나는 나직한 공명음. (BGM) 경외감과 미스터리가 폭발하는 웅장한 사운드.

    **쇼트 19**
    **장면:** 세 사람이 멍하니 열린 문 안쪽을 바라본다.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움, 두려움,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뒤섞여 있다.
    * **카인:** 한 손으로는 도끼를 굳게 쥐고, 다른 손으로는 엘리시아를 본능적으로 보호하려는 듯 그녀의 어깨를 잡는다. 그의 눈빛은 경계심으로 가득하다.
    * **리온:** 입을 다물지 못하고 경이로운 광경에 압도된 표정. 안경이 살짝 미끄러져 내려간다.
    * **엘리시아:** 푸른빛으로 물든 그녀의 눈은 미지의 공간을 응시한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을 더듬는 듯하다.
    **대사:**
    **카인:** (나직하게, 경외감과 불안감이 섞인 목소리) “이런… 이런 것이 존재했을 줄이야…”
    **리온:**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잊혀진… 고대 문명의 심장…! 우리가 그 비밀을… 열었다!”
    **엘리시아:** (나직하게 읊조리듯) “…여기가… 시작이었어…”
    **음향:** (BGM) 압도적인 음악이 절정에 달하며, 수정 기둥의 공명음이 점점 더 강해진다.

    **쇼트 20**
    **장면:** 카메라가 수정 기둥을 향해 빠르게 줌인한다. 기둥 표면에 알 수 없는 문양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액션:** 수정 기둥의 빛이 더욱 강해지며, 유적 전체에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음향:** (BGM) 급격히 고조된 후, 뚝 끊기듯 멈춘다. (SE) 수정 기둥에서 나는 거대한 ‘쿵’하는 박동 소리 하나만 남는다.

    **END SCENE**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낡고 거친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시온은, 콧등에 걸린 바이저 너머로 탁한 풍경을 응시했다. 거대한 먼지 폭풍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크로폴리스 행성의 대기는 아직도 붉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폐쇄된 격납고 안인데도, 흙먼지는 끊임없이 바닥을 굴러다니며 웅장했던 과거의 흔적들을 무의미하게 쓸고 있었다.

    “이번에도 헛걸음인가, 비트.”

    시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옆에서 붕붕거리는 드론에게 전달됐다. ‘비트’라는 이름의 소형 정찰 드론은 푸른빛 센서로 주변을 스캔하며 ‘삐릭, 삐리릭’ 하는 기계음을 냈다. 마치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시온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들의 무덤이었다. 한때는 은하계를 가로지르던 최첨단 운송선들이었고, 전투함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녹슨 고철 덩어리가 되어, 서로 기대거나 무너져 내린 채로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안은 어둠과 미세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끈적한 유기물로 가득했다. 바로 이곳이 그들의 삶터이자, 생존을 위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코멧호’의 워프 드라이브에 장착될 동력 코어. 며칠 전, 알 수 없는 전자파 교란으로 코멧호의 핵심 부품이 손상됐다. 이대로는 아크로폴리스 성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죽어가는 행성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수리해야 했다.

    “대상 함선, A-712 화물 수송선. 마지막으로 부품이 확인된 곳은 격납고 델타-7 구역입니다. 하지만… 구조물 붕괴로 진입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비트의 합성 음성이 이어졌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스캐너도 이미 같은 정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델타-7. 그곳은 한때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번화했던 우주항이었지만, 지금은 핵전쟁의 상흔과 시간의 풍화가 뒤섞여 거대한 미궁이 되어 있었다. 방사능 수치도 다른 곳보다 훨씬 높았다.

    “진입이 어렵다는 건, 아직 다른 놈들이 손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해. 가자.”

    그녀는 다 허물어진 화물선의 잔해를 타고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발 밑에서는 녹슨 철판이 삐걱거렸고, 흩어진 잔해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헬멧 안에서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방호복 안은 습기와 땀으로 축축했다. 고통스러운 등반이었지만, 그녀는 익숙한 듯 묵묵히 몸을 움직였다.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마침내, 거대한 함선 잔해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시온의 눈앞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함선 내부가 드러났다. 아마 핵폭격 당시의 충격으로 생긴 균열일 것이다. 붉고 탁한 먼지 너머로, 함선 내부의 어둠이 끊임없이 그녀를 손짓했다.

    “내부 방사능 수치, 외부보다 30% 높습니다. 진입 시 주의 필요.” 비트가 경고했다.

    “알아. 다른 선택지는 없어.”

    시온은 허리춤에 매달린 밧줄을 꺼내 단단히 고정시킨 후, 거대한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밧줄은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그녀의 발이 무언가에 닿았다. 함선 내부의 바닥이었다.

    사방은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시온은 헬멧에 부착된 라이트를 켰다. 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철골 구조물과 정체불명의 잔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서는 거대한 전선 다발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었고, 바닥은 먼지와 부서진 패널들로 뒤덮여 있었다. 썩은 쇠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스캐너를 켜서 동력 코어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델타-7 중앙 제어실’이라는 표시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쪽이야, 비트.”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발밑에서는 부서진 유리 조각이나 금속 파편들이 ‘바스락,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 넓은 함선 안에서, 자신들 외에 다른 존재가 있다면? 그 생각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권총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오랜 시간 동안 폐허에서 살아남으면서 터득한 본능적인 경계심이었다.

    “삑! 미확인 생체 신호 감지. 거리 50미터. 이동 속도 느림.”

    비트의 경고음이 낮게 울렸다. 시온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미확인 생체 신호. 이 함선에는 어떤 것들이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돌연변이 생명체, 혹은 그녀처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다른 생존자. 어느 쪽이든 위험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라이트를 끄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웅크린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철컥, 철컥. 느릿하고 불규칙적인 금속 마찰음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듯했다. 공포는 아니었다. 그저 피곤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또 싸워야 하나.

    “삑! 신호, 정지. 은폐 상태로 전환.”

    비트의 음성과 함께 주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시온은 숨을 죽였다. 그녀 역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희미한 발소리가 멎은 곳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고 둔탁한 몸집이었다. 마치 여러 개의 금속 조각들을 덧붙여놓은 듯한 형태. 그것은 이빨이 돋아난 거대한 금속 턱을 가지고 있었고, 곳곳에서 파란색 섬광이 번쩍였다. 고대의 보안 드로이드였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온몸에 뒤엉킨 녹과 이끼,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센서 등은 그 드로이드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파괴된 시스템 속에서 생존 본능만을 가지고 무의미하게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온은 가만히 기다렸다. 불규칙한 빛을 내뿜는 드로이드는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잠시 정지했다가, 이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드로이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다시 라이트를 켰다.

    “젠장, 이런 낡은 놈들까지 살아남아서….” 그녀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델타-7 중앙 제어실은 이 폐허의 심장부나 다름없었다. 긴 복도를 지나고, 무너진 통로를 우회하고, 때로는 환풍구를 기어서 통과했다. 마침내 그녀의 스캐너가 목표 지점을 가리켰다. 거대한 철문이 부서져 반쯤 열려 있었다. 문 주변에는 불에 탄 흔적과 함께 알 수 없는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제어실은 폭격의 직격탄을 맞은 듯 처참했다. 모든 것이 녹고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익숙한 형태의 동력 코어 하나를 발견했다.

    거대한 제어판 한가운데, 찌그러진 보호 케이스 안에 그것이 박혀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손상되지 않은 채로.

    “찾았다.” 시온의 목소리에 희미한 안도감이 섞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력 코어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멀티 툴을 꺼내 부서진 패널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드르륵, 쨍그랑’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부품들은 단단히 녹슬어 있었고, 떼어낼 때마다 사방으로 먼지가 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코멧호의 워프 드라이브를 고치지 못하면, 이 행성에서 영원히 썩어 죽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이 그녀의 심장을 채찍질했다.

    “삑! 경고! 외부 방사능 수치 급격히 상승 중! 함선 구조물 붕괴 위험 감지!” 비트의 경고음이 전보다 훨씬 다급하게 울렸다.

    “젠장!”

    시온은 땀으로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며 마지막 연결 부위를 끊어냈다. ‘파지직!’ 하는 섬광과 함께 동력 코어가 케이스에서 분리됐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것을 품에 안았다. 무겁고 차가운 금속 덩어리.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생명줄이었다.

    “서둘러, 비트! 탈출 경로를 탐색해!”

    “확인! 가장 가까운 탈출구까지 200미터!”

    시온은 동력 코어를 단단히 쥔 채 제어실을 빠져나왔다. 진동이 느껴졌다. 함선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복도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고, 천장에서 거대한 금속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복도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달렸다. 방호복의 무거움은 그녀의 속도를 늦췄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의 몸을 밀어붙였다. 발밑의 잔해들이 무너져 내렸고, 그녀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마다 비트가 날아와 그녀의 어깨를 밀며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쪽입니다! 점프!”

    비트의 지시와 함께 시온은 무너진 바닥의 틈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녀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맞은편 구조물을 붙잡았다. 팔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끌어올렸다. 뒤편에서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함선 내부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격납고 외부로 몸을 던졌을 때, 아크로폴리스의 붉은 먼지 속에서 코멧호의 희미한 불빛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코멧호의 출입구로 향했다.

    함선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헬멧을 벗어던졌다. 땀과 먼지로 뒤덮인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이 빌어먹을 행성에서… 겨우 살아남았네.”

    그녀는 동력 코어를 조종석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걸 제대로 장착하고, 워프 드라이브를 재가동해야 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성공이었다.

    “비트, 주변 통신 채널에 혹시 다른 신호는 없어? 아주 희미한 것이라도.” 시온은 혹시 모를 희망을 찾듯 물었다. 이곳 아크로폴리스는 죽은 행성이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호가 그녀의 잠 못 드는 밤을 흔들곤 했다.

    비트는 조용히 푸른 센서를 깜빡이며 통신 채널을 스캔했다. 잠시 후, ‘삐릭-‘ 하는 작고 희미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아주 약해서, 노이즈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신호였다.

    “미약한 신호 감지. 발신지 불명. 반복되는 코드 패턴 분석 중.” 비트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지만, 시온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코드 패턴? 어떤 코드인데?”

    “분석 중입니다… 코드 패턴: 조난 신호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매우 오래된 형식입니다.”

    시온은 멍하니 우주 저편을 응시했다. 조난 신호. 아주 오래된.
    이 망가진 성계의 어딘가에, 자신들 외의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더 큰 절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신호였다. 그녀의 눈에 피로와 함께 새로운 결의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워프 드라이브 수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저 신호를 따라간다.”

    코멧호의 엔진은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황폐해진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여정은, 이제 겨우 시작될 참이었다.

  • 추리 미스터리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갑고 끈끈한 어둠이 도시를 집어삼키는 시간, 류진호는 익숙한 비릿함에 코끝을 찡그렸다. 빗물에 쓸려 내려간 피 냄새는 여전히 폐부를 찌르는 듯했다. 뒷골목의 음습한 벽돌 위에는 붉은색 스프레이 낙서처럼 번져있는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시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하지만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김 형사님, 현장 통제는 제대로 된 거 맞습니까?”

    진호의 목소리에는 날 선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벽을 스치듯 훑었다. 빗물이 다 씻어내지 못한, 미미하지만 기이한 점액질의 흔적. 육안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 반짝임이 손끝에 닿았다.

    “류 형사, 그만 좀 해. 이미 다 훑어봤어. 뭐 나오는 게 있어야지.”

    김 형사는 신경질적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그도 지쳐있었다. 최근 한 달 새 세 번째 실종이자, 세 번째 괴이한 현장이었다. 공통점은 시체가 단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다는 것. 그리고 어딘가 비현실적인 잔혹한 흔적만 남는다는 것.

    진호는 김 형사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빗물에 젖은 바닥, 낡은 배수구 틈새에 박힌 무언가에 고정되었다. 섬세한 손가락이 움직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마른 가지처럼 얇고 검푸른 물질. 아주 작은 조각이었지만, 어딘가 생명체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지니고 있었다.

    “이건…”

    진호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는 이전에 이것과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꿈결처럼 아득한 기억 속에서. 아니, 꿈이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현실.

    그때였다.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들린 것은.

    *잊어버려. 잊어버리지 않으면, 네가 위험해져.*

    진호는 몸을 굳혔다. 시야가 흐려지는 착각마저 들었다.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달빛을 머금은 듯 창백한 피부,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늘 불안하게 흔들리던 그녀의 입술.

    세린.

    그녀는 늘 경고했다. 어둠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오지 말라고. 너는 빛의 아이이니, 그림자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하지만 진호는 이해하고 싶었다. 그녀의 세계를, 그녀의 고통을, 그리고 그녀의 종족이 지닌 비밀을.

    “류 형사, 뭘 그렇게 멍하니 서있어? 혹시 밤새웠나? 얼굴이 허옇네.”

    김 형사의 목소리에 진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손에 쥐고 있던 검푸른 조각을 급히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아닙니다. 그냥, 너무 기묘해서요. 이런 사건은 처음이라.”

    그는 애써 평범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거센 파도처럼 일렁였다. 이 조각. 이 흔적은 명백히 ‘그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관여된 사건은, 결코 단순한 미스터리로 끝나지 않았다.

    퇴근 후, 진호는 오직 자신만이 아는 은밀한 장소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도심 속 작은 공원, 오래된 플라타너스 나무 아래 벤치. 그곳은 언제나 비어있었고, 어둠이 깊어지면 고요만이 감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한 달빛 아래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온 세린은 늘 그렇듯 어딘가 슬픈 표정이었다. 그녀는 얇은 코트를 입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추위를 타지 않는 듯했다. 아니, 애초에 그녀의 존재 자체가 겨울밤의 찬 공기와 다름없었다.

    “왔구나.”

    진호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들의 관계는 이름으로 불리기에는 너무 위태로웠다.

    “네가 나를 불렀잖아. 무슨 일이야?”

    세린의 목소리는 새벽녘의 안개처럼 부드럽고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날카로운 긴장감이 숨어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아주 미세하게 빛났다. 검푸른 기운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진호는 주머니에서 검푸른 조각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세린의 눈이 순간적으로 크게 뜨였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것 같았다.

    “이건… 어디서 찾았어?”

    그녀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위험을 경고하는 듯한 낮은 울림이었다.

    “오늘 현장에서. 세 번째 실종 사건 현장이야. 너희 종족이 남긴 흔적이지? 이전에 네가 보여줬던 것과 똑같아.”

    진호의 말에 세린은 조각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아귀에 조각은 이내 검은 재처럼 부스러졌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절대 발각되어선 안 될 흔적이야. 누군가 의도적으로 남겼거나… 아주 위급한 상황이었겠지.”

    “위급한 상황이라니? 무슨 뜻이야? 너희 종족이 대체 뭘 하는 건데? 사람들을 사라지게 만드는 건가?”

    진호의 질문에 세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깊은 연못처럼 흔들렸다. 그 속에 담긴 고통과 체념이 진호를 압도했다.

    “인간의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어. 우리 ‘밤의 혈족’은 인간의 세계에 개입하지 않아. 하지만 최근 들어, 몇몇 개체가 규칙을 어기고 있어. 인간의 피에 대한 갈증을 이기지 못하거나… 혹은 그 반대이거나.”

    “그 반대?”

    “인간 사냥꾼들이 나타나고 있어.”

    세린의 말에 진호는 얼어붙었다. 인간 사냥꾼? 그들이 ‘밤의 혈족’을 사냥한다고? 그렇다면 실종된 사람들은… 피를 갈망하는 ‘밤의 혈족’의 희생자이거나, 아니면 인간 사냥꾼들이 ‘밤의 혈족’을 쫓는 과정에서 벌어진 부수적인 피해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끔찍한 진실이었다.

    “우리 쪽에서 정보를 얻었어. 밤의 혈족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달의 그림자’ 부족이 이 사건에 연루된 것 같다고. 그들은… 특히 위험해.”

    세린의 목소리에 진호는 소름이 돋았다. 달의 그림자 부족. 그녀가 언급하기조차 꺼렸던 존재들.

    “세린, 네가 내게 말해줘야 해. 모든 것을.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이 이상한 사건들이 너희 종족과 관련되어 있다면, 나도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어. 그리고 너는…”

    진호는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세린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공기가 그들 사이에 흘렀다.

    “네가 알수록, 위험해져. 우리는… 함께할 수 없어. 너는 빛의 세계에 살고, 나는 그림자의 세계에 존재해야만 해. 우리의 사랑은… 금지된 그림자야. 그 그림자가 길어질수록, 너의 빛은 사그라들 거야.”

    그녀의 눈빛은 아득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결연한 의지가 엿보였다.

    “하지만 난 널 포기할 수 없어. 내가 너를 발견했고, 너를 사랑하게 되었어. 이건 단순한 사랑이 아니야. 내 모든 것을 거는 일이야.”

    진호는 그녀에게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의 눈빛은 굳건했다.

    “내가 네 그림자를 걷어낼 방법을 찾을 거야. 우리가 함께할 방법을.”

    세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 체념의 미소가 번졌다.

    “늦었어. 이미 그림자가 드리워졌어. 네가 이 사건을 파고들수록, 그림자는 더욱 깊어질 뿐이야. 그리고 그 끝에는…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 거야. 너와 나, 우리 모두를 파멸시킬 진실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원 외곽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진호는 본능적으로 세린을 자기 뒤로 끌어당겼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밤의 정적을 갈랐다.

    “젠장! 저격수인가?!”

    그들 쪽으로 향하던 총성은 플라타너스 나무의 굵은 기둥에 박혔다. 나무껍질이 산산조각 났다.

    “그들이 우리를 쫓고 있어. 인간 사냥꾼이 이 정도까지 접근했다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뜻이야.”

    세린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극한의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어둠 속에 숨겨진 위협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진호는 그녀의 손을 움켜쥐었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 하지만 그 안에서 묘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누가 우릴 쫓는 거야? 대체 그들의 목적이 뭔데?”

    “밤의 혈족을 뿌리 뽑으려는 자들. 그리고… 우리를 이용해서 더 큰 힘을 얻으려는 자들. 그들은 너의 존재도 알고 있을 거야. 나와의 관계가… 이미 드러났어.”

    세린의 말은 진호의 심장을 꿰뚫었다. 자신들의 금지된 사랑이 누군가에게 발각되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발각은 이제 생명을 위협하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진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희미한 그림자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을 쫓는 것이 아니었다. 사냥이었다. 그들의 사냥감은 세린, 그리고 그녀와 엮인 자신이었다.

    “가자! 여기서는 위험해.”

    진호는 세린의 손을 잡고 어둠 속으로 뛰기 시작했다. 총성이 다시 한번 울렸다. 이번에는 더욱 가까이에서. 진호는 본능적으로 세린의 몸을 감쌌다. 그의 눈빛은 필사적이었다. 그는 그녀를 지켜야만 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세린의 품속에서, 진호는 그녀의 차가운 체온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나는, 달콤하고도 아련한 피 냄새를 맡았다.

    이 감각은… 익숙했다. 마치 자신의 피가 섞여 있는 것처럼.

    그때, 진호의 뇌리에 충격적인 기억의 파편이 스쳤다. 아주 어릴 적, 핏자국이 낭자했던 그의 집. 그리고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자신과 꼭 닮은 아이.

    아니, 자신이었다. 피를 흘리던… 어린 시절의 자신. 그리고 그 옆에서 울부짖던, 아주 젊은 세린의 얼굴.

    *잊지 마. 잊지 마, 진호. 내가 널… 구했어.*

    귓가에 울리는 환청.
    진호는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려 했다. 세린의 경고가, 그녀의 감추려 했던 진실이, 그리고 그의 어렴풋한 과거의 기억이 거대한 퍼즐처럼 맞춰지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처음부터 ‘빛’의 아이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세린은, 그저 그의 ‘그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생명이었다.

    그때였다. 뒤편에서 달려오던 검은 그림자 중 하나가 순식간에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번쩍이는 칼날이 달빛을 찢었다.

    “밤의 혈족, 그리고 그 협력자. 오늘 밤, 너희 모두 여기서 끝이다!”

    복면을 쓴 사냥꾼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진호는 세린의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이젠 도망칠 수 없다.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금지된 그림자 속에서 진실을 밝혀내고, 그녀를 지킬 것이다.
    설령 그 진실이 자신마저 뒤흔들지라도.
    그것이 그들의 운명이었다.
    피와 어둠, 그리고 금지된 사랑으로 엮인.
    긴 밤은, 이제 겨우 시작될 뿐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낡고 거친 방호복으로 중무장한 시온은, 콧등에 걸린 바이저 너머로 탁한 풍경을 응시했다. 거대한 먼지 폭풍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크로폴리스 행성의 대기는 아직도 붉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다. 바람 한 점 없는 폐쇄된 격납고 안인데도, 흙먼지는 끊임없이 바닥을 굴러다니며 웅장했던 과거의 흔적들을 무의미하게 쓸고 있었다.

    “이번에도 헛걸음인가, 비트.”

    시온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통신기를 통해 옆에서 붕붕거리는 드론에게 전달됐다. ‘비트’라는 이름의 소형 정찰 드론은 푸른빛 센서로 주변을 스캔하며 ‘삐릭, 삐리릭’ 하는 기계음을 냈다. 마치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시온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함선들의 무덤이었다. 한때는 은하계를 가로지르던 최첨단 운송선들이었고, 전투함선들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녹슨 고철 덩어리가 되어, 서로 기대거나 무너져 내린 채로 거대한 산맥을 이루고 있었다. 그 안은 어둠과 미세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끈적한 유기물로 가득했다. 바로 이곳이 그들의 삶터이자, 생존을 위한 투쟁의 현장이었다.

    그녀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코멧호’의 워프 드라이브에 장착될 동력 코어. 며칠 전, 알 수 없는 전자파 교란으로 코멧호의 핵심 부품이 손상됐다. 이대로는 아크로폴리스 성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죽어가는 행성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수리해야 했다.

    “대상 함선, A-712 화물 수송선. 마지막으로 부품이 확인된 곳은 격납고 델타-7 구역입니다. 하지만… 구조물 붕괴로 진입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비트의 합성 음성이 이어졌다.

    시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스캐너도 이미 같은 정보를 보여주고 있었다. 델타-7. 그곳은 한때 아크로폴리스에서 가장 번화했던 우주항이었지만, 지금은 핵전쟁의 상흔과 시간의 풍화가 뒤섞여 거대한 미궁이 되어 있었다. 방사능 수치도 다른 곳보다 훨씬 높았다.

    “진입이 어렵다는 건, 아직 다른 놈들이 손대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는 뜻이기도 해. 가자.”

    그녀는 다 허물어진 화물선의 잔해를 타고 조심스럽게 기어 올라갔다. 발 밑에서는 녹슨 철판이 삐걱거렸고, 흩어진 잔해들이 아래로 떨어지며 둔탁한 소음을 냈다. 헬멧 안에서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방호복 안은 습기와 땀으로 축축했다. 고통스러운 등반이었지만, 그녀는 익숙한 듯 묵묵히 몸을 움직였다. 살아남으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마침내, 거대한 함선 잔해의 꼭대기에 다다랐을 때, 시온의 눈앞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함선 내부가 드러났다. 아마 핵폭격 당시의 충격으로 생긴 균열일 것이다. 붉고 탁한 먼지 너머로, 함선 내부의 어둠이 끊임없이 그녀를 손짓했다.

    “내부 방사능 수치, 외부보다 30% 높습니다. 진입 시 주의 필요.” 비트가 경고했다.

    “알아. 다른 선택지는 없어.”

    시온은 허리춤에 매달린 밧줄을 꺼내 단단히 고정시킨 후, 거대한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밧줄은 삐걱거리는 마찰음과 함께 그녀의 몸무게를 지탱했다. 수십 미터를 내려갔을까. 그녀의 발이 무언가에 닿았다. 함선 내부의 바닥이었다.

    사방은 완벽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시온은 헬멧에 부착된 라이트를 켰다. 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철골 구조물과 정체불명의 잔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에서는 거대한 전선 다발들이 마치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었고, 바닥은 먼지와 부서진 패널들로 뒤덮여 있었다. 썩은 쇠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는 스캐너를 켜서 동력 코어의 위치를 다시 확인했다. ‘델타-7 중앙 제어실’이라는 표시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이쪽이야, 비트.”

    그녀는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발밑에서는 부서진 유리 조각이나 금속 파편들이 ‘바스락, 쨍그랑’ 소리를 내며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 넓은 함선 안에서, 자신들 외에 다른 존재가 있다면? 그 생각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권총의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오랜 시간 동안 폐허에서 살아남으면서 터득한 본능적인 경계심이었다.

    “삑! 미확인 생체 신호 감지. 거리 50미터. 이동 속도 느림.”

    비트의 경고음이 낮게 울렸다. 시온은 순간적으로 몸을 굳혔다. 미확인 생체 신호. 이 함선에는 어떤 것들이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돌연변이 생명체, 혹은 그녀처럼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다른 생존자. 어느 쪽이든 위험한 존재임은 틀림없었다.

    그녀는 라이트를 끄고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웅크린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철컥, 철컥. 느릿하고 불규칙적인 금속 마찰음이 그녀에게 다가오는 듯했다. 공포는 아니었다. 그저 피곤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또 싸워야 하나.

    “삑! 신호, 정지. 은폐 상태로 전환.”

    비트의 음성과 함께 주위가 다시 고요해졌다. 시온은 숨을 죽였다. 그녀 역시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잠시 후, 희미한 발소리가 멎은 곳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고 둔탁한 몸집이었다. 마치 여러 개의 금속 조각들을 덧붙여놓은 듯한 형태. 그것은 이빨이 돋아난 거대한 금속 턱을 가지고 있었고, 곳곳에서 파란색 섬광이 번쩍였다. 고대의 보안 드로이드였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어 있었다. 온몸에 뒤엉킨 녹과 이끼, 불규칙하게 깜빡이는 센서 등은 그 드로이드가 온전한 상태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마도 파괴된 시스템 속에서 생존 본능만을 가지고 무의미하게 배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온은 가만히 기다렸다. 불규칙한 빛을 내뿜는 드로이드는 마치 무언가를 찾는 듯 잠시 정지했다가, 이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드로이드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다시 라이트를 켰다.

    “젠장, 이런 낡은 놈들까지 살아남아서….” 그녀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델타-7 중앙 제어실은 이 폐허의 심장부나 다름없었다. 긴 복도를 지나고, 무너진 통로를 우회하고, 때로는 환풍구를 기어서 통과했다. 마침내 그녀의 스캐너가 목표 지점을 가리켰다. 거대한 철문이 부서져 반쯤 열려 있었다. 문 주변에는 불에 탄 흔적과 함께 알 수 없는 긁힌 자국들이 가득했다.

    시온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제어실은 폭격의 직격탄을 맞은 듯 처참했다. 모든 것이 녹고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다.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어져 별처럼 반짝였다. 하지만 그 혼돈 속에서도, 그녀의 눈은 익숙한 형태의 동력 코어 하나를 발견했다.

    거대한 제어판 한가운데, 찌그러진 보호 케이스 안에 그것이 박혀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손상되지 않은 채로.

    “찾았다.” 시온의 목소리에 희미한 안도감이 섞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동력 코어는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녀는 멀티 툴을 꺼내 부서진 패널들을 뜯어내기 시작했다. ‘드르륵, 쨍그랑’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부품들은 단단히 녹슬어 있었고, 떼어낼 때마다 사방으로 먼지가 튀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코멧호의 워프 드라이브를 고치지 못하면, 이 행성에서 영원히 썩어 죽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이 그녀의 심장을 채찍질했다.

    “삑! 경고! 외부 방사능 수치 급격히 상승 중! 함선 구조물 붕괴 위험 감지!” 비트의 경고음이 전보다 훨씬 다급하게 울렸다.

    “젠장!”

    시온은 땀으로 흐려진 시야를 닦아내며 마지막 연결 부위를 끊어냈다. ‘파지직!’ 하는 섬광과 함께 동력 코어가 케이스에서 분리됐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것을 품에 안았다. 무겁고 차가운 금속 덩어리.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생명줄이었다.

    “서둘러, 비트! 탈출 경로를 탐색해!”

    “확인! 가장 가까운 탈출구까지 200미터!”

    시온은 동력 코어를 단단히 쥔 채 제어실을 빠져나왔다. 진동이 느껴졌다. 함선 전체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에 비친 복도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먼지로 가득 차 있었고, 천장에서 거대한 금속 파편들이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하는 굉음과 함께 복도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달렸다. 방호복의 무거움은 그녀의 속도를 늦췄지만, 살아야 한다는 본능이 그녀의 몸을 밀어붙였다. 발밑의 잔해들이 무너져 내렸고, 그녀는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그때마다 비트가 날아와 그녀의 어깨를 밀며 방향을 잡아주었다.

    “이쪽입니다! 점프!”

    비트의 지시와 함께 시온은 무너진 바닥의 틈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녀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맞은편 구조물을 붙잡았다. 팔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몸을 끌어올렸다. 뒤편에서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함선 내부가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격납고 외부로 몸을 던졌을 때, 아크로폴리스의 붉은 먼지 속에서 코멧호의 희미한 불빛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코멧호의 출입구로 향했다.

    함선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헬멧을 벗어던졌다. 땀과 먼지로 뒤덮인 얼굴에는 피로와 함께 안도감이 서려 있었다.

    “이 빌어먹을 행성에서… 겨우 살아남았네.”

    그녀는 동력 코어를 조종석 옆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이걸 제대로 장착하고, 워프 드라이브를 재가동해야 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밤은, 성공이었다.

    “비트, 주변 통신 채널에 혹시 다른 신호는 없어? 아주 희미한 것이라도.” 시온은 혹시 모를 희망을 찾듯 물었다. 이곳 아크로폴리스는 죽은 행성이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호가 그녀의 잠 못 드는 밤을 흔들곤 했다.

    비트는 조용히 푸른 센서를 깜빡이며 통신 채널을 스캔했다. 잠시 후, ‘삐릭-‘ 하는 작고 희미한 신호음이 들려왔다. 아주 약해서, 노이즈와 구별하기 힘들 정도의 신호였다.

    “미약한 신호 감지. 발신지 불명. 반복되는 코드 패턴 분석 중.” 비트의 음성은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했지만, 시온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코드 패턴? 어떤 코드인데?”

    “분석 중입니다… 코드 패턴: 조난 신호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매우 오래된 형식입니다.”

    시온은 멍하니 우주 저편을 응시했다. 조난 신호. 아주 오래된.
    이 망가진 성계의 어딘가에, 자신들 외의 다른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혹은 더 큰 절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미지의 신호였다. 그녀의 눈에 피로와 함께 새로운 결의가 떠올랐다.

    “내일 아침, 워프 드라이브 수리를 시작한다. 그리고… 저 신호를 따라간다.”

    코멧호의 엔진은 희미하게 울리고 있었다. 황폐해진 세계를 벗어나기 위한 그들의 여정은, 이제 겨우 시작될 참이었다.

  • 메카 액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사방은 핏빛 노을로 물들어 있었다. 아니, 노을이 아니었다. 도심 곳곳에서 피어오르는 화염과 폭발이 빚어낸 지옥의 색채였다. 부서진 고층 빌딩의 뼈대가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하늘을 긁었고, 지면은 파헤쳐진 살점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진, 좌측 3도! 매복 확인!”

    통신망을 찢는 사령관 강혁의 다급한 목소리에 진은 반사적으로 [돌격병]의 조종간을 틀었다. ‘돌격병’이라 불리는 진의 기체는 제국군이 자랑하는 유려한 ‘제국 기사’ 메카와는 거리가 멀었다. 녹슨 장갑 곳곳에는 급조한 보강판이 덧대어져 있었고, 엔진은 쿨링액이 끓는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겨우 작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투박한 철덩어리는 자유를 향한 평민들의 열망을 담아 수많은 전투를 버텨낸 상징이었다.

    철컥거리는 구동음과 함께 기체가 빠르게 방향을 전환했다. 빌딩 잔해 뒤편에서 튀어나온 제국 보병들이 휴대용 대전차 로켓을 조준하는 것이 보였다.

    “젠장!”

    진은 욕설을 내뱉으며 어깨에 장착된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우르르르릉!’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굵은 탄환들이 불을 뿜으며 쏟아져 나갔다. 콘크리트 파편과 비명이 뒤섞이며 제국 보병들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훌륭하다, 진! 그대로 전진. 목표는 제7 에너지 증폭기. 저곳만 마비시키면 이 구역의 제국군 통신망과 방어막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다운된다. 그때 본대가 돌입할 것이다.”

    강혁의 목소리에는 간절함이 묻어 있었다. 이번 작전은 반란군에게 너무나 중요한 기회였다. 제국 수도의 외곽을 코앞에 둔 이 최전선에서, 제대로 된 반격 한번 없이 계속 밀리기만 한다면 사기는 바닥을 칠 터였다.

    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조종간을 꽉 쥐었다. 이 작은 승리가, 언젠가 거대한 제국을 무너뜨릴 첫걸음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버티는 매 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제7 증폭기는 저희가 접수합니다!”

    진의 옆으로는 동료들의 기체, ‘척후병’과 ‘수호자’가 바싹 붙어 이동하고 있었다. 척후병의 조종석에서는 동료 지혁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낡고 삐걱거리는 기체들 사이에서도 전우애만큼은 굳건했다.

    “젠장, 저놈의 제국 기사들은 지겹지도 않나!”

    수호자의 조종사, 미나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그들의 전방, 무너진 고가도로 너머에서 은색으로 번쩍이는 제국 기사 두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국 기사는 매끄러운 외형에 어울리지 않게 거대한 레이저 포와 충격 도끼를 장비하고 있었다.

    “후퇴는 없다! 목표는 저 증폭기다!” 진은 단호하게 외쳤다. “지혁, 우회해서 증폭기 건물로 직접 침투할 수 있는지 확인해라! 미나, 나와 함께 저놈들을 막는다!”

    “알았어, 진! 하지만 이놈들, 지난번보다 더 단단해 보이는데?” 미나가 엄살을 부리듯 투덜거렸다.

    “걱정 마, 미나! 우리가 더 단단하다!”

    진은 망설임 없이 [돌격병]을 제국 기사들을 향해 돌진시켰다. 낡은 엔진이 끓어오르듯 최고 출력을 뿜어냈다. 지면이 [돌격병]의 육중한 발걸음에 쿵, 쿵 울렸다.

    제국 기사 한 대가 팔에 장착된 레이저 포를 진에게 겨눴다. 순식간에 푸른빛 에너지 구체가 발사되었고, 진은 간발의 차이로 옆으로 회피했다. 에너지 구체는 진의 뒤편에 있던 잔해 더미에 명중했고,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네!”

    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동시에 개틀링 포를 다시 발사했다. ‘우르르르릉!’ 탄환이 제국 기사의 어깨 장갑에 명중했지만, 단단한 특수 합금 장갑에는 흠집만 낼 뿐이었다.

    “쳇, 소용없나!”

    그때, 미나의 [수호자]가 다른 제국 기사를 향해 돌진했다. [수호자]는 두터운 방어력과 강력한 근접 무기, 거대한 강철 방패를 주무기로 삼는 기체였다. 미나는 방패를 앞세워 제국 기사의 공격을 막아내며 거리를 좁혔다.

    “이거나 먹어라! 녹슬어 빠진 고철 덩어리!”

    미나가 조종간을 꺾자 [수호자]는 어깨에 장착된 대형 숄더 태클로 제국 기사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콰아앙!’ 금속이 뒤틀리는 굉음과 함께 제국 기사가 휘청거렸다.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미나는 팔에 장착된 충격 도끼를 휘둘렀다. ‘챙그랑!’ 도끼가 제국 기사의 다리 장갑을 스쳤지만, 깊은 손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젠장, 단단하기는 드럽게 단단하네!” 미나가 다시 투덜거렸다.

    진은 제국 기사가 미나에게 정신이 팔린 틈을 타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제국 기사들은 이미 그들의 전술을 파악한 듯 움직였다. 한 대가 미나를 견제하는 동안, 다른 한 대가 빠르게 진의 경로를 차단하며 거대한 충격 도끼를 휘둘렀다.

    “위험해, 진!” 미나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진은 기체를 뒤로 빼려 했지만, 제국 기사의 움직임은 예상보다 빨랐다. ‘콰직!’ [돌격병]의 팔 장갑에 충격 도끼가 그대로 박혔다. 억센 금속이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조종석 내부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좌측 팔 구동계 이상! 출력 20% 감소!”

    진은 이를 악물었다. 통증이 없는 곳은 없었다. [돌격병]은 진의 몸과 같았다. 부상을 입은 기체를 움직이는 것은 마치 자신의 부상당한 팔다리를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젠장, 이대로는 안 돼!”

    진은 망가진 팔로 제국 기사의 도끼를 억지로 밀어내려 했다. 팔에서 뿜어져 나오는 스파크와 함께 [돌격병]이 거칠게 떨렸다. 그는 제국 기사의 육중한 몸체에 매달리듯 버텼다.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진, 이쪽은 침투 경로 확인! 제7 증폭기 건물 내부로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 그때, 지혁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통해 들려왔다.

    “좋아, 지혁! 그대로 진행해! 미나, 나를 엄호하면서 증폭기 건물 입구 쪽으로 유인해!” 진은 재빨리 판단했다.

    “알았어, 진!” 미나의 [수호자]가 전열을 정비하며 다시 제국 기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이번에는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방패를 이용한 견제와 충격 도끼로 경로를 막는 데 집중했다.

    진은 부상당한 [돌격병]을 이끌고 미나의 뒤를 따랐다. 제국 기사들은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끈질기게 추격해왔다. 레이저 포탄이 연신 진의 주변에 작렬했고, 충격파가 [돌격병]을 뒤흔들었다.

    간신히 제7 증폭기 건물 입구에 다다른 순간, 지혁의 [척후병]이 건물 내부에서 연막탄을 터뜨리며 나타났다. 흰 연기가 순식간에 건물 입구를 뒤덮었고, 제국 기사들의 시야를 가렸다.

    “진! 미나! 어서 들어와!” 지혁이 외쳤다.

    진은 망설임 없이 연막 속으로 뛰어들었다. [돌격병]의 육중한 몸체가 건물 입구를 간신히 통과했다. 뒤이어 미나의 [수호자]도 연막을 뚫고 들어왔다. 연막 뒤편에서는 제국 기사들의 분노에 찬 엔진 소리가 울렸다.

    건물 내부는 어둡고 거대한 기계 장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에너지 코어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곳이 바로 제국군의 에너지 증폭기였다.

    “지혁, 시스템 해킹 시작해! 미나, 입구 봉쇄 준비! 제국 기사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진은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지혁은 [척후병]의 팔을 개조한 해킹 장비를 거대한 제어 패널에 연결하기 시작했다. [척후병]은 전투보다는 정찰과 전자전 능력이 특화된 기체였다.

    “시간이 얼마 없어, 진! 이 건물 방어 시스템이 곧 제국군에게 재활성화될 거야!” 지혁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때, 건물 입구 쪽에서 굉음이 들려왔다. ‘쾅!’ 제국 기사들이 건물을 뚫고 들어오려는 듯 입구를 공격하는 소리였다.

    “젠장! 생각보다 빠르잖아!” 미나가 방패를 들어 입구를 향해 겨누며 외쳤다. [수호자]의 팔에 장착된 용접기가 불꽃을 뿜으며 입구를 용접하기 시작했지만, 제국 기사들의 공격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했다.

    진은 [돌격병]의 망가진 팔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팔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직 오른쪽 팔의 개틀링 포는 살아 있었다.

    “내가 시간을 벌겠다! 지혁, 서둘러!”

    진은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제7 증폭기 내부의 거대한 에너지 코어를 향해 개틀링 포를 조준했다. 코어를 직접 파괴할 수는 없었다. 증폭기에 과부하를 걸어 시스템을 다운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강혁 사령관님, 제7 증폭기 시스템 해킹 중! 잠시 후 모든 시스템 마비됩니다!” 진은 통신망에 대고 보고했다.

    “훌륭하다, 진! 그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다!” 강혁의 목소리에 희망이 깃들어 있었다.

    ‘우르르르릉!’ 진은 개틀링 포의 방아쇠를 당겼다. 굵은 탄환들이 에너지 코어 주변의 제어반과 보조 시스템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스파크가 튀고, 전선이 끊어지며 ‘삐이익!’ 하는 고주파음이 건물 내부를 가득 채웠다.

    ‘콰아앙!’ 마침내 미나가 막고 있던 입구의 방어막이 뚫리고, 제국 기사 두 대가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그들의 눈동자처럼 빛나는 센서가 진과 지혁을 향해 번뜩였다.

    “진, 시스템 셧다운까지 10초! 9, 8…” 지혁의 목소리가 떨렸다.

    제국 기사 한 대가 진을 향해 레이저 포를 발사했다. 진은 기체를 굴려 겨우 피했지만, 레이저 포탄은 에너지 코어 바로 옆의 제어 패널을 명중시켰다. ‘지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코어의 빛이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젠장, 위험하다!”

    또 다른 제국 기사가 충격 도끼를 휘두르며 진에게 달려들었다. 진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돌격병]의 망가진 팔을 겨우 들어올려 방어 자세를 취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진!” 미나가 절규하듯 외쳤다.

    ‘콰직!’ 충격 도끼가 [돌격병]의 어깨 장갑에 그대로 박혔다. 조종석이 심하게 흔들렸고, 진의 몸이 충격에 이리저리 부딪혔다.

    “1초! 셧다운!”

    지혁의 외침과 동시에, 건물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거대한 에너지 코어의 빛이 폭주하듯 밝아졌다가, ‘쉬이이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모든 빛을 잃었다. 모든 기계음이 멈추고, 건물은 암흑과 정적에 휩싸였다.

    성공이었다. 제7 에너지 증폭기가 마비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건물 밖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땅이 울리고, 천장의 잔해가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그르르르릉….’

    어둠 속에서, 진은 겨우 고개를 들어 건물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마비된 증폭기 너머, 핏빛 노을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기존의 ‘제국 기사’와는 차원이 다른, 산을 깎아 만든 듯한 육중한 실루엣이었다. 엄청난 압도감이 진의 숨통을 조여왔다.

    “이건… 대체…?” 미나의 목소리가 공포에 질려 떨렸다.

    그 거대한 존재의 어깨에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 문양이 섬뜩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셀 수 없이 많은 제국 기사들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제7 증폭기는 마비되었지만, 그들은 이미 새로운 적과 마주하고 있었다. 훨씬 더 거대하고, 강력하며, 절망적인 존재와…

    진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막 작은 승리를 쟁취했다고 생각했지만, 제국은 더 깊고 어두운 심연을 드러냈다.

    “이럴 수가…”

    진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끝없는 절망이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조용한 공기가 갤러리 복도를 감쌌다. 낮은 조도의 간접 조명 아래, 매끈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은 은은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초여름 밤의 습기를 잊게 할 만큼 쾌적한 냉기가 피부에 닿았다.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서은우는 눈앞의 전시 작품들을 스쳐 지나갔다. 색색의 추상화들이 벽에 걸려 있었지만, 은우의 눈은 그저 그림의 형태만을 인지할 뿐이었다. 그의 내면은 고요한 호수 아래 감춰진 거대한 빙산처럼 묵직한 감정으로 가득했다.

    입구에서 받은 샴페인 잔을 기울였다. 탄산 기포가 혀끝에서 터지며 미약한 알코올 향을 남겼다. 이 밤의 목적은 취기가 아니었다. 그저, 지루할 틈을 채워줄 도구일 뿐. 은우는 손에 든 얇은 초대장을 다시 확인했다. ‘강지혁 개인전 오프닝 리셉션’. 웃음이 나왔다. 웃는 모양새는 아니었지만, 속으로는 분명히 그랬다. 오랜 세월 침묵했던 복수의 서곡이 드디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몇 걸음 더 옮기자, 리셉션 홀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곳이었다. 저마다 우아한 복장으로 잔을 부딪치며 웃고 떠드는 모습. 성공한 디자이너 강지혁의 인맥을 과시라도 하듯, 이름 있는 예술가들과 기업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강지혁.
    그때와 변함없이 화려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얄팍한 우정에 은우의 전부를 걸었던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아니, 우정이라 믿었던 것은 그저 지혁의 탐욕스러운 그림자에 불과했다. 은우의 꿈, 열정, 그리고 아이디어. 모든 것을 강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집어삼켰고, 그것을 발판 삼아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었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 환호와 찬사 속에서.

    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과거의 비릿한 기억을 억눌렀다.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밤을 견뎌냈다. 무너져 내린 모든 조각들을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아, 더 날카로운 칼날로 벼려냈다. 이제 그 칼날을 휘두를 때가 왔다.

    “어이, 은우 씨! 여기 계셨네요!”

    낯익은 목소리에 은우는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리자,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한 여성이 다가오고 있었다. 유명 갤러리의 큐레이터, 윤지민이었다. 그녀는 은우를 발견하고는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지민 씨, 늦었네요.”
    “어휴, 죄송해요. 마지막까지 일이 좀 꼬여서. 그래도 서은우 작가님 보러 달려왔잖아요.”

    지민은 애교 섞인 투정을 부리며 은우의 팔짱을 끼었다. 은우는 그녀의 팔을 부드럽게 풀고는 어깨를 툭 쳤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이제 막 시작이니까.”
    “맞아요, 오늘 강지혁 작가님 작품 진짜 대박이에요. 특히, 저기 중앙에 있는 ‘환영의 숲’이요. 보셨어요?”

    지민의 시선이 홀 중앙에 자리한 거대한 설치미술로 향했다. 숲의 형상을 본뜬 구조물 사이로 영롱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은우의 눈에는 그것이 거대한 독버섯처럼 보였다. 저 작품은, 분명 은우가 수년 전, 지혁에게 보여줬던 미완의 스케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내면의 숲’이라 이름 붙였던 아이디어.

    “아직요.” 은우는 덤덤하게 말했다. “천천히 둘러보려고요.”
    “그러시면 제가 안내해 드릴게요! 강 작가님이 지금쯤 저쪽에서 사람들하고 인사 나누고 계실 거예요.”

    지민은 은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홀 중앙을 향해 나아가자, 지혁의 웃음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왔다. 심장이 차갑게 수축하는 것을 느꼈다. 이 밤의 첫 번째 막이 오르고 있었다.

    “강 작가님! 이쪽이에요!”

    지민의 목소리가 터지자, 지혁의 시선이 은우에게로 향했다. 순간, 지혁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에 스친 것은 놀라움, 당혹감, 그리고 불쾌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순식간에 가면을 썼다.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혹시…?”

    은우는 아무 말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그에게 낯설게 다가오는 모양이었다. 예전의 초라했던 은우는 더 이상 없었다.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져진 단단함, 실패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자의 비범함이 은우의 표정에서 흘러나왔다.

    “강지혁 작가님, 오랜만입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에는 얼음처럼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다.

    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은우를 완전히 알아본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서… 서은우?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의 말 속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은우는 그 경계심을 읽고 속으로 미소 지었다. 그래, 바로 이거다. 이 불안감이 너를 갉아먹을 첫 번째 씨앗이 될 테니.

    “지민 씨 덕분에요.” 은우는 자연스럽게 지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민 씨가 이 전시회를 꼭 보러 오라고 권유하더군요. 특히 강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으셔서.”
    “아, 네! 제가요! 서은우 작가님은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이시잖아요. 마침 지혁 작가님도 같은 계열이라 생각해서 소개시켜드렸는데, 두 분이 원래 아는 사이셨네요?” 지민은 아무것도 모른 채 천진하게 웃었다.

    지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시선은 은우와 지민 사이를 오갔다. ‘서은우 작가님’, ‘저희 갤러리가 심혈을 기울여 모시고 있는 분’. 이 단어들이 지혁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맴도는 것이 눈에 선했다.

    “서은우 작가라니…?” 지혁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은우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지혁을 응시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강 작가님처럼 말이죠.”

    지혁은 더 이상 웃지 못했다. 그의 눈빛은 경계심을 넘어선 의구심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은우는 천천히 샴페인 잔을 들어 입술에 가져갔다. 톡 쏘는 탄산이 다시 혀끝을 자극했다.

    “참, 강 작가님. 이번 ‘환영의 숲’ 말입니다.” 은우는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말… 인상 깊더군요. 특히 그 구조와 빛의 활용이요. 제가 예전에 스케치했던 ‘내면의 숲’과 흡사한 부분이 많아서 더욱이 놀랐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의 눈동자가 공포에 질린 듯 흔들렸다. 주변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은우와 지혁, 둘만의 세계가 된 것 같았다. 지민은 두 사람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 그게 무슨…” 지혁은 말을 더듬었다.
    은우는 그의 말을 자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차가운 얼음처럼 지혁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아, 물론 제 스케치는 미숙한 습작이었죠. 강 작가님 덕분에 이렇게 멋진 작품으로 탄생한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언젠가… 강 작가님과 함께 작업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습니다. 제 아이디어가 강 작가님의 손을 거쳐 어떻게 피어날지… 정말 기대됩니다.”

    은우의 목소리는 더없이 상냥했지만, 그 속에는 숨 막히는 압박감이 서려 있었다. ‘함께 작업할 기회’, ‘내 아이디어’. 그 단어들이 지혁의 심장을 죄는 족쇄가 되어 울렸다.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얼굴에는 모든 것이 들통난 자의 절망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그의 화려한 가면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은우는 그의 흔들리는 눈빛 속에서 섬광처럼 번뜩이는 과거의 기억들을 보았다. 비열한 미소, 자신만만한 조롱, 그리고 무너져 내리던 은우의 세계.

    복수는 차가운 음식이라고 했던가. 은우는 이제 막 애피타이저를 내놓았을 뿐이었다. 본식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리고 이 갤러리의 화려한 조명 아래, 강지혁의 ‘환영의 숲’은 이제 그에게 진정한 ‘환영(幻影)’이자 피할 수 없는 지옥이 될 터였다.

    은우는 작게 속삭였다.
    “자, 이제 시작이야, 지혁아.”

    그 말은 오직 지혁의 귓가에만 맴도는, 감미로우면서도 섬뜩한 속삭임이었다.
    지혁은 입을 꾹 다문 채, 식은땀을 흘리며 은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는 이미, 깊은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홀 안의 웃음소리가 다시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지혁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비웃음으로 들렸다.
    그는 마치, 거대한 폭풍의 눈동자 한가운데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폭풍은, 은우의 손끝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