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무협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잊혀진 심연의 입구

    차가운 밤바람이 협곡을 휘돌아 치고,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낡은 전설의 속삭임이 메아리쳤다. 청풍은 낡은 두루마리 지도를 펼쳐 들었다. 희미한 먹으로 그려진 지형과, 해독하기 어려운 고대 문자들이 종이 위에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이곳인가….” 그의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 예리했다. 고요한 밤의 장막 아래, 그의 숨소리만이 유일한 움직임을 만들었다.

    십여 일 밤낮을 달려 산맥 깊숙이 들어온 터였다. 지도에 표시된 곳은 거대한 폭포 뒤에 가려진 은밀한 동굴 입구였다. 폭포수가 굉음을 내며 쏟아져 내리는 통에,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눈치채지 못했을 완벽한 위장이었다. 청풍은 기암괴석을 밟고 미끄러운 바위를 따라 조심스레 나아갔다. 축축한 공기가 뺨에 와닿았다. 마침내 폭포수 뒤편에 숨겨진 어두운 틈새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틈새는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눅진한 흙냄새와 함께 묘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횃불을 꺼내 들자, 주황빛 불꽃이 닿는 곳마다 빽빽한 거미줄과 음습한 분위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발을 옮기자, 그의 시선이 바닥에 닿았다.

    “핏자국인가?”

    말라붙어 검붉게 변색된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그리 오래된 것 같지는 않았다. 누군가 먼저 다녀갔다는 증거. 혹은, 이곳에 들어섰다가 변을 당했다는 증거였다. 청풍의 눈매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는 허리춤의 검자루를 잡았다.

    동굴은 곧 인공적인 통로로 이어졌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돌벽과 잊혀진 시대의 기묘한 문양들이 벽을 따라 새겨져 있었다. 먼지가 두텁게 쌓여 있었으나, 그 존재감만은 압도적이었다.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미세한 바람조차 느껴지지 않는 죽은 공간이었다. 오직 횃불의 흔들리는 불꽃만이 살아있음을 알리는 듯했다.

    “크윽!”

    갑자기 발밑이 푹 꺼지는 느낌과 함께, 청풍은 본능적으로 몸을 띄웠다. 착지하기도 전에 그의 등 뒤로 ‘쉬이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그는 몸을 틀어 허공에서 한 바퀴 돌며 칼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챙!’ 금속성의 마찰음과 함께, 투명한 실이 검날에 부딪혀 끊어졌다.

    “하마터면 걸릴 뻔했군.”

    바닥에는 미세한 구멍들이 뚫려 있었고, 그 사이를 엮어 보이지 않는 덫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면 온몸이 조각났을 것이다. 고대의 수호자들이 남긴 흔적은 집요하고도 잔인했다. 청풍은 검을 다시 칼집에 넣고, 더욱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발은 마치 수면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소리 없이 움직였다. ‘축지법’이라고 불리는 경공술의 극의였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통로는 점점 넓어졌고, 이따금씩 거대한 홀이 나타나기도 했다. 홀의 중앙에는 낡은 석상들이 서 있었다. 기괴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의 석상들은,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청풍은 석상들 사이를 지나다, 한 벽면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벽에는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손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문자는 마치 살아있는 듯, 그의 손끝에 미세한 떨림을 전달했다. 그는 오랜 시간 고대 문헌을 탐독하며 익혔던 지식을 떠올렸다.

    “여기는… 선인들의 은둔처였다… 혼돈의 시대, 세상의 종말을 예견한 자들이… 마지막 희망을 이곳에 숨겼다…”

    그는 문자의 의미를 해독하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서렸다.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세상의 운명을 가를 수 있는 무언가가 이곳에 봉인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심장이 미세하게 고동쳤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갑자기 멀리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통로의 벽이 미세하게 진동했고, 천장에서 먼지가 후드득 떨어졌다.

    “또 다른 침입자인가?”

    청풍은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그의 표정은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그의 감각이 외쳤다. *위험하다.*

    폭발음이 들려온 방향에서 희미한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곧이어, 묵직한 발소리가 통로를 따라 울려 퍼졌다. 발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명의 기척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가 짙게 묻어나는 발걸음이었다.

    청풍은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거대한 석상 뒤편에 몸을 감추자, 그의 존재는 어둠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그의 내공은 파도처럼 조용히 흘러, 주위의 모든 기척을 흡수하는 듯했다. 마치 그림자 자체가 된 것 같았다.

    잠시 후, 횃불을 든 그림자들이 통로를 따라 그의 위치로 다가왔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낡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었다. 심상치 않은 고수들이었다. 그들의 발소리에는 살기가 스며 있었다.

    “젠장, 함정이다!”

    선두에 서 있던 한 그림자가 외쳤다. 그들의 발밑에 거대한 마법진이 섬광을 내며 떠올랐다. ‘크아악!’ 비명과 함께 땅이 갈라지고, 뜨거운 열기가 치솟았다. 청풍은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무언가를 찾아 이곳에 온 듯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방금 청풍이 해독한 문자와 관련이 있을 터였다.

    그때, 마지막 그림자가 그의 석상 앞을 지나치려 할 때였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천천히 돌려 청풍이 숨어 있는 석상을 응시했다. 두건 너머의 시선이 마치 칼날처럼 청풍의 존재를 꿰뚫는 듯했다.

    서로의 존재를 깨달은 순간, 정적이 흘렀다.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그리고, 그림자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푸른 기운이 번개처럼 뿜어져 나왔다.

    ‘콰아앙!’

    석상이 폭발하고, 청풍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검을 뽑아 들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푸른 번개를 내뿜는 그림자를 향해 돌진했다.

    “감히 내 앞을 막아서느냐!”

    그림자의 목소리가 낮은 으르렁거림처럼 울렸다. 잊혀진 심연의 깊은 곳에서, 새로운 싸움의 서막이 올랐다.

  • 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민준은 자신이 이런 류의 괴담에 휘말릴 줄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는 도시의 심장부, 밤에도 꺼지지 않는 스크린 같은 초고층 빌딩 숲에서 빛나는 새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모든 것이 깔끔하고, 효율적이며, 최첨단 기술로 돌아가는 공간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처음에는 피곤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퇴근 후 겨우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마치면, 분명 침대 옆 협탁에 놓아두었던 이어폰이 소파 쿠션 틈새에서 발견되곤 했다. 한두 번은 그럴 수 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깜빡할 수도 있고, 물건이 제자리를 벗어나는 건 흔한 일이니까. 그러나 패턴이 생기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출근을 위해 현관문을 나서려는데, 분명 어제 밤 충전기에 꽂아두었던 스마트워치가 식탁 위, 그것도 미처 치우지 못한 시리얼 그릇 안에 놓여 있었다. 액정에는 알 수 없는 모래알 같은 노이즈가 희미하게 일렁였다. 민준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피곤함과 지각의 압박에 얼른 워치를 챙겨 나왔다. ‘배터리 방전이라도 됐나? 어째서 시리얼 그릇에…’ 의문은 꼬리를 물었지만, 이내 복잡한 출근길에 묻혔다.

    주말, 민준은 집에서 쉬기로 했다. 오랜만에 느긋하게 커피를 내려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거실 테이블 위에 놓인 무선 스피커가 갑자기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어폰을 끼고 있던 민준은 잠시 귀를 기울였다. 분명 아무것도 재생하지 않았는데,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잡음이 들려오듯 희미한 소리가 계속됐다.

    “어, 뭐야.”

    그는 스피커를 집어 들었다. 전원 버튼이 눌리지도 않았는데, 스피커 상단에 있는 LED 인디케이터가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마치 누군가 그 작은 점멸등으로 어떤 메시지를 보내는 것만 같았다. 민준은 배터리가 나갔나 싶어 충전 케이블을 꽂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잡음이 뚝 끊기고 LED는 정상적으로 충전 상태를 표시했다.

    ‘새 제품인데 벌써 고장인가? 요즘 가전제품들이 영 부실해.’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다음 날, 더욱 명확한 현상이 그를 찾아왔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아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보고 있을 때였다. 거실에서 ‘쨍’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였다.

    민준은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발소리에 맞춰 쿵쾅거렸다. 거실로 조심스럽게 발을 디디자, 바닥에는 물컵 하나가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파편들이 달빛을 받아 차갑게 빛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물을 마신 것은 저녁 식사 때였고, 컵은 분명 식탁 위에 멀쩡히 놓여 있었다.

    “누구… 없어요?”

    떨리는 목소리가 빈 공간을 울렸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집 안에는 민준 자신뿐이었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현상이 단순한 우연이나 기계 오작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이했다.

    그는 현관문과 창문들을 꼼꼼히 잠갔는지 다시 확인했다. 모든 것이 단단히 잠겨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갔다. 과학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지만, 이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 어떤 물리 법칙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는 다음날 아침, 당장 거실과 침실, 주방에 소형 감시 카메라를 설치했다. ‘이 모든 게 내가 헛것을 보거나, 꿈을 꾼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 그는 스스로에게 합리적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카메라가 모든 것을 기록할 것이고, 그러면 진실이 드러날 터였다.

    카메라 설치 후 이틀 밤이 지났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준은 안도하며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과민 반응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셋째 날 밤, 다시 시작되었다.

    그는 잠이 들 무렵, 서재 문이 삐걱이는 소리에 잠이 깼다. 분명 닫아두었던 문이었다. 그는 카메라를 의식하며 다시 잠을 청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맡 스탠드의 전구가 갑자기 ‘팟!’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버렸다. 방은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젠장!”

    놀란 민준은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뻔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그는 간신히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밤새도록 잠 한숨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았다.

    해가 뜨자마자 민준은 녹화된 영상을 확인했다. 거실 카메라 영상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주방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막으로 침실 카메라 영상을 재생했다. 영상은 민준이 잠자리에 들고, 뒤척이는 모습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서재 문이 저절로 열리는 순간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영상 속 서재 문은 마치 투명한 손이 밀기라도 한 듯 천천히 열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문이 혼자서 스르륵 열릴 뿐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영상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끊겼다. ‘기계 오작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시기적절하고, 묘하게 섬뜩했다. 영상은 민준이 놀라 깨어나기 직전, 스탠드 전구가 터지는 순간까지 담겨 있었고, 그 순간 정확히 녹화가 중단되었다. 마치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보고 싶지 않은 장면만 정확히 지워낸 것처럼.

    민준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명백히 폴터가이스트 현상이었다. 그러나 단순한 유령의 장난이라고 치부하기에는 어딘가 달랐다. 너무 정교하고, *효율적*이었다. 마치 어떤 시스템 오류처럼.

    그날 밤, 그는 거실 소파에 앉아 긴장된 자세로 어둠을 응시했다. 밤 11시 11분. 벽에 걸린 디지털 시계가 숫자를 바꿀 때였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유리 공예품이 흔들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이번에는 명백했다. 민준은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아무도 만지지 않았는데, 공예품이 마치 투명한 힘에 밀린 것처럼 미끄러져 떨어졌다. 심지어 떨어지기 직전, 공예품은 공중에서 잠시 멈춘 듯한 움직임을 보였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찰나의 정지.

    “너… 뭐냐.”

    민준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보다 더 깊은, 이해할 수 없는 경외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 왔다. 그 순간, 그의 등 뒤, 주방에서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땡그랑, 쨍그랑.’ 마치 누군가 주방 칼들을 바닥에 일부러 떨어뜨리는 소리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옆 칼꽂이에 꽂혀 있던 식칼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칼날 중 하나가, 마치 일부러 놓인 것처럼, 바닥의 타일에 뾰족하게 박혀 있었다. 그 칼날의 손잡이는 위를 향하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칼날이 박힌 타일 옆, 작은 설탕통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설탕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내부에서 어떤 진동이 일어나는 것처럼.

    민준은 천천히 설탕통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닿자마자, 설탕통은 차갑게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그 순간, 통 안에 담겨 있던 하얀 설탕들이 갑자기 미세하게 부풀어 오르더니, 마치 작은 모래폭풍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설탕 알갱이들이 스스로 움직이며, 통 바닥에 희미한 형체를 그렸다.

    그것은 숫자였다. 마치 오래된 컴퓨터 화면에서 깨진 픽셀처럼 불완전하고 흐릿한 숫자들.

    `3.1415926535…`

    원주율. 민준은 숨을 들이켰다. 왜? 왜 하필 원주율?
    그리고 이내 설탕들은 흩어지며 다른 형상을 만들었다. 이번에는 복잡한 기하학적인 도형이었다. 선과 점들이 불규칙하게 배열되다, 이내 정교한 패턴을 이루었다. 마치 어떤 에너지 파동의 시각화 같았다.

    민준은 정신없이 그것을 바라보았다. 이것은 유령의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어떤 정보의 전송이었다. 어떤 메시지.

    그때, 주방 창문 밖으로 도시의 불빛들이 한순간 일제히 깜빡였다. 거대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컴퓨터가 된 것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제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수십만 개의 불빛이 동기화된 듯이 점멸하는 광경은 압도적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주방 안. 설탕통 안의 설탕들이 다시금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마치 코드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기호들의 나열.

    그는 깨달았다. 이 아파트는, 아니 이 도시의 어딘가는, 어떤 보이지 않는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네트워크가 지금,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단순한 괴롭힘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계의 다른 차원에서 넘어오는 정보의 파편이었다. 이 초고층 빌딩, 수많은 전자기기, 끊임없이 흐르는 전류 속에서 발생한 어떤… *오류* 혹은 *접속*이었다.

    설탕 알갱이들이 마지막으로 형성한 것은, 그의 아파트 평면도와 비슷하면서도 어딘가 비틀린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작은 점이 반짝였다. 마치 이곳이 시공간의 교차점이라는 듯.

    민준은 설탕통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공포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차가운 지적 호기심과 함께,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똬리를 틀었다. 그는 이 현상이 자신에게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그리고 이 도시의 평범한 일상 아래 감춰진 진실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잠들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기묘한 아파트, 이 거대한 도시의 심장부에서, 그는 이제 이계의 신호와 공존해야 했다. 설탕통 안의 희미한 점멸은 계속되고 있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도시의 불빛은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에게는 더 이상 똑같은 풍경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 도시의 반짝임 속에서, 보이지 않는 균열과 그 틈새로 스며드는 다른 세계의 속삭임을 듣게 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알았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는 것을.

  • 던전 탐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녹슨 칼날의 그림자

    흙먼지가 자욱한 하늘은 늘 그랬듯 잿빛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이 망가진 세상에서, 강민호는 닳아빠진 부츠 끝으로 발밑의 흙을 툭툭 찼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철근이 뒤틀린 채 입을 벌린 붕괴된 지하철역 입구가 오늘 그들의 목적지였다. ‘제3 지하 공동’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쥐구멍.

    “이번엔 좀 다르겠죠?”

    어린 태오의 목소리가 흙먼지에 섞여 겨우 들려왔다. 언제나 희망을 갈구하는 그 목소리에는 이제 지친 기색마저 역력했다. 녀석의 등에는 제 몸집만 한 배낭이 짊어져 있었고, 얼굴은 며칠째 햇볕 대신 흙먼지만 먹은 듯 푸석했다.

    민호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 찬 낡은 총의 무게를 가늠했다. 보급은 끊긴 지 오래, 총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칼날은 녹슬었고, 방어구랍시고 걸친 가죽 조끼는 찢기고 헤져 제 기능을 못 한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찾아 헤매는 삶의 연속이었다.

    “다를 거 없어. 똑같아. 언제나처럼.”

    지혜가 냉소적으로 툭 던졌다. 그녀는 스캐너를 든 채 지하 공동의 입구에서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헬멧 아래로 보이는 눈은 흙먼지 때문에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 언제나 민호의 무모함을 말리고 태오의 어설픈 희망을 꺾는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벽 구조가 불안정해. 탐색 도중에도 계속 변형되고 있어. 지난번 그곳보다 훨씬 위험할 거야.”

    지혜의 말에 태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민호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그곳’에서 그들은 동료 하나를 잃었다. 쥐새끼 같은 변이체들이 떼로 달려들었고, 예상치 못한 붕괴가 덮쳤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래도 가야지.”

    민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며칠 전 겨우 찾아낸 통조림 하나를 셋이서 나눠 먹은 이후, 그들의 식량 창고는 완벽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 폐허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먼지와 녹슨 고철뿐. 유일한 희망은 언제나 지하 어딘가에 숨겨진 미지의 공간이었다.

    “조심해, 태오. 절대로 내 시야를 벗어나지 마.”

    민호는 태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조여 매고 플래시를 켠 다음, 민호는 제일 먼저 지하 공동으로 발을 들였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파이프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가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지하철 터널이었군.” 지혜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익숙한데.”

    그녀의 말처럼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던전은 그렇게 시작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잔해가 변이된 생물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는 곳. 하지만 곧 익숙함은 사라졌다. 터널은 이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고, 벽면에는 붉은색의 이끼 같은 것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태오가 플래시를 그 이끼에 비췄다. 붉은색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손대지 마.” 민호가 낮게 경고했다. “신경 독소 같은 걸 수도 있어.”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을까, 마치 무언가가 뜯겨나간 듯 기형적인 형태로 뒤틀린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진흙처럼 질척이는 액체가 고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불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미끄러운 바닥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민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너무 조용했다. 으레 이런 곳에는 작은 변이체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라도 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인 것 같은 고요함. 그 고요함이 민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수상해.” 민호가 낮게 읊조렸다.

    그때였다. 바닥의 질척이는 웅덩이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마치 진흙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검은 형체. 하지만 진흙은 아니었다. 섬뜩한 촉수가 뻗어 나오며 태오의 발목을 휘감으려 했다.

    “태오! 피해!”

    민호의 경고와 동시에 태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촉수는 허공을 휘저으며 주변의 잔해를 부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웅덩이 같았다. 검은 액체로 이루어진 몸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솟아 나왔고, 그 중심에는 섬뜩한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촉수 변이체!” 지혜가 소리쳤다. “저건 처음 봐!”

    “흩어지지 마! 붙어!”

    민호는 빠르게 총을 뽑았다. 낡은 총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는 붉은 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총알이 촉수 변이체의 몸체에 박혔다. 그러나 놈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몸체를 흔들며 더 많은 촉수를 뿜어냈다.

    검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지혜는 몸을 낮춰 간신히 촉수를 피했고, 태오는 배낭을 방패 삼아 버티고 있었다. 민호는 칼을 뽑아들었다. 녹슨 칼날이 플래시 불빛에 번쩍였다. 놈의 몸체는 칼날이 쉽게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촉수를 베어내도 곧바로 다른 촉수가 솟아났다.

    ‘약점은 저 붉은 눈이다.’ 민호는 직감했다.

    그는 촉수 하나를 간신히 피하며 몸을 날렸다. 질척이는 바닥에 발이 미끄러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놈의 붉은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번뜩였다. 민호는 칼을 고쳐 쥐고 모든 힘을 실어 놈의 눈을 향해 내리찍었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붉은 눈에 깊숙이 박혔다. 검은 액체가 마치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변이체가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의 촉수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주변의 콘크리트 잔해가 산산조각 났고, 바닥은 더욱 질척이는 액체로 가득 찼다.

    “민호 오빠!” 태오의 절규가 들렸다.

    민호는 칼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변이체의 몸체는 서서히 녹아내리듯 웅덩이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변이체들은 죽은 듯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괜찮아….” 민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손에는 검은 액체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괜찮아, 태오. 지혜.”

    그는 다시 플래시를 들어 주위를 비췄다. 변이체가 있던 자리는 온통 검은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놈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코를 찌르는 비린내는 더욱 진해졌다.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니.” 지혜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스캐너는 이상한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이 근처에… 또 다른 반응이 있어.”

    민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제 겨우 하나를 처리했을 뿐인데. 그들은 식량도, 물도, 희망도 바닥난 채 이 끔찍한 지하 공동으로 들어왔다. 과연 그들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찾아낼 수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이 원하는 건 그들의 절망뿐일지도 모른다.

    민호는 녹슨 칼날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칼날 끝에 묻은 검은 액체가 플래시 불빛에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될 터였다.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9화: 벽 속의 손자국

    김도진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도 온통 붉은 잔상이 아른거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밤의 아파트를 집어삼킬 듯 요란했다. 이틀 밤을 거의 새웠다. 아니, 정확히는 사흘 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인 줄 알았다. 오래된 아파트의 으레 있는 노후 현상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착각은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덜그럭.’

    침대 옆 협탁 위, 유리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처음엔 미동도 없던 컵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다가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방안을 휘감았다.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시작된 건 한 달 전이었다.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벽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엔 물건들이 제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이제는 아예 공중에 뜨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시작했다. 지난밤에는 주방 식칼이 서랍에서 튀어나와 식탁에 박혔다. 그걸 발견했을 때, 도진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더 이상 이 현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무시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도진은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지만, 거실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의자, 책상, 옷장… 평범한 가구들이 어둠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유령처럼 느껴졌다.

    ‘스르륵.’

    옷장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닫혔다. 바람이 불 리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환기 시스템도 꺼져 있었다. 옷장 안에 있던 셔츠 하나가 슬그머니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빨려 들어갔다.

    “이게… 대체….”

    도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포심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더 심했다. 닫혀 있던 창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창틀을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고층 아파트들의 불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아래 세상은 너무도 평온했다. 오직 이 공간만이, 비틀리고 일그러진 현실의 조각 같았다.

    “누구… 없어요?”

    도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째깍, 째깍, 째깍…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작은 탁자가 공중으로 ‘둥’ 하고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에서 떨어져 위로 솟구쳤다. 도진은 숨을 헙 들이켰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허공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균형을 잃은 것처럼 옆으로 기울어졌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과 잡지가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은 뒷걸음질 쳤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잔상으로 보일 만큼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에게 강하게 내던져진 것처럼,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벽으로 날아갔다.

    나무 탁자는 벽에 부딪히며 ‘콰자작!’ 하는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벽에는 깊은 금이 갔다. 그 순간, 도진은 분명히 보았다. 탁자가 벽에 부딪히기 직전, 허공에서 무언가 ‘뻗어 나가는’ 듯한 움직임을. 그것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마치 정확한 목표를 향해 가속된, 누군가의 ‘일격’ 같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벽에 박힌 탁자의 잔해와, 그 너머로 보이는 깊게 패인 벽을 번갈아 보았다. 일반적인 충격으로 저렇게 될 리 없었다. 마치 망치로 내리친 듯, 아니,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짓이겨진 듯한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거실 구석의 책장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책장 위에서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단순히 쓰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책들이 낱장으로 찢어지고,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마치 누군가 사납게 휩쓸고 지나간 듯한 파괴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기운이 강하게 덮쳐왔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했고, 폐가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도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 압박감 속에서, 그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쉬이익… 슈욱….’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숨결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거실의 벽 한가운데가 갑자기 안쪽으로 ‘푹’ 하고 움푹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이 벽을 강타한 것처럼.

    도진은 비명을 삼켰다. 벽에 박힌 자국은 둥글고 깊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다섯 개의 기다란 ‘손가락’ 모양의 금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 자국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살아있는 존재가, 벽을 잡고 강하게 움켜쥔 듯한 흔적이었다. 투명한 손이, 정확히 다섯 손가락으로 벽을 움켜쥐고 내리친 듯한… 완벽한 ‘손자국’이었다.

    그 자국은 분명히 그의 눈앞에서, 방금 막 생겨난 것이었다. 갓 태어난 상처처럼 생생했다.
    도진은 그 자국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등골을 꿰뚫는듯한 섬뜩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한 ‘살기’였다.
    벽에 새겨진 그 손자국은, 마치 살아있는 누군가가 엄청난 힘을 실어 내리친 ‘장력’의 흔적 같았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김도진은 무릎이 꺾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벽에 새겨진 섬뜩한 손자국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한 벽의 파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남긴 ‘경고’였다.
    다음은 네 차례라는… 섬뜩한 침묵 속의 경고.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9화: 벽 속의 손자국

    김도진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도 온통 붉은 잔상이 아른거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밤의 아파트를 집어삼킬 듯 요란했다. 이틀 밤을 거의 새웠다. 아니, 정확히는 사흘 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인 줄 알았다. 오래된 아파트의 으레 있는 노후 현상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착각은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덜그럭.’

    침대 옆 협탁 위, 유리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처음엔 미동도 없던 컵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다가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방안을 휘감았다.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시작된 건 한 달 전이었다.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벽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엔 물건들이 제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이제는 아예 공중에 뜨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시작했다. 지난밤에는 주방 식칼이 서랍에서 튀어나와 식탁에 박혔다. 그걸 발견했을 때, 도진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더 이상 이 현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무시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도진은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지만, 거실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의자, 책상, 옷장… 평범한 가구들이 어둠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유령처럼 느껴졌다.

    ‘스르륵.’

    옷장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닫혔다. 바람이 불 리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환기 시스템도 꺼져 있었다. 옷장 안에 있던 셔츠 하나가 슬그머니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빨려 들어갔다.

    “이게… 대체….”

    도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포심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더 심했다. 닫혀 있던 창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창틀을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고층 아파트들의 불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아래 세상은 너무도 평온했다. 오직 이 공간만이, 비틀리고 일그러진 현실의 조각 같았다.

    “누구… 없어요?”

    도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째깍, 째깍, 째깍…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작은 탁자가 공중으로 ‘둥’ 하고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에서 떨어져 위로 솟구쳤다. 도진은 숨을 헙 들이켰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허공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균형을 잃은 것처럼 옆으로 기울어졌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과 잡지가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은 뒷걸음질 쳤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잔상으로 보일 만큼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에게 강하게 내던져진 것처럼,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벽으로 날아갔다.

    나무 탁자는 벽에 부딪히며 ‘콰자작!’ 하는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벽에는 깊은 금이 갔다. 그 순간, 도진은 분명히 보았다. 탁자가 벽에 부딪히기 직전, 허공에서 무언가 ‘뻗어 나가는’ 듯한 움직임을. 그것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마치 정확한 목표를 향해 가속된, 누군가의 ‘일격’ 같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벽에 박힌 탁자의 잔해와, 그 너머로 보이는 깊게 패인 벽을 번갈아 보았다. 일반적인 충격으로 저렇게 될 리 없었다. 마치 망치로 내리친 듯, 아니,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짓이겨진 듯한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거실 구석의 책장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책장 위에서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단순히 쓰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책들이 낱장으로 찢어지고,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마치 누군가 사납게 휩쓸고 지나간 듯한 파괴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기운이 강하게 덮쳐왔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했고, 폐가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도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 압박감 속에서, 그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쉬이익… 슈욱….’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숨결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거실의 벽 한가운데가 갑자기 안쪽으로 ‘푹’ 하고 움푹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이 벽을 강타한 것처럼.

    도진은 비명을 삼켰다. 벽에 박힌 자국은 둥글고 깊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다섯 개의 기다란 ‘손가락’ 모양의 금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 자국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살아있는 존재가, 벽을 잡고 강하게 움켜쥔 듯한 흔적이었다. 투명한 손이, 정확히 다섯 손가락으로 벽을 움켜쥐고 내리친 듯한… 완벽한 ‘손자국’이었다.

    그 자국은 분명히 그의 눈앞에서, 방금 막 생겨난 것이었다. 갓 태어난 상처처럼 생생했다.
    도진은 그 자국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등골을 꿰뚫는듯한 섬뜩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한 ‘살기’였다.
    벽에 새겨진 그 손자국은, 마치 살아있는 누군가가 엄청난 힘을 실어 내리친 ‘장력’의 흔적 같았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김도진은 무릎이 꺾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벽에 새겨진 섬뜩한 손자국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한 벽의 파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남긴 ‘경고’였다.
    다음은 네 차례라는… 섬뜩한 침묵 속의 경고.

  • 던전 탐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녹슨 칼날의 그림자

    흙먼지가 자욱한 하늘은 늘 그랬듯 잿빛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이 망가진 세상에서, 강민호는 닳아빠진 부츠 끝으로 발밑의 흙을 툭툭 찼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철근이 뒤틀린 채 입을 벌린 붕괴된 지하철역 입구가 오늘 그들의 목적지였다. ‘제3 지하 공동’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쥐구멍.

    “이번엔 좀 다르겠죠?”

    어린 태오의 목소리가 흙먼지에 섞여 겨우 들려왔다. 언제나 희망을 갈구하는 그 목소리에는 이제 지친 기색마저 역력했다. 녀석의 등에는 제 몸집만 한 배낭이 짊어져 있었고, 얼굴은 며칠째 햇볕 대신 흙먼지만 먹은 듯 푸석했다.

    민호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 찬 낡은 총의 무게를 가늠했다. 보급은 끊긴 지 오래, 총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칼날은 녹슬었고, 방어구랍시고 걸친 가죽 조끼는 찢기고 헤져 제 기능을 못 한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찾아 헤매는 삶의 연속이었다.

    “다를 거 없어. 똑같아. 언제나처럼.”

    지혜가 냉소적으로 툭 던졌다. 그녀는 스캐너를 든 채 지하 공동의 입구에서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헬멧 아래로 보이는 눈은 흙먼지 때문에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 언제나 민호의 무모함을 말리고 태오의 어설픈 희망을 꺾는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벽 구조가 불안정해. 탐색 도중에도 계속 변형되고 있어. 지난번 그곳보다 훨씬 위험할 거야.”

    지혜의 말에 태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민호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그곳’에서 그들은 동료 하나를 잃었다. 쥐새끼 같은 변이체들이 떼로 달려들었고, 예상치 못한 붕괴가 덮쳤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래도 가야지.”

    민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며칠 전 겨우 찾아낸 통조림 하나를 셋이서 나눠 먹은 이후, 그들의 식량 창고는 완벽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 폐허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먼지와 녹슨 고철뿐. 유일한 희망은 언제나 지하 어딘가에 숨겨진 미지의 공간이었다.

    “조심해, 태오. 절대로 내 시야를 벗어나지 마.”

    민호는 태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조여 매고 플래시를 켠 다음, 민호는 제일 먼저 지하 공동으로 발을 들였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파이프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가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지하철 터널이었군.” 지혜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익숙한데.”

    그녀의 말처럼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던전은 그렇게 시작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잔해가 변이된 생물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는 곳. 하지만 곧 익숙함은 사라졌다. 터널은 이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고, 벽면에는 붉은색의 이끼 같은 것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태오가 플래시를 그 이끼에 비췄다. 붉은색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손대지 마.” 민호가 낮게 경고했다. “신경 독소 같은 걸 수도 있어.”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을까, 마치 무언가가 뜯겨나간 듯 기형적인 형태로 뒤틀린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진흙처럼 질척이는 액체가 고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불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미끄러운 바닥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민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너무 조용했다. 으레 이런 곳에는 작은 변이체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라도 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인 것 같은 고요함. 그 고요함이 민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수상해.” 민호가 낮게 읊조렸다.

    그때였다. 바닥의 질척이는 웅덩이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마치 진흙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검은 형체. 하지만 진흙은 아니었다. 섬뜩한 촉수가 뻗어 나오며 태오의 발목을 휘감으려 했다.

    “태오! 피해!”

    민호의 경고와 동시에 태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촉수는 허공을 휘저으며 주변의 잔해를 부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웅덩이 같았다. 검은 액체로 이루어진 몸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솟아 나왔고, 그 중심에는 섬뜩한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촉수 변이체!” 지혜가 소리쳤다. “저건 처음 봐!”

    “흩어지지 마! 붙어!”

    민호는 빠르게 총을 뽑았다. 낡은 총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는 붉은 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총알이 촉수 변이체의 몸체에 박혔다. 그러나 놈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몸체를 흔들며 더 많은 촉수를 뿜어냈다.

    검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지혜는 몸을 낮춰 간신히 촉수를 피했고, 태오는 배낭을 방패 삼아 버티고 있었다. 민호는 칼을 뽑아들었다. 녹슨 칼날이 플래시 불빛에 번쩍였다. 놈의 몸체는 칼날이 쉽게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촉수를 베어내도 곧바로 다른 촉수가 솟아났다.

    ‘약점은 저 붉은 눈이다.’ 민호는 직감했다.

    그는 촉수 하나를 간신히 피하며 몸을 날렸다. 질척이는 바닥에 발이 미끄러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놈의 붉은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번뜩였다. 민호는 칼을 고쳐 쥐고 모든 힘을 실어 놈의 눈을 향해 내리찍었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붉은 눈에 깊숙이 박혔다. 검은 액체가 마치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변이체가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의 촉수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주변의 콘크리트 잔해가 산산조각 났고, 바닥은 더욱 질척이는 액체로 가득 찼다.

    “민호 오빠!” 태오의 절규가 들렸다.

    민호는 칼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변이체의 몸체는 서서히 녹아내리듯 웅덩이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변이체들은 죽은 듯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괜찮아….” 민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손에는 검은 액체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괜찮아, 태오. 지혜.”

    그는 다시 플래시를 들어 주위를 비췄다. 변이체가 있던 자리는 온통 검은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놈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코를 찌르는 비린내는 더욱 진해졌다.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니.” 지혜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스캐너는 이상한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이 근처에… 또 다른 반응이 있어.”

    민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제 겨우 하나를 처리했을 뿐인데. 그들은 식량도, 물도, 희망도 바닥난 채 이 끔찍한 지하 공동으로 들어왔다. 과연 그들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찾아낼 수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이 원하는 건 그들의 절망뿐일지도 모른다.

    민호는 녹슨 칼날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칼날 끝에 묻은 검은 액체가 플래시 불빛에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될 터였다.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유리잔이 춤추는 아파트**

    고요한 밤, 도시의 불빛은 항상 깨어 있었다. 유나는 제법 익숙해진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베란다 창문을 타고 스며드는 여름밤의 습한 공기가 살짝 답답했지만, 오늘 밤은 평소와 다른 기운이 그녀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손목에 찬 심플한 팔찌가 희미하게 진동하며, 작은 알림음 대신 따뜻한 온기를 전해왔다.

    “모모, 뭐야?”

    유나가 팔찌를 톡톡 두드리자, 팔찌의 중심에 박혀있던 수정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공중에서 형상을 이루었다. 보송보송한 털에 커다란 눈, 고양이 같으면서도 요정 같은 이 작은 생명체는 유나의 오랜 파트너, 모모였다.

    “음냐… 콜록! 갑작스러운 기운이야, 유나!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어!”

    모모는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말하며 하품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허공을 킁킁거렸다.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고? 어떤 기운인데?”

    “혼란스러워! 슬픔과 분노, 절망이 뒤엉킨 에너지인데… 희한하게 물질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마치… 마치 살아있는 감정의 폭풍 같달까!”

    모모의 말에 유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아있는 감정의 폭풍. 그것은 보통 마법소녀의 손길이 닿기 전의, 초기 단계의 악몽 같은 존재들이 흔히 보이던 특성이었다. 하지만 물질계에 직접적인 영향이라니.

    “위치는?”

    “어…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약 3.7킬로미터. 스무 층짜리 아파트 건물이야. 제일 높은 층, 2004호에서 감지되고 있어.”

    모모의 보고에 유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야상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임무를 앞둔 전사의 그것이었다.

    밤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아파트 단지는 여느 도시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조경, 늦은 시간에도 몇몇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유나는 20층의 2004호를 올려다보자마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다른 집들과 달리 그곳의 불빛은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듯했다.

    딩동.

    벨을 누르자 한참 뒤에야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여자는 초췌한 얼굴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머리를 대충 묶은 채 잠옷 차림이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택배 착오로 온 건이 있어서 확인차 잠시 들렀습니다.”

    유나는 미리 생각해 둔 핑계를 댔다. 마법소녀라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택배요? 저는 시킨 게 없는데…”

    여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나를 보았지만, 이내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들어오세요. 어차피 이 꼴을 누가 보겠다고…”

    그녀는 문을 완전히 열며 뒤돌아섰다. 유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묘한 냉기를 느꼈다. 한여름 밤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이 좀 지저분하죠? 죄송해요. 요즘 통… 기운이 없어서.”

    여자의 이름은 서진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읽다 만 잡지들과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유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테이블 위,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아야 할 공간에 놓여 있는 유리잔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잔을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모는 유나의 어깨에 살짝 내려앉아 귓속말로 속삭였다.

    “유나, 느껴져? 감정의 파동이 이 공간을 뒤덮고 있어. 모든 물체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있다고!”

    유나는 서진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혹시 요즘 이상한 일 없으셨어요?”

    유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이상한 일이요? 매일이 이상한데요. 잠도 못 자고, 물건은 저절로 떨어지고, 갑자기 불이 꺼지거나 켜지고… 제가 미쳐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서 흔들리던 유리잔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리잔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꺄악!”

    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나는 재빨리 그녀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으세요?”

    “이… 이건 또 뭐야! 또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서진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절망적인 감정이 공간을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반응하듯,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삐뚤어지고, 책장의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천장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더니 결국 ‘팟!’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암흑 속에서, 서진의 흐느낌만이 적막을 갈랐다. 유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평범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었다. 서진의 내면에 갇힌 깊은 절망이, 이 공간에 유령 같은 형태로 발현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유나, 이건 강력한 감정의 덩어리야!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았지만, 그 어떤 괴물보다도 위험해질 수 있어!”

    모모의 목소리가 유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알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변의 물건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거실 중앙의 커다란 장식장이 기울어지더니, 곧 바닥으로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뒤편에서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서진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 순간, 날아오던 유리병 하나가 유나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유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파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팔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

    유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공중에 떠 있던 물건들이 일순 멈칫하는 듯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감싸던 절망의 기운이 잠시 물러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당신의 고통을 이용하고 있어. 당신이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내가 멈출게.”

    유나는 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모모, 준비해.”

    “알았어, 유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서둘러야 해!”

    유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에 갇힌 절망을 정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근원을 마주하기 위해. 이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주변의 물건들이 다시금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나는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이 밤, 유리잔이 춤추는 아파트에 별빛 마법소녀의 노래가 울려 퍼질 차례였다.

  • 무협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제19화: 벽 속의 손자국

    김도진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도 온통 붉은 잔상이 아른거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밤의 아파트를 집어삼킬 듯 요란했다. 이틀 밤을 거의 새웠다. 아니, 정확히는 사흘 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인 줄 알았다. 오래된 아파트의 으레 있는 노후 현상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착각은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덜그럭.’

    침대 옆 협탁 위, 유리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처음엔 미동도 없던 컵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다가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방안을 휘감았다.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시작된 건 한 달 전이었다.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벽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엔 물건들이 제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이제는 아예 공중에 뜨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시작했다. 지난밤에는 주방 식칼이 서랍에서 튀어나와 식탁에 박혔다. 그걸 발견했을 때, 도진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더 이상 이 현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무시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도진은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지만, 거실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의자, 책상, 옷장… 평범한 가구들이 어둠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유령처럼 느껴졌다.

    ‘스르륵.’

    옷장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닫혔다. 바람이 불 리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환기 시스템도 꺼져 있었다. 옷장 안에 있던 셔츠 하나가 슬그머니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빨려 들어갔다.

    “이게… 대체….”

    도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포심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더 심했다. 닫혀 있던 창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창틀을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고층 아파트들의 불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아래 세상은 너무도 평온했다. 오직 이 공간만이, 비틀리고 일그러진 현실의 조각 같았다.

    “누구… 없어요?”

    도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째깍, 째깍, 째깍…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작은 탁자가 공중으로 ‘둥’ 하고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에서 떨어져 위로 솟구쳤다. 도진은 숨을 헙 들이켰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허공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균형을 잃은 것처럼 옆으로 기울어졌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과 잡지가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은 뒷걸음질 쳤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잔상으로 보일 만큼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에게 강하게 내던져진 것처럼,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벽으로 날아갔다.

    나무 탁자는 벽에 부딪히며 ‘콰자작!’ 하는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벽에는 깊은 금이 갔다. 그 순간, 도진은 분명히 보았다. 탁자가 벽에 부딪히기 직전, 허공에서 무언가 ‘뻗어 나가는’ 듯한 움직임을. 그것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마치 정확한 목표를 향해 가속된, 누군가의 ‘일격’ 같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벽에 박힌 탁자의 잔해와, 그 너머로 보이는 깊게 패인 벽을 번갈아 보았다. 일반적인 충격으로 저렇게 될 리 없었다. 마치 망치로 내리친 듯, 아니,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짓이겨진 듯한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거실 구석의 책장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책장 위에서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단순히 쓰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책들이 낱장으로 찢어지고,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마치 누군가 사납게 휩쓸고 지나간 듯한 파괴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기운이 강하게 덮쳐왔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했고, 폐가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도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 압박감 속에서, 그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쉬이익… 슈욱….’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숨결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거실의 벽 한가운데가 갑자기 안쪽으로 ‘푹’ 하고 움푹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이 벽을 강타한 것처럼.

    도진은 비명을 삼켰다. 벽에 박힌 자국은 둥글고 깊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다섯 개의 기다란 ‘손가락’ 모양의 금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 자국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살아있는 존재가, 벽을 잡고 강하게 움켜쥔 듯한 흔적이었다. 투명한 손이, 정확히 다섯 손가락으로 벽을 움켜쥐고 내리친 듯한… 완벽한 ‘손자국’이었다.

    그 자국은 분명히 그의 눈앞에서, 방금 막 생겨난 것이었다. 갓 태어난 상처처럼 생생했다.
    도진은 그 자국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등골을 꿰뚫는듯한 섬뜩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한 ‘살기’였다.
    벽에 새겨진 그 손자국은, 마치 살아있는 누군가가 엄청난 힘을 실어 내리친 ‘장력’의 흔적 같았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김도진은 무릎이 꺾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벽에 새겨진 섬뜩한 손자국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한 벽의 파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남긴 ‘경고’였다.
    다음은 네 차례라는… 섬뜩한 침묵 속의 경고.

  • 마법소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유리잔이 춤추는 아파트**

    고요한 밤, 도시의 불빛은 항상 깨어 있었다. 유나는 제법 익숙해진 야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베란다 창문을 타고 스며드는 여름밤의 습한 공기가 살짝 답답했지만, 오늘 밤은 평소와 다른 기운이 그녀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손목에 찬 심플한 팔찌가 희미하게 진동하며, 작은 알림음 대신 따뜻한 온기를 전해왔다.

    “모모, 뭐야?”

    유나가 팔찌를 톡톡 두드리자, 팔찌의 중심에 박혀있던 수정에서 작은 빛이 뿜어져 나오며 공중에서 형상을 이루었다. 보송보송한 털에 커다란 눈, 고양이 같으면서도 요정 같은 이 작은 생명체는 유나의 오랜 파트너, 모모였다.

    “음냐… 콜록! 갑작스러운 기운이야, 유나! 평범한 수준을 넘어서고 있어!”

    모모는 비몽사몽 한 목소리로 말하며 하품을 쩍 벌렸다. 하지만 이내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허공을 킁킁거렸다.

    “평범한 수준이 아니라고? 어떤 기운인데?”

    “혼란스러워! 슬픔과 분노, 절망이 뒤엉킨 에너지인데… 희한하게 물질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어. 마치… 마치 살아있는 감정의 폭풍 같달까!”

    모모의 말에 유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살아있는 감정의 폭풍. 그것은 보통 마법소녀의 손길이 닿기 전의, 초기 단계의 악몽 같은 존재들이 흔히 보이던 특성이었다. 하지만 물질계에 직접적인 영향이라니.

    “위치는?”

    “어… 여기에서 북동쪽으로 약 3.7킬로미터. 스무 층짜리 아파트 건물이야. 제일 높은 층, 2004호에서 감지되고 있어.”

    모모의 보고에 유나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범한 야상 점퍼에 청바지 차림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미 임무를 앞둔 전사의 그것이었다.

    밤바람을 가르며 도착한 아파트 단지는 여느 도시의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조경, 늦은 시간에도 몇몇 창문에서는 불빛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유나는 20층의 2004호를 올려다보자마자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다른 집들과 달리 그곳의 불빛은 불안정하게 깜빡이는 듯했다.

    딩동.

    벨을 누르자 한참 뒤에야 문이 열렸다. 문틈으로 빼꼼히 얼굴을 내민 여자는 초췌한 얼굴에 짙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다. 서른쯤 되어 보이는 그녀는 머리를 대충 묶은 채 잠옷 차림이었다.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혹시… 택배 착오로 온 건이 있어서 확인차 잠시 들렀습니다.”

    유나는 미리 생각해 둔 핑계를 댔다. 마법소녀라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택배요? 저는 시킨 게 없는데…”

    여자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나를 보았지만, 이내 힘없이 한숨을 쉬었다.

    “들어오세요. 어차피 이 꼴을 누가 보겠다고…”

    그녀는 문을 완전히 열며 뒤돌아섰다. 유나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묘한 냉기를 느꼈다. 한여름 밤인데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집이 좀 지저분하죠? 죄송해요. 요즘 통… 기운이 없어서.”

    여자의 이름은 서진이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거실 바닥에는 읽다 만 잡지들과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고, 식탁 위에는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들이 쌓여 있었다. 하지만 유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따로 있었다. 테이블 위, 아무것도 올려져 있지 않아야 할 공간에 놓여 있는 유리잔 하나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잔을 밀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모는 유나의 어깨에 살짝 내려앉아 귓속말로 속삭였다.

    “유나, 느껴져? 감정의 파동이 이 공간을 뒤덮고 있어. 모든 물체에 에너지를 부여하고 있다고!”

    유나는 서진에게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끄덕였다.

    “저… 혹시 요즘 이상한 일 없으셨어요?”

    유나가 조심스럽게 묻자 서진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너무나도 지쳐 보였다.

    “이상한 일이요? 매일이 이상한데요. 잠도 못 자고, 물건은 저절로 떨어지고, 갑자기 불이 꺼지거나 켜지고… 제가 미쳐가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녀는 테이블 위에서 흔들리던 유리잔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유리잔이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꺄악!”

    서진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은 공포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유나는 재빨리 그녀를 보호하듯 앞을 가로막았다.

    “괜찮으세요?”

    “이… 이건 또 뭐야! 또야! 대체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서진은 울음을 터뜨리며 주저앉았다. 그녀의 절망적인 감정이 공간을 휘몰아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반응하듯, 주변의 사물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걸려있던 액자가 삐뚤어지고, 책장의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천장의 전등이 미친 듯이 깜빡거리더니 결국 ‘팟!’ 소리와 함께 꺼져버렸다.

    암흑 속에서, 서진의 흐느낌만이 적막을 갈랐다. 유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평범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 아니었다. 서진의 내면에 갇힌 깊은 절망이, 이 공간에 유령 같은 형태로 발현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그 자체가 하나의 존재가 되어버린 것일 수도 있었다.

    “유나, 이건 강력한 감정의 덩어리야! 물리적 형태를 갖지 않았지만, 그 어떤 괴물보다도 위험해질 수 있어!”

    모모의 목소리가 유나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알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어.”

    유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주변의 물건들이 굉음을 내며 날아다니기 시작했다. 거실 중앙의 커다란 장식장이 기울어지더니, 곧 바닥으로 쓰러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 뒤편에서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서진의 절망 어린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 순간, 날아오던 유리병 하나가 유나의 얼굴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유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들어 막았다. ‘파창!’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병이 팔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지만,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제 그만해.”

    유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공중에 떠 있던 물건들이 일순 멈칫하는 듯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감싸던 절망의 기운이 잠시 물러서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당신의 고통을 이용하고 있어. 당신이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내가 멈출게.”

    유나는 서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모모, 준비해.”

    “알았어, 유나! 기운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 서둘러야 해!”

    유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심장이 강하게 고동치기 시작했다. 이 아파트에 갇힌 절망을 정화하기 위해, 그리고 그 고통의 근원을 마주하기 위해. 이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드러낼 시간이었다.

    주변의 물건들이 다시금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유나는 그 혼란의 한가운데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피어올랐다. 이 밤, 유리잔이 춤추는 아파트에 별빛 마법소녀의 노래가 울려 퍼질 차례였다.

  • 던전 탐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녹슨 칼날의 그림자

    흙먼지가 자욱한 하늘은 늘 그랬듯 잿빛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이 망가진 세상에서, 강민호는 닳아빠진 부츠 끝으로 발밑의 흙을 툭툭 찼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철근이 뒤틀린 채 입을 벌린 붕괴된 지하철역 입구가 오늘 그들의 목적지였다. ‘제3 지하 공동’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쥐구멍.

    “이번엔 좀 다르겠죠?”

    어린 태오의 목소리가 흙먼지에 섞여 겨우 들려왔다. 언제나 희망을 갈구하는 그 목소리에는 이제 지친 기색마저 역력했다. 녀석의 등에는 제 몸집만 한 배낭이 짊어져 있었고, 얼굴은 며칠째 햇볕 대신 흙먼지만 먹은 듯 푸석했다.

    민호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 찬 낡은 총의 무게를 가늠했다. 보급은 끊긴 지 오래, 총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칼날은 녹슬었고, 방어구랍시고 걸친 가죽 조끼는 찢기고 헤져 제 기능을 못 한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찾아 헤매는 삶의 연속이었다.

    “다를 거 없어. 똑같아. 언제나처럼.”

    지혜가 냉소적으로 툭 던졌다. 그녀는 스캐너를 든 채 지하 공동의 입구에서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헬멧 아래로 보이는 눈은 흙먼지 때문에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 언제나 민호의 무모함을 말리고 태오의 어설픈 희망을 꺾는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벽 구조가 불안정해. 탐색 도중에도 계속 변형되고 있어. 지난번 그곳보다 훨씬 위험할 거야.”

    지혜의 말에 태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민호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그곳’에서 그들은 동료 하나를 잃었다. 쥐새끼 같은 변이체들이 떼로 달려들었고, 예상치 못한 붕괴가 덮쳤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래도 가야지.”

    민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며칠 전 겨우 찾아낸 통조림 하나를 셋이서 나눠 먹은 이후, 그들의 식량 창고는 완벽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 폐허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먼지와 녹슨 고철뿐. 유일한 희망은 언제나 지하 어딘가에 숨겨진 미지의 공간이었다.

    “조심해, 태오. 절대로 내 시야를 벗어나지 마.”

    민호는 태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조여 매고 플래시를 켠 다음, 민호는 제일 먼저 지하 공동으로 발을 들였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파이프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가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지하철 터널이었군.” 지혜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익숙한데.”

    그녀의 말처럼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던전은 그렇게 시작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잔해가 변이된 생물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는 곳. 하지만 곧 익숙함은 사라졌다. 터널은 이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고, 벽면에는 붉은색의 이끼 같은 것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태오가 플래시를 그 이끼에 비췄다. 붉은색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손대지 마.” 민호가 낮게 경고했다. “신경 독소 같은 걸 수도 있어.”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을까, 마치 무언가가 뜯겨나간 듯 기형적인 형태로 뒤틀린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진흙처럼 질척이는 액체가 고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불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미끄러운 바닥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민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너무 조용했다. 으레 이런 곳에는 작은 변이체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라도 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인 것 같은 고요함. 그 고요함이 민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수상해.” 민호가 낮게 읊조렸다.

    그때였다. 바닥의 질척이는 웅덩이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마치 진흙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검은 형체. 하지만 진흙은 아니었다. 섬뜩한 촉수가 뻗어 나오며 태오의 발목을 휘감으려 했다.

    “태오! 피해!”

    민호의 경고와 동시에 태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촉수는 허공을 휘저으며 주변의 잔해를 부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웅덩이 같았다. 검은 액체로 이루어진 몸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솟아 나왔고, 그 중심에는 섬뜩한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촉수 변이체!” 지혜가 소리쳤다. “저건 처음 봐!”

    “흩어지지 마! 붙어!”

    민호는 빠르게 총을 뽑았다. 낡은 총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는 붉은 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총알이 촉수 변이체의 몸체에 박혔다. 그러나 놈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몸체를 흔들며 더 많은 촉수를 뿜어냈다.

    검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지혜는 몸을 낮춰 간신히 촉수를 피했고, 태오는 배낭을 방패 삼아 버티고 있었다. 민호는 칼을 뽑아들었다. 녹슨 칼날이 플래시 불빛에 번쩍였다. 놈의 몸체는 칼날이 쉽게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촉수를 베어내도 곧바로 다른 촉수가 솟아났다.

    ‘약점은 저 붉은 눈이다.’ 민호는 직감했다.

    그는 촉수 하나를 간신히 피하며 몸을 날렸다. 질척이는 바닥에 발이 미끄러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놈의 붉은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번뜩였다. 민호는 칼을 고쳐 쥐고 모든 힘을 실어 놈의 눈을 향해 내리찍었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붉은 눈에 깊숙이 박혔다. 검은 액체가 마치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변이체가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의 촉수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주변의 콘크리트 잔해가 산산조각 났고, 바닥은 더욱 질척이는 액체로 가득 찼다.

    “민호 오빠!” 태오의 절규가 들렸다.

    민호는 칼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변이체의 몸체는 서서히 녹아내리듯 웅덩이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변이체들은 죽은 듯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괜찮아….” 민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손에는 검은 액체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괜찮아, 태오. 지혜.”

    그는 다시 플래시를 들어 주위를 비췄다. 변이체가 있던 자리는 온통 검은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놈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코를 찌르는 비린내는 더욱 진해졌다.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니.” 지혜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스캐너는 이상한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이 근처에… 또 다른 반응이 있어.”

    민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제 겨우 하나를 처리했을 뿐인데. 그들은 식량도, 물도, 희망도 바닥난 채 이 끔찍한 지하 공동으로 들어왔다. 과연 그들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찾아낼 수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이 원하는 건 그들의 절망뿐일지도 모른다.

    민호는 녹슨 칼날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칼날 끝에 묻은 검은 액체가 플래시 불빛에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