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9화: 벽 속의 손자국
김도진은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안으로도 온통 붉은 잔상이 아른거렸다.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밤의 아파트를 집어삼킬 듯 요란했다. 이틀 밤을 거의 새웠다. 아니, 정확히는 사흘 밤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인 줄 알았다. 오래된 아파트의 으레 있는 노후 현상이라 치부했다. 그런데 착각은 이토록 집요하게 자신을 괴롭히지 않는다.
‘덜그럭.’
침대 옆 협탁 위, 유리컵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이미 여러 번 겪은 일이었다. 처음엔 미동도 없던 컵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다가 결국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방안을 휘감았다.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읊조렸다. 지긋지긋했다. 이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시작된 건 한 달 전이었다. 이사 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처음엔 벽에서 긁는 소리가 들렸고, 그 다음엔 물건들이 제자리에서 조금씩 벗어났다. 이제는 아예 공중에 뜨거나,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기 시작했다. 지난밤에는 주방 식칼이 서랍에서 튀어나와 식탁에 박혔다. 그걸 발견했을 때, 도진은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그는 더 이상 이 현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니, 무시하기엔 너무 위험했다.
도진은 눈을 뜨고 천장을 응시했다. 형광등은 꺼져 있었지만, 거실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불빛이 방 안의 실루엣을 드러냈다. 의자, 책상, 옷장… 평범한 가구들이 어둠 속에서 마치 살아있는 유령처럼 느껴졌다.
‘스르륵.’
옷장 문이 아주 미세하게 열렸다 닫혔다. 바람이 불 리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환기 시스템도 꺼져 있었다. 옷장 안에 있던 셔츠 하나가 슬그머니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빨려 들어갔다.
“이게… 대체….”
도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그는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이대로 누워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포심이 뼛속까지 스며들어 그를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 그는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다.
거실은 더 심했다. 닫혀 있던 창문이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 움직임은 바람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창틀을 잡고 흔드는 것 같았다. 창밖으로는 고층 아파트들의 불빛이 점점이 박혀 있었고, 도로 위를 달리는 차들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 아래 세상은 너무도 평온했다. 오직 이 공간만이, 비틀리고 일그러진 현실의 조각 같았다.
“누구… 없어요?”
도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지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째깍, 째깍, 째깍…
갑자기, 거실 한가운데 놓여있던 작은 탁자가 공중으로 ‘둥’ 하고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닥에서 떨어져 위로 솟구쳤다. 도진은 숨을 헙 들이켰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허공에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는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균형을 잃은 것처럼 옆으로 기울어졌다. 탁자 위에 놓여있던 리모컨과 잡지가 ‘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진은 뒷걸음질 쳤다. 탁자는 그의 눈앞에서 빙글빙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나중에는 잔상으로 보일 만큼 빠르게 돌았다. 그리고는 마치 누군가에게 강하게 내던져진 것처럼, ‘쾅!’ 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벽으로 날아갔다.
나무 탁자는 벽에 부딪히며 ‘콰자작!’ 하는 굉음과 함께 박살 났다.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고, 벽에는 깊은 금이 갔다. 그 순간, 도진은 분명히 보았다. 탁자가 벽에 부딪히기 직전, 허공에서 무언가 ‘뻗어 나가는’ 듯한 움직임을. 그것은 단순한 충격이 아니었다. 마치 정확한 목표를 향해 가속된, 누군가의 ‘일격’ 같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벽에 박힌 탁자의 잔해와, 그 너머로 보이는 깊게 패인 벽을 번갈아 보았다. 일반적인 충격으로 저렇게 될 리 없었다. 마치 망치로 내리친 듯, 아니, 그보다 더 강한 힘으로 짓이겨진 듯한 흔적이었다.
그때였다. 거실 구석의 책장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기울어졌다. 책장 위에서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단순히 쓰러지는 것이 아니었다. 책들이 낱장으로 찢어지고, 표지가 너덜너덜해지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마치 누군가 사납게 휩쓸고 지나간 듯한 파괴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기운이 강하게 덮쳐왔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었다.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는 듯했고, 폐가 짓눌리는 듯한 답답함이 밀려왔다. 도진은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 압박감 속에서, 그는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쉬이익… 슈욱….’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깊은 숨결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거실의 벽 한가운데가 갑자기 안쪽으로 ‘푹’ 하고 움푹 들어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주먹이 벽을 강타한 것처럼.
도진은 비명을 삼켰다. 벽에 박힌 자국은 둥글고 깊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다섯 개의 기다란 ‘손가락’ 모양의 금이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것은 단순한 충격 자국이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살아있는 존재가, 벽을 잡고 강하게 움켜쥔 듯한 흔적이었다. 투명한 손이, 정확히 다섯 손가락으로 벽을 움켜쥐고 내리친 듯한… 완벽한 ‘손자국’이었다.
그 자국은 분명히 그의 눈앞에서, 방금 막 생겨난 것이었다. 갓 태어난 상처처럼 생생했다.
도진은 그 자국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 순간, 그의 등골을 꿰뚫는듯한 섬뜩한 감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가 아니었다.
이것은… 분명한 ‘살기’였다.
벽에 새겨진 그 손자국은, 마치 살아있는 누군가가 엄청난 힘을 실어 내리친 ‘장력’의 흔적 같았다.
무언가 거대한 힘이 이 공간을 잠식하고 있었다.
김도진은 무릎이 꺾였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벽에 새겨진 섬뜩한 손자국을 응시하는 것뿐이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단순한 벽의 파손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남긴 ‘경고’였다.
다음은 네 차례라는… 섬뜩한 침묵 속의 경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