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녹슨 칼날의 그림자
흙먼지가 자욱한 하늘은 늘 그랬듯 잿빛이었다. 숨 쉬는 것조차 버거운 이 망가진 세상에서, 강민호는 닳아빠진 부츠 끝으로 발밑의 흙을 툭툭 찼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는 마치 거대한 짐승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솟아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철근이 뒤틀린 채 입을 벌린 붕괴된 지하철역 입구가 오늘 그들의 목적지였다. ‘제3 지하 공동’이라는 이름만 그럴듯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쥐구멍.
“이번엔 좀 다르겠죠?”
어린 태오의 목소리가 흙먼지에 섞여 겨우 들려왔다. 언제나 희망을 갈구하는 그 목소리에는 이제 지친 기색마저 역력했다. 녀석의 등에는 제 몸집만 한 배낭이 짊어져 있었고, 얼굴은 며칠째 햇볕 대신 흙먼지만 먹은 듯 푸석했다.
민호는 대답 대신 허리춤에 찬 낡은 총의 무게를 가늠했다. 보급은 끊긴 지 오래, 총알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칼날은 녹슬었고, 방어구랍시고 걸친 가죽 조끼는 찢기고 헤져 제 기능을 못 한 지 오래였다.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찾아 헤매는 삶의 연속이었다.
“다를 거 없어. 똑같아. 언제나처럼.”
지혜가 냉소적으로 툭 던졌다. 그녀는 스캐너를 든 채 지하 공동의 입구에서 뭔가를 확인하고 있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었고, 헬멧 아래로 보이는 눈은 흙먼지 때문에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 중 가장 현실적인 인물. 언제나 민호의 무모함을 말리고 태오의 어설픈 희망을 꺾는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었다.
“내벽 구조가 불안정해. 탐색 도중에도 계속 변형되고 있어. 지난번 그곳보다 훨씬 위험할 거야.”
지혜의 말에 태오는 어깨를 움츠렸다. 민호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번 ‘그곳’에서 그들은 동료 하나를 잃었다. 쥐새끼 같은 변이체들이 떼로 달려들었고, 예상치 못한 붕괴가 덮쳤다.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래도 가야지.”
민호는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며칠 전 겨우 찾아낸 통조림 하나를 셋이서 나눠 먹은 이후, 그들의 식량 창고는 완벽하게 바닥을 드러냈다.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이 폐허의 바깥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먼지와 녹슨 고철뿐. 유일한 희망은 언제나 지하 어딘가에 숨겨진 미지의 공간이었다.
“조심해, 태오. 절대로 내 시야를 벗어나지 마.”
민호는 태오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크를 조여 매고 플래시를 켠 다음, 민호는 제일 먼저 지하 공동으로 발을 들였다. 축축한 흙냄새와 함께 곰팡이 냄새, 그리고 무언가 썩어가는 듯한 역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녹슨 파이프와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가 흉물스럽게 드러났다.
“지하철 터널이었군.” 지혜가 중얼거렸다. “이 정도는 익숙한데.”
그녀의 말처럼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 세상의 대부분의 던전은 그렇게 시작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잔해가 변이된 생물들의 보금자리로 변모하는 곳. 하지만 곧 익숙함은 사라졌다. 터널은 이내 알 수 없는 방향으로 뒤틀리기 시작했고, 벽면에는 붉은색의 이끼 같은 것이 끈적하게 달라붙어 섬뜩한 빛을 내고 있었다.
“이게… 뭐야?” 태오가 플래시를 그 이끼에 비췄다. 붉은색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손대지 마.” 민호가 낮게 경고했다. “신경 독소 같은 걸 수도 있어.”
그들은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을까, 마치 무언가가 뜯겨나간 듯 기형적인 형태로 뒤틀린 공간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진흙처럼 질척이는 액체가 고여 있었고, 천장에서는 불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플래시 불빛이 닿는 곳마다 미끄러운 바닥에 반사되어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민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너무 조용했다. 으레 이런 곳에는 작은 변이체들이 기어 다니는 소리라도 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모든 생명체가 숨을 죽인 것 같은 고요함. 그 고요함이 민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수상해.” 민호가 낮게 읊조렸다.
그때였다. 바닥의 질척이는 웅덩이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마치 진흙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검은 형체. 하지만 진흙은 아니었다. 섬뜩한 촉수가 뻗어 나오며 태오의 발목을 휘감으려 했다.
“태오! 피해!”
민호의 경고와 동시에 태오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촉수는 허공을 휘저으며 주변의 잔해를 부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웅덩이 같았다. 검은 액체로 이루어진 몸체에서 수십 개의 촉수가 솟아 나왔고, 그 중심에는 섬뜩한 붉은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촉수 변이체!” 지혜가 소리쳤다. “저건 처음 봐!”
“흩어지지 마! 붙어!”
민호는 빠르게 총을 뽑았다. 낡은 총은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지만,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는 붉은 눈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총성과 함께 총알이 촉수 변이체의 몸체에 박혔다. 그러나 놈은 고통스러워하기는커녕, 몸체를 흔들며 더 많은 촉수를 뿜어냈다.
검은 촉수들이 사방에서 휘몰아쳤다. 지혜는 몸을 낮춰 간신히 촉수를 피했고, 태오는 배낭을 방패 삼아 버티고 있었다. 민호는 칼을 뽑아들었다. 녹슨 칼날이 플래시 불빛에 번쩍였다. 놈의 몸체는 칼날이 쉽게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촉수를 베어내도 곧바로 다른 촉수가 솟아났다.
‘약점은 저 붉은 눈이다.’ 민호는 직감했다.
그는 촉수 하나를 간신히 피하며 몸을 날렸다. 질척이는 바닥에 발이 미끄러졌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놈의 붉은 눈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번뜩였다. 민호는 칼을 고쳐 쥐고 모든 힘을 실어 놈의 눈을 향해 내리찍었다.
푸슉!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붉은 눈에 깊숙이 박혔다. 검은 액체가 마치 피처럼 뿜어져 나왔다. 변이체가 경련하듯 몸을 떨더니,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온몸의 촉수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주변의 콘크리트 잔해가 산산조각 났고, 바닥은 더욱 질척이는 액체로 가득 찼다.
“민호 오빠!” 태오의 절규가 들렸다.
민호는 칼을 뽑아내며 뒤로 물러섰다. 변이체의 몸체는 서서히 녹아내리듯 웅덩이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방심할 수 없었다. 이 세상의 변이체들은 죽은 듯 보이다가도 순식간에 다시 나타나곤 했다.
“괜찮아….” 민호는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손에는 검은 액체가 끈적하게 묻어 있었다. “괜찮아, 태오. 지혜.”
그는 다시 플래시를 들어 주위를 비췄다. 변이체가 있던 자리는 온통 검은 액체로 뒤덮여 있었다. 놈은 사라졌지만, 그들의 코를 찌르는 비린내는 더욱 진해졌다.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니.” 지혜가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스캐너는 이상한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이 근처에… 또 다른 반응이 있어.”
민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제 겨우 하나를 처리했을 뿐인데. 그들은 식량도, 물도, 희망도 바닥난 채 이 끔찍한 지하 공동으로 들어왔다. 과연 그들은 이 깊은 어둠 속에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아니, 찾아낼 수나 있을까? 어쩌면 이 세상이 원하는 건 그들의 절망뿐일지도 모른다.
민호는 녹슨 칼날을 다시 허리춤에 꽂았다. 칼날 끝에 묻은 검은 액체가 플래시 불빛에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은, 오늘도 계속될 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