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mindulle

  • 좀비 아포칼립스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균열

    열두 시 사십칠 분. 내 손목의 낡은 시계가 뱉어내는 디지털 숫자는 어둠 속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천이백사호. 우리 집 주소이자, 이 빌어먹을 도시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안전하다고 믿었던 나의 보금자리. 하지만 오늘 밤은 조금 달랐다. 아니, 어쩌면 어제부터, 혹은 그저께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젠장….”

    낮게 중얼거렸다. 손안에 든 캔맥주가 축축하게 땀을 흘렸다. 거실의 스탠드 조명은 어째선지 오늘따라 노랗게 바래 보였고, 그 빛조차 불안하게 깜빡이는 통에 내 신경은 바짝 곤두서 있었다. 한밤중에 이런 불쾌한 빛이라니. 이런 건 영화에서나 나오는 불길한 전조 같은 거 아닌가.

    사건은 일주일 전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컴퓨터로 작업을 하다가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는데, 분명히 탁자 한가운데 놓아두었던 볼펜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때는 피곤해서 내가 실수로 건드렸나 보다, 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다음 날은 열어둔 창문이 닫혀 있었다. 환기를 시키려고 조금 열어두었었는데, 분명 잠그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었나? 고층 아파트라 바람이 세게 불 때도 있으니, 그것 또한 그러려니 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이틀 전, 아침에 커피를 마시려고 머그컵을 들었는데, 분명 깨끗하게 닦아 건조대에 올려두었던 컵 안쪽에 희미한 흙먼지 같은 게 묻어 있었다. 베란다 창문을 연 적도 없는데. 그리고 어젯밤에는…

    툭.

    나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분명히 들었다. 싱크대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나 건조하고, 작은 돌멩이라도 떨어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

    나는 벌떡 일어났다. 맨발이 차가운 마룻바닥에 닿았다. 찬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것 같았다. 아니, 찬 기운이 아니라, 온몸을 덮는 불쾌한 한기였다. 스탠드 불빛이 겨우 닿는 주방 쪽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누구… 있어요?”

    내 목소리는 마치 낯선 사람의 것인 양 가늘게 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누가 있겠어? 혼자 사는 아파트에서. 옆집이겠지. 층간 소음이겠지. 그저 노이로제에 걸린 내가 환청을 들은 것뿐일 거야.

    하지만 그 소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사각… 사각…

    이번에는 훨씬 선명했다. 마치 누군가가 발톱으로 벽을 긁는 듯한 소리.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주방 벽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낡은 아파트라 간혹 수도관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도 하지만, 이런 소리는 처음이었다. 벽을 긁는 소리라니. 벽에 뭐가 있다고.

    나는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갔다. 손이 떨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스탠드 불빛이 미치지 못하는 어둠 속에서, 나는 손을 뻗어 주방의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번쩍이며 주방을 환하게 밝혔다.

    아무것도 없었다.

    싱크대 위에는 어제 먹고 남은 설거지 그릇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건조대에는 깨끗한 접시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벽은 깨끗했다. 긁힌 자국도, 이상한 흔적도 없었다.

    “젠장, 내가 미쳐가는구나.”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과도한 스트레스가 환청과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게 분명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가려는 순간, 무언가 시야에 들어왔다.

    수도꼭지였다. 수도꼭지에서 똑, 똑, 하고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분명히 잠그고 나왔었는데. 밤새 수도세 폭탄이라도 맞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나는 다가가 수도꼭지를 단단히 잠갔다.

    그 순간,

    콰앙!

    바로 등 뒤에서 엄청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내 비명은 목구멍에서 틀어막혔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며 주저앉았다. 주방과 거실을 구분하는 작은 벽에서 나는 소리였다. 마치 거대한 망치로 벽을 내리찍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이건 환청이 아니었다. 명백한 물리적 충격음이었다.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충격음이 났던 벽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벽. 그 평범하고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던 벽에…

    균열이 생겨 있었다.

    아주 작고 미세한 실금. 하지만 그 균열은 분명히 눈에 보였다. 회색 벽지 사이를 가로지르는 옅은 갈색의 금. 나는 홀린 듯이 손을 뻗어 그 균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차갑고, 거칠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벽의 균열 사이에서, 스멀스멀 검붉은 액체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피처럼 끈적하고 역겨운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나는 재빨리 손을 떼며 뒷걸음질 쳤다.

    “이… 이게 뭐야….”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벽에서 피가 새어 나온다니. 그것도 내 집 벽에서. 그 끈적한 액체는 균열을 따라 천천히 흘러내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액체가 흘러내리던 균열이,

    **쩍—!**

    굉음과 함께 가로로 길게 벌어졌다. 마치 썩은 살점이 찢어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균열의 틈새로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분명히 **꿈틀거리고** 있었다.

    “흐읍… 으읍….”

    내 숨소리는 거칠고 격렬했다. 눈을 비볐지만,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형체. 그리고 그 틈새에서 풍겨 나오는 끔찍한 악취. 마치 썩어 문드러진 시체 냄새 같았다.

    그때, 어둠 속에서 무언가 하얀 것이 불쑥 튀어나왔다.

    길고 앙상한 손가락. 그리고 그 손가락 끝에는 거무튀튀하고 더럽혀진 손톱이 붙어 있었다. 손가락은 균열 밖으로 조금씩 나오더니, 벽지를 찢고 긁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이 벽을 뚫고 나오려는 듯이.

    사각, 사각, 사각!

    끔찍한 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는 더 이상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이미 온몸을 적시고 있었다. 눈앞의 광경은 악몽 그 자체였다. 벽 안에서 대체 뭐가…

    그 순간, 벽 안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흐으읍… 끄으윽…

    그것은 인간의 목소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괴하고,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였다. 마치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듯한, 아니, 목구멍이 찢어질 듯한 고통을 참는 듯한 소리.

    나는 뒷걸음질 치다 넘어졌다. 엉덩이가 아파왔지만, 그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균열 속에서 들려오는 소름 끼치는 신음 소리와, 벽을 긁어대는 앙상한 손가락만이 나의 모든 신경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손가락이 균열을 좀 더 벌리자, 그 틈새로 붉고 충혈된, 하지만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것은 날 보고 있었다.

    벽 안에서, 내 아파트 안에서, 죽은 듯한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나는 온몸이 굳어버린 채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벽 안에서 나를 지켜보는 그 기괴한 존재와 시선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밤은, 이제 막 시작된 것 같았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우주가 유리창 너머로 아득히 펼쳐져 있었다. 헤르메스호의 함교는 침묵 속에 깊이 잠겨 있었지만, 그 고요함 아래에는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무한한 어둠 속에서 한 점 빛을 찾아 헤매는 탐사선, 그게 바로 헤르메스호의 숙명이었다.

    “함장님, 좌표 델타-7 지점에서 미확인 에너지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이전 탐사 자료에는 없던 패턴입니다.”

    항해사 김민아 중위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녀의 손가락이 홀로그램 스크린 위를 빠르게 스쳤고, 흐릿한 분광 분석 그래프가 화면 가득 떠올랐다. 함장 이진우 대령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노련한 눈에는 그저 숫자로 보이는 것들이 때로는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전 기록에 없는 패턴이라… 과학팀에 연락해서 분석 좀 해보라고 해.”

    “네, 함장님.”

    몇 분 후, 과학팀장 최지은 박사가 허둥지둥 함교로 뛰어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에는 흥분과 함께 미묘한 불안감이 교차했다.

    “함장님! 이건… 저희가 아는 어떤 에너지원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순수 에너지가 특정 형태로 응축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동시에… 살아있는 것 같은 불규칙성을 띄고 있어요.”

    “살아있는 것 같다니?”

    이진우 함장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우주에서 수십 년을 보냈지만, 그런 표현은 처음이었다.

    “네…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혹은 아주 느리게 호흡하는 것처럼 말이죠. 자체적인 중력 왜곡도 관측됩니다. 아주 미미하지만, 주변 시공간을 끌어당기는 현상이 감지돼요.”

    이진우 함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홀로그램 스크린 앞으로 다가섰다. 델타-7 지점, 그곳에는 작은 점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그저 작은 점일 뿐인데도, 알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접근 속도 낮추고, 탐사 드론 발진 준비해. 강태성, 보안팀은 비상 대기해라.”

    보안팀장 강태성 소령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통신으로 흘러왔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헤르메스호는 거대한 몸체를 천천히 움직여 미지의 존재에게 다가갔다. 한 점으로 보이던 그것은 점차 그 형체를 드러냈다. 드론이 전송하는 실시간 영상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광경이 담겨 있었다.

    “맙소사… 저게 대체….”

    민아 중위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어떤 문명의 잔해도, 자연적인 현상도 아니었다. 육면체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 그 표면은 완벽하게 매끄러운 거울처럼 주변의 별빛을 반사했다. 동시에 그 거울 안에서는 무수한 별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듯한 환영이 아른거렸다. 마치 살아있는 우주 그 자체를 압축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육면체의 각 모서리는 뾰족하지 않고 부드럽게 이어져 있었으며, 그 안에 갇힌 별빛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내부에서 어떤 거대한 질서가 존재함을 암시했다.

    “재질 분석 결과는?” 이진우 함장이 침착하게 물었다.

    지은 박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분석 불가능입니다, 함장님. 어떤 알려진 원소도 감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간 자체를 빚어낸 것 같아요. 물질이 아니라, 어떤 에너지가 구체화된 형태….”

    그때였다. 홀로그램 스크린 속의 육면체, 그 안에서 아른거리던 별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냈다. 헤르메스호의 함교를 가득 채우던 조명이 일순간 희미해지고, 그 대신 육면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푸른빛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쉬이이이익-**

    이상한 소음이 함교를 가득 메웠다. 그것은 기계음도 아니고, 바람 소리도 아니었다. 마치 수억 개의 작은 벌레들이 동시에 날개를 퍼덕이는 듯한, 혹은 아주 먼 우주에서 들려오는 어떤 속삭임 같은 소리였다.

    “함장님! 에너지 필드! 육면체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 필드가 방출되고 있습니다! 보호막이… 견디지 못하고 있어요!” 민아 중위가 소리쳤다.

    함교의 전등이 깜빡거리며 불안하게 흔들렸다. 스크린에는 보호막이 빠르게 닳아 없어지는 그래프가 표시되었다. 그와 동시에 승무원들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이미지가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이진우 함장의 눈앞에는 고향 행성의 푸른 하늘이 펼쳐졌다. 그의 어린 시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이 마치 실제처럼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 뒤에는 섬뜩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기괴하게 일그러지고, 행복했던 목소리들이 비명으로 변하는 환영이었다.

    “으윽…!”

    지은 박사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수식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수식들은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듯한 의미 없는 혼돈으로 변해갔다. 이성과 논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고통이었다.

    “정신 차려! 민아! 함선 제어해! 태성, 내부 보안 점검!” 이진우 함장은 비명을 지르듯 명령했다. 그 또한 고통을 느끼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미 늦은 듯했다. 육면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함교의 투명 유리를 뚫고 들어와 승무원들의 눈동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의 눈은 점차 알 수 없는 공허함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변화가 나타난 것은 민아 중위였다. 그녀는 갑자기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지만, 더 이상 공포나 고통은 없었다. 대신, 어떤 알 수 없는 경외감과 함께 기묘한 평온함이 서려 있었다.

    “저… 저건….” 민아 중위의 입에서 몽롱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스크린을 가리켰다. 스크린에는 여전히 푸른빛을 뿜어내는 육면체가 떠 있었다.

    “저건… 시작이에요.”

    그 순간, 육면체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함선 내부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투명한 빛의 촉수들은 함교의 모든 전자장비를 휘감았고, 이내 승무원들의 몸으로 뻗어 들어왔다. 그들의 피부에 닿는 순간, 차가운 전율이 온몸을 관통했다.

    **징-**

    가벼운 진동과 함께, 함교의 모든 스크린이 일순간 정지했다. 그리고 모든 화면에는 단 하나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바로, 육면체의 내부, 그 무한한 별들의 바다였다.

    이진우 함장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도 푸른빛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느꼈다. 피부가 마치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동시에, 내부에서는 뜨거운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우리… 우리 모두….”

    그의 시야는 점점 더 흐려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홀로그램 스크린 속에서 빛나고 있는 무수한 별들이었다. 그 별들이 마치 그의 눈동자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헤르메스호는 드넓은 우주 공간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외관상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함선 내부, 함교의 모든 승무원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그들의 눈은 여전히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들의 얼굴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몽환적인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미지의 육면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빛을 뿜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빛은 더 이상 헤르메스호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찾아낸 것처럼,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을 뿐이었다.

    침묵 속에서, 헤르메스호의 항해 기록이 자동으로 업데이트되었다.

    `탐사 목표: 미확인 외계 유물 ‘시원의 정수’ 접촉 완료.`
    `함선 및 승무원 상태: 100% 동기화 완료.`
    `새로운 임무: 지구 귀환 및 ‘새로운 질서’ 확립.`

    그리고 그 순간, 육면체의 표면에서 미세한 진동이 일었다. 거울처럼 완벽했던 육면체에 미세한 균열이 생겨났다. 그 균열 속에서, 마치 봉인된 거대한 눈동자처럼, 기이한 빛이 번뜩였다.

    헤르메스호는 방향을 틀었다. 그 거대한 선체는 이제 지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지구를 향해.
    새로운 존재를 잉태한 채.

  • SF (공상과학) 독립적인 단편 소설

    도시의 심장부, 낡은 것을 부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역사는 쉴 새 없이 반복된다. 지훈은 그 역사 속에서 낡은 것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는 일을 했다. 그의 직업은 철거 예정 건물들의 잔류 에너지 패턴을 스캔하고 이상 징후를 보고하는 것이었다. 대부분은 녹슨 전선에서 새어 나오는 미미한 전류나, 잊힌 서버실의 잔열 같은 것들이었다. 지루하고 반복적이었다.

    “지훈아, 27번 구역 스캔 완료했냐? 꽤 오래된 건물이라던데.” 동료 석민이 무전으로 물었다.
    “거의 다 왔어, 형. 어차피 남는 건 고철 덩어리뿐일걸.”
    지훈은 묵묵히 손목에 찬 다기능 스캐너를 낡은 콘크리트 벽에 밀착시켰다. 지하 3층, 한때는 금융 데이터 센터였다는 건물은 폐쇄된 지 수십 년이 흘러 싸늘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스캐너 화면에 희미한 노이즈가 올라왔다.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평범한 노이즈는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의 맥박처럼 규칙적이면서도, 일반적인 전자기 신호와는 다른, 설명하기 어려운 파형이었다.

    “형, 잠깐만.” 지훈이 무전기를 다시 들었다. “여기 좀 이상해. 뭔가 잡히는데, 지금까지 본 적 없는 패턴이야.”
    “뭐? 또 오작동 아니냐? 어제는 쥐떼 소리를 핵융합로 출력으로 착각했잖아.” 석민의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섞여 있었다.
    “아니, 이건 진짜 달라. 에너지가… 너무 깨끗해. 동시에 너무 강력하고.”

    지훈은 그 신호의 근원을 찾아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서버 랙들이 흉물처럼 서 있는 복도를 지나 가장 깊숙한 곳,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작은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문은 두꺼운 강철로 되어 있었고, 그 표면에는 희미하게 고대 문자 같은 것이 새겨져 있었다. 스캐너가 문 앞에서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에너지의 진원지는 바로 이 문 너머였다.

    “찾았어, 형. 지도에도 없는 공간이야. 엄청난 에너지가 이 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어.”
    “야, 위험하면 건드리지 마! 일단 철거 팀 부를게.” 석민이 다급하게 말했다.
    하지만 지훈은 이미 망치와 렌치를 들고 있었다. 호기심이 그의 이성을 지배했다. 낡은 빗장을 부수고, 녹슨 경첩을 뜯어내자, 육중한 문이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어두운 공간은 숨 막힐 듯한 정적 속에 잠겨 있었다. 지훈이 라이트를 비추자, 방 한가운데에 놓인 거대한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기계라고 하기에는 너무 유기적이었고, 예술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능적이었다. 검은색의 매끄러운 금속 외피로 덮인 원통형 구조물이었는데, 그 표면에는 은하수처럼 수많은 작은 발광 패턴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 놀라운 것은, 그 중심에 박힌 커다란 수정 구슬이었다. 그 구슬은 안에서부터 부드러운 푸른빛을 내뿜으며 고동치고 있었다. 지훈의 스캐너가 다시 격렬하게 울렸다. 이것이 바로 그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지훈은 손을 뻗어 수정 구슬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그 순간,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푸른빛이 폭발적으로 증폭되면서 방 안을 가득 채웠고, 그의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이미지와 감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거대한 폭포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지훈은 한 문장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환영합니다, 마지막 계승자여.”**

    목소리는 뇌 속에서 직접 울리는 듯했다.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 지훈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누구… 누구세요?”
    “나는 코어, 당신들이 ‘고대’라고 부르는 시대에 창조된 존재입니다. 이 장치는 현실의 ‘흐름’을 조작하는 지식의 보고이자 도구이지요.”
    “현실의 흐름을 조작한다니… 그게 무슨 말이죠?” 지훈은 혼란스러웠다.
    “당신들은 그것을 ‘마법’이라 부를지도 모릅니다. 보이지 않는 힘으로 물질을 변형하고, 에너지를 창조하며, 심지어 시간의 간극을 비트는 것. 이 코어는 그 모든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것을 ‘흐름 읽기’라 불렀습니다.”

    코어의 빛이 더욱 강해지며, 방 안의 먼지 입자들이 빛을 받아 춤추기 시작했다. 지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코어를 바라봤다. SF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럼… 제가 지금 이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의 잠재의식이 코어와 연결되었습니다. ‘흐름 읽기’는 훈련된 정신과 섬세한 감각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시작은 언제나 우연으로부터 비롯되지요.”

    코어는 지훈에게 작은 실험을 제안했다. “저기 바닥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를 보세요. 당신의 의식으로 그 돌멩이의 흐름을 느껴보세요. 그 형태, 질량, 위치… 그 모든 것을 상상하세요. 그리고 아주 미세하게, 그 흐름에 개입하세요.”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작은 자갈을 가리켰다. 그리고 눈을 감고, 코어의 말대로 돌멩이를 상상했다. 차갑고 거친 질감, 미세한 균열, 중력에 이끌려 바닥에 붙어있는 느낌. 그의 의식이 돌멩이와 연결되는 듯한 이상한 감각이 들었다. 마치 돌멩이의 존재 자체가 그의 일부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생각했다. ‘움직여라.’

    아주 미세하게, 돌멩이가 바닥에서 톡, 하고 튀어 올랐다. 그리고 몇 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다시 떨어졌다.
    “세상에…” 지훈은 눈을 번쩍 떴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것은 그의 의지대로 움직인 것이었다.
    “놀랍군요. 첫 시도치고는 훌륭합니다. 보통은 수많은 실패를 거쳐야 겨우 작은 진동을 만들어낼 수 있지요.” 코어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감탄이 스며들어 있는 듯했다.

    그때, 무전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지훈아! 거기서 뭐 해? 철거 팀 곧 도착한다고! 이상한 거 발견했으면 보고부터 해야지, 왜 답이 없어?” 석민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지훈은 코어와 무전기를 번갈아 보았다. 이 강력하고 믿을 수 없는 힘을 세상에 공개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묻어두고 자신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할까?

    “코어, 이 힘은… 왜 여기에 숨겨져 있었던 거죠?”
    “이 힘은 인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했습니다. 과거, 저희 선조들은 이 힘으로 문명을 번성시켰지만, 결국 오만과 탐욕으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시킬 뻔했지요. 그래서 이 힘은 봉인되었고, 후대의 인류가 충분히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도록 설정되었습니다.”
    “그럼 제가… 그 성숙해진 인류라는 건가요?” 지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계승자여. 이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오직 당신의 선택입니다.”

    지훈은 심호흡을 했다. 바깥에서는 철거 장비들의 굉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손을 뻗어 코어의 푸른빛을 다시 한번 만졌다. 그의 손끝에서 미세한 에너지가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존재하지 않던 근육이 깨어나는 듯한 감각이었다.
    “아직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 지훈은 중얼거렸다. “이건… 내게 너무 커.”

    그는 코어에 마지막 말을 건넸다. “나중에 다시 올게요. 이 모든 걸 이해할 시간이 필요해요.”
    코어는 대답 대신 푸른빛을 한 번 더 강렬하게 깜빡였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낡은 빗장을 원래대로 걸었다. 그가 떠나자, 방 안의 빛은 서서히 사그라들었고, 모든 것이 다시 어둠과 침묵 속으로 잠겨들었다.
    지훈은 스캐너를 끄고 무전기를 들었다. “형, 별거 아니었어. 낡은 전선에서 스파크 좀 튀었던 모양이야. 이제 갈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이제 단순한 철거 스캔 기사가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숨겨진 힘의 유일한 계승자였다. 그리고 그 힘은, 어두운 지하의 심장부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 아래에서, 그는 이제 막 새로운 현실의 문을 연 참이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어스름 그림자

    차윤서는 오늘도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잊었다. 빽빽한 빌딩 숲, 숨 가쁜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오피스텔 겸 작업실은 그녀에게 유일한 피난처이자 감옥이었다. 차가운 아이패드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빛만이 유일한 동반자였고, 마감 기한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그녀의 발목을 옥죄었다. 창밖은 이미 깊은 밤이었지만, 도시의 빛은 꺼질 줄 모르고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영감이 바닥을 드러낸 건지, 며칠째 막혀 있는 삽화는 진전이 없었다. 손끝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형상에 답답함을 느낀 윤서는 결국 붓을 내려놓았다. 굳게 닫힌 창문을 열자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과 함께 후텁지근한 밤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숨 막히는 공기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어딘가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를 갈망했다.

    오피스텔 건물 꼭대기 층에 작게 마련된 옥상 정원, 그곳은 윤서가 숨통을 트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도시의 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작은 안식처.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멈추자, 문이 열리기도 전에 서늘한 공기가 먼저 그녀를 맞았다. 이상했다. 언제나 후끈했던 여름밤의 공기가 유독 이곳에서만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옥상 정원 문을 열고 한 걸음 내딛자, 어둠이 짙게 깔린 작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스름 속에서, 덩굴 식물들이 휘감고 있는 낡은 석상만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석상 아래, 짙은 그림자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윤서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떨어졌다. 놀라움보다는 낯선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은발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닮았고, 매끄러운 피부는 달빛을 머금은 듯 창백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마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는 듯 아득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윤서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남자의 시선은 그녀를 꿰뚫고 지나쳐, 세상의 모든 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심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동자에 미미한 흔들림이 감돌았다. 마치 윤서의 존재를 이제야 인식한 듯, 혹은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미묘한 변화였다.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윤서의 몸이 으스스하게 식어갔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강렬한 끌림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 시선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고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남자는 아주 천천히, 마치 유리 조각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유려하고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림자 자체가 형상을 얻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가 발을 뗄 때마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어스름이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누구… 세요?”

    윤서는 겨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불안하게 갈라졌다. 도시의 소음조차 삼켜버린 듯한 고요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크게 울렸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그녀의 시선을 피해 옥상 정원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은 넝쿨과 낡은 석상들이 뒤엉켜 마치 작은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윤서는 마치 홀린 듯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의 표정에서 고통의 그림자를 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희미해서,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다시 한 걸음 다가가자,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몸이 희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그의 윤곽이 일렁였고, 그의 존재가 주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안 돼요.”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듯 희미했지만, 윤서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갈 만큼 선명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저미는 듯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남은 힘을 다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잠시만요…!”

    윤서가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끝은 이미 잡히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손끝을 스쳤을 뿐, 그 어떤 온기도 닿지 않았다. 남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오직 짙은 어둠만이 남아 윤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던가. 옥상 정원에는 다시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고, 차가웠던 공기도 점차 평범한 밤의 온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윤서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는, 잡을 수 없었던 그림자의 차가움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윤서는 천천히 작업실로 돌아왔다. 아이패드 화면은 여전히 어두웠고, 미완성된 삽화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붓을 다시 들었다. 방금 전 옥상에서 만났던 남자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은발, 창백한 피부, 그리고 모든 것을 담은 듯한 슬픈 눈동자.

    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자, 닫혀 있던 영감이 마치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붓질은 망설임이 없었고, 색채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는 완벽하게 윤서의 캔버스 위에서 되살아났다. 그림 속의 남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듯했고,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향해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순간, 윤서의 손끝이 그림 속 남자의 눈동자를 스쳤다.

    차갑고 섬뜩한 한기가 붓을 타고 올라왔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낡고 오래된 도시의 뒷골목,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깊은 곳,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한 수많은 그림자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윤서는 그림에서 손을 떼었다. 붓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화면 속 남자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감히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위협과 함께,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왜 이곳에,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일까. 윤서는 밤늦도록 잠 못 이루고, 그림 속의 남자를 응시했다. 마치 그가 지금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금지된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고요한 침묵 속의 아우성

    푹신한 인조 잔디 위로 발자국을 내딛자, 웅장한 아틀라스 신전의 돌기둥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기원 불명의 덩굴들이 기둥을 휘감고, 그 틈새로 고대 문명이 남긴 상형문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진우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듯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실제 몸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돌아가는 좁은 원룸 침대에 누워있지만, 그의 정신은 완벽히 게임 속 세계, 『아틀라스의 유산』에 동화되어 있었다.

    “젠장, 또 함정이잖아!”

    진우의 분노 섞인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푸른색 시스템 메시지가 번개처럼 솟아올랐다.

    [함정 발동! 날아오는 화살촉을 회피하십시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비틀었다. 쉭, 쉭!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세 개의 화살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는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며 미약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착용하고 있던 가죽 갑옷의 내구도가 살짝 깎이는 진동이 느껴졌다.

    “이 정도 가지고 날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진우는 피식 웃으며 허리에 찬 한손검을 뽑아 들었다. 낡았지만 길들여진 검은 손에 착 감기는 감각이 일품이었다. 그는 어깨 너머로 자신의 캐릭터, ‘아크’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확인했다. 푸른 불꽃이 검날을 휘감더니, 전방을 향해 맹렬하게 뿜어져 나갔다.

    콰아앙!

    정교하게 숨겨져 있던 화살 발사대가 폭발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경험치 상승을 알리는 녹색 메시지가 팝업되고, 인벤토리에는 고대 유물의 파편 하나가 자동으로 추가되었다. 역시, 『아틀라스의 유산』은 그에게 완벽한 도피처였다. 현실의 팍팍한 삶, 직장 상사의 잔소리, 치솟는 물가 따위는 이 환상적인 세계 앞에서 한낱 먼지에 불과했다.

    깊은 숨을 들이쉬며 다음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귓가에 뭔가 스치는 듯한 아주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슥…….

    마치 얇은 종이가 스치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게임 속 사운드가 이렇게 섬세했던가? 그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신전 안은 고요하기만 했다. 바람 한 점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나뭇잎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착각이겠지. 잠을 너무 설쳤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게임에 몰두하려던 순간, 소리가 조금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스스슥…… 툭.

    이번엔 확실했다. 분명히 뭔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것도 바로 *내* 옆에서.

    진우는 순간적으로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몸은 게임 속 세계에 있지만, 뇌는 방금 들린 소리가 게임 바깥, 즉 현실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했다. 그는 게임 속 어두운 신전 벽에 기대어 가상현실 헤드셋을 벗지 않은 채 잠시 귀를 기울였다.

    고요함.

    그의 원룸은 항상 조용했다. 옆집에는 노부부가 살고, 아래층은 늘 비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소음이 없었다. 그는 이 고요함이 좋았다. 이 고요함 속에서 게임에 몰입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고요함은 조금 달랐다. 너무나 완벽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압도적인 침묵이었다.

    ‘뭔가 떨어졌다면, 소리가 더 컸을 텐데.’

    그는 다시 조심스레 헤드셋을 벗었다.

    칙- 하는 기계음과 함께 가상 세계의 장엄한 풍경이 사라지고, 그의 눈앞에는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어수선하게 널브러진 옷가지, 빈 컵라면 용기, 그리고 모니터의 희미한 잔상. 그리고 침대 옆 협탁.

    진우는 협탁 위를 쳐다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늘 그곳에 두던 물건들, 이를테면 무선 이어폰 케이스나 핸드크림 따위는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닥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피곤하긴 했나 보네. 환청까지 들리고.”

    그는 다시 헤드셋을 쓰려다가 멈칫했다. 불과 몇 초 전의 일인데, 그 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귓가에 남아있었다. 뭔가 가느다란 물체가 툭, 하고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

    고개를 갸웃거리며 결국 다시 헤드셋을 착용했다. 아틀라스 신전의 풍경이 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 해결해야 할 퍼즐과 처치해야 할 몬스터들이 잔뜩 남아있었다. 현실 따위는 잊고 다시 모험에 몰두하자.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을까. 진우는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기 위해 거대한 돌문을 열어젖혔다. 육중한 돌문이 천천히 열리며 삐걱이는 소리가 게임 내 스피커를 통해 사실적으로 울려 퍼졌다. 그때였다.

    삐걱이는 소리 뒤에 섞여 들어오는 아주 기분 나쁜, 거슬리는 소음.

    드르륵…… 드르르륵……

    마치 가구를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진우는 이번에도 게임 속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소리는 게임 속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현실 속 방에서 나는 소리였다.

    이번에는 헤드셋을 벗는 손길이 망설여지지 않았다. 빠르게 기기를 벗어던지자,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방문 옆 벽에 붙어있던 액자였다. 가족사진이 담긴, 평범한 액자.

    액자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오른쪽으로 스르륵 밀려나고 있었다.

    진우는 숨을 들이켰다. 착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액자가, 그의 눈앞에서, 벽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옆으로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액자 뒤에서 실로 잡아당기는 것처럼.

    “뭐, 뭐야……?”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나왔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뇌가 이 현상을 이해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천천히 액자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액자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중력을 무시하고, 마찰력을 거부한 채.

    그가 액자 앞에 섰을 때, 움직임이 멈췄다. 액자는 본래 있던 자리에서 10센티미터 가량 옆으로 밀려나 있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을 뻗어 액자를 만졌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액자 뒤에 실이 묶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어떤 조작의 흔적도 없었다. 그는 액자를 조심스럽게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안의 모든 물건들이 그를 노려보는 듯했다. 컵라면 용기, 옷가지, 모니터, 심지어 그의 침대까지. 평범했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고 섬뜩하게 다가왔다.

    “농담하지 마.” 그는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장난이야? 누가 나한테 장난치는 거야?”

    하지만 대답은 없었다. 오직 그의 목소리만이 텅 빈 방 안에서 메아리칠 뿐이었다.

    그는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터넷에 ‘액자 움직임’, ‘폴터가이스트’ 같은 단어들을 검색하려던 순간, 손안의 휴대폰이 갑자기 뜨겁게 달아올랐다. 액정을 보니, 분명히 배터리가 80% 이상 남아있었는데, 갑자기 1%로 급강하해 있었다.

    퍼억!

    휴대폰은 그의 손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꺼져버렸다.

    진우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간신히 입을 막고 뒷걸음질 쳤다. 휴대폰은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검은 연기를 피어 올렸다.

    이건 꿈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누군가의 장난도 아니었다.

    이건, 뭔가, 정말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었다.**

    그는 눈앞에 놓인 VR 헤드셋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완벽한 도피처였던 그 기기가, 이제는 현실의 공포를 피해 숨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 헤드셋을 통해 도망치는 순간, 이 모든 기괴한 현상들이 그의 존재를 잠식해 올 것만 같은 섬뜩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의 아파트, 그의 방이,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곳에, 그와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막, 그의 존재를 인지한 듯했다.
    창밖의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진우의 방 안은 마치 심해처럼 어둡고, 소름 끼치는 고요함 속에 잠겨 있었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닫힌 문 뒤의 그림자**

    장대비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비는 마치 하늘이 통곡이라도 하는 듯이, 멈출 줄 모르고 거칠게 지면을 때렸다. 그 빗줄기 사이로 낡았지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한서윤 형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저택 앞으로 달려갔다. 경찰 통제선은 이미 쳐져 있었고, 선배 형사들의 무전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어지럽게 들려왔다.

    “한 형사, 빨리 와! 망할, 이건 도대체…!”

    박 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서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후텁지근하고 곰팡이 냄새 섞인 퀴퀴한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외부는 낡았어도 내부는 한때 화려했을 법한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가장 안쪽에 위치한 서재 앞에 다다랐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는 이미 여러 명의 형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서윤이 속삭이듯 물었다.

    박 팀장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시신이 발견됐어. 건축가 박건우 씨야. 그런데… 이게 밀실 살인이다.”

    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 밀실 살인이라니. 그런 사건은 책이나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것 아니었던가.
    “밀실이요? 어떻게… 문이 잠겨 있었습니까?”

    “그래. 이중 잠금장치로 안에서 완벽하게 잠겨 있었어. 창문도 마찬가지고. 빗장까지 굳게 걸려 있었지. 부수고 들어간 흔적도, 외부 침입 흔적도 전혀 없어. 모든 게 완벽하게 봉쇄된 채였다고.”

    그들의 대화는 서재 문이 열리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안에 있던 감식반 요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오자, 서재 내부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묵직한 서가에 가득 찬 책들, 고풍스러운 가구들, 그리고 그 중심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의 형체.

    서윤은 조심스럽게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냄새는 안으로 들어서자 더욱 심해졌다. 아마도 오랫동안 환기되지 않은 탓일 터였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했고, 그 가운데 앙상한 체구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 박건우 씨는 가슴팍에 깊이 박힌 칼날을 간직한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칼은 그가 사용하던 문진용 나이프 같았다.

    “사인은 과다출혈. 흉기로 보아 아마도 이 나이프가 범행 도구인 듯합니다. 지문은… 아직 판독 중입니다만, 현장에서 발견된 모든 잠금장치는 안쪽에서 잠겼고,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감식반 팀장의 보고에 박 팀장은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피해자의 지문 외에는 다른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자살인가? 하지만 저렇게 깊게 찔렀는데, 흉기가 그대로 박힌 채라면… 도저히 자살로는 보이지 않아.”

    서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자살이라기엔 너무나 처참했고, 격렬한 저항의 흔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 모습도 아니었다. 피해자의 눈은 크게 뜨여 있었고, 얼굴에는 고통과 함께 마지막 순간의 어떤 강렬한 의문이 서려 있는 듯했다.

    “그럼 범인은 어떻게 나갔을까요? 벽을 뚫고 나갔을 리도 없고, 하늘을 날아간 것도 아닐 텐데…” 서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서재 문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하늘을 날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범인이 날개 달린 존재는 아닐 테니,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 방을 나갔을 겁니다.”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키가 크고, 깔끔한 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이미 방 안의 모든 것을 훑어보고 있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흥미와 더불어 차가운 이성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박 팀장은 남자를 보자마자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강 이안 씨… 벌써 오셨습니까.”

    ‘강 이안?’ 서윤은 속으로 되뇌었다. ‘그 유명한 천재 탐정 강 이안?’
    그의 이름은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경찰이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기가 막힌 통찰력으로 해결해낸다는, 전설 같은 인물. 하지만 그의 명성만큼이나 괴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강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서재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다른 형사들이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거침없이 걸어 들어왔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는 시신에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재의 벽을 훑고, 책장의 책들을 무심하게 응시하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서윤은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일반인들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소한 디테일에 멈추는 듯했다.

    “박 팀장, 이 방의 모든 잠금장치가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했죠?” 강 이안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습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박 팀장이 답했다.

    강 이안은 창문 앞에 섰다. 밖에서는 여전히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그는 창틀에 손을 얹고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흥미롭군요.”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차분했지만, 듣는 이에게는 묘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살인 사건 현장에서 ‘흥미롭다’는 표현이라니.

    “뭐가 흥미롭다는 겁니까?” 서윤이 무심결에 물었다.

    강 이안은 서윤을 흘긋 보더니, 다시 시선을 창문에 고정했다.
    “이 창문, 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것 같군요.”

    서윤은 창틀을 자세히 보았다. 과연, 창틀에는 묵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창문이 전혀 젖지 않은 걸 보면, 최근에는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잠금장치도 완벽했습니다.” 박 팀장이 덧붙였다.

    “음…” 강 이안은 짧게 콧소리를 냈다. “그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봉쇄된 밀실에서, 피해자는 가슴에 칼을 맞고 죽었고, 범인은 사라졌다는 말이군요.”

    그는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차가웠고, 어떤 비밀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종종 눈앞의 보이는 것에 현혹됩니다. 이 서재는 분명 ‘밀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누가’ 그 밀실을 만들었는가 하는 거죠.”

    그의 말에 서윤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누가 밀실을 만들었다니?
    강 이안은 시신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시신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피 묻은 바닥을 응시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의 어느 한 곳에 닿았다.

    “밀실 살인? 아닙니다.”

    강 이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모든 형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건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범인에게는요. 이 방은 처음부터,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완벽한 ‘덫’이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은 뇌리 속에 번개처럼 박혔다. 덫? 누가, 누구를 위한 덫이었을까?
    그는 다시금 창밖을 응시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히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이 거셌다.
    “범인은 이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단지, 문이 닫히도록 유도했을 뿐이죠.”

    그의 마지막 말은 서윤의 가슴을 세차게 울렸다. 닫히도록 유도했다니? 그건 무슨 의미일까?
    이 서재는 밀실이 아니었다는 그의 말은 과연 어떤 진실을 품고 있는 걸까?
    강 이안의 눈빛은 비에 젖은 밤하늘처럼 깊고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밀실 살인 사건의 베일은 이제 막 걷히기 시작한 듯했다.

  • 일상 힐링 애니메이션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조각난 계절의 멜로디

    빗방울이 창문을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쌌지만, 윤슬의 손끝은 여전히 차가웠다. 눈앞의 스케치북에는 반쯤 완성된 그림들이 펼쳐져 있었다. 원래라면 웃음꽃이 피어나는 밝은 색채로 가득했어야 할 페이지는 잿빛으로 물든 듯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후, 그녀의 세상은 줄곧 이 비 오는 날처럼 흐릿하고 축축했다.

    “진작 알아봤어야 했는데…”

    목구멍 깊숙한 곳에서 억눌린 한숨이 터져 나왔다. 툭, 하고 펜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작은 소리였지만, 고요한 카페 안에서 윤슬의 텅 빈 마음에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심장은 뜨거운 꿈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 아니,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하연과 함께라면 세상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밤을 새워가며 머리를 맞대고 꿈에 그리던 ‘그 카페’를 위한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빈 종이에 그려지던 스케치 하나하나에 온 마음을 담았다. 벽에 걸릴 그림부터 시작해서, 손님들에게 내어줄 컵의 디자인, 심지어 메뉴판에 쓰일 글씨체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하모니를 이룰 것이라고 믿었다.

    “이봐, 윤슬! 우리 카페 이름은 ‘프리지아’ 어때? 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노란 꽃처럼 활짝 피어날 거야!”

    환하게 웃던 하연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노란색 스웨터를 입고,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속삭이던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윤슬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순간의 행복이 너무나 순수하고 아름다웠기에, 지금의 배신감은 더욱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찢어 발기는 듯했다.

    하연은 윤슬의 모든 것을 가져갔다. 아이디어, 꿈, 그리고 믿음까지. 마치 그녀가 쌓아 올린 모든 탑을 한순간에 허물어뜨리듯, 잔인하고 철저하게. 윤슬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는 윤슬의 노트북에 담겨 있던 수많은 자료들을, 함께 밤새워 만든 기획안들을 훔쳐서 자신의 이름으로 먼저 등록해 버렸다. 그리고는 순진한 얼굴로 말했다. “미안해, 윤슬아. 내가 너무 조급했나 봐. 하지만 이건 나만의 꿈이기도 했잖아?”

    그 말에 윤슬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친구를 고소할 수도, 그녀의 양심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그저 온몸의 피가 식는 듯한 충격 속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하연은 그녀의 꿈을 훔쳐 찬란하게 빛나는 ‘프리지아’라는 이름의 카페를 열었고, 윤슬은 폐허가 된 자신의 마음을 부여잡고 홀로 남겨졌다.

    그날 이후, 윤슬은 껍데기만 남은 사람이 되었다. 웃음도 사라졌고, 열정도 식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두려워졌다. 하지만 깊은 절망 속에서도 아주 작은 불씨 하나가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서 꿈틀거렸다. 그것은 바로 ‘복수’라는 이름의 불씨였다. 단순히 하연을 망하게 하는 복수가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만들었던 꿈을, 자신만의 힘으로 다시 세워 보이겠다는 처절한 다짐이었다. 그것만이 무너진 자존심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윤슬이 주로 머무는 곳은 ‘책갈피 서재’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였다. 수많은 책들과 빈티지한 가구들, 그리고 은은한 커피 향이 어우러져 마치 시간을 멈춘 듯한 공간이었다. 그곳의 바리스타인 지훈은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윤슬이 주문하는 씁쓸한 아메리카노를 잊지 않고 늘 그녀의 자리로 가져다주곤 했다. 그는 윤슬의 어두운 눈빛과 늘 차가운 손끝을 말없이 지켜봤다.

    “늦게까지 계시네요.”

    어느 날 밤, 모두가 떠난 카페에서 윤슬은 여전히 스케치북과 씨름하고 있었다. 지훈이 따뜻한 캐모마일 차 한 잔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윤슬은 고개를 들었다. 피곤함에 젖은 눈이었지만, 그 속에는 어딘가 모를 단단한 빛이 맴돌고 있었다.

    “새로운 레시피를 만드는 중이거든요.”

    윤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다. 지훈은 그녀의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묘한 결의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몸에 좋은 차예요. 잠시 쉬어가는 것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지금 쉬면… 다 잊어버릴 것 같아서요.”

    윤슬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펜촉이 종이 위를 빠르게 스쳤다. 그녀의 스케치북에는 더 이상 하연과의 추억이 담긴 ‘프리지아’가 없었다. 대신, 새로운 공간이 그려지고 있었다. 더욱 독창적이고, 더욱 깊이 있는 윤슬만의 세상. 그녀는 하연이 훔쳐 간 꿈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작품’을 완성하고 싶었다.

    그녀는 ‘소박한 꿈’이라는 이름의 작은 카페 디자인 공모전 포스터를 보았다. 상금은 크지 않았지만, 지역 주민들의 투표와 전문가의 심사를 통해 선정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하연이 대형 프랜차이즈의 지원을 받아 화려하게 오픈한 ‘프리지아’와는 정반대의 길이었다. 하지만 윤슬은 알았다. 진정한 가치는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 담긴 이야기와 진정성에서 나온다는 것을.

    이것이 그녀의 복수의 시작이었다. 하연처럼 남의 것을 훔쳐서가 아니라,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더욱 빛나는 것을 창조해내는 것. 진실은 언젠가 드러나는 법이니까. 사람들의 마음은 결국 진정한 것을 알아볼 테니까.

    낡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지난 날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종이 위로 새로운 선들이 그려졌다. 처음에는 망설였던 손끝은 이내 주저함 없이 움직였다. 과거의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있었지만, 이제는 그 상처가 그녀를 일으켜 세우는 동력이 되었다.

    윤슬은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영혼을 깎아내어 만든 그림. 그 그림 속에는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피어나는 작은 꽃처럼,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윤슬의 새로운 시작이 담겨 있었다.

    새로운 레시피는 쓰디쓴 아메리카노처럼 시작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잃어버린 계절에 다시금 달콤한 시럽을 더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혹은… 더욱 차가운 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윤슬은 펜을 든 채, 길고 긴 밤을 향해 미세하게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어스름 그림자

    차윤서는 오늘도 캔버스 앞에서 시간을 잊었다. 빽빽한 빌딩 숲, 숨 가쁜 서울의 한복판에 자리 잡은 오피스텔 겸 작업실은 그녀에게 유일한 피난처이자 감옥이었다. 차가운 아이패드 스크린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공적인 빛만이 유일한 동반자였고, 마감 기한이라는 보이지 않는 족쇄가 그녀의 발목을 옥죄었다. 창밖은 이미 깊은 밤이었지만, 도시의 빛은 꺼질 줄 모르고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따라 영감이 바닥을 드러낸 건지, 며칠째 막혀 있는 삽화는 진전이 없었다. 손끝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형상에 답답함을 느낀 윤서는 결국 붓을 내려놓았다. 굳게 닫힌 창문을 열자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과 함께 후텁지근한 밤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숨 막히는 공기였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어딘가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를 갈망했다.

    오피스텔 건물 꼭대기 층에 작게 마련된 옥상 정원, 그곳은 윤서가 숨통을 트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도시의 밤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작은 안식처. 엘리베이터가 꼭대기 층에 멈추자, 문이 열리기도 전에 서늘한 공기가 먼저 그녀를 맞았다. 이상했다. 언제나 후끈했던 여름밤의 공기가 유독 이곳에서만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옥상 정원 문을 열고 한 걸음 내딛자, 어둠이 짙게 깔린 작은 정원이 눈에 들어왔다. 도시의 불빛이 닿지 않는 어스름 속에서, 덩굴 식물들이 휘감고 있는 낡은 석상만이 희미하게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석상 아래, 짙은 그림자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윤서의 심장이 순간 쿵, 하고 떨어졌다. 놀라움보다는 낯선 아름다움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한 은발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닮았고, 매끄러운 피부는 달빛을 머금은 듯 창백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는 마치 모든 시간과 공간을 담고 있는 듯 아득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윤서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윤서는 자신이 투명인간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남자의 시선은 그녀를 꿰뚫고 지나쳐, 세상의 모든 것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무심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동자에 미미한 흔들림이 감돌았다. 마치 윤서의 존재를 이제야 인식한 듯, 혹은 인식해서는 안 될 것을 본 듯한 미묘한 변화였다.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졌다. 윤서의 몸이 으스스하게 식어갔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보다는 강렬한 끌림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차가운 시선이 그녀의 심장 가장 깊은 곳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그 시선 속에는 알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가득했다. 그리고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고독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남자는 아주 천천히, 마치 유리 조각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유려하고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림자 자체가 형상을 얻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가 발을 뗄 때마다,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어스름이 더욱 짙어지는 듯했다.

    “누구… 세요?”

    윤서는 겨우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불안하게 갈라졌다. 도시의 소음조차 삼켜버린 듯한 고요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크게 울렸다.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눈빛이 흔들리더니, 그녀의 시선을 피해 옥상 정원의 가장 어두운 구석으로 향했다. 그곳은 넝쿨과 낡은 석상들이 뒤엉켜 마치 작은 숲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윤서는 마치 홀린 듯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저기… 괜찮으세요?”
    그의 표정에서 고통의 그림자를 읽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 그림자는 너무나도 희미해서, 착각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다시 한 걸음 다가가자,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이내 그의 몸이 희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지랑이처럼 그의 윤곽이 일렁였고, 그의 존재가 주변의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안 돼요.”

    아주 작은 속삭임이었다. 바람이 귓가를 스치듯 희미했지만, 윤서의 심장을 꿰뚫고 지나갈 만큼 선명했다.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동시에 그녀의 심장을 저미는 듯한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남은 힘을 다해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잠시만요…!”

    윤서가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끝은 이미 잡히지 않는 그림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손끝을 스쳤을 뿐, 그 어떤 온기도 닿지 않았다. 남자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에는 오직 짙은 어둠만이 남아 윤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모든 것이 꿈이었던가. 옥상 정원에는 다시 도시의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고, 차가웠던 공기도 점차 평범한 밤의 온도로 돌아왔다. 하지만 윤서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끝에는, 잡을 수 없었던 그림자의 차가움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그가 이곳에 존재했다는 유일한 증거처럼.

    윤서는 천천히 작업실로 돌아왔다. 아이패드 화면은 여전히 어두웠고, 미완성된 삽화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붓을 다시 들었다. 방금 전 옥상에서 만났던 남자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은발, 창백한 피부, 그리고 모든 것을 담은 듯한 슬픈 눈동자.

    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하자, 닫혀 있던 영감이 마치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붓질은 망설임이 없었고, 색채는 그녀의 마음속에서 그대로 흘러나왔다. 그는 완벽하게 윤서의 캔버스 위에서 되살아났다. 그림 속의 남자는 어둠 속에서 빛나는 듯했고,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그녀를 향해 깊은 슬픔을 담고 있었다.

    그 순간, 윤서의 손끝이 그림 속 남자의 눈동자를 스쳤다.

    차갑고 섬뜩한 한기가 붓을 타고 올라왔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이 스쳐 지나갔다. 낡고 오래된 도시의 뒷골목,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지하 깊은 곳,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 슬픈 노래를 부르는 듯한 수많은 그림자들의 모습이 아득하게 펼쳐졌다.

    윤서는 그림에서 손을 떼었다. 붓은 차갑게 식어 있었고, 화면 속 남자는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감히 넘어서는 안 될 선이 번뜩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알 수 없는 위협과 함께,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이끌림을 동시에 느꼈다.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가 왜 이곳에,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일까. 윤서는 밤늦도록 잠 못 이루고, 그림 속의 남자를 응시했다. 마치 그가 지금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서, 금지된 문이 아주 천천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 던전 탐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천하무림대회: 던전의 낙인**

    **제1장. 균열의 징조: 백련문의 소환**

    고요했다.
    강호윤은 오래된 절벽 끝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등 뒤로는 천 길 낭떠러지가 아득히 펼쳐져 있었고, 앞으로는 겹겹이 이어진 산맥이 푸른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새벽 공기는 뼈를 시리게 했지만, 그의 몸속을 흐르는 내공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고요 속에 잠긴 그의 정신은 마치 심연처럼 깊었고, 그 안에서 오랜 시간 벼려진 검 한 자루가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군.”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풍경만큼이나 차분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스스로에 대한 냉소가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지금, 강호에서 자신을 기억하는 이가 극히 드물 백무문의 마지막 후인이었다. 한때 위명을 떨쳤던 백무문은 그의 조부 대에 이르러 쇠락했고, 그의 아버지 대에 와서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다가, 그가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남은 것이라곤 이름뿐인 문파의 흔적과, 가문의 비전 무공인 ‘백무십삼식’뿐.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이곳,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서 오직 무공 수련에만 매진해왔다. 세상의 온갖 시름과 관계로부터 벗어나 오직 강해지는 것만을 추구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권력도, 명예도 아니었다. 그저 강해져야만 하는, 그저 버텨내야만 하는 막연한 의지였다.

    수련을 끝마친 그는 무심히 눈을 떴다. 흑요석처럼 깊고 차가운 눈동자가 먼 산봉우리를 응시했다. 그때였다.

    “하아… 하아… 강, 강호윤 소협!”

    저 멀리, 산길을 급히 뛰어 올라오는 인영이 보였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도 않은 이른 아침, 이 외딴곳에 찾아올 이는 결코 흔치 않았다. 강호윤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별다른 기색 없이 인영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렸다.

    그의 앞에 다다른 이는 사백련문의 젊은 제자였다.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얼굴에는 급박함과 경외심이 교차했다. 그는 강호윤의 얼굴을 미처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숨을 헐떡였다.

    “백련문의 소자, 한율입니다. 소협께 급히 전할 말씀이 있어…!”

    “말해라.”

    강호윤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한율에게는 날카로운 한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무시하며 품에서 공손히 서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비단으로 싸인 서찰에는 백련문의 문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백련문 문주, 무진도장님의 명입니다. 천하무림대회가 열립니다.”

    강호윤은 서찰을 받아 들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먼 산봉우리에 머물러 있었다.

    “천하무림대회? 시대에 뒤떨어진 유희에 내가 나설 이유는 없다.”

    강호에서 무림대회는 오랜 전통이었다. 강호의 젊은 영웅들이 무공을 겨루고, 명성을 쌓는 장. 하지만 강호윤에게 그런 명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한율은 강호윤의 태도에 당황했지만, 곧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소협, 이번 대회는 예전과는 다릅니다! 단순한 유희가 아닙니다. 지금 강호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강호윤의 시선이 드디어 한율에게 향했다.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한율을 꿰뚫는 듯했다.

    “위기라… 강호는 늘 위기에 처해 있었지 않나. 마교(魔敎)의 준동이거나, 사파(邪派)의 발호이거나. 늘 그래왔던 것처럼 스스로 해결할 테지.”

    “그, 그것이 아닙니다! 마교도 사파도 아닌… 미증유의 위협입니다.”

    한율은 말을 잇기 위해 애썼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수년 전부터 강호 곳곳에 ‘균열’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균열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던전’이라 부릅니다.”

    강호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던전. 그는 그 단어를 듣자마자 뇌리 한구석에 박혀 있던 어두운 기억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강호에 본격적으로 그 존재가 알려지기 전부터, 그는 그 균열의 존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아니, 그의 가문은 어쩌면 그 균열과 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마물이라… 허황된 이야기 같군.” 강호윤은 일부러 냉담하게 말했다.

    “결코 허황되지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문파의 제자들이 마물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었고, 대도시 근처에까지 균열이 나타나 민간인까지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마물들은 마치 어둠의 그림자처럼 이 강호를 침식하고 있습니다.”

    한율은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백련문을 비롯한 정파의 여러 문파들이 힘을 합쳐 던전을 조사하고, 마물들을 토벌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던전은 상상 이상으로 깊고, 마물들은 강력합니다. 더구나, 던전 안에는 알 수 없는 ‘마기(魔氣)’가 가득하여 우리의 내공을 흐트러뜨리고, 심신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그는 다시 한번 강호윤에게 서찰을 내밀었다.

    “이번 천하무림대회는 단순한 무공 겨루기가 아닙니다. 강호의 모든 무림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이 위기를 타개할 방도를 찾고, 던전의 근원을 파헤쳐 이 모든 혼란을 종식시킬 ‘패왕’을 뽑기 위함입니다.”

    강호윤은 서찰을 받아 들었다. 묵직한 비단 서찰 안에서 종이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서찰을 열어 내용을 훑어보았다. 무진도장의 필체로 쓰인 내용은 한율의 설명과 일치했다. 무엇보다, 서찰의 마지막 문구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백무문의 비전, 던전의 해답을 찾을 열쇠가 되리라 믿사옵니다.’

    강호윤의 심장이 무언가에 꿰뚫린 듯 격렬하게 울렸다. 백무문의 비전.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숙명과 같은 것이었다. 그가 이 외딴곳에서 외로이 무공을 수련해온 이유와도 연결되는 깊고 어두운 비밀.

    그는 서찰을 접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그림자가 새벽 햇살 아래 길게 드리워졌다.

    “백련문 문주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가 단지 던전 때문만은 아니겠지.”

    강호윤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한율은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 그것은… 소자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문주님께서 강호윤 소협의 무공과 지혜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강호윤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한율을 지나쳐 절벽 끝으로 다가섰다. 푸른 산맥과 그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강호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에게 이곳은 은거지였지만, 이제는 그의 삶의 터전이 될 새로운 세상이 그를 부르는 듯했다.

    그는 자신의 주먹을 쥐었다 펴 보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도 그의 내공은 더욱 뜨겁게 타올랐다. 그의 손에는 오랜 시간 동안 갈고닦은 무공의 정수가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던전의 균열 너머에서부터 이어져 온 어둠의 그림자에 맞설 무언가가 숨겨져 있었다.

    “알겠다. 백련문으로 가겠다.”

    그의 낮은 결정은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이내 강호를 뒤흔들 거대한 파란의 시작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한율은 안도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강호윤이라는 이름, 그리고 백무문의 비전. 그것들이 과연 강호의 운명을 어디로 이끌게 될 것인가.

    강호윤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산봉우리 너머의 희미한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어둠을 삼키려는 듯 붉게 타오르는 여명의 빛이, 마치 거대한 균열처럼 벌어져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여명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자,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낙인이었다.
    던전의 균열, 천하무림대회. 그리고 백무문의 마지막 후인.
    그 모든 것이 지금, 강호의 역사 속으로 돌진하고 있었다.

  • 추리 미스터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닫힌 문 뒤의 그림자**

    장대비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비는 마치 하늘이 통곡이라도 하는 듯이, 멈출 줄 모르고 거칠게 지면을 때렸다. 그 빗줄기 사이로 낡았지만 위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드러났다. 한서윤 형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저택 앞으로 달려갔다. 경찰 통제선은 이미 쳐져 있었고, 선배 형사들의 무전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어지럽게 들려왔다.

    “한 형사, 빨리 와! 망할, 이건 도대체…!”

    박 팀장의 다급한 목소리에 서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 후텁지근하고 곰팡이 냄새 섞인 퀴퀴한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 찔렀다. 외부는 낡았어도 내부는 한때 화려했을 법한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으스스한 분위기 속에서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가장 안쪽에 위치한 서재 앞에 다다랐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는 이미 여러 명의 형사들이 심각한 얼굴로 서 있었다.

    “팀장님, 어떻게 된 겁니까?” 서윤이 속삭이듯 물었다.

    박 팀장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미간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시신이 발견됐어. 건축가 박건우 씨야. 그런데… 이게 밀실 살인이다.”

    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 밀실 살인이라니. 그런 사건은 책이나 영화 속에서나 나오는 것 아니었던가.
    “밀실이요? 어떻게… 문이 잠겨 있었습니까?”

    “그래. 이중 잠금장치로 안에서 완벽하게 잠겨 있었어. 창문도 마찬가지고. 빗장까지 굳게 걸려 있었지. 부수고 들어간 흔적도, 외부 침입 흔적도 전혀 없어. 모든 게 완벽하게 봉쇄된 채였다고.”

    그들의 대화는 서재 문이 열리면서 잠시 중단되었다. 안에 있던 감식반 요원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오자, 서재 내부의 풍경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묵직한 서가에 가득 찬 책들, 고풍스러운 가구들, 그리고 그 중심에 쓰러져 있는 한 남자의 형체.

    서윤은 조심스럽게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냄새는 안으로 들어서자 더욱 심해졌다. 아마도 오랫동안 환기되지 않은 탓일 터였다. 바닥에는 핏자국이 흥건했고, 그 가운데 앙상한 체구의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나이 지긋한 중년의 남자, 박건우 씨는 가슴팍에 깊이 박힌 칼날을 간직한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칼은 그가 사용하던 문진용 나이프 같았다.

    “사인은 과다출혈. 흉기로 보아 아마도 이 나이프가 범행 도구인 듯합니다. 지문은… 아직 판독 중입니다만, 현장에서 발견된 모든 잠금장치는 안쪽에서 잠겼고,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감식반 팀장의 보고에 박 팀장은 다시금 이마를 짚었다.
    “피해자의 지문 외에는 다른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자살인가? 하지만 저렇게 깊게 찔렀는데, 흉기가 그대로 박힌 채라면… 도저히 자살로는 보이지 않아.”

    서윤 역시 같은 생각을 했다. 자살이라기엔 너무나 처참했고, 격렬한 저항의 흔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한 모습도 아니었다. 피해자의 눈은 크게 뜨여 있었고, 얼굴에는 고통과 함께 마지막 순간의 어떤 강렬한 의문이 서려 있는 듯했다.

    “그럼 범인은 어떻게 나갔을까요? 벽을 뚫고 나갔을 리도 없고, 하늘을 날아간 것도 아닐 텐데…” 서윤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서재 문 밖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요. 하늘을 날았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범인이 날개 달린 존재는 아닐 테니, 물리적인 방법으로 이 방을 나갔을 겁니다.”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키가 크고, 깔끔한 검은색 수트를 입은 남자가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날카로운 눈빛은 이미 방 안의 모든 것을 훑어보고 있는 듯했다.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흥미와 더불어 차가운 이성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박 팀장은 남자를 보자마자 얼굴에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강 이안 씨… 벌써 오셨습니까.”

    ‘강 이안?’ 서윤은 속으로 되뇌었다. ‘그 유명한 천재 탐정 강 이안?’
    그의 이름은 언론에 자주 오르내렸다. 경찰이 미궁에 빠진 사건들을 기가 막힌 통찰력으로 해결해낸다는, 전설 같은 인물. 하지만 그의 명성만큼이나 괴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강 이안은 아무 말 없이 서재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다른 형사들이 조심스럽게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는 달리, 그는 거침없이 걸어 들어왔다. 그가 발을 딛는 곳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 열리는 듯했다.

    그는 시신에 다가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서재의 벽을 훑고, 책장의 책들을 무심하게 응시하고,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서윤은 그의 움직임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일반인들이라면 그냥 지나쳤을 사소한 디테일에 멈추는 듯했다.

    “박 팀장, 이 방의 모든 잠금장치가 안에서 잠겨 있었다고 했죠?” 강 이안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왠지 모를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습니다.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박 팀장이 답했다.

    강 이안은 창문 앞에 섰다. 밖에서는 여전히 빗줄기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그는 창틀에 손을 얹고 조용히 창밖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흥미롭군요.”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차분했지만, 듣는 이에게는 묘한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살인 사건 현장에서 ‘흥미롭다’는 표현이라니.

    “뭐가 흥미롭다는 겁니까?” 서윤이 무심결에 물었다.

    강 이안은 서윤을 흘긋 보더니, 다시 시선을 창문에 고정했다.
    “이 창문, 꽤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것 같군요.”

    서윤은 창틀을 자세히 보았다. 과연, 창틀에는 묵은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창문이 전혀 젖지 않은 걸 보면, 최근에는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잠금장치도 완벽했습니다.” 박 팀장이 덧붙였다.

    “음…” 강 이안은 짧게 콧소리를 냈다. “그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봉쇄된 밀실에서, 피해자는 가슴에 칼을 맞고 죽었고, 범인은 사라졌다는 말이군요.”

    그는 빙긋이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은 차가웠고, 어떤 비밀을 이미 꿰뚫어 보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은 종종 눈앞의 보이는 것에 현혹됩니다. 이 서재는 분명 ‘밀실’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누가’ 그 밀실을 만들었는가 하는 거죠.”

    그의 말에 서윤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누가 밀실을 만들었다니?
    강 이안은 시신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더니, 시신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그는 피 묻은 바닥을 응시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의 어느 한 곳에 닿았다.

    “밀실 살인? 아닙니다.”

    강 이안의 단호한 목소리가 서재에 울려 퍼졌다. 모든 형사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이건 ‘밀실’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범인에게는요. 이 방은 처음부터,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완벽한 ‘덫’이었을 뿐입니다.”

    그의 말은 뇌리 속에 번개처럼 박혔다. 덫? 누가, 누구를 위한 덫이었을까?
    그는 다시금 창밖을 응시했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여전히 모든 것을 덮어버릴 듯이 거셌다.
    “범인은 이 문을 닫지 않았습니다. 단지, 문이 닫히도록 유도했을 뿐이죠.”

    그의 마지막 말은 서윤의 가슴을 세차게 울렸다. 닫히도록 유도했다니? 그건 무슨 의미일까?
    이 서재는 밀실이 아니었다는 그의 말은 과연 어떤 진실을 품고 있는 걸까?
    강 이안의 눈빛은 비에 젖은 밤하늘처럼 깊고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밀실 살인 사건의 베일은 이제 막 걷히기 시작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