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유난히 서쪽으로 길게 뻗는 노을이, 창밖의 풍경을 온통 붉은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내 마음도 저 노을처럼 온종일 붉게 달아올랐다가, 이제는 서서히 차가운 보랏빛으로 식어가는 중이었다. 책상 위, 손때 묻은 일기장과 펜이 놓여 있었지만, 좀처럼 글을 이어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언제나처럼 내 옆에 있었다. 정확히는 내 무릎 위, 따뜻한 온기를 나누며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고 있었다. 금빛으로 부서지는 노을빛이 그 아이의 털에 닿아 마치 작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나는 가만히 그 아이의 부드러운 등을 쓸었다. 작은 골격 사이로 느껴지는 잔잔한 진동, 이윽고 울려 퍼지는 낮은 골골송은 세상의 모든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는 주문 같았다.
“오늘은 말이야, 참 이상한 날이었어.”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고양이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내 얼굴을 올려다봤다. 투명한 호박색 눈동자에는 노을의 색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 눈빛은 언제나 나의 복잡한 감정들을 읽어내는 듯했다. 나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에 잃었던 줄 알았던 조각들이 갑자기 다시 나타난 느낌이랄까. 오랜 시간 잊고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한 번도 떠나지 않고 내 안에 머물러 있었던 모양이야.”
그 아이는 다시 고개를 내 무릎에 파묻고는, 긴 꼬리를 한 번 더 가볍게 흔들었다. 마치 ‘알고 있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보드라운 털에 얼굴을 기댔다. 차가워지던 마음 한구석이 따뜻한 기운으로 채워지는 것을 느꼈다. 길 위에서 수많은 밤을 견뎌냈을 이 작은 생명은, 언제나 묵묵히 나에게 가장 필요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다시 마주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내가 다시 속삭였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몰랐던 것들이 이제는 너무나 선명하게 보여. 그래서 더 아픈 걸까?”
고양이는 짧게 “야옹” 하고 울었다. 그 소리는 마치 날카로운 질문에 대한 부드러운 대답 같았다. 그리고는 앞발을 살짝 들어 내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나는 그 행동에 담긴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아픔은 분명히 있겠지만, 그것 또한 너를 이루는 조각일 뿐이야. 모든 조각이 맞춰져야 온전한 그림이 되는 것처럼.’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쩌면 우리는 서로의 거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그 아이에게 길 위에서의 고단함을 헤아리듯, 그 아이는 내 마음속 미로를 읽어내는 것 같았다. 말없이 전해지는 위안, 그 무언의 대화 속에서 나는 길 잃은 어린아이 같았던 마음을 다독였다. 조각들은 흩어져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숨어 있었을 뿐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창밖의 노을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어스름한 푸른빛이 세상을 감쌌다. 나는 무릎 위의 고양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따뜻하고 가벼운 몸. 그 아이는 내 품에 편안히 안겨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는 마치 내 결심을 확인하듯, 다시 한번 나를 올려다보았다.
‘응, 괜찮아.’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다시 맞춰볼게. 서두르지 않고, 조심스럽게. 너와 함께라면, 어떤 조각이라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새로운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은, 오랜 상념의 조각들을 하나씩 꺼내어 다시 들여다볼 용기를 선물해 주었다. 그 아이의 따뜻한 온기 속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