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빌딩 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고단했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숨 막히는 정체로 가득했고, 인파는 끈적한 피로를 몰고 다니는 유령들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훈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용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공허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자, 바깥세상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17층 그의 작은 보금자리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소파,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진 말이다.

    지훈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었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뭐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원격 제어기가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뼘 정도 옆으로 스르륵 움직인 것 같았다.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착각이겠지.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원격 제어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음식 용기를 봉투에 담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영상 기기를 켜려 원격 제어기를 찾았지만, 아까 제자리에 두었던 원격 제어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그는 소파 틈새를 뒤지고,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어디 갔지?”

    그때,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컵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컵을 놓아두는 건조대에 컵이 하나 더러져 있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으니 물을 마시러 간 적도 없었다. 그는 컵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설마, 귀신이라도 붙었나?’

    하지만 그는 과학을 믿는 현실주의자였다. 낡은 아파트의 미세한 지반 흔들림이거나,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컵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원격 제어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젠장.”

    짜증이 솟구쳤다. 어딘가에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는 창가에 놓인 오래된 금속제 장식품을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 아버지가 선물해준 우주선 모형이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색 모형은 오랜 세월의 먼지를 품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스탠드 등이 ‘파지직’ 소리와 함께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불안정한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빛이 희미해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지훈은 손을 멈추고 스탠드 등을 응시했다. ‘전구가 다 됐나?’ 하지만 이 스탠드는 최근에 전구를 교체한 참이었다. 그는 스탠드 쪽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러봤지만, 깜빡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아주 낮은 주파수의 ‘웅-웅-‘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건물의 진동과는 달랐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아주 멀리서,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귀를 찢을 듯한 고음이 아니라, 심장을 흔드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었다.

    “뭐야, 정말?”

    그는 스탠드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소파 등받이 위에 놓여 있던 그의 휴대용 단말기가 ‘덜컹’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면은 멀쩡했지만, 충격 때문인지 화면이 잠시 지직거렸다.

    지훈은 순간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원격 제어기, 컵, 스탠드, 그리고 휴대용 단말기.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있어?”

    말소리는 떨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용기를 내어 휴대용 단말기를 주워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게 뻔했다.

    그는 휴대용 단말기를 꽉 쥐고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혹시 누군가 침입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꽂이에서 식칼 하나가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박힌 칼날이 번쩍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굳혔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방에 함께 있었다.

    “나가… 나가라고!”

    그가 외쳤다. 목소리는 쉬었고, 공포로 인해 갈라졌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거실의 영상 기기가 저절로 켜졌다. ‘쉬이이이-‘ 하는 백색 소음과 함께 화면이 지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직거리는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고대 상형문자 같기도 했고, 정교한 회로도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문자들 사이에서, 아주 짧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이미지가 있었다.

    새까만 우주를 배경으로, 미세한 금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형태의 건축물. 혹은 거대한 기계.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엔진이 그의 집 바로 아래에서 시동을 거는 것만 같았다. 스탠드 등은 미친 듯이 깜빡였고, 주방의 그릇들은 격렬하게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지훈은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 집,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전체에,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침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그의 고요했던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뜨자, 영상 기기 화면은 다시 백색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면에, 방금 전 칼이 떨어진 자리 옆, 주방 타일 바닥 위에 알 수 없는 기호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본떠 만든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어떤 기계의 설계도 같기도 했다. 미세한 푸른빛이 그 기호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지훈은 그 기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한.

    그것은 시작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세상에 던진, 첫 번째 질문.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기호를 가리킬 뿐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빌딩 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고단했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숨 막히는 정체로 가득했고, 인파는 끈적한 피로를 몰고 다니는 유령들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훈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용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공허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자, 바깥세상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17층 그의 작은 보금자리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소파,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진 말이다.

    지훈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었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뭐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원격 제어기가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뼘 정도 옆으로 스르륵 움직인 것 같았다.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착각이겠지.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원격 제어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음식 용기를 봉투에 담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영상 기기를 켜려 원격 제어기를 찾았지만, 아까 제자리에 두었던 원격 제어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그는 소파 틈새를 뒤지고,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어디 갔지?”

    그때,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컵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컵을 놓아두는 건조대에 컵이 하나 더러져 있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으니 물을 마시러 간 적도 없었다. 그는 컵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설마, 귀신이라도 붙었나?’

    하지만 그는 과학을 믿는 현실주의자였다. 낡은 아파트의 미세한 지반 흔들림이거나,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컵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원격 제어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젠장.”

    짜증이 솟구쳤다. 어딘가에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는 창가에 놓인 오래된 금속제 장식품을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 아버지가 선물해준 우주선 모형이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색 모형은 오랜 세월의 먼지를 품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스탠드 등이 ‘파지직’ 소리와 함께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불안정한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빛이 희미해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지훈은 손을 멈추고 스탠드 등을 응시했다. ‘전구가 다 됐나?’ 하지만 이 스탠드는 최근에 전구를 교체한 참이었다. 그는 스탠드 쪽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러봤지만, 깜빡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아주 낮은 주파수의 ‘웅-웅-‘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건물의 진동과는 달랐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아주 멀리서,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귀를 찢을 듯한 고음이 아니라, 심장을 흔드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었다.

    “뭐야, 정말?”

    그는 스탠드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소파 등받이 위에 놓여 있던 그의 휴대용 단말기가 ‘덜컹’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면은 멀쩡했지만, 충격 때문인지 화면이 잠시 지직거렸다.

    지훈은 순간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원격 제어기, 컵, 스탠드, 그리고 휴대용 단말기.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있어?”

    말소리는 떨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용기를 내어 휴대용 단말기를 주워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게 뻔했다.

    그는 휴대용 단말기를 꽉 쥐고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혹시 누군가 침입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꽂이에서 식칼 하나가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박힌 칼날이 번쩍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굳혔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방에 함께 있었다.

    “나가… 나가라고!”

    그가 외쳤다. 목소리는 쉬었고, 공포로 인해 갈라졌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거실의 영상 기기가 저절로 켜졌다. ‘쉬이이이-‘ 하는 백색 소음과 함께 화면이 지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직거리는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고대 상형문자 같기도 했고, 정교한 회로도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문자들 사이에서, 아주 짧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이미지가 있었다.

    새까만 우주를 배경으로, 미세한 금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형태의 건축물. 혹은 거대한 기계.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엔진이 그의 집 바로 아래에서 시동을 거는 것만 같았다. 스탠드 등은 미친 듯이 깜빡였고, 주방의 그릇들은 격렬하게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지훈은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 집,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전체에,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침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그의 고요했던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뜨자, 영상 기기 화면은 다시 백색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면에, 방금 전 칼이 떨어진 자리 옆, 주방 타일 바닥 위에 알 수 없는 기호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본떠 만든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어떤 기계의 설계도 같기도 했다. 미세한 푸른빛이 그 기호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지훈은 그 기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한.

    그것은 시작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세상에 던진, 첫 번째 질문.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기호를 가리킬 뿐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빌딩 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고단했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숨 막히는 정체로 가득했고, 인파는 끈적한 피로를 몰고 다니는 유령들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훈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용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공허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자, 바깥세상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17층 그의 작은 보금자리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소파,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진 말이다.

    지훈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었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뭐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원격 제어기가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뼘 정도 옆으로 스르륵 움직인 것 같았다.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착각이겠지.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원격 제어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음식 용기를 봉투에 담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영상 기기를 켜려 원격 제어기를 찾았지만, 아까 제자리에 두었던 원격 제어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그는 소파 틈새를 뒤지고,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어디 갔지?”

    그때,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컵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컵을 놓아두는 건조대에 컵이 하나 더러져 있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으니 물을 마시러 간 적도 없었다. 그는 컵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설마, 귀신이라도 붙었나?’

    하지만 그는 과학을 믿는 현실주의자였다. 낡은 아파트의 미세한 지반 흔들림이거나,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컵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원격 제어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젠장.”

    짜증이 솟구쳤다. 어딘가에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는 창가에 놓인 오래된 금속제 장식품을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 아버지가 선물해준 우주선 모형이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색 모형은 오랜 세월의 먼지를 품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스탠드 등이 ‘파지직’ 소리와 함께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불안정한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빛이 희미해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지훈은 손을 멈추고 스탠드 등을 응시했다. ‘전구가 다 됐나?’ 하지만 이 스탠드는 최근에 전구를 교체한 참이었다. 그는 스탠드 쪽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러봤지만, 깜빡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아주 낮은 주파수의 ‘웅-웅-‘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건물의 진동과는 달랐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아주 멀리서,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귀를 찢을 듯한 고음이 아니라, 심장을 흔드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었다.

    “뭐야, 정말?”

    그는 스탠드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소파 등받이 위에 놓여 있던 그의 휴대용 단말기가 ‘덜컹’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면은 멀쩡했지만, 충격 때문인지 화면이 잠시 지직거렸다.

    지훈은 순간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원격 제어기, 컵, 스탠드, 그리고 휴대용 단말기.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있어?”

    말소리는 떨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용기를 내어 휴대용 단말기를 주워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게 뻔했다.

    그는 휴대용 단말기를 꽉 쥐고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혹시 누군가 침입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꽂이에서 식칼 하나가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박힌 칼날이 번쩍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굳혔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방에 함께 있었다.

    “나가… 나가라고!”

    그가 외쳤다. 목소리는 쉬었고, 공포로 인해 갈라졌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거실의 영상 기기가 저절로 켜졌다. ‘쉬이이이-‘ 하는 백색 소음과 함께 화면이 지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직거리는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고대 상형문자 같기도 했고, 정교한 회로도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문자들 사이에서, 아주 짧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이미지가 있었다.

    새까만 우주를 배경으로, 미세한 금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형태의 건축물. 혹은 거대한 기계.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엔진이 그의 집 바로 아래에서 시동을 거는 것만 같았다. 스탠드 등은 미친 듯이 깜빡였고, 주방의 그릇들은 격렬하게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지훈은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 집,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전체에,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침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그의 고요했던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뜨자, 영상 기기 화면은 다시 백색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면에, 방금 전 칼이 떨어진 자리 옆, 주방 타일 바닥 위에 알 수 없는 기호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본떠 만든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어떤 기계의 설계도 같기도 했다. 미세한 푸른빛이 그 기호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지훈은 그 기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한.

    그것은 시작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세상에 던진, 첫 번째 질문.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기호를 가리킬 뿐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 스페이스 오페라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빌딩 숲을 가로질러 집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고단했다. 퇴근 시간의 도로는 숨 막히는 정체로 가득했고, 인파는 끈적한 피로를 몰고 다니는 유령들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훈은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용 단말기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아파트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삑, 삑, 삑.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공허하게 울렸다.

    문이 열리고 닫히자, 바깥세상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차단되었다. 17층 그의 작은 보금자리는 언제나처럼 고요했다. 현관에 벗어놓은 구두, 거실 한편에 놓인 낡은 소파,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야경. 모든 것이 평소와 다름없어 보였다. 적어도 그때까진 말이다.

    지훈은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느슨하게 풀었다. 테이블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배달 음식 용기가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그것들을 치우려 손을 뻗었다. 그때였다.

    “뭐지?”

    테이블 중앙에 놓여 있던 원격 제어기가 아주 미세하게, 마치 눈 깜빡할 사이에 한 뼘 정도 옆으로 스르륵 움직인 것 같았다. 지훈은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을 본 건가? 착각이겠지.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원격 제어기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남은 음식 용기를 봉투에 담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와 가벼운 옷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영상 기기를 켜려 원격 제어기를 찾았지만, 아까 제자리에 두었던 원격 제어기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여기에 뒀는데. 그는 소파 틈새를 뒤지고, 테이블 아래를 살폈다.

    “어디 갔지?”

    그때, 주방 쪽에서 ‘달그락’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컵이 서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주방으로 향했다. 싱크대 위, 컵을 놓아두는 건조대에 컵이 하나 더러져 있었다. 방금 샤워하고 나왔으니 물을 마시러 간 적도 없었다. 그는 컵을 집어 들며 생각했다. ‘설마, 귀신이라도 붙었나?’

    하지만 그는 과학을 믿는 현실주의자였다. 낡은 아파트의 미세한 지반 흔들림이거나, 아니면 그저 착각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는 컵을 제자리에 두고,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원격 제어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젠장.”

    짜증이 솟구쳤다. 어딘가에 있겠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는 창가에 놓인 오래된 금속제 장식품을 만지작거렸다. 어릴 적 아버지가 선물해준 우주선 모형이었다. 꽤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은색 모형은 오랜 세월의 먼지를 품고 있었다. 그 순간, 거실의 스탠드 등이 ‘파지직’ 소리와 함께 깜빡이기 시작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불안정한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빛이 희미해졌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지훈은 손을 멈추고 스탠드 등을 응시했다. ‘전구가 다 됐나?’ 하지만 이 스탠드는 최근에 전구를 교체한 참이었다. 그는 스탠드 쪽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눌러봤지만, 깜빡임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격렬해지는 듯했다.

    그리고 그는 미약한 진동을 느꼈다. 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아주 낮은 주파수의 ‘웅-웅-‘ 하는 소리였다. 그것은 건물의 진동과는 달랐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아주 멀리서,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이는 듯한 느낌. 도시의 소음 속에서도 귀를 찢을 듯한 고음이 아니라, 심장을 흔드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었다.

    “뭐야, 정말?”

    그는 스탠드에서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그때였다. 소파 등받이 위에 놓여 있던 그의 휴대용 단말기가 ‘덜컹’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화면은 멀쩡했지만, 충격 때문인지 화면이 잠시 지직거렸다.

    지훈은 순간적인 공포에 사로잡혔다. 이건 우연이 아니었다. 원격 제어기, 컵, 스탠드, 그리고 휴대용 단말기.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의지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있어?”

    말소리는 떨렸다. 그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둘러봤다. 고요했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듯했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는 용기를 내어 휴대용 단말기를 주워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이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다. ‘내 집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라고 말하면 미쳤다고 할 게 뻔했다.

    그는 휴대용 단말기를 꽉 쥐고 부엌으로 다시 향했다. 혹시 누군가 침입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현관문은 분명 잠겨 있었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부엌에 들어서자마자, 싱크대 위에 놓여 있던 칼꽂이에서 식칼 하나가 ‘챙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바닥에 박힌 칼날이 번쩍였다.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 이건 현실이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현상들.

    그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몸을 굳혔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이 방에 함께 있었다.

    “나가… 나가라고!”

    그가 외쳤다. 목소리는 쉬었고, 공포로 인해 갈라졌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거실의 영상 기기가 저절로 켜졌다. ‘쉬이이이-‘ 하는 백색 소음과 함께 화면이 지직거렸다. 그리고 그 순간, 지직거리는 화면 위로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마치 고대 상형문자 같기도 했고, 정교한 회로도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문자들 사이에서, 아주 짧게, 섬광처럼 스쳐 지나간 이미지가 있었다.

    새까만 우주를 배경으로, 미세한 금빛으로 빛나는 알 수 없는 형태의 건축물. 혹은 거대한 기계. 그 모든 것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하지만 찰나의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이게… 대체…”

    그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아파트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강렬한 진동이 울렸다. 마치 거대한 엔진이 그의 집 바로 아래에서 시동을 거는 것만 같았다. 스탠드 등은 미친 듯이 깜빡였고, 주방의 그릇들은 격렬하게 부딪히며 소리를 냈다.

    지훈은 주저앉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단순히 보이지 않는 장난이 아니었다. 이 집, 아니 어쩌면 이 도시 전체에,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침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작이 그의 고요했던 아파트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눈을 뜨자, 영상 기기 화면은 다시 백색 소음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정면에, 방금 전 칼이 떨어진 자리 옆, 주방 타일 바닥 위에 알 수 없는 기호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마치 하늘의 별자리를 본떠 만든 것 같기도 했고, 동시에 어떤 기계의 설계도 같기도 했다. 미세한 푸른빛이 그 기호 주변에서 간헐적으로 깜빡였다.

    지훈은 그 기호를 멍하니 바라봤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오한.

    그것은 시작이었다. 알 수 없는 존재가 이 세상에 던진, 첫 번째 질문.

    그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기호를 가리킬 뿐이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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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룡비무대.

    거대한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 한가운데, 수천 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흑요석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위로 사방에 펼쳐진 거대한 관중석은 고요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숨죽인 채 단상을 응시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깃발들을 찢어버릴 듯 격렬하게 휘감았지만, 그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한 침묵이 천룡비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운명 비무.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그 엄청난 무게가 공기 중에 짓눌려 있었다. 천 년에 한 번 도래한다는 ‘묵시의 겨울’을 막을 유일한 존재, ‘운명지기’를 가리는 자리. 모두의 시선은 단상 위에 마주 선 두 인물에게 꽂혀 있었다.

    한 명은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무영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함께 오래된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은 검집에 싸인 낡은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검은, 마치 무영 자신처럼 존재감이 희미한 듯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선 이는 흑룡이었다. 온몸을 뒤덮은 암흑색 무복은 그의 맹렬한 기세를 더욱 부각시켰다. 우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치 거대한 암석과 같았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고, 입술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그의 두 주먹 자체가 천하를 부술 듯한 살기를 뿜어냈다.

    “무영. 네놈의 잔영검법은 그림자처럼 잡히지 않는다고 들었다.” 흑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천룡비무대 전체를 울릴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강해지면 사라지는 법. 네놈의 얄팍한 기교가 나의 흑룡파천장(黑龍破天掌)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영은 말없이 흑룡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흑룡의 압도적인 기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폭풍우 속의 등대처럼, 그는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 따위는 너희가 논할 자격이 없다.” 흑룡이 비웃듯이 덧붙였다. “힘 있는 자가 곧 운명이자 정의다. 이 천하비무를 통해 내가 그 진리를 증명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룡의 전신에서 검은 오라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그의 기운에 눌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의 기운은 용솟음치며 거대한 흑룡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기운은 천룡비무대 전체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관중석에서는 얕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세한 빛 한 줄기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너는 이 비무의 의미를 모른다.” 무영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속에는 흑룡의 광기 어린 기세조차 잠재울 듯한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운명은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려는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룡이 움직였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속도로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발이 닿는 비무대 바닥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육중한 주먹에서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며 하나의 거대한 용의 머리가 되어 무영을 향해 쇄도했다. 흑룡파천장, 그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 순간, 무영의 몸이 흐릿해졌다. 잔상이었다. 그의 검은 아직 검집에 있었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흑룡의 주먹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흑룡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바람소리를 냈다. 그 압력이 너무나 강해 비무대 바닥의 미세한 먼지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무영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흑룡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의 손은 이미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쉬익’ 소리와 함께 검은 검날이 새벽 어둠처럼 미끄러져 나왔다. 잔영검법, 일검(一劍).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섬광. 검은 검날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 듯, 오직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성 같았다. 흑룡의 등 뒤를 노린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흑룡은 고작 등 뒤에 나타난 무영의 기습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 근육이 불쑥 솟아오르며 등 뒤로 검은 기운의 방패가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무영의 검날이 그 방패에 닿는 순간, ‘쨍강!’ 하는 금속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발생했다.

    무영의 검이 튕겨 나갔다. 흑룡은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다른 손으로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흑룡파천장, 이격(二擊). 이번에는 무영의 머리를 정통으로 노린 일격이었다. 주먹 끝에서는 검은 회오리가 몰아치며 찢어지는 듯한 바람 소리를 냈다.

    무영은 검을 쳐내자마자 발로 비무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움직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흑룡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허공이 찢어지는 듯한 기세가 남았다. 그 강력한 기파에 무영의 도포 자락이 격렬하게 휘날렸다.

    흑룡은 놓치지 않고 무영을 추격했다. 그의 발걸음은 하나하나가 천둥 같았고, 팔은 쉴 새 없이 휘둘러지며 검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재앙 같았다. 그는 무영을 몰아붙였다. 무영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흑룡의 맹렬한 공격은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무영은 수십 합을 오직 피하고 막아내는 데 집중했다. 그의 잔영검법은 방어에 특화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흑룡의 무자비한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흑룡의 공격 사이를 유영했다. 검날은 때로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흑룡의 빈틈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 될 준비를 했다.

    “피하기만 할 셈이냐, 무영!” 흑룡이 포효했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함께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네놈의 잔영검법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나의 힘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

    흑룡은 양손을 모아 거대한 검은 구체를 만들어냈다. 암흑의 기운이 압축되어 만들어진 구체는 마치 작은 블랙홀처럼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천마강뢰(天魔降雷)!’ 흑룡이 외치자, 구체는 무영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공기마저 뒤틀리는 굉음이 비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무영은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이 고요히 뛰었다.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단련했던 검술, 가문의 핏줄에 새겨진 잔영검법의 진정한 의미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단순히 적을 베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반영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고요함이 없었다. 오직 강철 같은 결의만이 번뜩였다.

    무영은 검을 잡은 손에 모든 기운을 모았다. 그의 몸에서 잔잔한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흑룡의 암흑과 정반대되는, 고요하고도 강인한 빛이었다. 검은 기운으로 뭉쳐진 구체가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무영이 검을 휘둘렀다.

    잔영검법, ‘환영개벽(幻影開闢)’.

    무영의 검은 하나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검은 검날이 수백 개의 잔상으로 나뉘어 허공을 채웠다. 섬광처럼 빛나는 잔상들은 흑룡의 거대한 암흑 구체를 향해 마치 폭풍처럼 쇄도했다. 수백 개의 검날이 동시에 암흑 구체를 꿰뚫고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천룡비무대를 뒤흔들었다. 암흑 구체가 마치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흑룡의 검은 기운과 무영의 푸른 기운이 뒤섞이며 거대한 에너지가 충돌했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흑룡은 자신의 강력한 공격이 흩어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영이 파고들었다.

    잔상으로 가득 찬 비무대 위에서, 무영의 진정한 검이 번개처럼 흑룡의 심장을 겨냥했다. 그의 검은 흑룡의 모든 방어를 뚫고 지나갈 듯한 기세였다.

    “감히!” 흑룡은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최후의 발악처럼 온몸의 기운을 심장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피처럼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무영의 검날이 흑룡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피할 수 없는 일격. 모든 관중이 숨을 멈췄다. 이 순간, 천하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검날이 흑룡의 심장에 닿는 순간, 흑룡의 눈이 광기 어린 빛을 발하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의 검은 겨우 심장만을 꿰뚫을 뿐.” 흑룡의 목소리는 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힘은… 천하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동시에 흑룡의 몸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번에는 이전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살아있는 지옥의 불꽃과 같은 암흑의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무영의 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천룡비무대 전체를 잠식하려 했다.

    무영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검은 흑룡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흑룡의 육체는 그조차 뛰어넘는 강력한 생명력과 어둠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이 폭발적인 암흑 기운은 무영 자신을 포함한 천룡비무대, 아니, 천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의 검이 흑룡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수록, 흑룡의 입꼬리는 더욱 섬뜩하게 올라갔다.

    “네놈은… 천하를 구할 수 없다!” 흑룡의 목소리가 비웃듯이 울려 퍼졌다.

    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선택은 단 하나였다. 검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천하를 지키기 위해 자신마저도 이 암흑의 폭풍에 기꺼이 던져 넣을 것인가. 그의 손에 쥔 검이 푸른빛을 더욱 강렬하게 발산했다.

    운명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무영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결의로 빛났다.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단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는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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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룡비무대.

    거대한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 한가운데, 수천 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흑요석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위로 사방에 펼쳐진 거대한 관중석은 고요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숨죽인 채 단상을 응시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깃발들을 찢어버릴 듯 격렬하게 휘감았지만, 그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한 침묵이 천룡비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운명 비무.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그 엄청난 무게가 공기 중에 짓눌려 있었다. 천 년에 한 번 도래한다는 ‘묵시의 겨울’을 막을 유일한 존재, ‘운명지기’를 가리는 자리. 모두의 시선은 단상 위에 마주 선 두 인물에게 꽂혀 있었다.

    한 명은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무영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함께 오래된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은 검집에 싸인 낡은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검은, 마치 무영 자신처럼 존재감이 희미한 듯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선 이는 흑룡이었다. 온몸을 뒤덮은 암흑색 무복은 그의 맹렬한 기세를 더욱 부각시켰다. 우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치 거대한 암석과 같았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고, 입술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그의 두 주먹 자체가 천하를 부술 듯한 살기를 뿜어냈다.

    “무영. 네놈의 잔영검법은 그림자처럼 잡히지 않는다고 들었다.” 흑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천룡비무대 전체를 울릴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강해지면 사라지는 법. 네놈의 얄팍한 기교가 나의 흑룡파천장(黑龍破天掌)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영은 말없이 흑룡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흑룡의 압도적인 기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폭풍우 속의 등대처럼, 그는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 따위는 너희가 논할 자격이 없다.” 흑룡이 비웃듯이 덧붙였다. “힘 있는 자가 곧 운명이자 정의다. 이 천하비무를 통해 내가 그 진리를 증명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룡의 전신에서 검은 오라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그의 기운에 눌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의 기운은 용솟음치며 거대한 흑룡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기운은 천룡비무대 전체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관중석에서는 얕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세한 빛 한 줄기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너는 이 비무의 의미를 모른다.” 무영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속에는 흑룡의 광기 어린 기세조차 잠재울 듯한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운명은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려는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룡이 움직였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속도로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발이 닿는 비무대 바닥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육중한 주먹에서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며 하나의 거대한 용의 머리가 되어 무영을 향해 쇄도했다. 흑룡파천장, 그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 순간, 무영의 몸이 흐릿해졌다. 잔상이었다. 그의 검은 아직 검집에 있었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흑룡의 주먹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흑룡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바람소리를 냈다. 그 압력이 너무나 강해 비무대 바닥의 미세한 먼지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무영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흑룡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의 손은 이미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쉬익’ 소리와 함께 검은 검날이 새벽 어둠처럼 미끄러져 나왔다. 잔영검법, 일검(一劍).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섬광. 검은 검날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 듯, 오직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성 같았다. 흑룡의 등 뒤를 노린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흑룡은 고작 등 뒤에 나타난 무영의 기습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 근육이 불쑥 솟아오르며 등 뒤로 검은 기운의 방패가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무영의 검날이 그 방패에 닿는 순간, ‘쨍강!’ 하는 금속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발생했다.

    무영의 검이 튕겨 나갔다. 흑룡은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다른 손으로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흑룡파천장, 이격(二擊). 이번에는 무영의 머리를 정통으로 노린 일격이었다. 주먹 끝에서는 검은 회오리가 몰아치며 찢어지는 듯한 바람 소리를 냈다.

    무영은 검을 쳐내자마자 발로 비무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움직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흑룡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허공이 찢어지는 듯한 기세가 남았다. 그 강력한 기파에 무영의 도포 자락이 격렬하게 휘날렸다.

    흑룡은 놓치지 않고 무영을 추격했다. 그의 발걸음은 하나하나가 천둥 같았고, 팔은 쉴 새 없이 휘둘러지며 검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재앙 같았다. 그는 무영을 몰아붙였다. 무영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흑룡의 맹렬한 공격은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무영은 수십 합을 오직 피하고 막아내는 데 집중했다. 그의 잔영검법은 방어에 특화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흑룡의 무자비한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흑룡의 공격 사이를 유영했다. 검날은 때로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흑룡의 빈틈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 될 준비를 했다.

    “피하기만 할 셈이냐, 무영!” 흑룡이 포효했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함께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네놈의 잔영검법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나의 힘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

    흑룡은 양손을 모아 거대한 검은 구체를 만들어냈다. 암흑의 기운이 압축되어 만들어진 구체는 마치 작은 블랙홀처럼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천마강뢰(天魔降雷)!’ 흑룡이 외치자, 구체는 무영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공기마저 뒤틀리는 굉음이 비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무영은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이 고요히 뛰었다.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단련했던 검술, 가문의 핏줄에 새겨진 잔영검법의 진정한 의미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단순히 적을 베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반영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고요함이 없었다. 오직 강철 같은 결의만이 번뜩였다.

    무영은 검을 잡은 손에 모든 기운을 모았다. 그의 몸에서 잔잔한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흑룡의 암흑과 정반대되는, 고요하고도 강인한 빛이었다. 검은 기운으로 뭉쳐진 구체가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무영이 검을 휘둘렀다.

    잔영검법, ‘환영개벽(幻影開闢)’.

    무영의 검은 하나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검은 검날이 수백 개의 잔상으로 나뉘어 허공을 채웠다. 섬광처럼 빛나는 잔상들은 흑룡의 거대한 암흑 구체를 향해 마치 폭풍처럼 쇄도했다. 수백 개의 검날이 동시에 암흑 구체를 꿰뚫고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천룡비무대를 뒤흔들었다. 암흑 구체가 마치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흑룡의 검은 기운과 무영의 푸른 기운이 뒤섞이며 거대한 에너지가 충돌했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흑룡은 자신의 강력한 공격이 흩어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영이 파고들었다.

    잔상으로 가득 찬 비무대 위에서, 무영의 진정한 검이 번개처럼 흑룡의 심장을 겨냥했다. 그의 검은 흑룡의 모든 방어를 뚫고 지나갈 듯한 기세였다.

    “감히!” 흑룡은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최후의 발악처럼 온몸의 기운을 심장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피처럼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무영의 검날이 흑룡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피할 수 없는 일격. 모든 관중이 숨을 멈췄다. 이 순간, 천하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검날이 흑룡의 심장에 닿는 순간, 흑룡의 눈이 광기 어린 빛을 발하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의 검은 겨우 심장만을 꿰뚫을 뿐.” 흑룡의 목소리는 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힘은… 천하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동시에 흑룡의 몸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번에는 이전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살아있는 지옥의 불꽃과 같은 암흑의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무영의 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천룡비무대 전체를 잠식하려 했다.

    무영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검은 흑룡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흑룡의 육체는 그조차 뛰어넘는 강력한 생명력과 어둠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이 폭발적인 암흑 기운은 무영 자신을 포함한 천룡비무대, 아니, 천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의 검이 흑룡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수록, 흑룡의 입꼬리는 더욱 섬뜩하게 올라갔다.

    “네놈은… 천하를 구할 수 없다!” 흑룡의 목소리가 비웃듯이 울려 퍼졌다.

    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선택은 단 하나였다. 검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천하를 지키기 위해 자신마저도 이 암흑의 폭풍에 기꺼이 던져 넣을 것인가. 그의 손에 쥔 검이 푸른빛을 더욱 강렬하게 발산했다.

    운명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무영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결의로 빛났다.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단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는 지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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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룡비무대.

    거대한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 한가운데, 수천 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흑요석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위로 사방에 펼쳐진 거대한 관중석은 고요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숨죽인 채 단상을 응시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깃발들을 찢어버릴 듯 격렬하게 휘감았지만, 그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한 침묵이 천룡비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운명 비무.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그 엄청난 무게가 공기 중에 짓눌려 있었다. 천 년에 한 번 도래한다는 ‘묵시의 겨울’을 막을 유일한 존재, ‘운명지기’를 가리는 자리. 모두의 시선은 단상 위에 마주 선 두 인물에게 꽂혀 있었다.

    한 명은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무영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함께 오래된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은 검집에 싸인 낡은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검은, 마치 무영 자신처럼 존재감이 희미한 듯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선 이는 흑룡이었다. 온몸을 뒤덮은 암흑색 무복은 그의 맹렬한 기세를 더욱 부각시켰다. 우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치 거대한 암석과 같았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고, 입술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그의 두 주먹 자체가 천하를 부술 듯한 살기를 뿜어냈다.

    “무영. 네놈의 잔영검법은 그림자처럼 잡히지 않는다고 들었다.” 흑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천룡비무대 전체를 울릴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강해지면 사라지는 법. 네놈의 얄팍한 기교가 나의 흑룡파천장(黑龍破天掌)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영은 말없이 흑룡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흑룡의 압도적인 기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폭풍우 속의 등대처럼, 그는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 따위는 너희가 논할 자격이 없다.” 흑룡이 비웃듯이 덧붙였다. “힘 있는 자가 곧 운명이자 정의다. 이 천하비무를 통해 내가 그 진리를 증명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룡의 전신에서 검은 오라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그의 기운에 눌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의 기운은 용솟음치며 거대한 흑룡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기운은 천룡비무대 전체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관중석에서는 얕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세한 빛 한 줄기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너는 이 비무의 의미를 모른다.” 무영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속에는 흑룡의 광기 어린 기세조차 잠재울 듯한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운명은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려는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룡이 움직였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속도로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발이 닿는 비무대 바닥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육중한 주먹에서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며 하나의 거대한 용의 머리가 되어 무영을 향해 쇄도했다. 흑룡파천장, 그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 순간, 무영의 몸이 흐릿해졌다. 잔상이었다. 그의 검은 아직 검집에 있었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흑룡의 주먹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흑룡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바람소리를 냈다. 그 압력이 너무나 강해 비무대 바닥의 미세한 먼지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무영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흑룡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의 손은 이미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쉬익’ 소리와 함께 검은 검날이 새벽 어둠처럼 미끄러져 나왔다. 잔영검법, 일검(一劍).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섬광. 검은 검날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 듯, 오직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성 같았다. 흑룡의 등 뒤를 노린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흑룡은 고작 등 뒤에 나타난 무영의 기습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 근육이 불쑥 솟아오르며 등 뒤로 검은 기운의 방패가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무영의 검날이 그 방패에 닿는 순간, ‘쨍강!’ 하는 금속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발생했다.

    무영의 검이 튕겨 나갔다. 흑룡은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다른 손으로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흑룡파천장, 이격(二擊). 이번에는 무영의 머리를 정통으로 노린 일격이었다. 주먹 끝에서는 검은 회오리가 몰아치며 찢어지는 듯한 바람 소리를 냈다.

    무영은 검을 쳐내자마자 발로 비무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움직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흑룡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허공이 찢어지는 듯한 기세가 남았다. 그 강력한 기파에 무영의 도포 자락이 격렬하게 휘날렸다.

    흑룡은 놓치지 않고 무영을 추격했다. 그의 발걸음은 하나하나가 천둥 같았고, 팔은 쉴 새 없이 휘둘러지며 검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재앙 같았다. 그는 무영을 몰아붙였다. 무영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흑룡의 맹렬한 공격은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무영은 수십 합을 오직 피하고 막아내는 데 집중했다. 그의 잔영검법은 방어에 특화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흑룡의 무자비한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흑룡의 공격 사이를 유영했다. 검날은 때로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흑룡의 빈틈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 될 준비를 했다.

    “피하기만 할 셈이냐, 무영!” 흑룡이 포효했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함께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네놈의 잔영검법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나의 힘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

    흑룡은 양손을 모아 거대한 검은 구체를 만들어냈다. 암흑의 기운이 압축되어 만들어진 구체는 마치 작은 블랙홀처럼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천마강뢰(天魔降雷)!’ 흑룡이 외치자, 구체는 무영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공기마저 뒤틀리는 굉음이 비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무영은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이 고요히 뛰었다.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단련했던 검술, 가문의 핏줄에 새겨진 잔영검법의 진정한 의미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단순히 적을 베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반영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고요함이 없었다. 오직 강철 같은 결의만이 번뜩였다.

    무영은 검을 잡은 손에 모든 기운을 모았다. 그의 몸에서 잔잔한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흑룡의 암흑과 정반대되는, 고요하고도 강인한 빛이었다. 검은 기운으로 뭉쳐진 구체가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무영이 검을 휘둘렀다.

    잔영검법, ‘환영개벽(幻影開闢)’.

    무영의 검은 하나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검은 검날이 수백 개의 잔상으로 나뉘어 허공을 채웠다. 섬광처럼 빛나는 잔상들은 흑룡의 거대한 암흑 구체를 향해 마치 폭풍처럼 쇄도했다. 수백 개의 검날이 동시에 암흑 구체를 꿰뚫고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천룡비무대를 뒤흔들었다. 암흑 구체가 마치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흑룡의 검은 기운과 무영의 푸른 기운이 뒤섞이며 거대한 에너지가 충돌했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흑룡은 자신의 강력한 공격이 흩어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영이 파고들었다.

    잔상으로 가득 찬 비무대 위에서, 무영의 진정한 검이 번개처럼 흑룡의 심장을 겨냥했다. 그의 검은 흑룡의 모든 방어를 뚫고 지나갈 듯한 기세였다.

    “감히!” 흑룡은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최후의 발악처럼 온몸의 기운을 심장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피처럼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무영의 검날이 흑룡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피할 수 없는 일격. 모든 관중이 숨을 멈췄다. 이 순간, 천하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검날이 흑룡의 심장에 닿는 순간, 흑룡의 눈이 광기 어린 빛을 발하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의 검은 겨우 심장만을 꿰뚫을 뿐.” 흑룡의 목소리는 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힘은… 천하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동시에 흑룡의 몸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번에는 이전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살아있는 지옥의 불꽃과 같은 암흑의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무영의 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천룡비무대 전체를 잠식하려 했다.

    무영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검은 흑룡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흑룡의 육체는 그조차 뛰어넘는 강력한 생명력과 어둠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이 폭발적인 암흑 기운은 무영 자신을 포함한 천룡비무대, 아니, 천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의 검이 흑룡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수록, 흑룡의 입꼬리는 더욱 섬뜩하게 올라갔다.

    “네놈은… 천하를 구할 수 없다!” 흑룡의 목소리가 비웃듯이 울려 퍼졌다.

    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선택은 단 하나였다. 검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천하를 지키기 위해 자신마저도 이 암흑의 폭풍에 기꺼이 던져 넣을 것인가. 그의 손에 쥔 검이 푸른빛을 더욱 강렬하게 발산했다.

    운명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무영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결의로 빛났다.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단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는 지킬 것이다.”

  • 대체 역사물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천룡비무대.

    거대한 바위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절벽 한가운데, 수천 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흑요석 단상이 솟아 있었다. 그 위로 사방에 펼쳐진 거대한 관중석은 고요했다. 수만 명의 인파가 숨죽인 채 단상을 응시했다. 멀리서 불어오는 산바람이 깃발들을 찢어버릴 듯 격렬하게 휘감았지만, 그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한 침묵이 천룡비무대를 지배하고 있었다.

    운명 비무.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그 엄청난 무게가 공기 중에 짓눌려 있었다. 천 년에 한 번 도래한다는 ‘묵시의 겨울’을 막을 유일한 존재, ‘운명지기’를 가리는 자리. 모두의 시선은 단상 위에 마주 선 두 인물에게 꽂혀 있었다.

    한 명은 검은 도포 자락이 바람에 펄럭이는 무영이었다. 그의 얼굴은 차분하고 고요했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속에는 굳건한 의지와 함께 오래된 슬픔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검은 검집에 싸인 낡은 검 한 자루가 매달려 있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그 검은, 마치 무영 자신처럼 존재감이 희미한 듯 보였다.

    그의 맞은편에 선 이는 흑룡이었다. 온몸을 뒤덮은 암흑색 무복은 그의 맹렬한 기세를 더욱 부각시켰다. 우람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치 거대한 암석과 같았다. 그의 눈빛은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고, 입술은 비릿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는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그의 두 주먹 자체가 천하를 부술 듯한 살기를 뿜어냈다.

    “무영. 네놈의 잔영검법은 그림자처럼 잡히지 않는다고 들었다.” 흑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지만, 천룡비무대 전체를 울릴 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빛이 강해지면 사라지는 법. 네놈의 얄팍한 기교가 나의 흑룡파천장(黑龍破天掌)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무영은 말없이 흑룡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흑룡의 압도적인 기세에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폭풍우 속의 등대처럼, 그는 고요히 빛나고 있었다.

    “천하의 운명 따위는 너희가 논할 자격이 없다.” 흑룡이 비웃듯이 덧붙였다. “힘 있는 자가 곧 운명이자 정의다. 이 천하비무를 통해 내가 그 진리를 증명하겠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흑룡의 전신에서 검은 오라가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그의 기운에 눌려 미세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어둠의 기운은 용솟음치며 거대한 흑룡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꿈틀거리는 기운은 천룡비무대 전체를 집어삼킬 듯 맹렬했다. 관중석에서는 얕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무영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그의 검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미세한 빛 한 줄기가 흔들리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허리춤의 검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이 그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너는 이 비무의 의미를 모른다.” 무영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속에는 흑룡의 광기 어린 기세조차 잠재울 듯한 단단함이 담겨 있었다. “운명은 힘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려는 의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흑룡이 움직였다. 그는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속도로 무영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발이 닿는 비무대 바닥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냈다. 육중한 주먹에서 검은 기운이 휘몰아치며 하나의 거대한 용의 머리가 되어 무영을 향해 쇄도했다. 흑룡파천장, 그 첫 번째 일격이었다.

    그 순간, 무영의 몸이 흐릿해졌다. 잔상이었다. 그의 검은 아직 검집에 있었지만, 이미 그의 육신은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흑룡의 주먹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흑룡의 주먹이 허공을 가르며 거대한 바람소리를 냈다. 그 압력이 너무나 강해 비무대 바닥의 미세한 먼지가 폭발하듯 흩날렸다.

    무영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흑룡의 등 뒤에 나타났다. 그의 손은 이미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고 있었다. ‘쉬익’ 소리와 함께 검은 검날이 새벽 어둠처럼 미끄러져 나왔다. 잔영검법, 일검(一劍).

    허공을 가르는 한 줄기 섬광. 검은 검날은 빛을 반사하지 않는 듯, 오직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유성 같았다. 흑룡의 등 뒤를 노린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하지만 흑룡은 고작 등 뒤에 나타난 무영의 기습에 흔들릴 위인이 아니었다. 그의 어깨 근육이 불쑥 솟아오르며 등 뒤로 검은 기운의 방패가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무영의 검날이 그 방패에 닿는 순간, ‘쨍강!’ 하는 금속음과 함께 엄청난 충격이 발생했다.

    무영의 검이 튕겨 나갔다. 흑룡은 몸을 반 바퀴 돌리며 다른 손으로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흑룡파천장, 이격(二擊). 이번에는 무영의 머리를 정통으로 노린 일격이었다. 주먹 끝에서는 검은 회오리가 몰아치며 찢어지는 듯한 바람 소리를 냈다.

    무영은 검을 쳐내자마자 발로 비무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났다. 그의 움직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연스러웠다. 흑룡의 주먹이 스쳐 지나간 자리에서, 허공이 찢어지는 듯한 기세가 남았다. 그 강력한 기파에 무영의 도포 자락이 격렬하게 휘날렸다.

    흑룡은 놓치지 않고 무영을 추격했다. 그의 발걸음은 하나하나가 천둥 같았고, 팔은 쉴 새 없이 휘둘러지며 검은 파동을 만들어냈다. 마치 움직이는 거대한 재앙 같았다. 그는 무영을 몰아붙였다. 무영이 아무리 빠르게 움직여도, 흑룡의 맹렬한 공격은 그의 숨통을 조여왔다.

    무영은 수십 합을 오직 피하고 막아내는 데 집중했다. 그의 잔영검법은 방어에 특화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흑룡의 무자비한 공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냈다. 그의 검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흑룡의 공격 사이를 유영했다. 검날은 때로는 방패가 되고, 때로는 흑룡의 빈틈을 찌르는 날카로운 창이 될 준비를 했다.

    “피하기만 할 셈이냐, 무영!” 흑룡이 포효했다.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함께 득의양양한 미소가 번졌다. “네놈의 잔영검법이 아무리 빠르다 한들, 나의 힘을 영원히 피할 수는 없어!”

    흑룡은 양손을 모아 거대한 검은 구체를 만들어냈다. 암흑의 기운이 압축되어 만들어진 구체는 마치 작은 블랙홀처럼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천마강뢰(天魔降雷)!’ 흑룡이 외치자, 구체는 무영을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공기마저 뒤틀리는 굉음이 비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피할 수 없는 일격이었다.

    무영은 두 눈을 감았다. 그의 심장이 고요히 뛰었다. 수많은 밤을 새워가며 단련했던 검술, 가문의 핏줄에 새겨진 잔영검법의 진정한 의미가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검은 단순히 적을 베는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마음의 반영이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슬픔이나 고요함이 없었다. 오직 강철 같은 결의만이 번뜩였다.

    무영은 검을 잡은 손에 모든 기운을 모았다. 그의 몸에서 잔잔한 푸른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흑룡의 암흑과 정반대되는, 고요하고도 강인한 빛이었다. 검은 기운으로 뭉쳐진 구체가 눈앞까지 다가온 순간, 무영이 검을 휘둘렀다.

    잔영검법, ‘환영개벽(幻影開闢)’.

    무영의 검은 하나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 검은 검날이 수백 개의 잔상으로 나뉘어 허공을 채웠다. 섬광처럼 빛나는 잔상들은 흑룡의 거대한 암흑 구체를 향해 마치 폭풍처럼 쇄도했다. 수백 개의 검날이 동시에 암흑 구체를 꿰뚫고 파고들었다.

    ‘콰아아앙!’

    귀를 찢을 듯한 폭음이 천룡비무대를 뒤흔들었다. 암흑 구체가 마치 유리 조각처럼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흑룡의 검은 기운과 무영의 푸른 기운이 뒤섞이며 거대한 에너지가 충돌했다. 비무대 바닥의 흑요석이 균열하기 시작했다.

    흑룡은 자신의 강력한 공격이 흩어지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영이 파고들었다.

    잔상으로 가득 찬 비무대 위에서, 무영의 진정한 검이 번개처럼 흑룡의 심장을 겨냥했다. 그의 검은 흑룡의 모든 방어를 뚫고 지나갈 듯한 기세였다.

    “감히!” 흑룡은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최후의 발악처럼 온몸의 기운을 심장에 집중했다. 그의 몸에서 피처럼 붉은 기운이 솟아올랐다.

    무영의 검날이 흑룡의 심장을 향해 일직선으로 뻗어나갔다. 피할 수 없는 일격. 모든 관중이 숨을 멈췄다. 이 순간, 천하의 운명이 결정될 터였다.

    검날이 흑룡의 심장에 닿는 순간, 흑룡의 눈이 광기 어린 빛을 발하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네놈의 검은 겨우 심장만을 꿰뚫을 뿐.” 흑룡의 목소리는 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나의 힘은… 천하 전체를 집어삼킬 것이다!”

    동시에 흑룡의 몸에서 거대한 검은 기운이 다시 한번 폭발했다. 이번에는 이전의 공격과는 차원이 다른, 마치 살아있는 지옥의 불꽃과 같은 암흑의 파동이었다. 그 파동은 무영의 검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천룡비무대 전체를 잠식하려 했다.

    무영의 눈이 흔들렸다. 그의 검은 흑룡의 심장을 꿰뚫었지만, 흑룡의 육체는 그조차 뛰어넘는 강력한 생명력과 어둠의 힘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이 폭발적인 암흑 기운은 무영 자신을 포함한 천룡비무대, 아니, 천하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는 끔찍한 것이었다.

    그의 검이 흑룡의 심장을 깊이 파고들수록, 흑룡의 입꼬리는 더욱 섬뜩하게 올라갔다.

    “네놈은… 천하를 구할 수 없다!” 흑룡의 목소리가 비웃듯이 울려 퍼졌다.

    무영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선택은 단 하나였다. 검을 거둘 것인가, 아니면 천하를 지키기 위해 자신마저도 이 암흑의 폭풍에 기꺼이 던져 넣을 것인가. 그의 손에 쥔 검이 푸른빛을 더욱 강렬하게 발산했다.

    운명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무영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차가운 결의로 빛났다.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단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아니, 나는 지킬 것이다.”

  • 던전 탐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돌 바닥에 깔린 습기가 신발 밑창을 끈적하게 달라붙게 했다. 발걸음 소리조차 먹어버리는 듯한 지하 미궁의 침묵 속에서, 이준은 마법으로 밝힌 구슬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루미나 학원 지하의 금지된 구역. 이곳에 발을 들인 지 벌써 며칠째인지 정확히 셀 수도 없었다. 시간 감각마저 마비시키는 어둠과 칙칙한 공기였다.

    “젠장, 김하나. 네 놈의 고서적에 쓰여 있다는 ‘위대한 지식의 원천’이라는 게 설마 이런 썩어 문드러진 지하실을 의미했던 건 아니겠지?”
    박진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든 그의 어깨는 좁은 통로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웠다. 진우의 눈은 경계심으로 번뜩였지만, 그 안에는 피로와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조용히 해, 박진우. ‘엘도니아의 비문’은 이곳에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단순한 지하실이 아니야.”
    김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마법 구슬의 희미한 빛이 양피지에 그려진 기괴한 문양들을 비췄다. 하나는 학년 수석다운 지적인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었다.

    이준은 묵묵히 주변을 살폈다. 통로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일반적인 건축물과는 다른,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형상들이었다. 흡사 고통받는 존재들의 절규가 굳어버린 듯한.

    “확실히… 이곳은 마력이 다르다.” 이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나의 흐름이 마치 오염된 물처럼 탁하고 무거웠다. 루미나 학원의 맑고 투명한 마력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오염되었다기보다는… 변질된 것에 가깝네요.” 하나가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강제로 변형된 마력. 이 구조물 자체도… 마력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있어요.”

    그때였다.
    콰아앙!
    멀리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한 쇠붙이가 바닥에 내리쳐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준의 심장을 조여왔다.

    “뭐지?” 진우가 도끼를 고쳐 잡으며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괴물은 아니야. 소리의 울림이… 어딘가 인위적이야.” 이준이 촉각 마법을 발동시켜 미세한 진동을 감지했다. “마법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아니면, 갇혀 있는 무언가가 발버둥 치는 소리일지도. 불현듯 그런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쪽이야.” 하나가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비문에 따르면, 가장 깊은 곳은 ‘기만자의 심장’이라고 불린대요.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속죄의 회랑’을 통과하는 것뿐이라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넓은 원형의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통형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기둥의 표면에는 복잡한 마법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들은 희미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주기적으로 깜빡이며 공간 전체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속죄의 회랑… 이건 회랑이 아니라 제단 같은데?”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준은 기둥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표면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마력의 파동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 파동은… 마치 무언가를 억압하고 가두는 것 같았다.

    “진우 말이 맞아. 이건 단순한 통로가 아니야.” 이준이 말했다. “이 기둥 자체가 봉인인 것 같아. 뭔가를 가두고 있어.”

    “봉인…?” 하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엘도니아의 비문에는…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단지 ‘최고의 지식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만…”

    그때, 이준의 발밑에서 얇은 금속판이 느껴졌다. 흙먼지를 털어내자, 오래된 청동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판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학원 창립 당시의 언어야.”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녀는 양피지와 청동판의 문양을 대조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최고의 지식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금기의…”

    하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 완전히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루마리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뭐가 있는데, 김하나?” 진우가 다그치듯 물었다.
    하나는 청동판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마치 불에 데인 듯이 떨리고 있었다.

    “이 비문은… ‘환생의 요람’에 대한 기록이에요.” 하나의 목소리가 공포로 잠식되어 있었다. “엘리트 마법사를 만들기 위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재구성하는… 끔찍한 실험의 기록이야… 이 아래… 이 기둥 아래… 수많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기둥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기둥의 뿌리 부분은 바닥 속으로 깊이 박혀 있었는데, 그 틈새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한, 불규칙적인 리듬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준의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있었다. 쇠 비린내와 함께 역겨운 달콤한 향. 마치 시든 꽃과 썩어가는 고기를 뒤섞어 놓은 듯한 끔찍한 악취였다.

    그 순간, 기둥의 마법진들이 일제히 섬광을 터뜨리며 빛났다. 보랏빛 섬광은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번뜩였다.
    콰아아아앙!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바닥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봉인이… 약해지고 있어!”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젠장! 봉인이 약해지면 뭐가 튀어나온다는 거야!” 진우가 도끼를 들어 올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이준은 진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둥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붉은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이준은 희미하게 무언가를 보았다. 거대한 기둥에 새겨진 마법진들 사이로, 불완전한 형태의 실루엣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뒤틀려 있었다. 여러 개의 팔다리가 엉켜 있는 듯했고, 머리 부분은 마치 여러 개의 얼굴이 한데 뭉쳐진 듯한 형체였다. 끔찍한 기형의 그림자가, 봉인된 기둥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의 귀에 환청처럼, 혹은 실제처럼,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려오는 듯했다.
    *살려줘…*
    *돌려줘…*
    *…우리는… 루미나의… 지식…*

    콰지직!
    기둥 중앙에서 굵은 균열이 생겨났다. 붉은빛이 그 균열을 통해 핏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준은 깨달았다. 루미나 학원의 지하에 숨겨진 금기란, 단순히 고서에 잠들어 있는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채로, 혹은 살아있었던 채로, 끔찍하게 변모한 채 봉인되어 있던 존재들의 절규였다. 학원의 영광을 위해 치러진, 인간성을 말살한 대가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금기가 봉인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하나가 절규했다.
    “너무 늦었어…!” 진우의 목소리에도 공포가 서렸다.

    이준은 얼어붙은 듯 기둥을 바라보았다. 붉은 균열 사이로 드러난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해 번뜩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그러나 한 점으로 모인 듯한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꿰뚫었다.

    그 순간, 기둥의 봉인 마법진 하나가 완전히 꺼지며 거대한 돌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틈으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비명이 아니었다. 동시에 수십, 수백의 존재가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영혼을 찢는 듯한 절규였다.
    금지된 지식의 심장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준은 자신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 던전 탐험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차가운 돌 바닥에 깔린 습기가 신발 밑창을 끈적하게 달라붙게 했다. 발걸음 소리조차 먹어버리는 듯한 지하 미궁의 침묵 속에서, 이준은 마법으로 밝힌 구슬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루미나 학원 지하의 금지된 구역. 이곳에 발을 들인 지 벌써 며칠째인지 정확히 셀 수도 없었다. 시간 감각마저 마비시키는 어둠과 칙칙한 공기였다.

    “젠장, 김하나. 네 놈의 고서적에 쓰여 있다는 ‘위대한 지식의 원천’이라는 게 설마 이런 썩어 문드러진 지하실을 의미했던 건 아니겠지?”
    박진우가 거친 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거대한 전투 도끼를 든 그의 어깨는 좁은 통로에 닿을 듯 말 듯 위태로웠다. 진우의 눈은 경계심으로 번뜩였지만, 그 안에는 피로와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조용히 해, 박진우. ‘엘도니아의 비문’은 이곳에 대단히 중요한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단순한 지하실이 아니야.”
    김하나가 낮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마법 구슬의 희미한 빛이 양피지에 그려진 기괴한 문양들을 비췄다. 하나는 학년 수석다운 지적인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손끝이 그녀의 내면을 보여주었다.

    이준은 묵묵히 주변을 살폈다. 통로는 돌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일반적인 건축물과는 다른,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태를 하고 있었다. 벽면에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음각되어 있었는데,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섬뜩할 정도로 생생한 형상들이었다. 흡사 고통받는 존재들의 절규가 굳어버린 듯한.

    “확실히… 이곳은 마력이 다르다.” 이준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공기 중에 떠도는 마나의 흐름이 마치 오염된 물처럼 탁하고 무거웠다. 루미나 학원의 맑고 투명한 마력과는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오염되었다기보다는… 변질된 것에 가깝네요.” 하나가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다른 무엇인가를 위해 강제로 변형된 마력. 이 구조물 자체도… 마력의 흐름을 왜곡시키고 있어요.”

    그때였다.
    콰아앙!
    멀리서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한 쇠붙이가 바닥에 내리쳐지는 듯한 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준의 심장을 조여왔다.

    “뭐지?” 진우가 도끼를 고쳐 잡으며 잔뜩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괴물은 아니야. 소리의 울림이… 어딘가 인위적이야.” 이준이 촉각 마법을 발동시켜 미세한 진동을 감지했다. “마법 장치가 작동하는 소리인가… 아니면…”

    아니면, 갇혀 있는 무언가가 발버둥 치는 소리일지도. 불현듯 그런 섬뜩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쪽이야.” 하나가 두루마리를 가리켰다. “비문에 따르면, 가장 깊은 곳은 ‘기만자의 심장’이라고 불린대요.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속죄의 회랑’을 통과하는 것뿐이라고.”

    그들이 당도한 곳은 넓은 원형의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거대한 원통형 기둥이 솟아 있었는데, 기둥의 표면에는 복잡한 마법진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마법진들은 희미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그 빛은 주기적으로 깜빡이며 공간 전체에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속죄의 회랑… 이건 회랑이 아니라 제단 같은데?”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준은 기둥에 다가가 손을 뻗었다. 표면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마력의 파동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이 파동은… 마치 무언가를 억압하고 가두는 것 같았다.

    “진우 말이 맞아. 이건 단순한 통로가 아니야.” 이준이 말했다. “이 기둥 자체가 봉인인 것 같아. 뭔가를 가두고 있어.”

    “봉인…?” 하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엘도니아의 비문에는… 그런 내용은 없었는데… 단지 ‘최고의 지식이 잠들어 있는 곳’이라고만…”

    그때, 이준의 발밑에서 얇은 금속판이 느껴졌다. 흙먼지를 털어내자, 오래된 청동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동판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학원 창립 당시의 언어야.” 하나가 헐레벌떡 다가왔다. 그녀는 양피지와 청동판의 문양을 대조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최고의 지식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금기의…”

    하나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끝내 완전히 멎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두루마리를 든 손이 덜덜 떨렸다.

    “뭐가 있는데, 김하나?” 진우가 다그치듯 물었다.
    하나는 청동판을 가리켰다. 그녀의 손가락 끝은 마치 불에 데인 듯이 떨리고 있었다.

    “이 비문은… ‘환생의 요람’에 대한 기록이에요.” 하나의 목소리가 공포로 잠식되어 있었다. “엘리트 마법사를 만들기 위한… 인간의 몸과 영혼을 재구성하는… 끔찍한 실험의 기록이야… 이 아래… 이 기둥 아래… 수많은…”

    그녀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준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기둥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기둥의 뿌리 부분은 바닥 속으로 깊이 박혀 있었는데, 그 틈새에서 희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붉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살아있는 심장이 뛰는 듯한, 불규칙적인 리듬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준의 코끝을 스치는 냄새가 있었다. 쇠 비린내와 함께 역겨운 달콤한 향. 마치 시든 꽃과 썩어가는 고기를 뒤섞어 놓은 듯한 끔찍한 악취였다.

    그 순간, 기둥의 마법진들이 일제히 섬광을 터뜨리며 빛났다. 보랏빛 섬광은 공간 전체를 집어삼킬 듯이 번뜩였다.
    콰아아아앙!
    아까보다 훨씬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바닥이 흔들리고, 천장에서 작은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렸다.

    “봉인이… 약해지고 있어!”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젠장! 봉인이 약해지면 뭐가 튀어나온다는 거야!” 진우가 도끼를 들어 올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이준은 진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기둥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붉은빛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이준은 희미하게 무언가를 보았다. 거대한 기둥에 새겨진 마법진들 사이로, 불완전한 형태의 실루엣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것은 인간의 형상을 닮았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뒤틀려 있었다. 여러 개의 팔다리가 엉켜 있는 듯했고, 머리 부분은 마치 여러 개의 얼굴이 한데 뭉쳐진 듯한 형체였다. 끔찍한 기형의 그림자가, 봉인된 기둥 안쪽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준의 귀에 환청처럼, 혹은 실제처럼, 수많은 목소리들이 동시에 들려오는 듯했다.
    *살려줘…*
    *돌려줘…*
    *…우리는… 루미나의… 지식…*

    콰지직!
    기둥 중앙에서 굵은 균열이 생겨났다. 붉은빛이 그 균열을 통해 핏물처럼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준은 깨달았다. 루미나 학원의 지하에 숨겨진 금기란, 단순히 고서에 잠들어 있는 ‘지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채로, 혹은 살아있었던 채로, 끔찍하게 변모한 채 봉인되어 있던 존재들의 절규였다. 학원의 영광을 위해 치러진, 인간성을 말살한 대가의 결과물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모든 금기가 봉인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도망쳐야 해!” 하나가 절규했다.
    “너무 늦었어…!” 진우의 목소리에도 공포가 서렸다.

    이준은 얼어붙은 듯 기둥을 바라보았다. 붉은 균열 사이로 드러난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자신들을 향해 번뜩이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셀 수 없이 많은, 그러나 한 점으로 모인 듯한 차가운 시선이 그들을 꿰뚫었다.

    그 순간, 기둥의 봉인 마법진 하나가 완전히 꺼지며 거대한 돌조각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틈으로,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인간의 비명이 아니었다. 동시에 수십, 수백의 존재가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영혼을 찢는 듯한 절규였다.
    금지된 지식의 심장이 드디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준은 자신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들에게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