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대체 역사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제1장: 닫힌 문의 저편

    고요한 밤공기를 뚫고 솟아오른 달이 박 저택의 기와지붕 위에서 싸늘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으나, 수십 개의 등불이 뿜어내는 어수선한 빛과 그림자들이 저택의 안팎을 오가며 이곳에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서재혁은 닳아빠진 갓끈을 만지작거리며 삐걱거리는 대문을 넘어섰다. 그의 낡은 도포자락이 차가운 밤바람에 한 번 휘청거렸지만, 잿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저택의 깊숙한 곳을 향했다. 그의 옆을 따르던 김치수 포도대장이 큼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 밤중에 오시게 해서 미안하오, 서 나으리. 허나… 정말로 불가사의한 일이오.”

    김 포도대장의 말에는 노련한 수사관의 당혹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재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이 미스터리에 대한 미세한 호기심이 그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박영수 상공이… 그리도 허무하게 돌아가실 줄이야.” 김 포도대장이 다시 혀를 찼다.

    “어찌 된 일입니까?” 재혁의 목소리는 낮고 침착했다.

    “둘째 딸인 박선아 아씨가 오늘 아침 일찍 발견했소. 박 상공께서 평소에 해가 뜨면 바로 서재로 향하는 분이신데, 오늘따라 식사 시간까지도 모습을 보이지 않더라는 게지. 걱정이 되어 아씨가 서재로 가보니 문이 굳게 잠겨 있었고…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더랍니다. 결국 하인들과 문을 부수고 들어갔는데…”

    김 포도대장은 말끝을 흐렸다. 재혁은 이미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했다.

    “부검은 마쳤습니까?”

    “방금 끝났소. 시진은 어젯밤 자정을 전후한 시각이라 하더군. 흉기는 책상 위에 꽂혀 있던 문진으로 밝혀졌소. 머리를 강하게 내리쳐 사망에 이르게 했더군. 더 끔찍한 것은, 박 상공의 재산 목록이 담긴 주요 장부가 모두 훼손된 채 찢겨져 있었다는 거요. 살해 동기가 재물에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원한 때문인지….”

    재혁은 잠시 멈춰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문진으로 살해하고 장부를 훼손했다… 범인이 누구든, 꽤나 감정적이거나 치밀한 자로군요.”

    “문제는 말이지요, 서 나으리.” 김 포도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서재 문이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다는 거요. 그것도 모자라 안쪽에서 쇠 자물쇠로 이중으로 잠겨 있었다는 게 아니겠소?”

    재혁의 잿빛 눈동자에 미세한 빛이 스쳤다. 드디어 본론이었다.

    “창문은 어떻습니까?”

    “창문은 모두 안에서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쇠창살까지 박혀 있었소. 사람이 드나들 흔적은 전혀 없었지. 굴뚝은 너무 좁아 아이도 드나들 수 없었고, 벽은 튼튼했소. 밀실 살인이라오, 서 나으리. 명백한 밀실 살인.”

    재혁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서재는 저택의 가장 깊숙한 곳, 2층에 위치해 있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오르자, 굳게 닫혔던 서재의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짝은 뜯겨 나간 자국이 선명했고, 굵은 빗장쇠는 제자리에서 벗어나 축 늘어져 있었다.

    방 안에는 몇몇 하인들이 불안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방 한가운데 있는 박영수 상공의 시신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시신은 수습되어 나갔지만, 바닥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핏자국이 그날 밤의 끔찍함을 증언하는 듯했다.

    재혁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큼직한 책상 위에는 뒤죽박죽 엉킨 종이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그 옆에는 흉기로 쓰인 묵직한 구리 문진이 놓여 있었다. 방 안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재혁은 먼저 부서진 문을 살폈다. 안쪽에서 걸려 있던 빗장쇠는 묵직하고 견고한 것이었다. 그 옆에 있던 쇠 자물쇠도 마찬가지였다. 이 문을 안에서 걸어 잠근 뒤 외부에서 열려고 했다면, 엄청난 힘이 필요했을 터였다. 박선아 아씨의 말대로, 하인들이 달려들어 부수지 않았다면 절대 열리지 않았을 문이었다.

    재혁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빗장쇠가 걸려 있던 문턱과 문틈을 유심히 살폈다. 흙먼지가 조금 쌓여 있었지만, 특별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다음으로 그는 창문을 확인했다. 쇠창살은 견고했고, 안쪽 걸쇠는 단단히 잠겨 있었다. 창밖은 꽤 높은 곳이었고, 뛰어내렸다 하더라도 무사히 착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게다가 흙바닥이 아닌 돌이 깔린 정원이었다.

    “살해 시각이 자정 전후라고 했죠?” 재혁이 물었다.

    “그렇소.” 김 포도대장이 답했다.

    재혁은 다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인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틀어져 있었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훼손된 장부 조각들을 뒤적였다. 조심스럽게 조각들을 모아보니, 박 상공의 가장 중요한 거래 내역과 채무 관계가 기록된 부분들이었다.

    “장부를 찢은 것은 범인입니까, 아니면 상공 본인입니까?” 재혁이 물었다.

    “아씨의 증언으로는 박 상공은 자신의 장부에 매우 집착했다고 합니다. 살해당하기 직전에 찢었을 리 만무하고… 범인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이 집사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감정의 동요가 거의 없었다.

    재혁은 책상 의자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방 안의 공기, 냄새, 모든 것을 감각으로 흡수하려는 듯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떴다. 잿빛 눈동자에 어딘가 날카로운 빛이 감돌았다.

    “이 집사, 어젯밤 박 상공의 마지막 행적을 알려주십시오.”

    “어젯밤, 박 상공께서는 저녁 식사를 마치시고 평소처럼 서재로 향하셨습니다. 잠시 후 아씨께서 상공께 드릴 따뜻한 차를 가져다드리려 했으나, 문이 잠겨 있었다고 합니다. 상공께서는 안에서 차분하게 ‘됐다’고 말씀하셨고, 아씨께서는 더 이상 방해하지 않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이 박 상공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문은 이미 잠겨 있었군요.” 재혁이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떻게 나갔을까….”

    재혁은 갑자기 허리를 숙여 책상 밑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 벽, 그리고 천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을 훑었다. 김 포도대장과 이 집사는 재혁의 기이한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침내, 재혁의 시선이 방 한쪽 벽에 걸려 있는 낡은 족자를 향했다. 평범한 산수화가 그려진 족자였지만, 다른 장식들과 달리 유독 그 족자 아래쪽 벽면에만 미세한 먼지가 쌓여 있지 않았다. 마치 얼마 전 누군가 그곳을 쓸고 지나간 듯한 자국이었다.

    재혁은 족자를 걷어냈다. 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흙벽돌 벽이었다. 김 포도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다른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재혁은 말없이 족자 주변의 벽을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나무가 벽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미세한 떨림이 그의 손끝에 전달되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벽은… 나무로 된 벽이군요. 아니, 정확히는 벽 안쪽에 나무 기둥이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이 족자가 걸려 있던 곳을 보세요. 다른 벽면보다 유독 깨끗합니다. 마치 무언가를 감추기 위해 주기적으로 쓸어냈던 것처럼.”

    그의 손가락이 벽의 한 부분을 짚었다. 아주 미세한 틈이었다. 거의 보이지 않는 얇은 선이 벽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것은… 분명합니다.” 재혁이 나직이 말했다. “이 벽은 열리는 문입니다.”

    김 포도대장과 이 집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문이라니요? 저희는 단 한 번도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김 포도대장이 놀라 소리쳤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벽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 조작하면 열리는 비밀 문입니다. 저택의 주인인 박 상공은 분명 이 문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중요한 문서나 귀한 물품을 숨기기 위한 용도였겠죠.” 재혁이 설명했다.

    “하지만, 서 나으리! 만약 그곳이 문이었다고 해도, 범인이 그곳을 통해 나가 밀실을 만든 것이라면… 그 문도 안에서 잠겨야 할 텐데, 그럼 결국 범인은 어떻게 나갔다는 말입니까?” 김 포도대장이 여전히 납득하지 못했다.

    재혁은 족자 아래의 벽을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밀실의 트릭은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범인은 이 문을 통해 침입했고, 박 상공을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 서재의 유일한 출입구인 저 문을 안에서 잠가버린 겁니다. 자물쇠와 빗장까지 완벽하게.”

    그의 시선이 다시 부서진 서재 문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서, 범인은 바로 이 비밀 문을 통해 유유히 빠져나간 것입니다. 이 문은 밖에서는 열 수 없지만, 안에서는 열 수 있도록 만들어졌을 테니까요. 박 상공을 살해한 뒤, 그는 서재의 정문을 걸어 잠가 완벽한 밀실을 연출했습니다. 아무도 그가 이 비밀 문을 통해 나갔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니까요.”

    김 포도대장은 숨을 들이켰다. 이 집사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세한 동요가 일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박 상공의 저택 구조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자라는 말이 되는군요!” 김 포도대장이 외쳤다. “이 비밀 문의 존재를 아는 자는 박 상공 외에 그리 많지 않을 터….”

    재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비밀 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을 정도로 박 상공과의 신뢰가 깊거나… 혹은 박 상공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자.”

    그는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갑고도 예리했다.

    “밀실의 트릭은 깨졌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박 상공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그의 비밀 문까지 알고 있었는지 밝혀내는 것입니다. 김 포도대장, 이 벽을 뜯어내 보십시오. 분명 안쪽에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장치가 있을 겁니다.”

    김 포도대장은 즉시 하인들에게 벽을 뜯어낼 것을 명했다. 쿵, 쿵, 쿵. 둔탁한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렸다. 재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서재 중앙에 놓인 묵직한 문진을 집어 들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밀실의 트릭은 밝혀졌으나, 진정한 그림자는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과연 박 상공의 은밀한 비밀을 알고 있던 자는 누구이며, 그는 왜 상공을 죽이고 장부를 훼손했던 것일까. 밤은 아직 길었다. 재혁의 잿빛 눈동자가 미세한 전율로 빛나고 있었다.

  • 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짙고 축축한 어둠이 폐부를 짓누르는 듯했다. 강태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횃불을 높이 들었다. 나락의 심연,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시들어버린다는 전설의 던전 최하층. 그의 동료들은 이미 며칠 전 거대한 심연의 문턱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탐욕도, 명예도, 그 어떤 가치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곳. 하지만 태한은 달랐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함인지, 아니면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찾기 위함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이끌림이었다.

    발밑에는 끈적한 이끼와 미끄러운 바위들이 얽혀 있었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 기이한 비명 소리, 철썩이는 물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낮은 울림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거대한 석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주변을 탐색하며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나아갔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심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본능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희미한 푸른빛이 저 멀리서 아른거렸다. 조심스럽게 다가선 곳에는 거대한 수정 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수정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로 자라나 있었고,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영롱한 빛은 동굴 전체를 신비로운 환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환상의 한가운데, 거대한 에메랄드 수정 기둥에 박힌 듯 쓰러져 있는 형체가 있었다.

    태한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그는 재빨리 칼을 뽑아들었다. 저것은… 심연의 요정이었다. 인간의 탐욕스러운 발길이 닿기 시작하면서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종족으로 알려진 존재들. 그들의 피부는 옅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뾰족한 귀는 섬세하게 흔들렸다. 등에는 곤충의 날개처럼 투명하고 영롱한 막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져 있었지만, 한쪽 날개는 찢겨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머리카락은 수정 파편에 엉켜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이라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선제공격은 던전 탐험가의 불문율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랐다. 증오와 공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깊고 푸른 눈동자. 그것은 흔히 보던 ‘괴물’의 눈이 아니었다.

    태한은 무심코 다가섰다. 심연의 요정은 그를 보자마자 몸을 움츠렸다. 찢어진 날개에서는 푸른 피가 흘러나와 투명한 수정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태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요정은 알아듣지 못하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굳어버린 건지 미동도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치유 물약을 꺼냈다. 맑은 초록빛 액체가 담긴 병을 본 요정의 눈이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
    “이건… 치료제다.”
    태한은 조심스럽게 물약 뚜껑을 열고 요정의 상처 입은 날개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요정은 화들짝 놀라며 발버둥 쳤지만, 태한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고 더 많은 물약을 부어주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처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곧이어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투명한 막이 재생되고, 날개 뼈가 다시 이어지는 기적 같은 광경.

    요정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태한을 올려다보았다.
    “왜… 나를 돕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는 수정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맑고 고왔다. 인간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에 태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딱히 이유랄 건 없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태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넌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요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인간들 또한 우리를 탐욕스럽게 사냥하고 죽이지 않았나.”
    말문이 막혔다. 사실이었다. 인간들은 이 던전의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보았다.
    “나는 릴리아다.”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너는… 인간치고는 제법 이상한 존재로군.”
    “강태한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 순간, 동굴 바깥에서 거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섬뜩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촉수가 달린 심연 괴물 ‘크라켄베인’의 포효였다. 태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괴물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숨어야 해.” 릴리아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둘은 급히 동굴 안쪽의 좁은 틈새로 몸을 숨겼다. 크라켄베인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한 이들을 찾기 위해 동굴 안을 샅샅이 뒤졌다. 거대한 촉수가 수정 기둥들을 부수고 지나가며 굉음을 냈다. 수정 파편들이 빗발치듯 쏟아졌지만, 릴리아는 작은 마법 보호막을 만들어 자신과 태한을 감쌌다.

    좁은 틈새 속에서 둘의 몸은 서로 밀착되어 있었다. 릴리아의 차가운 피부와 태한의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릴리아의 어깨에서는 옅은 꽃향기가 났다. 어둠 속에서 둘의 심장 소리만이 격렬하게 울렸다.
    “네 덕분에 살았군.” 태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 릴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로에게 기대어 한참을 기다렸다. 공포와 불안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유대감. 그들의 종족이 수백 년간 서로에게 겨눴던 칼날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과 심연의 요정. 공존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들. 그러나 이 어둡고 깊은 심연의 바닥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남았다.

    크라켄베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둘은 틈새에서 나올 수 있었다. 동굴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릴리아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태한이 물었다.
    “내 서식지는 파괴되었어. 갈 곳이 없어.” 릴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크라켄베인은 끝까지 쫓아올 거야.”
    태한은 생각에 잠겼다. 릴리아를 버리고 혼자 던전을 나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슬픔과 연약함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태한이 불쑥 말했다. “이 던전을 나가는 길을 나는 알고 있다.”
    릴리아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인간들 세상으로? 미친 짓이야. 너는 동족들에게 살해당할 것이고, 나는… 어둠 밖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럼 이곳에서 죽으란 말인가?” 태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너의 동족들도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함께라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릴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작고 창백한 손은 망설임 끝에 태한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는 차갑고도 부드러웠다.

    며칠 밤낮을 숨죽이며 던전 깊은 곳을 헤맸다. 태한은 릴리아에게 던전 탐험의 지식을 가르쳐주었고, 릴리아는 그녀의 마법으로 어둠을 밝히고 위험을 감지했다. 낮선 공존은 기적처럼 편안해졌다. 태한은 릴리아의 섬세한 날개가 스치는 소리에 익숙해졌고, 릴리아는 태한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졌고, 이젠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밤, 좁은 바위 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릴리아는 차가운 태한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태한은 그녀의 옅은 비늘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마치 수정처럼 차가운 그녀의 피부 아래로 생명의 온기가 느껴졌다. 릴리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태한…” 그녀의 목소리가 꿈결 같았다.
    “미안하다, 깼나.”
    “아니.” 릴리아는 태한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네가 나를 구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 너는 나에게 던전 밖의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게 아니야. 너는 그저…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태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그저 이 연약한 존재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감정은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선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될까?” 릴리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모르겠다.” 태한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되든, 함께라면 괜찮을 거다.”

    드디어 던전의 출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희미한 바깥세상의 빛이 어둠을 뚫고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희망과 동시에 불안이 밀려왔다. 이곳을 나가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구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멈춰라! 저 요정을 죽여라!”
    인간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릴리아를 발견하고 거침없이 공격해왔다. 동시에 출구 반대편, 던전 깊숙한 곳에서는 기괴한 비명과 함께 심연의 요정 전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릴리아가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배신자! 감히 인간과 어울리다니!”

    두 세력 사이에 고립된 채, 태한은 릴리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릴리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봐라, 태한. 우리가 함께라는 것을 이들은 용납하지 못해.” 릴리아가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된다.” 태한은 릴리아의 손을 놓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방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수고 나아가자.”
    릴리아는 그의 뒤에 섰다. 그녀의 손에서 푸른 마법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태한은 검을 뽑아들었다.

    양쪽 진영의 병사들이 동시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활시위가 당겨지고, 마법이 작렬했다. 거대한 혼돈의 물결 속에서, 인간과 심연의 요정, 두 이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오직 서로에게만 향해 있었다.
    “함께라면… ” 릴리아가 속삭였다.
    “어디든.” 태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세상에 맞서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은 던전의 출구를 향한 마지막 돌파구이자, 그들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절규였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서로의 세상을 선택했다. 이 깊고 어두운 심연의 바닥에서, 태어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찬란한 빛이 되어 혼돈 속으로 뛰어들었다.
    던전의 출구는, 이제 막 열리려는 새로운 운명의 문이었다.

  • 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짙고 축축한 어둠이 폐부를 짓누르는 듯했다. 강태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횃불을 높이 들었다. 나락의 심연,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시들어버린다는 전설의 던전 최하층. 그의 동료들은 이미 며칠 전 거대한 심연의 문턱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탐욕도, 명예도, 그 어떤 가치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곳. 하지만 태한은 달랐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함인지, 아니면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찾기 위함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이끌림이었다.

    발밑에는 끈적한 이끼와 미끄러운 바위들이 얽혀 있었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 기이한 비명 소리, 철썩이는 물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낮은 울림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거대한 석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주변을 탐색하며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나아갔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심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본능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희미한 푸른빛이 저 멀리서 아른거렸다. 조심스럽게 다가선 곳에는 거대한 수정 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수정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로 자라나 있었고,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영롱한 빛은 동굴 전체를 신비로운 환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환상의 한가운데, 거대한 에메랄드 수정 기둥에 박힌 듯 쓰러져 있는 형체가 있었다.

    태한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그는 재빨리 칼을 뽑아들었다. 저것은… 심연의 요정이었다. 인간의 탐욕스러운 발길이 닿기 시작하면서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종족으로 알려진 존재들. 그들의 피부는 옅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뾰족한 귀는 섬세하게 흔들렸다. 등에는 곤충의 날개처럼 투명하고 영롱한 막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져 있었지만, 한쪽 날개는 찢겨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머리카락은 수정 파편에 엉켜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이라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선제공격은 던전 탐험가의 불문율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랐다. 증오와 공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깊고 푸른 눈동자. 그것은 흔히 보던 ‘괴물’의 눈이 아니었다.

    태한은 무심코 다가섰다. 심연의 요정은 그를 보자마자 몸을 움츠렸다. 찢어진 날개에서는 푸른 피가 흘러나와 투명한 수정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태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요정은 알아듣지 못하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굳어버린 건지 미동도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치유 물약을 꺼냈다. 맑은 초록빛 액체가 담긴 병을 본 요정의 눈이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
    “이건… 치료제다.”
    태한은 조심스럽게 물약 뚜껑을 열고 요정의 상처 입은 날개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요정은 화들짝 놀라며 발버둥 쳤지만, 태한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고 더 많은 물약을 부어주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처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곧이어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투명한 막이 재생되고, 날개 뼈가 다시 이어지는 기적 같은 광경.

    요정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태한을 올려다보았다.
    “왜… 나를 돕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는 수정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맑고 고왔다. 인간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에 태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딱히 이유랄 건 없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태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넌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요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인간들 또한 우리를 탐욕스럽게 사냥하고 죽이지 않았나.”
    말문이 막혔다. 사실이었다. 인간들은 이 던전의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보았다.
    “나는 릴리아다.”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너는… 인간치고는 제법 이상한 존재로군.”
    “강태한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 순간, 동굴 바깥에서 거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섬뜩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촉수가 달린 심연 괴물 ‘크라켄베인’의 포효였다. 태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괴물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숨어야 해.” 릴리아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둘은 급히 동굴 안쪽의 좁은 틈새로 몸을 숨겼다. 크라켄베인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한 이들을 찾기 위해 동굴 안을 샅샅이 뒤졌다. 거대한 촉수가 수정 기둥들을 부수고 지나가며 굉음을 냈다. 수정 파편들이 빗발치듯 쏟아졌지만, 릴리아는 작은 마법 보호막을 만들어 자신과 태한을 감쌌다.

    좁은 틈새 속에서 둘의 몸은 서로 밀착되어 있었다. 릴리아의 차가운 피부와 태한의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릴리아의 어깨에서는 옅은 꽃향기가 났다. 어둠 속에서 둘의 심장 소리만이 격렬하게 울렸다.
    “네 덕분에 살았군.” 태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 릴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로에게 기대어 한참을 기다렸다. 공포와 불안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유대감. 그들의 종족이 수백 년간 서로에게 겨눴던 칼날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과 심연의 요정. 공존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들. 그러나 이 어둡고 깊은 심연의 바닥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남았다.

    크라켄베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둘은 틈새에서 나올 수 있었다. 동굴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릴리아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태한이 물었다.
    “내 서식지는 파괴되었어. 갈 곳이 없어.” 릴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크라켄베인은 끝까지 쫓아올 거야.”
    태한은 생각에 잠겼다. 릴리아를 버리고 혼자 던전을 나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슬픔과 연약함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태한이 불쑥 말했다. “이 던전을 나가는 길을 나는 알고 있다.”
    릴리아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인간들 세상으로? 미친 짓이야. 너는 동족들에게 살해당할 것이고, 나는… 어둠 밖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럼 이곳에서 죽으란 말인가?” 태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너의 동족들도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함께라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릴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작고 창백한 손은 망설임 끝에 태한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는 차갑고도 부드러웠다.

    며칠 밤낮을 숨죽이며 던전 깊은 곳을 헤맸다. 태한은 릴리아에게 던전 탐험의 지식을 가르쳐주었고, 릴리아는 그녀의 마법으로 어둠을 밝히고 위험을 감지했다. 낮선 공존은 기적처럼 편안해졌다. 태한은 릴리아의 섬세한 날개가 스치는 소리에 익숙해졌고, 릴리아는 태한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졌고, 이젠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밤, 좁은 바위 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릴리아는 차가운 태한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태한은 그녀의 옅은 비늘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마치 수정처럼 차가운 그녀의 피부 아래로 생명의 온기가 느껴졌다. 릴리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태한…” 그녀의 목소리가 꿈결 같았다.
    “미안하다, 깼나.”
    “아니.” 릴리아는 태한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네가 나를 구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 너는 나에게 던전 밖의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게 아니야. 너는 그저…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태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그저 이 연약한 존재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감정은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선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될까?” 릴리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모르겠다.” 태한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되든, 함께라면 괜찮을 거다.”

    드디어 던전의 출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희미한 바깥세상의 빛이 어둠을 뚫고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희망과 동시에 불안이 밀려왔다. 이곳을 나가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구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멈춰라! 저 요정을 죽여라!”
    인간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릴리아를 발견하고 거침없이 공격해왔다. 동시에 출구 반대편, 던전 깊숙한 곳에서는 기괴한 비명과 함께 심연의 요정 전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릴리아가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배신자! 감히 인간과 어울리다니!”

    두 세력 사이에 고립된 채, 태한은 릴리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릴리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봐라, 태한. 우리가 함께라는 것을 이들은 용납하지 못해.” 릴리아가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된다.” 태한은 릴리아의 손을 놓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방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수고 나아가자.”
    릴리아는 그의 뒤에 섰다. 그녀의 손에서 푸른 마법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태한은 검을 뽑아들었다.

    양쪽 진영의 병사들이 동시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활시위가 당겨지고, 마법이 작렬했다. 거대한 혼돈의 물결 속에서, 인간과 심연의 요정, 두 이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오직 서로에게만 향해 있었다.
    “함께라면… ” 릴리아가 속삭였다.
    “어디든.” 태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세상에 맞서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은 던전의 출구를 향한 마지막 돌파구이자, 그들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절규였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서로의 세상을 선택했다. 이 깊고 어두운 심연의 바닥에서, 태어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찬란한 빛이 되어 혼돈 속으로 뛰어들었다.
    던전의 출구는, 이제 막 열리려는 새로운 운명의 문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3: 잿빛 달의 속삭임**

    차디찬 강철 복도를 따라 발소리가 울렸다. 정지장 보행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경보가 울렸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복도의 주인인 제국조차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하리라. 세린은 어둠 속에 잠긴 홀로그램 시계를 응시했다. ’00:03:17′. 주어진 시간은 이제 3분 남짓.

    “카인, 동선은?” 세린의 목소리는 산소마스크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그녀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제국군이 미처 관리하지 못한 통신망의 미세한 파동까지 놓치지 않았다.

    “예정대로 갑니다. A-7 섹터는 잠시 정전 상태. 제국 놈들이 식사 시간이라고 대충 관리하는 틈을 탔습니다.” 카인의 목소리는 마스크 너머로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그는 세린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손목의 위상 측정기로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스캔했다. 녹색 점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보안벽은 이미 우회했고, 다음 코너만 돌면 됩니다.”

    그들이 침투한 곳은 ‘잿빛 달’이라 불리는 버려진 광산 행성에 세워진 제국의 거대한 보급창이었다. 제국은 이 변방의 달에서 나오는 희귀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원주민 행성을 황폐화시켰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이곳을 거대한 쓰레기통이자 보급 거점으로 전락시켰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라 보안이 허술하다고? 천만에. 제국의 오만함은 그 어떤 요새보다 견고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오만함의 틈을 노렸다.

    두 사람은 마지막 코너를 돌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원통형 통로였다. 천장까지 닿는 수많은 데이터 서버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고, 그 사이를 수십 개의 광섬유 케이블이 마치 신경망처럼 얽혀 있었다. 목적은 저 가장 안쪽에 있는 중앙 데이터 코어.

    “젠장, 저긴 정전이 아니잖아!” 카인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위상 측정기에 갑자기 붉은 점들이 번개처럼 깜빡였다. “감지 필드가 활성화됐습니다! 제기랄, 누군가 수동으로 복구시켰나 봐요!”

    세린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제국군은 전력을 아낀답시고 이런 변방 기지에서는 동력 흐름이 불규칙했다. 하지만 감지 필드가 재활성화되었다면, 상황은 최악이었다. 정지장 보행기는 은신에는 탁월했지만, 감지 필드를 통과하는 순간 그들의 미약한 에너지는 마치 불꽃처럼 폭발하며 위치를 노출시킬 터였다.

    “시간 없어.” 세린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작은 EMP 수류탄을 꺼냈다. 제국군의 표준 장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조악한 수제 폭탄이었다. 껍데기는 폐기된 드론의 부품, 내부는 재활용된 배터리와 불법 개조된 코일. 하지만 이 작은 폭탄 하나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세린! 저걸로 저걸 다 날릴 생각입니까? 코어까지?”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딱 3초만.” 그녀는 EMP 수류탄의 조작부를 빠르게 만졌다. “저 가장 바깥쪽 데이터 서버를 봐. 낡아서 연결선이 불안정해. 거기만 노린다.”

    그녀는 수류탄을 들어 올렸다. 조준경조차 없는 허술한 장비였지만, 세린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마치 수십 년을 기다린 사냥꾼처럼,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정지했다. 그리고, 던졌다.

    쉬이이익-

    수류탄은 공기를 가르며 정확히 목표물, 즉 가장자리에 위치한 낡은 데이터 서버의 하단부 연결 케이블에 명중했다.

    **쿠우웅!**

    강력한 전자기 충격파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EMP의 충격은 주변의 모든 전자기기를 잠시 마비시켰다. 낡은 서버는 비명을 지르며 전원부가 폭발했고, 연결되어 있던 감지 필드도 일순간 꺼졌다. 하지만 제국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불과 1초 만에 비상 전원이 가동되며 서버의 보조 전원과 감지 필드가 다시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2초 남았습니다!” 카인이 외쳤다.

    세린은 EMP 수류탄이 터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그녀의 몸놀림은 유성처럼 빨랐다. 감지 필드가 다시 완전히 켜지기 직전,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감지 필드 영역을 통과했다. 이제 그들의 위치는 안전했다. 적어도 지금은.

    “미쳤군요, 당신!” 카인은 세린을 따라 감지 필드를 통과하며 숨을 헐떡였다. “저라면 평생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어.” 세린은 이미 중앙 데이터 코어 앞으로 다가서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특수 제작된 데이터 스크램블러를 꺼냈다. 작은 USB 형태의 장치였다. “이거 꽂고, 카인, 네가 접속해. 놈들의 통신망을 통해 제국 함대의 보급선을 추적해야 해. 잿빛 달에서 출항하는 모든 화물선의 목적지, 운송 품목,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빈틈.”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가리킨 포트에 스크램블러를 삽입했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고속으로 암호가 해독되고, 제국의 보안 시스템이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카인은 반란군 최고의 해커였다. 어렸을 때부터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뒷골목에서 코드를 만지작거리던 재능은, 이제 은하계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칼날이 되었다.

    “제국 함대 ‘정의의 심판’ 호의 보급선 경로가 잡혔습니다! 행성 ‘오리온’으로 가는 중입니다. 화물은… 젠장, 식량 보급선이 아닙니다. 희귀 광물과… 병기 부품? 오리온은 제국군 주둔지가 아닌데…” 카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뭔데?” 세린은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오리온 성계는 과거 반란군 요새가 있었던 곳입니다. 제국은 몇 년 전에 그곳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발표했죠. 그런데 병기 부품을 그곳으로 보낸다니…” 카인의 눈이 번뜩였다. “놈들이 뭔가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물 데이터… 이 광물은 ‘그림자 수정’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제국군의 신형 무기에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던… ‘성간 분쇄포’ 말입니다!”

    성간 분쇄포. 단어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제국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학살 병기. 그들이 이 변방의 보급창에서 신형 무기 부품을 은밀히 운송하고 있었다니.

    “젠장.” 세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놈들은 단순한 반란의 씨앗을 뽑으려는 게 아니었어. 아예 뿌리째 뽑아버리려 하는군.”

    “데이터 다 받았습니다! 빠져나가야 합니다, 세린!”

    갑자기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제국군의 순찰대였다. 그들의 통신망에서 미세한 잡음이 들려왔다. EMP 폭발로 인한 일시적인 혼란이 수습된 모양이었다.

    “왔군.” 세린은 스크램블러를 뽑아 카인에게 건네받으며 몸을 돌렸다. “카인, 후방은 네게 맡긴다. 난 코어를 정리한다.”

    “알겠습니다!” 카인은 재빨리 은폐장치를 활성화하며 뒷걸음질 쳤다.

    세린은 중앙 데이터 코어에 설치된 자폭 장치를 활성화했다. “놈들에게 줄 선물이 너무 많아.”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돌아서서 카인이 도망친 통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쾅! 쾅! 쾅!

    제국군 순찰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전술 슈트가 내는 중후한 기계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쪽이다! 누군가 침입했다! 감지 필드 이상!”

    세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우주가,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별, ‘희망’이 있었다. 잿빛 달은 불타오를 것이고, 그 불길은 제국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평민들의 반란은 이제, 진짜 막을 올리는 참이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젠장, 또 여기야.”

    하준은 푸석한 흙먼지가 입안 가득 맴도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찢어진 옷자락이 마른 피부를 스쳤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제와 다름없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뼈대만 남은 빌딩들이 마치 거대한 비석처럼 꽂혀 있었다. 먼지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한 배경음악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찬 낡은 장치를 만졌다. 손바닥만 한 철제 큐브. 어설프게 덕지덕지 붙은 전선들과 금이 간 액정. 하준을 이 지옥 같은 미래로 떨궈 놓은 원흉이자,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시간 이동 장치’라고 불리던 이 물건은 그를 200년 후의 세상으로 던져 놓았다. 문명은 사라지고, 인류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벌써 세 번째 기상인가.” 하준은 중얼거렸다. 처음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지만, 이제는 절망조차 사치였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이 미친 시간 여행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목마름이 턱을 긁었다. 어제 겨우 찾아낸 녹슨 수도관은 더 이상 물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제 이동해야 했다. 그는 배낭을 고쳐 맸다. 내용물은 단출했다. 작은 삽, 식칼, 낡은 천 조각, 그리고 간신히 모은 말린 풀뿌리 몇 개.

    하준은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질렀다. 거리는 온통 무너진 잔해와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가끔 녹슨 자동차의 앙상한 차체만이 과거의 영광을 암시할 뿐이었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공기는 이상하게도 싸늘했다. 아마도 산소 농도가 희박해진 탓이리라.

    “어디, 괜찮은 곳 없나.”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물. 식량. 그리고 밤을 보낼 안전한 장소. 이 세 가지가 그의 생존 공식이었다. 그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거대한 돔형 건물에 닿았다. 과거의 기술 박람회장이었을까.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지만, 철골 구조는 비교적 온전해 보였다. 저곳이라면… 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쓸모없는 장치가 반응할 만한 어떤 에너지를.

    걷는 동안 그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였다. 이 폐허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간혹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혹은 금속이 부딪히는 불쾌한 소리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돔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잔해들은 더욱 기괴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열에 녹아내린 듯한 금속 기둥, 알 수 없는 물질로 뒤덮인 벽들. 어쩌면 이 도시를 파괴한 것이 자연재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는 거대한 틈새처럼 벌어져 있었다.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희미한 기계 냄새가 났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에서 밟히는 파편들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시야는 점차 익숙한 어둠에 적응해갔다. 드넓은 홀 안에는 부서진 전시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홀로그램 장치, 반쯤 타버린 로봇의 잔해.

    그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깔린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하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배낭에서 식칼을 꺼내 들었다. 녹슬었지만 날카로웠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크고, 불길하게 빛나는 눈. 그것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이었다. 몸은 마치 강철 조각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 듯했고, 등에는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녀석의 입에서 검붉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변이된 짐승이었다. 이 폐허의 진정한 지배자들 중 하나.

    “젠장…” 하준은 숨을 멈췄다. 녀석은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민첩하게 움직였다.
    짐승이 공격 자세를 취하는 순간, 하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하준은 식칼을 꽉 쥐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이 거대한 홀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그의 눈이 재빨리 주변을 스캔했다. 부서진 구조물들, 쓰러진 기둥들… 그때,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홀 한가운데, 아직 쓰러지지 않은 거대한 제어판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위에는 섬광처럼 깜빡이는 불빛이 있었다. 전력? 아직 살아있는 시스템?

    “크아아악!” 짐승이 다시 한번 덤벼들었다. 이번엔 더욱 격렬하게.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저곳이야. 저곳으로 가야 해.’
    그는 식칼을 휘둘러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짐승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하준은 온 힘을 다해 제어판을 향해 달렸다.

    육중한 몸이 그의 뒤를 쫓았다. 발소리가 홀을 뒤흔들었다. 거의 다 왔다. 제어판까지 불과 몇 걸음.
    그때, 짐승이 전력을 다해 점프했다. 하준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하준은 마지막 순간, 몸을 날려 제어판 옆으로 구르면서 동시에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제발!’

    칼날이 짐승의 옆구리를 스쳤다. 강철 같은 피부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녀석의 균형을 잠시 흐트러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짐승은 으르렁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제어판에 기대섰다. 손바닥으로 버튼이 박힌 표면을 더듬었다. 여러 개의 버튼 중, 유독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상 전력? 통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이거… 작동하는 건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빛나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홀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붉은 경고등이 번뜩였다. 동시에, 제어판 주변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경고음에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뭐… 뭐야!”

    갈라진 바닥 틈새로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강렬한 전자기 충격파가 온몸을 강타했다. 하준의 옆구리에 찬 시간 이동 장치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의 금이 더 깊어졌다.

    짐승이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충격파가 녀석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하준은 강렬한 충격파 속에서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의 시간 이동 장치는 이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

    “안 돼! 아직은…!” 그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아직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폐허가 된 홀, 발악하는 짐승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압도적인 시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하준은 의식을 잃었다.

    ***

    “으윽…”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부딪히는 충격에 하준은 신음하며 눈을 떴다.
    폐허가 된 돔 건물. 어둠 속에서 짐승의 붉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

    귀에 익숙한 울음소리.

    ‘설마… 다시?’
    하준은 옆구리의 장치를 확인했다. 금이 더 깊어진 액정. 하지만 여전히 깜빡이는 작은 불빛.
    시간이동 장치는 그를 또 다른 시간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 고작 수 분 전의 과거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전일 수도. 짐승의 자세는 그가 버튼을 누르기 직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젠장, 미쳤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은 반복이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장치의 오작동.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짐승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엔 버튼을 누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 이 정도 반복은 익숙해.”
    하준은 식칼을 고쳐 쥐었다. 입가에 비장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엔,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움직인다.”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폐허 속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전투의 시작이었다. 매 순간이 생존이었고,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 던전 탐험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짙고 축축한 어둠이 폐부를 짓누르는 듯했다. 강태한은 거친 숨을 내쉬며 횃불을 높이 들었다. 나락의 심연, 발을 들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시들어버린다는 전설의 던전 최하층. 그의 동료들은 이미 며칠 전 거대한 심연의 문턱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탐욕도, 명예도, 그 어떤 가치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곳. 하지만 태한은 달랐다.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함인지, 아니면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찾기 위함인지,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막연한 이끌림이었다.

    발밑에는 끈적한 이끼와 미끄러운 바위들이 얽혀 있었다. 눅눅한 공기 속에서 기이한 비명 소리, 철썩이는 물소리, 그리고 알 수 없는 낮은 울림들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횃불이 흔들릴 때마다 거대한 석벽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은 마치 살아있는 괴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주변을 탐색하며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나아갔다. 수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이 심연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본능에 충실하는 것뿐이었다.

    얼마나 깊이 들어갔을까. 희미한 푸른빛이 저 멀리서 아른거렸다. 조심스럽게 다가선 곳에는 거대한 수정 동굴이 펼쳐져 있었다. 수정은 제각기 다른 모양과 크기로 자라나 있었고,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영롱한 빛은 동굴 전체를 신비로운 환상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환상의 한가운데, 거대한 에메랄드 수정 기둥에 박힌 듯 쓰러져 있는 형체가 있었다.

    태한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그는 재빨리 칼을 뽑아들었다. 저것은… 심연의 요정이었다. 인간의 탐욕스러운 발길이 닿기 시작하면서부터 흉포하고 잔인한 종족으로 알려진 존재들. 그들의 피부는 옅은 비늘로 덮여 있었고, 뾰족한 귀는 섬세하게 흔들렸다. 등에는 곤충의 날개처럼 투명하고 영롱한 막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펼쳐져 있었지만, 한쪽 날개는 찢겨 너덜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머리카락은 수정 파편에 엉켜 있었고, 창백한 얼굴에는 고통스러운 신음이 스쳐 지나갔다.

    보통이라면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을 것이다. 선제공격은 던전 탐험가의 불문율이니까. 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달랐다. 증오와 공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이 뒤섞인 깊고 푸른 눈동자. 그것은 흔히 보던 ‘괴물’의 눈이 아니었다.

    태한은 무심코 다가섰다. 심연의 요정은 그를 보자마자 몸을 움츠렸다. 찢어진 날개에서는 푸른 피가 흘러나와 투명한 수정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움직이지 마.” 태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요정은 알아듣지 못하는지, 아니면 두려움에 굳어버린 건지 미동도 없었다. 그는 품속에서 작은 치유 물약을 꺼냈다. 맑은 초록빛 액체가 담긴 병을 본 요정의 눈이 경계심으로 가득 찼다.
    “이건… 치료제다.”
    태한은 조심스럽게 물약 뚜껑을 열고 요정의 상처 입은 날개에 몇 방울 떨어뜨렸다. 요정은 화들짝 놀라며 발버둥 쳤지만, 태한은 억지로 그녀를 붙잡고 더 많은 물약을 부어주었다.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처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곧이어 상처가 서서히 아물기 시작했다. 투명한 막이 재생되고, 날개 뼈가 다시 이어지는 기적 같은 광경.

    요정의 눈빛에서 경계심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태한을 올려다보았다.
    “왜… 나를 돕는 거지?” 그녀의 목소리는 수정이 부딪히는 소리처럼 맑고 고왔다. 인간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에 태한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딱히 이유랄 건 없다.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태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넌 인간을 잡아먹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요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인간들 또한 우리를 탐욕스럽게 사냥하고 죽이지 않았나.”
    말문이 막혔다. 사실이었다. 인간들은 이 던전의 모든 것을 ‘자원’으로 보았다.
    “나는 릴리아다.” 그녀가 이름을 밝혔다. “너는… 인간치고는 제법 이상한 존재로군.”
    “강태한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 순간, 동굴 바깥에서 거대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섬뜩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촉수가 달린 심연 괴물 ‘크라켄베인’의 포효였다. 태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괴물은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숨어야 해.” 릴리아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둘은 급히 동굴 안쪽의 좁은 틈새로 몸을 숨겼다. 크라켄베인은 자신들의 영역에 침입한 이들을 찾기 위해 동굴 안을 샅샅이 뒤졌다. 거대한 촉수가 수정 기둥들을 부수고 지나가며 굉음을 냈다. 수정 파편들이 빗발치듯 쏟아졌지만, 릴리아는 작은 마법 보호막을 만들어 자신과 태한을 감쌌다.

    좁은 틈새 속에서 둘의 몸은 서로 밀착되어 있었다. 릴리아의 차가운 피부와 태한의 따뜻한 체온이 닿았다. 릴리아의 어깨에서는 옅은 꽃향기가 났다. 어둠 속에서 둘의 심장 소리만이 격렬하게 울렸다.
    “네 덕분에 살았군.” 태한이 나지막이 말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 릴리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서로에게 기대어 한참을 기다렸다. 공포와 불안 속에서 피어나는 묘한 유대감. 그들의 종족이 수백 년간 서로에게 겨눴던 칼날의 의미가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인간과 심연의 요정. 공존할 수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들. 그러나 이 어둡고 깊은 심연의 바닥에서, 그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남았다.

    크라켄베인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둘은 틈새에서 나올 수 있었다. 동굴은 거의 폐허가 되어 있었다. 릴리아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태한이 물었다.
    “내 서식지는 파괴되었어. 갈 곳이 없어.” 릴리아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곳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크라켄베인은 끝까지 쫓아올 거야.”
    태한은 생각에 잠겼다. 릴리아를 버리고 혼자 던전을 나가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 비친 슬픔과 연약함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나와 함께 가지 않겠나?” 태한이 불쑥 말했다. “이 던전을 나가는 길을 나는 알고 있다.”
    릴리아는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나와 함께? 인간들 세상으로? 미친 짓이야. 너는 동족들에게 살해당할 것이고, 나는… 어둠 밖에서는 숨조차 쉴 수 없을지도 몰라.”
    “그럼 이곳에서 죽으란 말인가?” 태한은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너의 동족들도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함께라면, 어쩌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릴리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작고 창백한 손은 망설임 끝에 태한의 손을 잡았다. 그 온기는 차갑고도 부드러웠다.

    며칠 밤낮을 숨죽이며 던전 깊은 곳을 헤맸다. 태한은 릴리아에게 던전 탐험의 지식을 가르쳐주었고, 릴리아는 그녀의 마법으로 어둠을 밝히고 위험을 감지했다. 낮선 공존은 기적처럼 편안해졌다. 태한은 릴리아의 섬세한 날개가 스치는 소리에 익숙해졌고, 릴리아는 태한의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에 익숙해졌고, 이젠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밤, 좁은 바위 틈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릴리아는 차가운 태한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태한은 그녀의 옅은 비늘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마치 수정처럼 차가운 그녀의 피부 아래로 생명의 온기가 느껴졌다. 릴리아가 살며시 눈을 떴다.
    “태한…” 그녀의 목소리가 꿈결 같았다.
    “미안하다, 깼나.”
    “아니.” 릴리아는 태한의 손을 잡았다. “나는… 네가 나를 구한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아. 너는 나에게 던전 밖의 세상을 보여주려 하는 게 아니야. 너는 그저…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았을 뿐이야.”
    태한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는 그저 이 연약한 존재를 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감정은 단순한 동정심을 넘어선 것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될까?” 릴리아가 나지막이 물었다.
    “모르겠다.” 태한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이 되든, 함께라면 괜찮을 거다.”

    드디어 던전의 출구가 시야에 들어왔다. 희미한 바깥세상의 빛이 어둠을 뚫고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희망과 동시에 불안이 밀려왔다. 이곳을 나가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출구 가까이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멈춰라! 저 요정을 죽여라!”
    인간 탐험가들이었다. 그들은 릴리아를 발견하고 거침없이 공격해왔다. 동시에 출구 반대편, 던전 깊숙한 곳에서는 기괴한 비명과 함께 심연의 요정 전사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릴리아가 인간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분노에 찬 비명을 질렀다.
    “배신자! 감히 인간과 어울리다니!”

    두 세력 사이에 고립된 채, 태한은 릴리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릴리아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빛나고 있었다.
    “봐라, 태한. 우리가 함께라는 것을 이들은 용납하지 못해.” 릴리아가 애처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가 틀린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면 된다.” 태한은 릴리아의 손을 놓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방식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수고 나아가자.”
    릴리아는 그의 뒤에 섰다. 그녀의 손에서 푸른 마법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태한은 검을 뽑아들었다.

    양쪽 진영의 병사들이 동시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활시위가 당겨지고, 마법이 작렬했다. 거대한 혼돈의 물결 속에서, 인간과 심연의 요정, 두 이질적인 존재는 서로의 등을 맞댄 채 서 있었다. 그들의 눈빛은 오직 서로에게만 향해 있었다.
    “함께라면… ” 릴리아가 속삭였다.
    “어디든.” 태한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해, 모든 세상에 맞서는 싸움을 시작했다. 그것은 던전의 출구를 향한 마지막 돌파구이자, 그들만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절규였다. 세상은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그들은 서로의 세상을 선택했다. 이 깊고 어두운 심연의 바닥에서, 태어난 그들의 사랑은 가장 찬란한 빛이 되어 혼돈 속으로 뛰어들었다.
    던전의 출구는, 이제 막 열리려는 새로운 운명의 문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3: 잿빛 달의 속삭임**

    차디찬 강철 복도를 따라 발소리가 울렸다. 정지장 보행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경보가 울렸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복도의 주인인 제국조차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하리라. 세린은 어둠 속에 잠긴 홀로그램 시계를 응시했다. ’00:03:17′. 주어진 시간은 이제 3분 남짓.

    “카인, 동선은?” 세린의 목소리는 산소마스크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그녀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제국군이 미처 관리하지 못한 통신망의 미세한 파동까지 놓치지 않았다.

    “예정대로 갑니다. A-7 섹터는 잠시 정전 상태. 제국 놈들이 식사 시간이라고 대충 관리하는 틈을 탔습니다.” 카인의 목소리는 마스크 너머로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그는 세린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손목의 위상 측정기로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스캔했다. 녹색 점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보안벽은 이미 우회했고, 다음 코너만 돌면 됩니다.”

    그들이 침투한 곳은 ‘잿빛 달’이라 불리는 버려진 광산 행성에 세워진 제국의 거대한 보급창이었다. 제국은 이 변방의 달에서 나오는 희귀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원주민 행성을 황폐화시켰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이곳을 거대한 쓰레기통이자 보급 거점으로 전락시켰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라 보안이 허술하다고? 천만에. 제국의 오만함은 그 어떤 요새보다 견고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오만함의 틈을 노렸다.

    두 사람은 마지막 코너를 돌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원통형 통로였다. 천장까지 닿는 수많은 데이터 서버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고, 그 사이를 수십 개의 광섬유 케이블이 마치 신경망처럼 얽혀 있었다. 목적은 저 가장 안쪽에 있는 중앙 데이터 코어.

    “젠장, 저긴 정전이 아니잖아!” 카인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위상 측정기에 갑자기 붉은 점들이 번개처럼 깜빡였다. “감지 필드가 활성화됐습니다! 제기랄, 누군가 수동으로 복구시켰나 봐요!”

    세린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제국군은 전력을 아낀답시고 이런 변방 기지에서는 동력 흐름이 불규칙했다. 하지만 감지 필드가 재활성화되었다면, 상황은 최악이었다. 정지장 보행기는 은신에는 탁월했지만, 감지 필드를 통과하는 순간 그들의 미약한 에너지는 마치 불꽃처럼 폭발하며 위치를 노출시킬 터였다.

    “시간 없어.” 세린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작은 EMP 수류탄을 꺼냈다. 제국군의 표준 장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조악한 수제 폭탄이었다. 껍데기는 폐기된 드론의 부품, 내부는 재활용된 배터리와 불법 개조된 코일. 하지만 이 작은 폭탄 하나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세린! 저걸로 저걸 다 날릴 생각입니까? 코어까지?”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딱 3초만.” 그녀는 EMP 수류탄의 조작부를 빠르게 만졌다. “저 가장 바깥쪽 데이터 서버를 봐. 낡아서 연결선이 불안정해. 거기만 노린다.”

    그녀는 수류탄을 들어 올렸다. 조준경조차 없는 허술한 장비였지만, 세린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마치 수십 년을 기다린 사냥꾼처럼,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정지했다. 그리고, 던졌다.

    쉬이이익-

    수류탄은 공기를 가르며 정확히 목표물, 즉 가장자리에 위치한 낡은 데이터 서버의 하단부 연결 케이블에 명중했다.

    **쿠우웅!**

    강력한 전자기 충격파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EMP의 충격은 주변의 모든 전자기기를 잠시 마비시켰다. 낡은 서버는 비명을 지르며 전원부가 폭발했고, 연결되어 있던 감지 필드도 일순간 꺼졌다. 하지만 제국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불과 1초 만에 비상 전원이 가동되며 서버의 보조 전원과 감지 필드가 다시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2초 남았습니다!” 카인이 외쳤다.

    세린은 EMP 수류탄이 터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그녀의 몸놀림은 유성처럼 빨랐다. 감지 필드가 다시 완전히 켜지기 직전,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감지 필드 영역을 통과했다. 이제 그들의 위치는 안전했다. 적어도 지금은.

    “미쳤군요, 당신!” 카인은 세린을 따라 감지 필드를 통과하며 숨을 헐떡였다. “저라면 평생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어.” 세린은 이미 중앙 데이터 코어 앞으로 다가서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특수 제작된 데이터 스크램블러를 꺼냈다. 작은 USB 형태의 장치였다. “이거 꽂고, 카인, 네가 접속해. 놈들의 통신망을 통해 제국 함대의 보급선을 추적해야 해. 잿빛 달에서 출항하는 모든 화물선의 목적지, 운송 품목,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빈틈.”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가리킨 포트에 스크램블러를 삽입했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고속으로 암호가 해독되고, 제국의 보안 시스템이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카인은 반란군 최고의 해커였다. 어렸을 때부터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뒷골목에서 코드를 만지작거리던 재능은, 이제 은하계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칼날이 되었다.

    “제국 함대 ‘정의의 심판’ 호의 보급선 경로가 잡혔습니다! 행성 ‘오리온’으로 가는 중입니다. 화물은… 젠장, 식량 보급선이 아닙니다. 희귀 광물과… 병기 부품? 오리온은 제국군 주둔지가 아닌데…” 카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뭔데?” 세린은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오리온 성계는 과거 반란군 요새가 있었던 곳입니다. 제국은 몇 년 전에 그곳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발표했죠. 그런데 병기 부품을 그곳으로 보낸다니…” 카인의 눈이 번뜩였다. “놈들이 뭔가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물 데이터… 이 광물은 ‘그림자 수정’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제국군의 신형 무기에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던… ‘성간 분쇄포’ 말입니다!”

    성간 분쇄포. 단어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제국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학살 병기. 그들이 이 변방의 보급창에서 신형 무기 부품을 은밀히 운송하고 있었다니.

    “젠장.” 세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놈들은 단순한 반란의 씨앗을 뽑으려는 게 아니었어. 아예 뿌리째 뽑아버리려 하는군.”

    “데이터 다 받았습니다! 빠져나가야 합니다, 세린!”

    갑자기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제국군의 순찰대였다. 그들의 통신망에서 미세한 잡음이 들려왔다. EMP 폭발로 인한 일시적인 혼란이 수습된 모양이었다.

    “왔군.” 세린은 스크램블러를 뽑아 카인에게 건네받으며 몸을 돌렸다. “카인, 후방은 네게 맡긴다. 난 코어를 정리한다.”

    “알겠습니다!” 카인은 재빨리 은폐장치를 활성화하며 뒷걸음질 쳤다.

    세린은 중앙 데이터 코어에 설치된 자폭 장치를 활성화했다. “놈들에게 줄 선물이 너무 많아.”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돌아서서 카인이 도망친 통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쾅! 쾅! 쾅!

    제국군 순찰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전술 슈트가 내는 중후한 기계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쪽이다! 누군가 침입했다! 감지 필드 이상!”

    세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우주가,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별, ‘희망’이 있었다. 잿빛 달은 불타오를 것이고, 그 불길은 제국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평민들의 반란은 이제, 진짜 막을 올리는 참이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젠장, 또 여기야.”

    하준은 푸석한 흙먼지가 입안 가득 맴도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찢어진 옷자락이 마른 피부를 스쳤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제와 다름없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뼈대만 남은 빌딩들이 마치 거대한 비석처럼 꽂혀 있었다. 먼지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한 배경음악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찬 낡은 장치를 만졌다. 손바닥만 한 철제 큐브. 어설프게 덕지덕지 붙은 전선들과 금이 간 액정. 하준을 이 지옥 같은 미래로 떨궈 놓은 원흉이자,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시간 이동 장치’라고 불리던 이 물건은 그를 200년 후의 세상으로 던져 놓았다. 문명은 사라지고, 인류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벌써 세 번째 기상인가.” 하준은 중얼거렸다. 처음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지만, 이제는 절망조차 사치였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이 미친 시간 여행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목마름이 턱을 긁었다. 어제 겨우 찾아낸 녹슨 수도관은 더 이상 물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제 이동해야 했다. 그는 배낭을 고쳐 맸다. 내용물은 단출했다. 작은 삽, 식칼, 낡은 천 조각, 그리고 간신히 모은 말린 풀뿌리 몇 개.

    하준은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질렀다. 거리는 온통 무너진 잔해와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가끔 녹슨 자동차의 앙상한 차체만이 과거의 영광을 암시할 뿐이었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공기는 이상하게도 싸늘했다. 아마도 산소 농도가 희박해진 탓이리라.

    “어디, 괜찮은 곳 없나.”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물. 식량. 그리고 밤을 보낼 안전한 장소. 이 세 가지가 그의 생존 공식이었다. 그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거대한 돔형 건물에 닿았다. 과거의 기술 박람회장이었을까.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지만, 철골 구조는 비교적 온전해 보였다. 저곳이라면… 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쓸모없는 장치가 반응할 만한 어떤 에너지를.

    걷는 동안 그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였다. 이 폐허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간혹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혹은 금속이 부딪히는 불쾌한 소리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돔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잔해들은 더욱 기괴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열에 녹아내린 듯한 금속 기둥, 알 수 없는 물질로 뒤덮인 벽들. 어쩌면 이 도시를 파괴한 것이 자연재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는 거대한 틈새처럼 벌어져 있었다.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희미한 기계 냄새가 났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에서 밟히는 파편들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시야는 점차 익숙한 어둠에 적응해갔다. 드넓은 홀 안에는 부서진 전시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홀로그램 장치, 반쯤 타버린 로봇의 잔해.

    그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깔린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하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배낭에서 식칼을 꺼내 들었다. 녹슬었지만 날카로웠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크고, 불길하게 빛나는 눈. 그것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이었다. 몸은 마치 강철 조각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 듯했고, 등에는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녀석의 입에서 검붉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변이된 짐승이었다. 이 폐허의 진정한 지배자들 중 하나.

    “젠장…” 하준은 숨을 멈췄다. 녀석은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민첩하게 움직였다.
    짐승이 공격 자세를 취하는 순간, 하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하준은 식칼을 꽉 쥐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이 거대한 홀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그의 눈이 재빨리 주변을 스캔했다. 부서진 구조물들, 쓰러진 기둥들… 그때,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홀 한가운데, 아직 쓰러지지 않은 거대한 제어판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위에는 섬광처럼 깜빡이는 불빛이 있었다. 전력? 아직 살아있는 시스템?

    “크아아악!” 짐승이 다시 한번 덤벼들었다. 이번엔 더욱 격렬하게.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저곳이야. 저곳으로 가야 해.’
    그는 식칼을 휘둘러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짐승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하준은 온 힘을 다해 제어판을 향해 달렸다.

    육중한 몸이 그의 뒤를 쫓았다. 발소리가 홀을 뒤흔들었다. 거의 다 왔다. 제어판까지 불과 몇 걸음.
    그때, 짐승이 전력을 다해 점프했다. 하준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하준은 마지막 순간, 몸을 날려 제어판 옆으로 구르면서 동시에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제발!’

    칼날이 짐승의 옆구리를 스쳤다. 강철 같은 피부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녀석의 균형을 잠시 흐트러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짐승은 으르렁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제어판에 기대섰다. 손바닥으로 버튼이 박힌 표면을 더듬었다. 여러 개의 버튼 중, 유독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상 전력? 통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이거… 작동하는 건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빛나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홀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붉은 경고등이 번뜩였다. 동시에, 제어판 주변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경고음에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뭐… 뭐야!”

    갈라진 바닥 틈새로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강렬한 전자기 충격파가 온몸을 강타했다. 하준의 옆구리에 찬 시간 이동 장치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의 금이 더 깊어졌다.

    짐승이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충격파가 녀석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하준은 강렬한 충격파 속에서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의 시간 이동 장치는 이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

    “안 돼! 아직은…!” 그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아직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폐허가 된 홀, 발악하는 짐승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압도적인 시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하준은 의식을 잃었다.

    ***

    “으윽…”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부딪히는 충격에 하준은 신음하며 눈을 떴다.
    폐허가 된 돔 건물. 어둠 속에서 짐승의 붉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

    귀에 익숙한 울음소리.

    ‘설마… 다시?’
    하준은 옆구리의 장치를 확인했다. 금이 더 깊어진 액정. 하지만 여전히 깜빡이는 작은 불빛.
    시간이동 장치는 그를 또 다른 시간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 고작 수 분 전의 과거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전일 수도. 짐승의 자세는 그가 버튼을 누르기 직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젠장, 미쳤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은 반복이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장치의 오작동.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짐승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엔 버튼을 누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 이 정도 반복은 익숙해.”
    하준은 식칼을 고쳐 쥐었다. 입가에 비장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엔,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움직인다.”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폐허 속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전투의 시작이었다. 매 순간이 생존이었고,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3: 잿빛 달의 속삭임**

    차디찬 강철 복도를 따라 발소리가 울렸다. 정지장 보행기가 아니었다면 벌써 경보가 울렸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복도의 주인인 제국조차도 우리를 눈치채지 못하리라. 세린은 어둠 속에 잠긴 홀로그램 시계를 응시했다. ’00:03:17′. 주어진 시간은 이제 3분 남짓.

    “카인, 동선은?” 세린의 목소리는 산소마스크 안에서도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그녀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제국군이 미처 관리하지 못한 통신망의 미세한 파동까지 놓치지 않았다.

    “예정대로 갑니다. A-7 섹터는 잠시 정전 상태. 제국 놈들이 식사 시간이라고 대충 관리하는 틈을 탔습니다.” 카인의 목소리는 마스크 너머로 살짝 흥분되어 있었다. 그는 세린의 뒤를 바싹 따라붙으며 손목의 위상 측정기로 끊임없이 주변 환경을 스캔했다. 녹색 점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가 사라졌다. “보안벽은 이미 우회했고, 다음 코너만 돌면 됩니다.”

    그들이 침투한 곳은 ‘잿빛 달’이라 불리는 버려진 광산 행성에 세워진 제국의 거대한 보급창이었다. 제국은 이 변방의 달에서 나오는 희귀 광물을 채취하기 위해 원주민 행성을 황폐화시켰고,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지자 이곳을 거대한 쓰레기통이자 보급 거점으로 전락시켰다.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라 보안이 허술하다고? 천만에. 제국의 오만함은 그 어떤 요새보다 견고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오만함의 틈을 노렸다.

    두 사람은 마지막 코너를 돌았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원통형 통로였다. 천장까지 닿는 수많은 데이터 서버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고, 그 사이를 수십 개의 광섬유 케이블이 마치 신경망처럼 얽혀 있었다. 목적은 저 가장 안쪽에 있는 중앙 데이터 코어.

    “젠장, 저긴 정전이 아니잖아!” 카인이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의 위상 측정기에 갑자기 붉은 점들이 번개처럼 깜빡였다. “감지 필드가 활성화됐습니다! 제기랄, 누군가 수동으로 복구시켰나 봐요!”

    세린은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제국군은 전력을 아낀답시고 이런 변방 기지에서는 동력 흐름이 불규칙했다. 하지만 감지 필드가 재활성화되었다면, 상황은 최악이었다. 정지장 보행기는 은신에는 탁월했지만, 감지 필드를 통과하는 순간 그들의 미약한 에너지는 마치 불꽃처럼 폭발하며 위치를 노출시킬 터였다.

    “시간 없어.” 세린은 망설임 없이 허리춤에서 작은 EMP 수류탄을 꺼냈다. 제국군의 표준 장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조악한 수제 폭탄이었다. 껍데기는 폐기된 드론의 부품, 내부는 재활용된 배터리와 불법 개조된 코일. 하지만 이 작은 폭탄 하나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세린! 저걸로 저걸 다 날릴 생각입니까? 코어까지?” 카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딱 3초만.” 그녀는 EMP 수류탄의 조작부를 빠르게 만졌다. “저 가장 바깥쪽 데이터 서버를 봐. 낡아서 연결선이 불안정해. 거기만 노린다.”

    그녀는 수류탄을 들어 올렸다. 조준경조차 없는 허술한 장비였지만, 세린의 시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마치 수십 년을 기다린 사냥꾼처럼, 그녀의 몸은 완벽하게 정지했다. 그리고, 던졌다.

    쉬이이익-

    수류탄은 공기를 가르며 정확히 목표물, 즉 가장자리에 위치한 낡은 데이터 서버의 하단부 연결 케이블에 명중했다.

    **쿠우웅!**

    강력한 전자기 충격파가 복도를 뒤흔들었다. EMP의 충격은 주변의 모든 전자기기를 잠시 마비시켰다. 낡은 서버는 비명을 지르며 전원부가 폭발했고, 연결되어 있던 감지 필드도 일순간 꺼졌다. 하지만 제국이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불과 1초 만에 비상 전원이 가동되며 서버의 보조 전원과 감지 필드가 다시 불안정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2초 남았습니다!” 카인이 외쳤다.

    세린은 EMP 수류탄이 터진 순간을 놓치지 않고 전력 질주했다. 그녀의 몸놀림은 유성처럼 빨랐다. 감지 필드가 다시 완전히 켜지기 직전, 그녀는 간발의 차이로 감지 필드 영역을 통과했다. 이제 그들의 위치는 안전했다. 적어도 지금은.

    “미쳤군요, 당신!” 카인은 세린을 따라 감지 필드를 통과하며 숨을 헐떡였다. “저라면 평생 생각도 못 했을 겁니다!”

    “생각할 시간조차 없었어.” 세린은 이미 중앙 데이터 코어 앞으로 다가서 있었다. 그녀는 허리춤에서 특수 제작된 데이터 스크램블러를 꺼냈다. 작은 USB 형태의 장치였다. “이거 꽂고, 카인, 네가 접속해. 놈들의 통신망을 통해 제국 함대의 보급선을 추적해야 해. 잿빛 달에서 출항하는 모든 화물선의 목적지, 운송 품목, 그리고 가장 중요한 빈틈.”

    카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가리킨 포트에 스크램블러를 삽입했다. 그의 손가락이 홀로 키보드 위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초고속으로 암호가 해독되고, 제국의 보안 시스템이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카인은 반란군 최고의 해커였다. 어렸을 때부터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뒷골목에서 코드를 만지작거리던 재능은, 이제 은하계에서 가장 거대한 권력에 맞서는 칼날이 되었다.

    “제국 함대 ‘정의의 심판’ 호의 보급선 경로가 잡혔습니다! 행성 ‘오리온’으로 가는 중입니다. 화물은… 젠장, 식량 보급선이 아닙니다. 희귀 광물과… 병기 부품? 오리온은 제국군 주둔지가 아닌데…” 카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이거, 뭔가 이상합니다.”

    “뭔데?” 세린은 주위를 경계하며 물었다.

    “오리온 성계는 과거 반란군 요새가 있었던 곳입니다. 제국은 몇 년 전에 그곳을 완전히 파괴했다고 발표했죠. 그런데 병기 부품을 그곳으로 보낸다니…” 카인의 눈이 번뜩였다. “놈들이 뭔가 꾸미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광물 데이터… 이 광물은 ‘그림자 수정’이라고 불리는 겁니다. 제국군의 신형 무기에 쓰인다는 소문이 돌았던… ‘성간 분쇄포’ 말입니다!”

    성간 분쇄포. 단어만으로도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제국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학살 병기. 그들이 이 변방의 보급창에서 신형 무기 부품을 은밀히 운송하고 있었다니.

    “젠장.” 세린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놈들은 단순한 반란의 씨앗을 뽑으려는 게 아니었어. 아예 뿌리째 뽑아버리려 하는군.”

    “데이터 다 받았습니다! 빠져나가야 합니다, 세린!”

    갑자기 저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제국군의 순찰대였다. 그들의 통신망에서 미세한 잡음이 들려왔다. EMP 폭발로 인한 일시적인 혼란이 수습된 모양이었다.

    “왔군.” 세린은 스크램블러를 뽑아 카인에게 건네받으며 몸을 돌렸다. “카인, 후방은 네게 맡긴다. 난 코어를 정리한다.”

    “알겠습니다!” 카인은 재빨리 은폐장치를 활성화하며 뒷걸음질 쳤다.

    세린은 중앙 데이터 코어에 설치된 자폭 장치를 활성화했다. “놈들에게 줄 선물이 너무 많아.”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돌아서서 카인이 도망친 통로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쾅! 쾅! 쾅!

    제국군 순찰대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들의 전술 슈트가 내는 중후한 기계음이 복도를 가득 채웠다.

    “이쪽이다! 누군가 침입했다! 감지 필드 이상!”

    세린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직 앞만 보고 달렸다. 그녀의 눈앞에는 끝없이 펼쳐진 암흑의 우주가, 그리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하나의 별, ‘희망’이 있었다. 잿빛 달은 불타오를 것이고, 그 불길은 제국의 심장에 닿을 것이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우리 평민들의 반란은 이제, 진짜 막을 올리는 참이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젠장, 또 여기야.”

    하준은 푸석한 흙먼지가 입안 가득 맴도는 감각에 인상을 찌푸렸다. 찢어진 옷자락이 마른 피부를 스쳤다.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어제와 다름없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뼈대만 남은 빌딩들이 마치 거대한 비석처럼 꽂혀 있었다. 먼지바람이 윙윙거리는 소리만이 유일한 배경음악이었다.

    그는 옆구리에 찬 낡은 장치를 만졌다. 손바닥만 한 철제 큐브. 어설프게 덕지덕지 붙은 전선들과 금이 간 액정. 하준을 이 지옥 같은 미래로 떨궈 놓은 원흉이자, 동시에 유일한 희망이었다. ‘시간 이동 장치’라고 불리던 이 물건은 그를 200년 후의 세상으로 던져 놓았다. 문명은 사라지고, 인류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다.

    “벌써 세 번째 기상인가.” 하준은 중얼거렸다. 처음엔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지만, 이제는 절망조차 사치였다. 살아남아야 했다. 그게 이 미친 시간 여행의 유일한 규칙이었다.

    목마름이 턱을 긁었다. 어제 겨우 찾아낸 녹슨 수도관은 더 이상 물을 내어주지 않았다. 이제 이동해야 했다. 그는 배낭을 고쳐 맸다. 내용물은 단출했다. 작은 삽, 식칼, 낡은 천 조각, 그리고 간신히 모은 말린 풀뿌리 몇 개.

    하준은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질렀다. 거리는 온통 무너진 잔해와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로 뒤덮여 있었다. 가끔 녹슨 자동차의 앙상한 차체만이 과거의 영광을 암시할 뿐이었다. 햇빛은 뜨거웠지만, 공기는 이상하게도 싸늘했다. 아마도 산소 농도가 희박해진 탓이리라.

    “어디, 괜찮은 곳 없나.”

    그의 눈은 끊임없이 주변을 탐색했다. 물. 식량. 그리고 밤을 보낼 안전한 장소. 이 세 가지가 그의 생존 공식이었다. 그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거대한 돔형 건물에 닿았다. 과거의 기술 박람회장이었을까.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지만, 철골 구조는 비교적 온전해 보였다. 저곳이라면… 물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 쓸모없는 장치가 반응할 만한 어떤 에너지를.

    걷는 동안 그는 조심스럽게 발소리를 죽였다. 이 폐허에는 그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님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간혹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 혹은 금속이 부딪히는 불쾌한 소리가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돔 건물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잔해들은 더욱 기괴한 형태로 변해 있었다. 열에 녹아내린 듯한 금속 기둥, 알 수 없는 물질로 뒤덮인 벽들. 어쩌면 이 도시를 파괴한 것이 자연재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섬뜩한 생각이 스쳤다.

    건물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는 거대한 틈새처럼 벌어져 있었다.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곰팡이 냄새와 함께 희미한 기계 냄새가 났다.

    하준은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신발 밑에서 밟히는 파편들이 으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시야는 점차 익숙한 어둠에 적응해갔다. 드넓은 홀 안에는 부서진 전시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깨진 홀로그램 장치, 반쯤 타버린 로봇의 잔해.

    그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깔린 울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하준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본능적으로 배낭에서 식칼을 꺼내 들었다. 녹슬었지만 날카로웠다.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이 번뜩였다. 크고, 불길하게 빛나는 눈. 그것은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짐승이었다. 몸은 마치 강철 조각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 듯했고, 등에는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 있었다. 녀석의 입에서 검붉은 침이 뚝뚝 떨어졌다. 변이된 짐승이었다. 이 폐허의 진정한 지배자들 중 하나.

    “젠장…” 하준은 숨을 멈췄다. 녀석은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놀랍도록 민첩하게 움직였다.
    짐승이 공격 자세를 취하는 순간, 하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던졌다. 날카로운 발톱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훑고 지나갔다. 콘크리트 바닥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하준은 식칼을 꽉 쥐었다.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어디로? 이 거대한 홀은 사방이 막혀 있었다. 녀석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그의 눈이 재빨리 주변을 스캔했다. 부서진 구조물들, 쓰러진 기둥들… 그때,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홀 한가운데, 아직 쓰러지지 않은 거대한 제어판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위에는 섬광처럼 깜빡이는 불빛이 있었다. 전력? 아직 살아있는 시스템?

    “크아아악!” 짐승이 다시 한번 덤벼들었다. 이번엔 더욱 격렬하게.

    하준은 이를 악물었다. ‘저곳이야. 저곳으로 가야 해.’
    그는 식칼을 휘둘러 녀석의 주의를 끌었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짐승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 하준은 온 힘을 다해 제어판을 향해 달렸다.

    육중한 몸이 그의 뒤를 쫓았다. 발소리가 홀을 뒤흔들었다. 거의 다 왔다. 제어판까지 불과 몇 걸음.
    그때, 짐승이 전력을 다해 점프했다. 하준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하준은 마지막 순간, 몸을 날려 제어판 옆으로 구르면서 동시에 손에 든 칼을 휘둘렀다.

    ‘제발!’

    칼날이 짐승의 옆구리를 스쳤다. 강철 같은 피부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지만, 녀석의 균형을 잠시 흐트러뜨리는 데는 성공했다. 짐승은 으르렁거리며 바닥에 착지했다.

    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제어판에 기대섰다. 손바닥으로 버튼이 박힌 표면을 더듬었다. 여러 개의 버튼 중, 유독 하나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비상 전력? 통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이거… 작동하는 건가?”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빛나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홀 전체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붉은 경고등이 번뜩였다. 동시에, 제어판 주변의 바닥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녀석은 경고음에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뭐… 뭐야!”

    갈라진 바닥 틈새로 뜨거운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강렬한 전자기 충격파가 온몸을 강타했다. 하준의 옆구리에 찬 시간 이동 장치가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액정의 금이 더 깊어졌다.

    짐승이 고통스러운 울음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섰다. 충격파가 녀석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았다.

    하준은 강렬한 충격파 속에서 겨우 몸을 지탱했다. 그의 시간 이동 장치는 이제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눈앞이 흐릿해지고,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

    “안 돼! 아직은…!” 그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직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아직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은 빛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폐허가 된 홀, 발악하는 짐승의 모습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압도적인 시공간의 뒤틀림 속에서, 하준은 의식을 잃었다.

    ***

    “으윽…”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에 몸이 부딪히는 충격에 하준은 신음하며 눈을 떴다.
    폐허가 된 돔 건물. 어둠 속에서 짐승의 붉은 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크르르르…”

    귀에 익숙한 울음소리.

    ‘설마… 다시?’
    하준은 옆구리의 장치를 확인했다. 금이 더 깊어진 액정. 하지만 여전히 깜빡이는 작은 불빛.
    시간이동 장치는 그를 또 다른 시간으로 데려다 놓은 것이 아니라, 고작 수 분 전의 과거로 되돌려 놓았을 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 더 전일 수도. 짐승의 자세는 그가 버튼을 누르기 직전의 모습과 똑같았다.

    “젠장, 미쳤군.” 그는 허탈하게 웃었다.
    이것은 반복이었다. 생존을 위한 발버둥,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장치의 오작동.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그는 짐승의 붉은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번엔 버튼을 누르는 대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 이 정도 반복은 익숙해.”
    하준은 식칼을 고쳐 쥐었다. 입가에 비장한 미소가 번졌다.

    “이번엔, 네가 아니라 내가 먼저 움직인다.”

    그의 눈빛이 살아났다. 폐허 속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새로운 전투의 시작이었다. 매 순간이 생존이었고,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