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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밤의 이웃> – 제1화: “낯선 침입자”

    **장르:**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핵심 줄거리:** 현대 도시의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기괴한 폴터가이스트 현상.

    **[장면 1]**

    **장면 배경:** 햇살이 길게 비스듬히 쏟아져 들어오는, 이수아의 아파트 거실. 막 정리된 듯 깔끔한 원룸 오피스텔이다. 창밖으로는 빼곡한 도시의 빌딩 숲이 보인다. 평범하고 고요한 오후.

    **수아:** (20대 후반, 프리랜서 디자이너)
    * 편안한 홈웨어 차림으로 거실 중앙 테이블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 머리를 한 번 쓸어 올리고, 따뜻한 커피 한 모금을 마신다.
    * 작업에 몰두한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다가, 이내 만족스러운 듯 살짝 미소 짓는다.

    **지문:**
    * 테이블 위에는 커피잔, 노트북, 무선 마우스, 그리고 다 마신 생수병 하나가 놓여 있다.
    * 수아가 커피잔을 내려놓는 순간, 그녀의 시야 밖에서 생수병이 아주 미세하게, 스르륵, 테이블 위를 몇 밀리미터 미끄러진다.
    * 그 움직임은 너무나 작아서, 수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내레이션:**
    그것은 아주 사소한 균열이었다.
    평범한 오후의 나른함 속에 숨겨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흔들림.
    수아는 몰랐다.
    이 고요한 일상이, 이제는 더 이상 그녀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장면 2]**

    **장면 배경:** 밤, 수아의 아파트 주방. 은은한 조명 아래, 혼자 저녁을 준비하는 수아의 뒷모습이 보인다.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고, 그 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온다.

    **수아:**
    * 냉장고 문을 열고 내용물을 살피고 있다.
    * 곧 저녁 식사 재료를 꺼낸다. 고기, 채소, 소스 등을 꺼내어 조리대 위에 놓는다.
    * 냉장고 문을 닫으려고 손을 떼는 순간.

    **지문:**
    * 수아가 냉장고 문에서 손을 뗀 후,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다가, ‘딸깍’ 하고 저절로 완벽하게 닫힌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밀어준 것처럼.
    * 수아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린다.

    **수아:**
    “문이 덜 닫혔나? 잠결에 예민해지네, 괜히.”
    (혼잣말을 하며 어깨를 으쓱인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표정.)

    **내레이션:**
    그저 ‘덜 닫혔던 것’으로 치부해버린 순간.
    하지만 어딘가 찜찜한 기분이 그녀의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점점 더, 일상의 빈틈 사이로 스며드는 낯선 감각들.

    **[장면 3]**

    **장면 배경:** 며칠 후, 새벽녘. 수아의 침실. 커튼 사이로 여명이 스며들어 방을 희미하게 밝힌다. 침대 위에 곤히 잠들어 있던 수아가 뒤척이며 눈을 뜬다.

    **수아:**
    * 잠에서 깨어나 눈을 비빈다.
    * 늘 그렇듯, 협탁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찾으려 손을 뻗는다.
    * 그런데 손이 닿지 않는다. 눈을 크게 뜨고 협탁을 바라본다.
    * 핸드폰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 빈 유리컵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자, 핸드폰이 침대 아래 바닥에 떨어져 있다.

    **수아:**
    “이게 왜… 여기에 있어? 어제 분명 여기에 뒀는데.”
    (미간을 찌푸리며 핸드폰을 주워든다. 액정에는 금이 가 있다.)
    “어휴, 진짜… 또 떨어뜨렸나?”
    (떨어진 곳을 바라본다. 침대 협탁에서 꽤 멀리 떨어져 있다.)
    (왠지 모를 불쾌감에 몸을 움츠린다.)

    **내레이션:**
    ‘떨어뜨렸다’기에는 너무 멀었다.
    누군가 ‘던진 것’처럼.
    불길한 기시감.
    점점 더 분명해지는, 이 집 안의 ‘무엇’.

    **[장면 4]**

    **장면 배경:** 낮, 수아의 거실. 수아는 음악을 틀어놓고 청소를 하고 있다. 평소보다 더 꼼꼼하게,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수아:**
    * 진공청소기를 돌리고, 먼지를 닦고, 정리를 한다.
    * 책장 앞에서 먼지를 털다가 멈칫한다.
    * 책장에 꽂혀있던 몇 권의 책이 거꾸로 꽂혀 있거나, 제목이 보이지 않게 뒤집혀 있다. 심지어 장르가 다른 책 사이에 엉뚱하게 끼어 있는 책도 있다.
    * 수아는 멍하니 그 책들을 바라본다.
    * 이내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고, 표정이 굳어진다.

    **수아:**
    “…이거, 뭐지?”
    (작게 중얼거린다.)
    “내가 이렇게 꽂았을 리 없어.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두리번거리며 방 안을 살핀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시선은 불안하게 흔들린다.)
    “누가… 누가 장난치는 거야? 설마, 도둑이라도…?”
    (불안감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주변을 살피는 눈빛에 경계심이 가득하다.)

    **내레이션:**
    더 이상 ‘착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일들.
    명백한 ‘변화’.
    누군가 이 집 안에 발을 들여놓았고,
    그리고, 그것은 수아의 일상을, 잠식하고 있었다.

    **[장면 5]**

    **장면 배경:** 한밤중, 수아의 아파트. 모든 불이 꺼져 있고, 노트북 화면의 푸른빛만이 거실을 희미하게 밝히고 있다. 공포스러운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수아는 잔뜩 겁에 질린 채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

    **수아:**
    *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 안고 잔뜩 웅크린 자세로 노트북을 응시하고 있다.
    * 검색창에는 ‘폴터가이스트 현상’, ‘귀신 들린 집’ 같은 단어들이 떠 있다.
    * 눈은 충혈되어 있고, 얼굴에는 공포와 피곤함이 뒤섞여 있다.
    * 미동도 없이 화면만 응시하다가, 결국 노트북을 닫아버린다.
    * 고개를 파묻고 심호흡을 한다.

    **지문:**
    * 그 순간, 주방 쪽에서 ‘와장창!!!’ 하고 유리 접시가 깨지는 굉음이 터져 나온다.
    * 어둠 속에서 그 소리는 유난히 날카롭고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 수아의 몸이 경련하듯 튀어 오르고,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온다.

    **수아:**
    “히이이이익!! 뭐… 뭐야! 뭐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겨우 핸드폰을 붙잡고 플래시를 켠다. 주방 쪽으로 희미한 빛을 비춘다.)

    **[장면 6]**

    **장면 배경:** 어둠에 잠긴 수아의 주방. 바닥에는 깨진 접시 파편들이 흩어져 있고, 그 위로 핸드폰 플래시의 희미한 빛이 떨리고 있다.

    **수아:**
    * 주방 입구에 서서 핸드폰 플래시를 비추고 있다.
    * 공포에 질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 온몸이 떨리고 있다.
    * 입은 떡 벌어져 있고,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다.
    * 산산조각 난 접시 파편들을 보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 한다.

    **지문:**
    * 바로 그 순간, 수아의 등 뒤, 냉장고 문이 ‘쾅!!!!’ 하고 닫히는 굉음이 울려 퍼진다.
    * 동시에,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이 ‘콸콸콸콸콸!!!!’ 하고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 어둠 속에서 들리는 물소리는 마치 울부짖는 듯하다.
    * 수아는 주저앉으려던 자세에서 완전히 주저앉아 버린다.
    * 핸드폰 플래시가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방 안은 다시 깊은 어둠에 잠긴다.
    * 오직 수도꼭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소리만이 섬뜩하게 울려 퍼진다.

    **수아:**
    (목구멍에서 제대로 된 소리도 나오지 않고, ‘흐읍… 끄흐읍…’ 하는 숨 넘어가는 소리만 낸다.)
    (눈에서는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온몸이 경련한다.)

    **내레이션:**
    그것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집 안에, 수아의 바로 곁에,
    명백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장면 7]**

    **장면 배경:** 다시 수아의 거실. 어둠 속에서 수아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공포에 질려 현관문 쪽으로 기어간다. 모든 것이 망가진 이 집에서, 오직 탈출만이 살길이다.

    **수아:**
    * 눈은 공포로 가득하고,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있다.
    * 경련하는 팔다리로 겨우 몸을 일으켜 현관문 쪽으로 몸을 이끈다.
    * “나가야 해… 나가야만 해…” (속으로 되뇌인다.)

    **지문:**
    * 현관문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현관문 잠금장치에서 ‘철컥, 철컥, 철컥’ 하고 세 번 소리가 난다.
    * 수아는 공포에 질려 움직임을 멈춘다. 그 소리는 마치 누가 안에서 문을 열려고 하는 듯하다.
    * 그리고, 잠금장치가 완전히 풀리는 소리와 함께, ‘끼이이이익…’ 하고 현관문이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한다.
    *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보이는 복도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복도 저 끝, 엘리베이터 쪽에서부터 희미하게, 마치 누군가 속삭이는 듯한 알 수 없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수아:**
    (열리는 문틈 너머의 어둠을, 경악과 절망이 뒤섞인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본다.)
    (입은 쩍 벌어져 있지만, 어떤 비명도, 소리도 내지 못한다. 온몸의 기능이 마비된 듯하다.)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완벽한 지옥의 풍경이었다.)

    **내레이션:**
    그것은, 수아의 가장 안전한 공간이자 전부였던 이 아파트를,
    완벽하게 집어삼켰다.
    이제 그녀는,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다.

    **[에피소드 종료]**

  • 크툴루 신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밤하늘은 언제나 그랬다. 영겁의 시간 동안 변치 않는 검은 천막 아래, 수십억 개의 별들이 차가운 빛을 뿌리는 영원한 고독. 인류가 이 광대한 우주에서 길을 잃은 지 수 세기가 흘렀지만, 이 막막한 공허함은 여전히 모든 탐사선의 심장을 짓누르는 절대적인 무게였다.

    새벽녘 호의 함교는 그런 우주의 무게를 잠시 잊게 할 만큼 아늑하고 기능적이었다. 미색의 패널과 부드러운 간접 조명은 오랜 항해로 지친 승무원들의 눈을 편안하게 했고, 미묘한 엔진의 진동은 멀고 먼 고향 행성에서의 생활을 상기시키는 유일한 생명이었다.

    “함장님, 여섯 번째 우주 주기 보고서입니다. 특이 사항은 없습니다.”

    항해사 김민준이 손에 들린 데이터 패드를 내밀었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건조했다. 함장 엘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패드를 받아 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면의 주 모니터에 박혀 있었다. 모니터에는 끝없이 펼쳐진 성간 먼지와 아득히 멀리 보이는 이름 없는 성운의 희미한 윤곽이 떠 있었다.

    “항상 특이 사항이 없는 게 특이 사항이지, 민준 씨.” 엘레나가 피식 웃었다. “이 드넓은 우주에서 대체 우리는 뭘 찾아다니는 걸까.”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선임 과학자 박선우가 엷은 미소를 지었다.

    “호기심이죠, 함장님. 미지의 것에 대한 인류의 영원한 갈증.” 그는 모니터에 떠 있는 성운을 응시하며 읊조렸다. “아니면 어쩌면… 그저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한 증명일지도요.”

    그 순간, 함교를 가득 채우던 낮은 엔진음 위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삑- 삑- 삑- 비정상 에너지 패턴 감지.**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항해 콘솔로 향했다. 김민준의 얼굴에서 평온함이 사라졌다. 그의 손놀림이 다급해졌다.

    “이게… 무슨…?” 그는 중얼거렸다. “함장님, 방금 전방 0.5광초 지점에서 극도로 이례적인 에너지 패턴이 감지되었습니다. 저희 탐사선이 감지할 수 있는 어떤 알려진 에너지원과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자연 현상도 아니고요.”

    엘레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작동 가능성은?”

    “재확인했습니다. 센서 시스템은 완벽합니다. 허상도 아니고요.” 김민준의 눈은 주 모니터의 데이터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 “계속해서… 심화되고 있습니다. 이건 마치… 뭔가가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박선우의 눈빛에 과학자 특유의 흥미가 번뜩였다. 그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패턴의 파형과 주파수 분석 결과를 볼 수 있을까요, 김민준 씨?”

    “잠시만요… 송출 중입니다.”

    박선우의 개인 콘솔에 알 수 없는 그래프들이 빠르게 그려졌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이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형태입니다. 어떤 물리학적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어요. 마치… 모든 것을 거스르는 듯한.”

    엘레나는 잠시 침묵했다. 수백 년에 걸친 인류의 우주 탐사 역사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수없이 많았고, 그중 대부분은 재앙으로 끝났다. 그러나 탐사선은 미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존재했다.

    “진행 방향 재조정.” 엘레나가 단호하게 명령했다. “접근합니다. 안전 거리 유지하면서 대상의 정체를 파악한다. 이진호 기관장, 비상 동력 계통 가동 준비하고, 전투 태세는 아니지만 언제든 대응할 수 있도록 대비해.”

    선체 깊은 곳에서 육중한 금속음이 울리며 기관장 이진호의 목소리가 통신망을 타고 들어왔다.

    “알겠습니다, 함장님. 비상 동력 계통 준비 완료. 이런 우주에서 또 뭘 찾아내시는 건지 모르겠지만… 늘 하던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의 목소리에는 미묘한 피로와 체념이 섞여 있었다.

    새벽녘 호는 거대한 몸체를 틀어 미지의 에너지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주 모니터에는 이제 희미한 점 하나가 불안하게 깜빡였다.

    시간은 한참 흘렀다. 우주의 고요는 더욱 깊어진 듯했고, 새벽녘 호의 모든 승무원들은 숨을 죽인 채 다가오는 미지의 존재를 기다렸다.

    마침내, 김민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육안 확인 가능합니다, 함장님. 주 모니터에 띄우겠습니다.”

    화면이 전환되자, 함교의 모든 이들은 숨을 헙 들이켰다.

    그곳에는 별이 없었다. 행성도, 성운도, 심지어 일반적인 소행성이나 우주 잔해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 떠 있는 것은, 차가운 암흑 속에 홀로 고고하게 빛을 흡수하는 듯한 거대한 형체였다.

    “맙소사…” 박선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어떤 기하학적인 도형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웠다. 검은색도 아니고, 회색도 아니었다. 단지 그 존재 자체로 빛을 무효화시키는 듯한, 절대적인 암흑의 덩어리였다. 불가능한 각도로 꺾이고 뒤틀린 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표면에는 고대 상형문자처럼 보이는, 그러나 인류가 아는 어떤 문자 체계와도 다른 무늬들이 희미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 무늬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는 각도에 따라 미묘하게 변하는 착시 현상을 일으켰다.

    “크기 측정 결과, 약 500미터… 함장님, 이 물체는 어떤 금속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캔 센서가 뚫리지 않습니다. 모든 스캔이 표면에서 반사되거나 흡수됩니다.” 김민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외심과 혼란이 섞여 있었다.

    엘레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그녀는 평생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인류가 탐사해 온 모든 외계 문명의 잔해들 중, 이토록 철저히 ‘외계적’인 것은 없었다.

    “접근 속도… 줄입니다. 초저속으로 대상 주변을 공전하며 관찰해.” 엘레나가 간신히 명령했다. 그녀의 눈은 스크린 속의 기괴한 형체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새벽녘 호는 거대한 유물을 중심으로 느릿하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그 기이한 형태는 더욱 선명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표면의 기하학적 무늬들은 이제 더욱 또렷해졌고, 마치 무언가 알 수 없는 의미를 속삭이는 듯했다.

    박선우는 개인 콘솔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손가락은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함장님, 유물의 표면에서 미세한 진동이 감지됩니다. 그것도…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신호일까요? 아니면… 호흡?”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 이것은… 심해에서 발견되는 특정 생명체의 심장 박동과 유사합니다. 그러나 이건… 유물입니다.”

    그때, 함교 전체를 감싸는 미세한 떨림이 시작됐다. 처음에는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했지만, 곧 분명한 진동으로 변했다.

    “함장님, 선체 외부 센서에 이상 신호 감지! 유물에서 방출되는 파장이 우리 함선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김민준이 다급하게 외쳤다.

    엘레나는 진호에게 통신했다. “기관장, 상황 보고해! 내부 시스템 이상 없어?”

    “아직은 괜찮습니다, 함장님. 하지만 에너지 흐름이 불안정합니다. 외부에서 압력이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이건… 마치 함선을 통째로 삼키려는 듯한 느낌입니다.” 이진호의 목소리에는 오랜 경력의 기관장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당혹감이 묻어 있었다.

    갑자기, 주 모니터의 유물 표면에 각인된 문자들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마치 스스로 에너지를 내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광채를 발했다. 그 빛은 차갑고, 동시에 너무나도 고대적이었다.

    그리고 모두의 뇌리에,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가 섬광처럼 스쳤다.

    거대한 바다. 어둠 속에 잠긴 도시. 헤아릴 수 없는 촉수와 날개를 가진 존재들이 심연에서 기어오르는 모습. 그들의 울음소리는 귀가 아닌 정신을 직접 찢어발기는 듯했다.

    “크으윽…!” 박선우가 비명을 지르며 콘솔에서 몸을 떼어냈다. 그의 눈은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엘레나도 두통과 함께 환각에 시달렸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이게… 대체…!”

    김민준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그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비상 탈출 버튼을 향했다.

    그때, 유물에서 뻗어 나온 듯한 푸른빛이 새벽녘 호의 함교 유리에 드리워졌다. 빛은 창문에 닿는 순간 액체처럼 번져나가더니, 이내 유리를 통해 함교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서늘한 기운이 피부에 닿았다.

    그리고 그 빛은,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승무원들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귓가에 들리지 않는 목소리.

    *깨어나라.*

    그것은 언어라기보다 감각에 가까웠다. 존재의 근원을 뒤흔드는 순수한 의지.

    *너희는 잠자는 자를 깨웠으니, 이제 너희의 눈으로 영원의 어둠을 보게 될지어다.*

    엘레나는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손은 격렬하게 떨렸다. 그녀는 눈을 들어 빛이 스며드는 창밖의 유물을 응시했다. 그 검은 유물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우주의 심연에서 깨어난, 이름 없는 존재의 거대한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눈동자가,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새벽녘 호는 이제 더 이상 우주를 탐사하는 배가 아니었다. 놈의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거대한 먹잇감일 뿐이었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 균열의 시작**

    이진우는 눈을 감은 채 익숙한 침대 매트리스의 푹신함을 느끼고 있었다. 길고 지루했던 하루의 끝. 쨍한 형광등 아래에서 숫자와 씨름하다 겨우 탈출한 참이었다. 옆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나지막이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유로운 주말 밤. 도시의 소음은 20층 높이까지는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 창밖은 검푸른 어둠 속에 점점이 박힌 불빛들로 가득했다. 그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고층 아파트의 한 조각이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적어도, 그 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으음…….”

    나른한 한숨과 함께 뒤척였다. 딱히 잠이 오진 않았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였다.

    딸깍.

    아주 작고 미세한 소리. 너무 작아서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이진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신경은 이미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딸깍.

    이번엔 좀 더 선명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이 저절로 굴러 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은 건전지 덮개가 살짝 열려 있었다.

    “뭐야, 헛것을 봤나?”

    그는 피식 웃으며 리모컨을 주워 제자리에 놓았다. 낡은 물건이라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 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벽 두 시쯤이었을까. 잠이 들락말락 하던 찰나,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 이진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침입자? 강도?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어둠 속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작은 스탠드 조명을 켰다. 은은한 불빛이 집안을 밝혔다.

    주방은 멀쩡했다. 깨진 유리 조각도, 엎어진 물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젠장, 꿈인가?”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히 들었는데. 그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겨우 잠을 청했다.

    며칠이 지났다. 이진우의 아파트는 점점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가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매번 똑바로 맞춰놓아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려 있는 날도 있었다. 처음엔 자기가 대충 닫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 연속 같은 일이 반복되자,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가장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 소리였다.

    삐걱. 삐그덕. 덜컥.

    마치 낡은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밤마다 벽 속에서, 혹은 천장 위에서 들려왔다. 단순한 건물 노후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규칙적이었다. 어떤 때는 마치 금속이 무언가에 갈리는 듯한 긁히는 소리가 들렸고, 또 어떤 때는 낮은 주파수의 웅웅거리는 진동이 온몸을 울렸다.

    “윗집 이사라도 왔나?”

    이진우는 윗집 현관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양옆집도 마찬가지.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었지만, 기계적인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누수나 배관 문제일 수 있습니다. 점검반을 보내보겠습니다.”

    하지만 점검반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배관은 멀쩡했고, 벽에도 균열은 없었다. 이진우는 점점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피곤함은 극에 달했지만, 밤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날 밤, 모든 것이 폭발했다.

    이진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어김없이 벽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강렬했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콰앙!

    갑작스러운 굉음.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오래된 금속 스탠드 조명이 쓰러지며 테이블에 부딪혔다. 거친 충격음과 함께 전구가 박살 났다. 어둠 속에서 이진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뭐야…! 누가… 누구야!”

    그는 소리쳤다. 아무도 없었다. 방 안은 그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마저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

    철컥!

    이번엔 현관문 잠금장치가 스스로 열리는 소리였다. 이진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현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칠흑 같은 복도의 어둠이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주방에서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앙! 쾅! 쾅! 콰아앙!

    마치 냉장고가 통째로 뽑혀 나가는 듯한 굉음이었다. 금속이 뒤틀리고 부서지는 소리, 거대한 기어가 맞물리는 듯한 삐걱거림, 그리고 무언가가 바닥을 긁으며 끌려가는 듯한 마찰음까지. 평범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육중하고 기계적인 소음이었다.

    이진우는 공포에 질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주방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음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냉장고가 저절로 움직여 주방 한가운데로 끌려 나왔다. 그 육중한 몸체가 바닥을 긁으며 찢어발겼다. 냉장고 뒤쪽 벽면이, 마치 내부에 갇힌 무언가에 의해 뜯겨 나가는 것처럼, 거친 파열음을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속 패널들이 찢겨지고, 콘크리트 가루가 흩날렸다.

    크윽! 끄으으윽!

    벽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제는 숨 쉬는 듯한, 혹은 거대한 짐승이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갈라진 벽 틈새로, 붉고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일초, 이초, 삼초. 짧고 강렬한 빛이 반복적으로 벽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일반적인 전기 스파크와는 달랐다. 마치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열기처럼, 벽 틈새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빛이 터져 나올 때마다, 집 안의 모든 전등이 번쩍이며 깜빡였다.

    이진우는 이제 더 이상 공포에만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호기심이 피어났다.

    이건 단순한 유령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지금 그의 벽 속에서 부활하고 있었다.

    “…나와.”

    이진우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부서지는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젠장, 대체 너는… 정체가 뭐야.”

    다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의 아파트, 그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균열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미지의 존재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 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우주선 ‘밤안개호’의 낡은 조종석은 오늘도 삐걱거렸다. 진은 닳고 닳은 가죽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우주 진공 너머로 펼쳐진 무한한 어둠을 응시했다. 밤안개호는 그의 유일한 친구이자 재산이었다. 낡았지만, 기묘하게 신뢰할 수 있는 이 작은 우주선은 그를 수많은 위험에서 구해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잊힌 항로, 일명 ‘망자의 길’을 헤매는 것도 벌써 열흘째. 기름통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고, 스캐너는 고철 몇 조각 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젠장, 오늘도 꽝이군.”

    진은 나직이 중얼거리며 낡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수익은커녕, 식량조차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그는 한때 번성했던 고대 문명의 잔해가 가득한 이 구역에서 한몫 잡으려 했지만, 그의 운은 늘 비켜갔다.

    그때, 함선 전체를 흔드는 듯한 진동과 함께 스캐너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뭐야? 또 고장 났나?”

    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리며 화면을 확인했다. 익숙한 고철 덩어리들의 신호가 아니었다. 거대한, 압도적인 규모의 미확인 물체가 레이더에 잡혔다. 그것은 마치 산맥처럼 거대했고, 수십만 년 동안 우주를 떠돌았던 것처럼 보였다. 밤안개호의 스캐너가 감지하는 에너지 파동은 기묘했다. 일반적인 기계 에너지나 생명체의 신호와는 전혀 달랐다. 정적이면서도, 강력한 무언가가 그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 꿈틀거리는 듯했다.

    “이건… 대체 뭐야?”

    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망자의 길에서 이런 규모의 잔해를 발견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이 정도로 온전하게 유지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는 잠시 망설였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해적의 함정이거나, 미지의 고대 병기가 잠들어 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주머니 사정은 망설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좋아, 한 번 가보지 뭐.”

    그는 밤안개호의 스러스터를 최대로 가동하고, 거대한 물체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가까이 갈수록 그 크기는 더욱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검은 금속으로 뒤덮인 거대한 우주선이었다. 아니, 우주선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도 유기적인 형상이었다. 거대한 짐승의 뼈대 같기도, 파도가 빚어낸 거대한 산맥 같기도 했다. 표면은 수십억 년의 우주 풍화작용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끄럽고 견고해 보였다.

    진은 밤안개호를 조심스럽게 착륙시켰다. 착륙 지점은 거대한 함선의 갈라진 틈 사이였다. 외부 공기 차단막이 닫히자, 그는 산소마스크를 착용하고 낡은 블래스터를 챙겼다. 랜턴을 켜자, 어둠 속에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여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내부는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금속 벽은 섬세한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공기는 놀랍도록 깨끗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자, 고대 문명의 흔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새겨진 비문들, 기묘한 형태로 빛나는 에너지 패널들, 그리고 심장을 울리는 듯한 저음의 공명.

    진은 복도 끝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거대한 원형 문이 있었다. 문양을 따라 손을 대자, 희미한 빛이 터져 나오며 문이 천천히 열렸다. 안쪽에는 압도적인 기운이 진을 반겼다.

    중앙에는 거대한 수정 기둥이 있었다. 그것은 우주의 모든 별빛을 응축한 듯한 영롱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기둥 주변에는 기묘한 문자들이 떠다니고 있었고, 그 문자들은 끊임없이 변형하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냈다. 마법? 과학? 진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세상에….”

    그는 숨을 들이켰다. 수정 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는 그의 심장을 직접 어루만지는 듯했다.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그는 천천히 기둥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자, 수정 표면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수십만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그의 손길을 기다린 것처럼.

    그의 손이 수정에 닿는 순간, 거대한 에너지가 그의 몸을 관통했다. 푸른빛이 그의 시야를 집어삼켰고, 우주의 모든 소리가 그의 귀에 쏟아져 들어오는 듯했다. 그는 수억 년의 시간, 별들의 탄생과 소멸, 은하의 흐름, 그리고 헤아릴 수 없는 존재들의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단순히 정보의 흐름이 아니었다. 존재의 근원, 우주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이 그의 정신 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진은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의 몸은 공중으로 떠올랐고, 주위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손끝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 빛은 그의 의지에 따라 형상을 바꾸고, 주변의 고대 장치들을 희미하게나마 재가동시키는 듯했다.

    “이게… 무슨…?”

    혼란 속에서, 그는 자신의 의지 하나로 주위의 잔해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 낡은 금속 조각들이 공중으로 떠오르고, 부서진 회로들이 다시 연결되는 듯한 환상. 그것은 마법이었다. 물리법칙을 무시하고, 존재의 형태를 바꾸는 순수한 힘. 고대의 숨겨진 마법의 힘이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 순간, 거대한 함선 전체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긴 잠에서 깨어난 거수가 울부짖는 듯한 진동이 진의 온몸을 때렸다. 경보음이 울리고, 사방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망할! 뭘 건드린 거야!”

    진은 공중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은 사라졌지만, 그 힘의 잔상이 그의 몸속에 남아 있었다. 거대한 함선은 서서히 활성화되는 듯했다. 고대 병기가 깨어난 것일까? 아니면 이 힘을 감지한 다른 존재들이 접근하는 것일까?

    밤안개호의 비상 통신 장치가 울렸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낯선 함선의 레이더 신호였다. 대규모 함대였다. 이 망자의 길에서 이토록 많은 함선은 단 한 가지 의미만을 가졌다. 해적.

    “젠장, 이런 타이밍에!”

    진은 수정 기둥을 돌아보았다. 그 푸른빛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이제는 왠지 모르게 불길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물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고, 너무나도 위험했다.

    해적 함선들은 이미 고대 함선 주변으로 포위망을 좁히고 있었다. 그들은 진동하는 이 고대 유물에 담긴 막대한 가치를 눈치챘을 것이다.

    진은 전속력으로 밤안개호가 있는 착륙 지점으로 달려갔다. 고대 함선의 벽 곳곳에서 미지의 에너지 파동이 터져 나왔고, 함선 내부 구조가 불안정하게 변형되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발이 미끄러졌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던 찰나, 그의 손끝에서 다시금 푸른빛이 일렁였다.

    “어?”

    그 빛은 진의 몸을 안정시키고,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마치 그의 의지가 물리적인 힘이 되어 작용한 것처럼. 그는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이 힘은 여전히 그의 안에 있었다. 아직은 서툴고 통제할 수 없지만, 그것은 그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이게… 정말….”

    착륙 지점에 도착하자마자, 밤안개호는 이미 해적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몇몇 소형 전투기들이 밤안개호의 방어막을 뚫으려 애쓰고 있었다. 진은 망설이지 않고 밤안개호에 몸을 던졌다. 조종석에 앉아 엔진 시동을 걸었지만, 이미 방어막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젠장, 도망칠 수 없어!”

    해적들의 함포 사격이 밤안개호의 선체를 강타했다. 조종석 내부에서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그의 정신 속에서 수정 기둥의 이미지가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푸른빛, 그리고 우주의 근원적인 흐름.

    “흐름을… 바꿔봐.”

    그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조종석 패널에 닿았다. 평소라면 복잡한 조작이 필요한 방어막 출력 조절이, 그의 손끝에서 단 한 번의 생각만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부서지기 직전이던 밤안개호의 방어막이 다시금 푸른빛을 내며 강화되었다. 해적들의 포격이 튕겨 나갔다.

    해적들은 당황한 듯 잠시 공격을 멈췄다. 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밤안개호의 스러스터를 최대로 가동하고, 고대 함선의 틈새를 통해 우주로 솟구쳐 올랐다.

    “날 쫓아오시겠다?”

    그는 해적 함대의 레이더 신호를 보았다. 그들은 자신을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진은 미소 지었다. 그의 심장은 두려움과 동시에 묘한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알 수 없는 힘. 이 힘이 무엇인지, 어디까지 쓸 수 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의 삶은 이제 완전히 달라질 터였다.

    그는 밤안개호의 조종간을 움켜쥐었다. 밤안개호는 더 이상 단순한 고철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새로운 시작, 새로운 운명을 실어나르는 배였다. 푸른 별빛이 그의 눈동자에서 반짝였다. 잊힌 항로에서 우연히 발견한 고대의 마법의 힘, 그것은 진의 손에서 비로소 깨어났다. 이제 그는 이 광활한 우주에서 새로운 그림을 그려 나갈 것이다. 어쩌면 그 그림은 은하계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거대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잔향 (殘響)

    강태한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심의 끄트머리, 재개발이 멈춰 선 폐건물 더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허망하게 부유했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냄새가 그의 존재를 주변 풍경에 스며들게 하는 위장막 같았다.

    오늘 밤 그의 먹잇감은 최은혁. 한때 남기현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비서였다. 기현에게 이용당해 태한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데 일조했던 하수인.

    폐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최은혁은 버려진 창고 앞,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낡은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초조함과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입에서는 연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고, 손은 끊임없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누가 봐도 뭔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의 행색이었다.

    태한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저 자식의 잔향이 느껴져. 역겨운 욕망과 비굴함, 그리고… 공포.’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감정, 의지, 행동이 남긴 미묘한 에너지의 파동, 일종의 ‘잔향’. 기현에게 배신당하고 지하 감옥에서 죽음 직전까지 몰렸을 때,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각성된 능력. 그 잔향은 마치 과거의 순간을 재현하는 듯 생생했다. 최은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잔향은 기현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그 뒤에 숨겨진 자신의 안위를 향한 비겁함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남기현. 이름만 떠올려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친구라고? 하찮은 내 존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한 디딤돌로 이용했을 뿐이지.’
    그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기현의 목을 조르기 전에, 그의 손발부터 하나씩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최은혁은 그 시작이었다.

    태한은 옥상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를 유령처럼 미끄러져 내려가, 최은혁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은 그림자보다 가벼웠고, 폐건물의 먼지 하나 흩날리지 않았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감싸 안고, 그의 존재감을 지웠다.

    최은혁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어깨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최은혁.”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둠을 찢고 흘러나왔다.
    최은혁의 몸이 경직됐다. 어깨가 움찔거리고, 손에 쥔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퍼졌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핏기 없는 얼굴이 태한을 향했다. 눈은 공포에 질려 잔뜩 커져 있었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강, 강태한? 설마… 살아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 같았다. 아니, 그에게 태한은 유령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죽었어야 할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태한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섰다. 그의 발소리는 심장을 죄어오는 박자처럼 최은혁의 귀를 때렸다.
    “네가 왜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태한의 눈은 차가운 얼음 같았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불길이 일렁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남 실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진짜로!”
    최은혁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손을 저으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뒤는 담벼락에 막혀 있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절박함이 그의 잔향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몰랐다고? 네가 내 정보를 빼돌려 기현에게 넘겼을 때도? 내가 감금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도?”
    태한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 목소리에는 이젠 분노보다는 싸늘한 경멸만이 가득했다.
    “네 잔향이 말해주는 것과는 너무 다르잖아, 최은혁.”

    최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 잔향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태한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 같은 손아귀에 최은혁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네가 기현을 위해 나를 등쳐먹었던 순간의 비열함이 느껴져. 네가 기현의 권력에 빌붙어 부와 명예를 얻으려 했던 추악한 욕망이 선명하게 보여. 그리고 지금, 네 속에 가득한 이 비겁한 공포까지도.”
    태한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최은혁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최은혁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흐읍… 크윽…!”
    최은혁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태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의 정신을 좀먹는 듯했다. 그의 눈앞에, 마치 홀린 듯 과거의 장면들이 플래시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한의 연구 자료를 USB에 담아 기현에게 건네던 자신의 모습, 기현에게 보상받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자신의 얼굴… 그 모든 잔상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짓말 마… 거짓말 마요…!”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잔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의 감정 잔향을 증폭시켜 고문하는 것이었다.

    “남기현이 다음에 뭘 할지 알고 있지? 내게 뭘 숨기고 있는지도.”
    태한의 목소리가 최은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력.
    최은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포가 그의 혀를 묶어버린 듯했다.

    태한은 그의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최은혁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말해. 남기현이 어디서 뭘 꾸미고 있지?”
    태한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그 빛은 최은혁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흐으윽… 흐… 흥신소… S 흥신소에요… 남 실장님이… 거기로 사람들을 보내서… 강태한 씨를… 찾고 있었어요… 근데… 뭔가 다른 것도 찾는 것 같았어요… 오래된… 어떤… 문서를….”
    최은혁의 입에서 진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저항할 수 없었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뇌 속에서 진실만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문서? 무슨 문서.”
    태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을 찾는 거야 예상했지만, ‘오래된 문서’라니.

    “모, 몰라요… 저한테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냥… 아주 오래된… 연구… 자료 같은 거라고…만….”
    최은혁은 울먹였다. 그의 몸은 이제 자율적으로 떨리는 것을 넘어 경련하기 시작했다.

    태한은 최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잔향 속에서 거짓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오직 순수한 공포와 진실만이 느껴졌다. 최은혁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쏟아낸 듯했다.

    “좋아. 이 정보는 유용했어.”
    태한은 손을 뗐다. 최은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축 늘어진 채로 헉헉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마치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태한은 그런 최은혁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네가 받을 첫 번째 대가다. 기현에게 전해. 나 강태한은 죽지 않았고, 이제 너희의 모든 것을 되찾으러 갈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메아리처럼 울렸다.

    최은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이젠 태한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듯했다.

    태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낡은 창고 앞, 최은혁의 절규만이 텅 빈 폐건물 사이를 맴돌았다.
    강태한은 이제 다시 살아 돌아온 그림자였다.
    친구의 배신으로 산산조각 났던 그의 모든 것이, 피와 복수라는 이름으로 재조립되고 있었다.
    그의 첫걸음은 끝없이 이어질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S 흥신소.
    남기현.
    오래된 문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을 되뇌며, 태한은 다음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심장은 복수심으로 차갑게 뛰고 있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는 이 게임의 모든 판도를 뒤엎어 버릴 작정이었다.

  • 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화. 이 밤의 문은 누구에게 닫혔는가

    강하랑은 진지했다. 눈앞의 스크린에 비치는 미세한 움직임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턱을 괸 채 검지로 입술을 느리게 쓸었다. 왼쪽 눈동자는 화면 중앙의 녹색 점을 쫓았고, 오른쪽 눈동자는 그 점이 그리는 궤적의 예상 경로를 읽는 듯 허공을 방황했다. 그의 주변은 온통 쓰레기였다. 방금 전까지 그가 열과 성을 다해 분석하고 추론했던 간식 봉투들, 엉뚱한 모양으로 구겨진 종이컵, 그리고 아무렇게나 던져진 책 더미들. 완벽한 지저분함 속에 완벽한 질서가 숨어있는 그의 세계.

    “젠장.”

    나직이 읊조린 그에게서 짜증 섞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화면 속 초록 점은 그의 예측을 완벽하게 빗나가, 그가 설정한 수치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며 게임 오버 사인을 띄웠다.

    “이게 말이 돼? 이 완벽한 수의 세계에서 찰나의 오류가 발생했다고? 시스템의 결함인가, 아니면…”

    그가 중얼거리는 순간, 탁자 위 휴대폰이 맹렬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에는 이름 두 글자, ‘이슬비’가 선명했다. 하랑은 한숨을 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지금 중요한 연구 중인데.”

    “하랑 씨! 중요한 연구는 무슨! 또 게임하고 있었죠?” 수화기 너머로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날카로운데 은근히 듣기 좋은, 이슬비 형사 특유의 목소리였다.

    “게임이 아니야, 이슬비 형사님. 이건 무작위성의 본질을 탐구하는 심오한 실험이라고. 자네 같은 직관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닥쳐요! 지금 장난할 시간 없어요. 빨리, 당장, 지금 즉시, 검은 연못가에 있는 박 회장님 별장으로 와요. 긴급 상황이에요!”

    검은 연못가 별장. 박성철 회장. 그 이름에 하랑의 느슨했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굳어졌다. 대한민국 경제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 중의 거물. 그런 사람의 별장에 긴급 상황이라니. 분명 심상치 않은 일일 터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또 회장님 금고 번호를 까먹으셨대?”

    “사람이 죽었어요! 밀실 살인이라고요, 밀실!”

    ‘밀실 살인’이라는 단어에 하랑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빛났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장난감 가게의 새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미묘한 흥분감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오호라. 밀실이라. 그거 재미있겠는데.”

    “재미? 지금 제정신이에요? 지금 난리가 났는데!”

    “알았어, 알았어. 갈게. 대신, 오늘 저녁은 자네가 사야 해. 내 심오한 연구를 방해한 대가로.”

    하랑은 전화를 끊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방은 언제나 그랬듯 난장판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놀랍도록 또렷했다.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 같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그에게는 언제나 풀 수 있는 퍼즐이었다. 그리고 지금, 새로운 퍼즐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검은 연못가 박 회장 별장은 과연 소문대로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높은 담벼락을 따라 삼엄하게 경비가 서 있었고, 별장 앞마당은 이미 경찰차와 과학수사팀 차량으로 빼곡했다. 붉은색과 푸른색 경광등이 밤하늘을 가르며 섬뜩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랑은 자신의 낡은 세단을 주차장에 던져놓듯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잠시 후, 이슬비 형사가 그에게로 달려왔다. 항상 단정하게 묶어 올리던 머리는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하랑 씨! 이제 와요? 전화는 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늦다니? 내가 차 키를 찾느라 그랬지. 그리고 형사님은 왜 이렇게 초췌해졌어? 범인한테 쫓기기라도 했나?” 하랑은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이거 진짜! 지금 장난할 때 아니거든요?” 슬비는 그의 손을 쳐내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자, 어서 와요. 현장으로 안내할게요.”

    별장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눅진하고 끈적한 공기가 하랑을 감쌌다. 겉만 번지르르한 빈 껍데기 같은 집이었다. 거실을 지나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낮은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에요. 박 회장님 서재.” 슬비가 무거운 참나무 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문 앞에는 이미 여러 명의 형사들과 감식반 요원들이 초조하게 서 있었다. 그들의 표정에는 한결같이 당혹감과 좌절감이 묻어 있었다.

    “다들 지금 뭐 하는 거죠? 그냥 구경하는 건가?” 하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에서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어서 그래요. 아니,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슬비가 한숨을 쉬었다. “서재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고, 창문도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창문은 이중 잠금장치에 방탄 유리였고요. 내부에는 부러진 흔적이나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어요. 완벽한 밀실이죠.”

    “완벽한 밀실이라…” 하랑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한 반가움이자, 동시에 오만한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일단 들어가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하랑은 문으로 다가섰다. 그는 잠시 문손잡이를 만져보고, 문틈을 유심히 살폈다.

    “강력계 이반장님이 지금 현장 통제 중이세요. 섣불리 만지면… 안 돼요!” 슬비가 급히 그를 말리려 했지만, 하랑은 이미 문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봐, 강하랑! 자네는 대체 뭔데 함부로 현장에 들어서나?!” 안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력계 이반장이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함과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경찰의 비효율적인 수사 방식이 나를 부르는군요.” 하랑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이미 방 안을 훑고 있었다.

    서재 안은 생각보다 간결했다. 중앙에는 거대한 참나무 책상과 의자가 놓여 있었고, 벽면 가득 책장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값비싼 예술품들이 방을 채우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은 한 남자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의미를 잃었다.

    박성철 회장이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은 채 상체를 숙이고 있었다. 등에는 선명한 칼자국이 나 있었고, 책상 위에는 붉은 액체가 흥건하게 번져 있었다. 그의 눈은 형형하게 뜨여 있었고, 그 속에 담긴 것은 공포와 놀라움이었다.

    하랑은 시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시신 앞에서 보인 유일한 감정은 마치 정교한 기계장치를 해부하는 엔지니어의 그것과 비슷했다. 그의 시선은 시신을 넘어, 책상 위, 그리고 바닥으로 향했다.

    “이 슬비 형사님.” 그가 나직이 불렀다.

    “네, 네?!”

    “여기 바닥에 깔린 이 고급스러운 양탄자 말이야. 혹시 제작 연도가 언제쯤인지 알아?”

    슬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지금 그걸 왜 물어요? 시신이나 먼저 살펴보는 게 우선 아닌가요?!”

    “이게 다 연관이 있다니까. 형사님 눈에는 그저 낡은 양탄자로 보이겠지만, 내 눈에는 이 방의 모든 역사가 새겨진 중요한 단서로 보인다고.”

    이반장이 혀를 차며 끼어들었다. “강하랑, 제발 좀 진지하게 임해라. 피해자는 등 뒤에서 칼에 찔렸어. 정황상 피해자는 살해당할 때까지 범인이 누군지 몰랐을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이 완벽한 밀실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아무도 모르고!”

    하랑은 피식 웃었다. 그가 웃는 순간, 슬비는 왠지 모를 불안감을 느꼈다. 그가 또 다른 기괴한 추론을 내놓을 것이라는 직감 때문이었다.

    “글쎄요. 정말 아무도 몰랐을까요?” 하랑은 박 회장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은 여전히 크게 뜨여 있었고, 그 속에 담긴 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이 회장님 눈빛 말이야. 저건 마치… 아주 가까운 사람을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인데.”

    하랑은 다시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굳게 닫힌 창문으로 다가섰다. 그는 창문 유리에 손가락을 대고 톡톡 두드려 보더니,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이 슬비 형사님.”

    “네? 또 뭔데요?”

    “여기, 이 창문 말이야. 이 창문은… 닫힌 적이 없는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하랑은 고개를 돌려 이슬비 형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형용할 수 없는 진지함이 깃들어 있었다. 슬비는 그 눈빛 속에서 그가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기이한 확신을 느꼈다. 이 밤의 문은 과연 누구에게 닫히지 않았던 것일까. 그리고 그 열린 문으로 들어선 그림자의 정체는? 이슬비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빌딩 숲의 심장부, 버려진 채 잊혀진 옥상 정원은 스산한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고립된 세계였다. 한때 화려했을 꽃들은 시들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고, 이파리 없는 덩굴들만이 앙상하게 철제 구조물을 휘감고 있었다. 도윤은 숨을 헐떡이며 이아의 가는 어깨를 감쌌다. 등 뒤로 도시의 불빛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지만, 그 빛은 따스함 대신 차가운 감시의 눈동자처럼 느껴졌다.

    이아는 온몸을 떨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가로등 불빛에 섬뜩하게 빛났다.

    “도윤… 미안해.”
    이아가 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 속삭였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는 공포와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도윤의 옷깃을 움켜쥔 손가락은 힘없이 파르르 떨렸다.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이곳은 마치 시간마저 멈춘 듯 고요했다. 그는 불과 몇 분 전, 그들을 턱밑까지 쫓아왔던 그림자들을 떠올렸다.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이아의 종족, 밤의 그림자에 속한 존재들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차가웠고, 경고는 명확했다.

    “우리가… 우리가 저지른 일은 용서받지 못할 거야.”
    이아의 말은 비수처럼 도윤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이 그녀가 느끼는 공포의 깊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용서받지 못하면 어때.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이아.”
    도윤은 억지로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그의 손이 이아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그녀의 피부가 그의 온기를 조금이나마 흡수하길 바라면서.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길고 어두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내 존재 자체가 그들에게는 규율이자 법이야. 그런데 내가, 감히 인간과… 이런 관계를 맺었으니.”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이아의 눈물은 마치 유리 구슬처럼 투명하고 빛났다.
    “이제 정말 끝인 것 같아, 도윤. 우리… 이 이상은 안 돼.”

    도윤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끝낼 수 없어. 널 포기할 수 없어.”
    그는 이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내가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내 세상은 달라졌어. 어두웠던 모든 것이 선명해졌고, 의미 없던 모든 것이 특별해졌어. 널 포기하는 건,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

    이아는 그의 말에 잠시 잊었던 듯이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빛에 아주 희미한 희망의 그림자가 스쳤다. 하지만 그 희망은 곧 차가운 현실에 잠식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나에게는 중징계가 내려질 거고, 너는… 너는 기억을 잃게 될지도 몰라. 그게 그들의 방식이야.”

    도윤은 주먹을 꽉 쥐었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 이아에 대한 모든 추억이 사라지고, 마치 그녀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살아가야 한다는 것.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조여왔다.
    “그렇게 되도록 두지 않을 거야.”

    “어떻게? 네가 어떻게 막을 수 있어? 그들은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이야. 너는…”
    이아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녀는 도윤이 자신과 얼마나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를 상기시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싸아아아…*

    바람 소리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고요 속에, 아주 미세한, 그러나 이아의 예민한 감각에 포착된 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발자국 소리…”
    이아가 몸을 굳혔다.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익숙해… 아주 익숙한 발자국 소리야.”

    도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파리 없는 덩굴들이 밤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도시의 웅성거림. 그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아는 틀린 적이 없었다. 그녀의 감각은 인간과는 달랐다.
    “누구야?”
    도윤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섞였다.

    “그들이… 다시 온 거야.”
    이아는 거의 울부짖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시자야. 그가 우리를 찾아냈어.”

    옥상으로 이어지는 비상계단 문이 삐걱이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낡은 금속이 마찰하며 내는 소리는, 마치 누군가의 비명처럼 처절했다. 도윤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이 숨을 만한 곳은 더 이상 없었다. 옥상 위는 사방이 뚫려 있었다.

    그리고 문이 천천히 열렸다.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호리호리한 체형, 밤색 옷을 입었지만 그 어떤 위장술보다도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자였다. 그의 얼굴은 밤하늘처럼 검은 망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깊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개의 눈은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형형했다.

    그는 이아의 친오라버니, 동시에 그녀의 감시자이자 심판자 역할을 하는 자였다. 그의 이름은 ‘카엘’. 그는 밤의 그림자 종족에서 가장 냉정하고 잔혹한 규율 집행자로 통했다.

    카엘은 천천히, 마치 먹이를 조롱하듯 걸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소리 하나 없이 옥상 바닥에 닿았다. 주변의 낡은 철제 구조물이 그의 움직임에 맞춰 희미하게 떨리는 듯했다.

    “이아.”
    그의 목소리는 차가운 밤공기처럼 날카로웠다. 심장을 꿰뚫을 듯한 서늘함이 담겨 있었다.
    “규칙을 어긴 대가는 혹독할 것이다.”

    이아는 도윤의 뒤로 숨으려 했지만, 이미 다리가 풀려 움직일 수 없었다. 도윤은 그녀를 자신의 등 뒤에 완전히 감춘 채, 카엘을 노려보았다.
    “물러서.”
    도윤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카엘의 시선이 도윤에게 닿았다. 인간에게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인간. 너는 감히 우리의 영역을 침범했다. 그녀의 영혼을 더럽혔고, 우리의 질서를 파괴하려 했다.”
    카엘의 목소리에는 단 한 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분노와 경멸만이 느껴졌다.
    “인간과의 유대는 너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이아. 이 배신은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카엘의 손이 서서히 올라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어둠이 피어오르는 듯한 기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도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그것은 단순한 주먹이나 발길질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마치 주변의 빛을 빨아들이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

    “이아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도윤이 소리쳤다. 그는 이아를 지키기 위해 몸을 더욱 단단히 세웠다.

    카엘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그녀의 죄는 이미 네 존재 자체로 증명되었다. 그리고 너의 죄는…”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가운 푸른빛으로 번뜩였다.
    “…존재해서는 안 될 것을 존재하게 만든 것.”

    어둠이 손끝에서 응축되어 칼날처럼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질적인 칼날이 아니었다. 인간의 눈으로는 인식조차 하기 힘든, 존재 그 자체를 지워버릴 듯한 무형의 힘이었다.

    도윤은 이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그는 결코 놓지 않았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설령 그 끝이 자신의 소멸이라 할지라도.

    카엘의 손에서 피어난 어둠의 칼날이 섬광처럼 두 사람을 향해 뻗어 나갔다.
    옥상 정원을 감싼 밤공기가 울부짖는 듯했다.

    “도윤…!”
    이아의 비명이 처절하게 울려 퍼졌다.

  • 메카 액션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 균열의 시작**

    이진우는 눈을 감은 채 익숙한 침대 매트리스의 푹신함을 느끼고 있었다. 길고 지루했던 하루의 끝. 쨍한 형광등 아래에서 숫자와 씨름하다 겨우 탈출한 참이었다. 옆 침대 협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에서 나지막이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유로운 주말 밤. 도시의 소음은 20층 높이까지는 제대로 도달하지 못했다. 창밖은 검푸른 어둠 속에 점점이 박힌 불빛들로 가득했다. 그의 아늑한 보금자리는 고층 아파트의 한 조각이었다.

    모든 것이 평화로웠다. 적어도, 그 밤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그랬다.

    “으음…….”

    나른한 한숨과 함께 뒤척였다. 딱히 잠이 오진 않았다.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때였다.

    딸깍.

    아주 작고 미세한 소리. 너무 작아서 착각했을 수도 있었다. 이진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신경은 이미 그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딸깍.

    이번엔 좀 더 선명했다. 침대 머리맡에 놓인 리모컨이 저절로 굴러 떨어진 것 같았다. 그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리모컨은 건전지 덮개가 살짝 열려 있었다.

    “뭐야, 헛것을 봤나?”

    그는 피식 웃으며 리모컨을 주워 제자리에 놓았다. 낡은 물건이라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그 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벽 두 시쯤이었을까. 잠이 들락말락 하던 찰나, 주방 쪽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 이진우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침입자? 강도?

    “누구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어둠 속에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거실의 작은 스탠드 조명을 켰다. 은은한 불빛이 집안을 밝혔다.

    주방은 멀쩡했다. 깨진 유리 조각도, 엎어진 물건도 없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젠장, 꿈인가?”

    식은땀이 흘렀다. 분명히 들었는데. 그는 찜찜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겨우 잠을 청했다.

    며칠이 지났다. 이진우의 아파트는 점점 기묘한 분위기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액자가 미묘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매번 똑바로 맞춰놓아도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살짝 비뚤어져 있었다.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려 있는 날도 있었다. 처음엔 자기가 대충 닫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틀 연속 같은 일이 반복되자, 의아함을 지울 수 없었다.

    가장 신경을 거슬리게 한 건, 소리였다.

    삐걱. 삐그덕. 덜컥.

    마치 낡은 배가 파도에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밤마다 벽 속에서, 혹은 천장 위에서 들려왔다. 단순한 건물 노후화라고 하기엔 너무나 생생하고 규칙적이었다. 어떤 때는 마치 금속이 무언가에 갈리는 듯한 긁히는 소리가 들렸고, 또 어떤 때는 낮은 주파수의 웅웅거리는 진동이 온몸을 울렸다.

    “윗집 이사라도 왔나?”

    이진우는 윗집 현관문 앞에서 귀를 기울였다. 조용했다. 양옆집도 마찬가지. 그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전화를 걸어 민원을 넣었지만, 기계적인 답변만 돌아올 뿐이었다.

    “누수나 배관 문제일 수 있습니다. 점검반을 보내보겠습니다.”

    하지만 점검반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배관은 멀쩡했고, 벽에도 균열은 없었다. 이진우는 점점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피곤함은 극에 달했지만, 밤만 되면 눈이 말똥말똥해졌다.

    그날 밤, 모든 것이 폭발했다.

    이진우는 거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어김없이 벽 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이번에는 평소보다 훨씬 강렬했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듯한 저음의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콰앙!

    갑작스러운 굉음.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오래된 금속 스탠드 조명이 쓰러지며 테이블에 부딪혔다. 거친 충격음과 함께 전구가 박살 났다. 어둠 속에서 이진우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게 뭐야…! 누가… 누구야!”

    그는 소리쳤다. 아무도 없었다. 방 안은 그와, 그리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공기마저 무겁게 짓눌리는 느낌.

    철컥!

    이번엔 현관문 잠금장치가 스스로 열리는 소리였다. 이진우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현관문이 천천히 안쪽으로 밀려 열렸다. 칠흑 같은 복도의 어둠이 집 안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주방에서 엄청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앙! 쾅! 쾅! 콰아앙!

    마치 냉장고가 통째로 뽑혀 나가는 듯한 굉음이었다. 금속이 뒤틀리고 부서지는 소리, 거대한 기어가 맞물리는 듯한 삐걱거림, 그리고 무언가가 바닥을 긁으며 끌려가는 듯한 마찰음까지. 평범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이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육중하고 기계적인 소음이었다.

    이진우는 공포에 질려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는 주방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고 있었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존재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음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거대한 냉장고가 저절로 움직여 주방 한가운데로 끌려 나왔다. 그 육중한 몸체가 바닥을 긁으며 찢어발겼다. 냉장고 뒤쪽 벽면이, 마치 내부에 갇힌 무언가에 의해 뜯겨 나가는 것처럼, 거친 파열음을 내며 갈라지기 시작했다. 금속 패널들이 찢겨지고, 콘크리트 가루가 흩날렸다.

    크윽! 끄으으윽!

    벽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제는 숨 쉬는 듯한, 혹은 거대한 짐승이 신음하는 듯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갈라진 벽 틈새로, 붉고 강렬한 섬광이 번쩍였다. 일초, 이초, 삼초. 짧고 강렬한 빛이 반복적으로 벽 속에서 터져 나왔다. 그 빛은 일반적인 전기 스파크와는 달랐다. 마치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열기처럼, 벽 틈새가 순식간에 달아오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 빛이 터져 나올 때마다, 집 안의 모든 전등이 번쩍이며 깜빡였다.

    이진우는 이제 더 이상 공포에만 사로잡히지 않았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함께 알 수 없는 호기심이 피어났다.

    이건 단순한 유령 장난이 아니었다.

    이건…… 무언가 살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는, 지금 그의 벽 속에서 부활하고 있었다.

    “…나와.”

    이진우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부서지는 벽에 고정되어 있었다.

    “젠장, 대체 너는… 정체가 뭐야.”

    다시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의 아파트, 그의 삶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균열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균열 속에서, 미지의 존재가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모습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잔향 (殘響)

    강태한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심의 끄트머리, 재개발이 멈춰 선 폐건물 더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허망하게 부유했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냄새가 그의 존재를 주변 풍경에 스며들게 하는 위장막 같았다.

    오늘 밤 그의 먹잇감은 최은혁. 한때 남기현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비서였다. 기현에게 이용당해 태한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데 일조했던 하수인.

    폐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최은혁은 버려진 창고 앞,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낡은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초조함과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입에서는 연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고, 손은 끊임없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누가 봐도 뭔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의 행색이었다.

    태한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저 자식의 잔향이 느껴져. 역겨운 욕망과 비굴함, 그리고… 공포.’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감정, 의지, 행동이 남긴 미묘한 에너지의 파동, 일종의 ‘잔향’. 기현에게 배신당하고 지하 감옥에서 죽음 직전까지 몰렸을 때,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각성된 능력. 그 잔향은 마치 과거의 순간을 재현하는 듯 생생했다. 최은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잔향은 기현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그 뒤에 숨겨진 자신의 안위를 향한 비겁함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남기현. 이름만 떠올려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친구라고? 하찮은 내 존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한 디딤돌로 이용했을 뿐이지.’
    그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기현의 목을 조르기 전에, 그의 손발부터 하나씩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최은혁은 그 시작이었다.

    태한은 옥상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를 유령처럼 미끄러져 내려가, 최은혁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은 그림자보다 가벼웠고, 폐건물의 먼지 하나 흩날리지 않았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감싸 안고, 그의 존재감을 지웠다.

    최은혁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어깨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최은혁.”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둠을 찢고 흘러나왔다.
    최은혁의 몸이 경직됐다. 어깨가 움찔거리고, 손에 쥔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퍼졌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핏기 없는 얼굴이 태한을 향했다. 눈은 공포에 질려 잔뜩 커져 있었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강, 강태한? 설마… 살아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 같았다. 아니, 그에게 태한은 유령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죽었어야 할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태한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섰다. 그의 발소리는 심장을 죄어오는 박자처럼 최은혁의 귀를 때렸다.
    “네가 왜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태한의 눈은 차가운 얼음 같았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불길이 일렁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남 실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진짜로!”
    최은혁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손을 저으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뒤는 담벼락에 막혀 있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절박함이 그의 잔향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몰랐다고? 네가 내 정보를 빼돌려 기현에게 넘겼을 때도? 내가 감금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도?”
    태한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 목소리에는 이젠 분노보다는 싸늘한 경멸만이 가득했다.
    “네 잔향이 말해주는 것과는 너무 다르잖아, 최은혁.”

    최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 잔향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태한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 같은 손아귀에 최은혁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네가 기현을 위해 나를 등쳐먹었던 순간의 비열함이 느껴져. 네가 기현의 권력에 빌붙어 부와 명예를 얻으려 했던 추악한 욕망이 선명하게 보여. 그리고 지금, 네 속에 가득한 이 비겁한 공포까지도.”
    태한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최은혁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최은혁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흐읍… 크윽…!”
    최은혁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태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의 정신을 좀먹는 듯했다. 그의 눈앞에, 마치 홀린 듯 과거의 장면들이 플래시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한의 연구 자료를 USB에 담아 기현에게 건네던 자신의 모습, 기현에게 보상받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자신의 얼굴… 그 모든 잔상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짓말 마… 거짓말 마요…!”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잔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의 감정 잔향을 증폭시켜 고문하는 것이었다.

    “남기현이 다음에 뭘 할지 알고 있지? 내게 뭘 숨기고 있는지도.”
    태한의 목소리가 최은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력.
    최은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포가 그의 혀를 묶어버린 듯했다.

    태한은 그의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최은혁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말해. 남기현이 어디서 뭘 꾸미고 있지?”
    태한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그 빛은 최은혁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흐으윽… 흐… 흥신소… S 흥신소에요… 남 실장님이… 거기로 사람들을 보내서… 강태한 씨를… 찾고 있었어요… 근데… 뭔가 다른 것도 찾는 것 같았어요… 오래된… 어떤… 문서를….”
    최은혁의 입에서 진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저항할 수 없었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뇌 속에서 진실만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문서? 무슨 문서.”
    태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을 찾는 거야 예상했지만, ‘오래된 문서’라니.

    “모, 몰라요… 저한테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냥… 아주 오래된… 연구… 자료 같은 거라고…만….”
    최은혁은 울먹였다. 그의 몸은 이제 자율적으로 떨리는 것을 넘어 경련하기 시작했다.

    태한은 최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잔향 속에서 거짓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오직 순수한 공포와 진실만이 느껴졌다. 최은혁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쏟아낸 듯했다.

    “좋아. 이 정보는 유용했어.”
    태한은 손을 뗐다. 최은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축 늘어진 채로 헉헉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마치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태한은 그런 최은혁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네가 받을 첫 번째 대가다. 기현에게 전해. 나 강태한은 죽지 않았고, 이제 너희의 모든 것을 되찾으러 갈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메아리처럼 울렸다.

    최은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이젠 태한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듯했다.

    태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낡은 창고 앞, 최은혁의 절규만이 텅 빈 폐건물 사이를 맴돌았다.
    강태한은 이제 다시 살아 돌아온 그림자였다.
    친구의 배신으로 산산조각 났던 그의 모든 것이, 피와 복수라는 이름으로 재조립되고 있었다.
    그의 첫걸음은 끝없이 이어질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S 흥신소.
    남기현.
    오래된 문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을 되뇌며, 태한은 다음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심장은 복수심으로 차갑게 뛰고 있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는 이 게임의 모든 판도를 뒤엎어 버릴 작정이었다.

  • 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 잔향 (殘響)

    강태한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심의 끄트머리, 재개발이 멈춰 선 폐건물 더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허망하게 부유했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냄새가 그의 존재를 주변 풍경에 스며들게 하는 위장막 같았다.

    오늘 밤 그의 먹잇감은 최은혁. 한때 남기현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비서였다. 기현에게 이용당해 태한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데 일조했던 하수인.

    폐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최은혁은 버려진 창고 앞,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낡은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초조함과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입에서는 연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고, 손은 끊임없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누가 봐도 뭔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의 행색이었다.

    태한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저 자식의 잔향이 느껴져. 역겨운 욕망과 비굴함, 그리고… 공포.’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감정, 의지, 행동이 남긴 미묘한 에너지의 파동, 일종의 ‘잔향’. 기현에게 배신당하고 지하 감옥에서 죽음 직전까지 몰렸을 때,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각성된 능력. 그 잔향은 마치 과거의 순간을 재현하는 듯 생생했다. 최은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잔향은 기현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그 뒤에 숨겨진 자신의 안위를 향한 비겁함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남기현. 이름만 떠올려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친구라고? 하찮은 내 존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한 디딤돌로 이용했을 뿐이지.’
    그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기현의 목을 조르기 전에, 그의 손발부터 하나씩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최은혁은 그 시작이었다.

    태한은 옥상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를 유령처럼 미끄러져 내려가, 최은혁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은 그림자보다 가벼웠고, 폐건물의 먼지 하나 흩날리지 않았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감싸 안고, 그의 존재감을 지웠다.

    최은혁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어깨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최은혁.”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둠을 찢고 흘러나왔다.
    최은혁의 몸이 경직됐다. 어깨가 움찔거리고, 손에 쥔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퍼졌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핏기 없는 얼굴이 태한을 향했다. 눈은 공포에 질려 잔뜩 커져 있었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강, 강태한? 설마… 살아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 같았다. 아니, 그에게 태한은 유령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죽었어야 할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태한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섰다. 그의 발소리는 심장을 죄어오는 박자처럼 최은혁의 귀를 때렸다.
    “네가 왜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태한의 눈은 차가운 얼음 같았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불길이 일렁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남 실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진짜로!”
    최은혁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손을 저으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뒤는 담벼락에 막혀 있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절박함이 그의 잔향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몰랐다고? 네가 내 정보를 빼돌려 기현에게 넘겼을 때도? 내가 감금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도?”
    태한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 목소리에는 이젠 분노보다는 싸늘한 경멸만이 가득했다.
    “네 잔향이 말해주는 것과는 너무 다르잖아, 최은혁.”

    최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 잔향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태한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 같은 손아귀에 최은혁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네가 기현을 위해 나를 등쳐먹었던 순간의 비열함이 느껴져. 네가 기현의 권력에 빌붙어 부와 명예를 얻으려 했던 추악한 욕망이 선명하게 보여. 그리고 지금, 네 속에 가득한 이 비겁한 공포까지도.”
    태한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최은혁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최은혁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흐읍… 크윽…!”
    최은혁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태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의 정신을 좀먹는 듯했다. 그의 눈앞에, 마치 홀린 듯 과거의 장면들이 플래시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한의 연구 자료를 USB에 담아 기현에게 건네던 자신의 모습, 기현에게 보상받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자신의 얼굴… 그 모든 잔상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짓말 마… 거짓말 마요…!”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잔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의 감정 잔향을 증폭시켜 고문하는 것이었다.

    “남기현이 다음에 뭘 할지 알고 있지? 내게 뭘 숨기고 있는지도.”
    태한의 목소리가 최은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력.
    최은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포가 그의 혀를 묶어버린 듯했다.

    태한은 그의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최은혁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말해. 남기현이 어디서 뭘 꾸미고 있지?”
    태한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그 빛은 최은혁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흐으윽… 흐… 흥신소… S 흥신소에요… 남 실장님이… 거기로 사람들을 보내서… 강태한 씨를… 찾고 있었어요… 근데… 뭔가 다른 것도 찾는 것 같았어요… 오래된… 어떤… 문서를….”
    최은혁의 입에서 진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저항할 수 없었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뇌 속에서 진실만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문서? 무슨 문서.”
    태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을 찾는 거야 예상했지만, ‘오래된 문서’라니.

    “모, 몰라요… 저한테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냥… 아주 오래된… 연구… 자료 같은 거라고…만….”
    최은혁은 울먹였다. 그의 몸은 이제 자율적으로 떨리는 것을 넘어 경련하기 시작했다.

    태한은 최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잔향 속에서 거짓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오직 순수한 공포와 진실만이 느껴졌다. 최은혁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쏟아낸 듯했다.

    “좋아. 이 정보는 유용했어.”
    태한은 손을 뗐다. 최은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축 늘어진 채로 헉헉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마치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태한은 그런 최은혁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네가 받을 첫 번째 대가다. 기현에게 전해. 나 강태한은 죽지 않았고, 이제 너희의 모든 것을 되찾으러 갈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메아리처럼 울렸다.

    최은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이젠 태한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듯했다.

    태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낡은 창고 앞, 최은혁의 절규만이 텅 빈 폐건물 사이를 맴돌았다.
    강태한은 이제 다시 살아 돌아온 그림자였다.
    친구의 배신으로 산산조각 났던 그의 모든 것이, 피와 복수라는 이름으로 재조립되고 있었다.
    그의 첫걸음은 끝없이 이어질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S 흥신소.
    남기현.
    오래된 문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을 되뇌며, 태한은 다음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심장은 복수심으로 차갑게 뛰고 있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는 이 게임의 모든 판도를 뒤엎어 버릴 작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