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잔향 (殘響)
강태한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도심의 끄트머리, 재개발이 멈춰 선 폐건물 더미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가로등 불빛이 허망하게 부유했다. 축축하고 역겨운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냄새가 그의 존재를 주변 풍경에 스며들게 하는 위장막 같았다.
오늘 밤 그의 먹잇감은 최은혁. 한때 남기현의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던 비서였다. 기현에게 이용당해 태한의 모든 것을 앗아가는 데 일조했던 하수인.
폐건물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최은혁은 버려진 창고 앞,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낡은 스마트폰 화면을 뚫어지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초조함과 불안으로 얼룩져 있었다. 입에서는 연신 담배 연기가 피어올랐고, 손은 끊임없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누가 봐도 뭔가를 기다리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자의 행색이었다.
태한의 눈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저 자식의 잔향이 느껴져. 역겨운 욕망과 비굴함, 그리고… 공포.’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의 감정, 의지, 행동이 남긴 미묘한 에너지의 파동, 일종의 ‘잔향’. 기현에게 배신당하고 지하 감옥에서 죽음 직전까지 몰렸을 때,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각성된 능력. 그 잔향은 마치 과거의 순간을 재현하는 듯 생생했다. 최은혁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잔향은 기현을 향한 맹목적인 충성과 그 뒤에 숨겨진 자신의 안위를 향한 비겁함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남기현. 이름만 떠올려도 피가 거꾸로 솟는 듯한 분노가 치밀었다.
‘친구라고? 하찮은 내 존재를 밟고 올라서기 위한 디딤돌로 이용했을 뿐이지.’
그는 심호흡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기현의 목을 조르기 전에, 그의 손발부터 하나씩 잘라내야 했다. 그리고 최은혁은 그 시작이었다.
태한은 옥상에서 소리 없이 뛰어내렸다. 건물 사이의 좁은 틈새를 유령처럼 미끄러져 내려가, 최은혁의 뒤편으로 다가섰다. 그의 발걸음은 그림자보다 가벼웠고, 폐건물의 먼지 하나 흩날리지 않았다. 어둠이 그를 완전히 감싸 안고, 그의 존재감을 지웠다.
최은혁은 여전히 스마트폰에 얼굴을 박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어깨는 뻣뻣하게 굳어 있었고,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최은혁.”
낮게 깔린 목소리가 어둠을 찢고 흘러나왔다.
최은혁의 몸이 경직됐다. 어깨가 움찔거리고, 손에 쥔 스마트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퍼졌다.
그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핏기 없는 얼굴이 태한을 향했다. 눈은 공포에 질려 잔뜩 커져 있었고, 입술은 파르르 떨렸다.
“…강, 강태한? 설마… 살아있었어?”
그의 목소리는 덜덜 떨렸다. 마치 유령을 본 사람 같았다. 아니, 그에게 태한은 유령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죽었어야 할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으니.
태한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다가섰다. 그의 발소리는 심장을 죄어오는 박자처럼 최은혁의 귀를 때렸다.
“네가 왜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지?”
태한의 눈은 차가운 얼음 같았지만, 그 안에는 끓어오르는 불길이 일렁였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남 실장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진짜로!”
최은혁은 필사적으로 변명했다. 손을 저으며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뒤는 담벼락에 막혀 있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절박함이 그의 잔향을 더욱 혼탁하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몰랐다고? 네가 내 정보를 빼돌려 기현에게 넘겼을 때도? 내가 감금당하고 죽음 직전까지 갔을 때도?”
태한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그 목소리에는 이젠 분노보다는 싸늘한 경멸만이 가득했다.
“네 잔향이 말해주는 것과는 너무 다르잖아, 최은혁.”
최은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잔… 잔향이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는 더듬거리며 말을 이으려 했지만, 태한은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 같은 손아귀에 최은혁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네가 기현을 위해 나를 등쳐먹었던 순간의 비열함이 느껴져. 네가 기현의 권력에 빌붙어 부와 명예를 얻으려 했던 추악한 욕망이 선명하게 보여. 그리고 지금, 네 속에 가득한 이 비겁한 공포까지도.”
태한의 손에서 차가운 기운이 최은혁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최은혁은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흐읍… 크윽…!”
최은혁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태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의 정신을 좀먹는 듯했다. 그의 눈앞에, 마치 홀린 듯 과거의 장면들이 플래시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한의 연구 자료를 USB에 담아 기현에게 건네던 자신의 모습, 기현에게 보상받으며 회심의 미소를 짓던 자신의 얼굴… 그 모든 잔상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거짓말 마… 거짓말 마요…!”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지만, 잔상은 더욱 선명해졌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의 감정 잔향을 증폭시켜 고문하는 것이었다.
“남기현이 다음에 뭘 할지 알고 있지? 내게 뭘 숨기고 있는지도.”
태한의 목소리가 최은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압력.
최은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입술을 움직였지만,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공포가 그의 혀를 묶어버린 듯했다.
태한은 그의 어깨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최은혁의 얼굴이 퍼렇게 질렸다.
“말해. 남기현이 어디서 뭘 꾸미고 있지?”
태한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번뜩였다. 그 빛은 최은혁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흐으윽… 흐… 흥신소… S 흥신소에요… 남 실장님이… 거기로 사람들을 보내서… 강태한 씨를… 찾고 있었어요… 근데… 뭔가 다른 것도 찾는 것 같았어요… 오래된… 어떤… 문서를….”
최은혁의 입에서 진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그는 저항할 수 없었다. 태한의 능력이 그의 뇌 속에서 진실만을 끄집어내는 듯했다.
“문서? 무슨 문서.”
태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자신을 찾는 거야 예상했지만, ‘오래된 문서’라니.
“모, 몰라요… 저한테는…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냥… 아주 오래된… 연구… 자료 같은 거라고…만….”
최은혁은 울먹였다. 그의 몸은 이제 자율적으로 떨리는 것을 넘어 경련하기 시작했다.
태한은 최은혁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잔향 속에서 거짓의 흔적을 찾으려 했지만, 오직 순수한 공포와 진실만이 느껴졌다. 최은혁은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쏟아낸 듯했다.
“좋아. 이 정보는 유용했어.”
태한은 손을 뗐다. 최은혁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듯, 축 늘어진 채로 헉헉거렸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고, 얼굴에는 절망감이 가득했다. 마치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태한은 그런 최은혁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네가 받을 첫 번째 대가다. 기현에게 전해. 나 강태한은 죽지 않았고, 이제 너희의 모든 것을 되찾으러 갈 거라고.”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어둠 속에서 거대한 메아리처럼 울렸다.
최은혁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무릎을 감싸 안고 울부짖을 뿐이었다. 이젠 태한을 두려워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나약함과 비겁함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듯했다.
태한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의 그림자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스며들었다.
낡은 창고 앞, 최은혁의 절규만이 텅 빈 폐건물 사이를 맴돌았다.
강태한은 이제 다시 살아 돌아온 그림자였다.
친구의 배신으로 산산조각 났던 그의 모든 것이, 피와 복수라는 이름으로 재조립되고 있었다.
그의 첫걸음은 끝없이 이어질 피비린내 나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S 흥신소.
남기현.
오래된 문서.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을 되뇌며, 태한은 다음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심장은 복수심으로 차갑게 뛰고 있었다.
이제 게임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는 이 게임의 모든 판도를 뒤엎어 버릴 작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