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Original Stories

  • 타임슬립 (시간여행)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시간의 틈, 잊힌 숲의 부름**

    “젠장, 또 지각이야!”

    서하는 휴대폰 액정을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빨간색 경고등이 번쩍이는 지각 알림창이 그녀를 반겼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었고, 발은 아스팔트 바닥에 닿는 순간마다 고통을 호소했다. 서른 살, 평범한 직장인.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회식, 그리고 이 빌어먹을 출근 전쟁. 서하의 삶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에 갇혀 끊임없이 돌아가는 부품 같았다.

    오늘따라 유독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어젯밤, 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고양이의 눈빛 때문일까. 잿빛 눈동자 속에는 왠지 모를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고, 그 눈빛은 퇴근 후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듯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겨우 눈을 붙였건만, 알람 소리는 늘 야속하게 울려 퍼졌다.

    사무실에 도착해 겨우 책상에 앉자마자 부장은 서류 더미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서하 씨, 이것들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거 알죠? 저녁에 회식 있으니 늦지 말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서하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늘 마음속을 맴도는 질문이었다.

    퇴근 후 회식은 지옥 같았다. 억지로 넘기는 술잔과 듣기 싫은 농담들. 간신히 비틀거리며 지하철역을 나왔을 때,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심의 불빛에 가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 문득, 어릴 적 할머니 댁 마당에서 쏟아질 듯 빛나던 별들이 생각났다. 그때의 자신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한 아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메마르고 지쳐버렸을까.

    별이 보고 싶었다. 도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득, 충동적으로 발길을 돌렸다. 늘 가던 집 방향이 아닌, 도시 외곽의 작은 야산 쪽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 어릴 적 한 번쯤 친구들과 담력 체험을 갔다가 길을 잃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그곳이라면 어쩌면, 희미하게라도 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숲길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도시의 인공적인 냄새에 익숙해져 있던 서하의 폐는 숲의 신선한 공기에 금세 편안해졌다. 조금 더,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밑에 밟히는 흙과 나뭇가지의 감각이 점점 더 익숙지 않은 느낌으로 변해갔다. 이 길은 분명 예전에 와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숲은 더욱 울창해졌고, 나무들은 하늘을 가릴 듯이 거대했다. 저 멀리, 희미한 달빛 아래 무언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서하는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헙 들이켰다.

    고대 신전의 문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돌기둥 두 개가 솟아 있었고, 그 위를 육중한 돌이 이어 거대한 아치형 문을 이루고 있었다. 이끼와 넝쿨이 뒤엉켜 있었지만, 그 웅장함은 감출 수 없었다. 돌기둥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서하가 손을 대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희미한 푸른빛을 내며 꿈틀거리는 듯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아니라,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오묘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이게… 대체 뭐지?”

    누가 이런 곳에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서울 근교에 이런 유적이 숨어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서하의 발걸음을 문 안쪽으로 향하게 했다. ‘돌아가야 해’라는 이성이 경고했지만, ‘이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그녀를 지배했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거대한 아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세상이 일그러졌다.

    시야가 회오리치고, 모든 소리가 뒤섞이며 거대한 폭풍처럼 서하의 몸을 감쌌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격렬한 혼란. 온몸의 세포가 분해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는 듯한 고통에 서하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시간이 찢어지고, 공간이 해체되는 듯한 아찔한 감각.

    그리고, 모든 것이 멎었다.

    몸을 가득 채웠던 고통과 혼란이 사라지고, 마치 깊은 물속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고요한 평온이 찾아왔다. 서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 여긴… 어디지?”

    몸은 흙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머리 위로는 빽빽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도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빛은 마치 태고의 신비로운 힘을 머금은 듯했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 또한 달랐다. 눅진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짙은 꽃향기가 강렬하게 폐부를 파고들었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은 멜로디처럼 아름다웠고,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는 서늘한 긴장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변의 풍경이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마치 살아있는 탑처럼 솟아 있었고, 뿌리는 땅 위로 뱀처럼 엉켜 있었다. 나무줄기는 아름다운 무늬로 뒤덮여 있었고, 나뭇잎들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서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자신이 들어왔던 돌문은 온데간데없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돌문 자리에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말도 안 돼… 꿈인가?”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명백히 현실이었다. 공포가 목구멍을 옥죄어왔다. 자신이 알던 세상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패닉에 빠져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바람 소리조차 잦아든 고요 속에서, 멀리 떨어진 거대한 고목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인간보다 훨씬 컸고,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빛나는 두 눈은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밤하늘을 닮은 검은 머리카락은 길게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매끈하게 빠진 근육질의 몸은 간소한 가죽 옷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의 손에는 끝이 날카로운 창이 들려 있었는데, 그 창 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했다.
    그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완벽했지만, 그 완벽함 속에는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함과 오만함, 그리고 야생의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서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금빛 눈동자.

    그의 눈이 서하에게 고정되자, 서하의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맹수에게 포착된 작은 토끼처럼,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숲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는 듯한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인간… 감히 이 숲에 발을 들인 더러운 존재여.”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경멸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서하는 온몸으로 그의 적대감을 느꼈다. 위험했다. 이곳은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고, 이 존재는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누, 누구세요… 여긴 대체 어디죠?”

    서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공포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대답을 갈구했다.

    그는 피식, 하고 짧게 비웃었다. 그의 눈빛은 서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 숲의 주인에게, 감히 질문을 하다니. 너는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물질이다.”

    그가 한 발자국, 서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숲의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서하는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뒤로는 거대한 나무가 가로막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감히 금지된 경계를 넘어선 죄, 네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그의 창 끝이 서하의 목을 겨눴다.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하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금빛 눈동자 속에는, 맹렬한 살기 외에 아주 희미하게, 서하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서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이상하게, 그녀의 시선은 그의 금빛 눈동자에 갇혔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그 속에서 왠지 모를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이 금지된 숲에서, 종족을 뛰어넘은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직감했다. 이 만남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은 이제 결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 심리 스릴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잿빛 숨결**

    창문 없는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눈을 떴다. 희미한 새벽빛이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무수히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들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고 있었다. 축축한 냉기가 뼈를 파고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며칠째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지 못했다. 위장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바싹 마른 입 안으로 퍼졌다.

    민준은 더러운 헝겊 조각으로 만든 임시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 기댄 벽은 한때 누군가의 안락한 보금자리였을 텐데, 지금은 그저 차갑고 거친 돌덩이에 불과했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허공에 맴도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옥죄어오는 고독이었다. 바깥세상은 더욱 냉혹했다. 어쩌면 그 어떤 유령보다도.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폐는 텁텁한 공기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보니, 거뭇거뭇한 흙먼지와 수염이 뒤섞여 피부를 덮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 멀쩡한 사람의 얼굴을 한 자신은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잔해였다.

    가방을 뒤적였다. 낡고 해진 배낭 속에는 겨우 손바닥만 한 깡통 하나와 절반쯤 남은 물통, 그리고 녹슨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이마를 짚었다. 오늘 점심은 또 무엇으로 때워야 할까. 아니, 오늘을 넘길 수나 있을까. 이 잿빛 도시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는 건 곧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창틀 밖을 내다봤다. 무너진 건물들의 실루엣이 스모그 낀 하늘 아래 웅장하면서도 스산하게 서 있었다. 멀리 떨어진 빌딩의 뼈대에는 기이한 형태로 자라난 철골들이 마치 거대한 괴물의 척추처럼 솟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찢겨진 현수막 조각들이 나부꼈고, 그 펄럭이는 소리는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은 자들의 도시가 보내는.

    “젠장.”

    민준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배는 고팠고, 목은 말랐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상황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자신의 의지였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멈출 수 없을 뿐이었다. 굶주림은 그 어떤 철학보다도 강력한 동기였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삐걱이는 쇠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길게 울려 퍼졌다. 혹시 모를 누군가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소리일까 봐,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먼지 섞인 침묵만이 그를 에워쌌다.

    바닥에 깔린 잔해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복도였을 이 공간은 이제 폐허 그 자체였다. 깨진 유리 조각, 부서진 가구의 파편들, 알 수 없는 얼룩들.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어떤 희망을 품었을까. 이젠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들의 흔적만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한 층, 또 한 층.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오직 감각에 의존했다. 손바닥으로 차가운 난간을 더듬고, 발바닥으로 삐걱이는 계단 층계의 균열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공포는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새롭게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올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섬뜩한 깨달음.

    마침내 1층 로비에 다다랐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외부의 황량한 풍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먼지로 뒤덮인 카운터와 부서진 의자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공간은 이제 죽은 듯 고요했다.

    “오늘은 저쪽으로 가봐야겠어.”

    민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제와는 다른 방향. 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나마 ‘덜’ 뒤져본 곳을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자원 고갈은 단순한 물자 부족을 넘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 그는 그 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콘크리트 조각과 뒤섞인 흙길을 걸었다. 텅 빈 거리에는 그의 발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날카롭고 건조한 소리였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한데 모아 터뜨리는 비명처럼.

    갑자기, 그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오래된 상가 건물. 여느 건물들과 다름없이 흉물스러운 폐허였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리 조각 사이로 비치는 붉은색.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 아니, 어쩌면 함정.

    민준은 손에 든 녹슨 칼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손아귀에서 불안하게 떨렸다. 저곳에 무엇이 있을까? 먹을 것? 아니면 또 다른 죽음?

    그는 숨을 죽이고, 건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색은 선명해졌다. 부서진 상점 간판 아래, 진열장이 통째로 엎어져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마네킹의 잘린 팔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 옆에, 찌그러진 캔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통조림 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지막 한 조각의 이성마저 놓아버릴 것 같은 충동.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쉽게 얻어지는 것은 언제나 가장 위험한 함정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묘한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썩어가는 단내. 오래된 통조림에서 나는 냄새일까, 아니면 이 근처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걸까.

    점점 더 가까이. 캔은 마치 그를 유혹하는 빛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막 움켜쥐려는 순간,

    *콰앙!*

    머리 위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마치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날아오는 파편들을 막기 위해 팔을 들었다.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무엇인가가 붕괴했다. 아니면… 공격받은 것인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지 속을 응시했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었다. 귓가에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먼지 구름이 조금 걷히자, 보였다.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린 자리, 그 검은 구멍 사이로 흐릿한 형체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그리고 그 형체가 지나간 뒤, 무너진 천장 잔해 위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

    굶주림에 지친 맹수의 눈빛.
    아니, 그보다 더 섬뜩하고, 광기 어린, 인간의 눈빛이었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캔은 여전히 바닥에 놓여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저 위,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그 존재에 집중되어 있었다.

    생존.
    그것은 곧 사냥꾼이 되거나, 사냥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명백히 후자였다.
    이 잿빛 숨결 속에서, 또 한 번의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니, 밤이 아니었다.
    이것은… 새벽이었다.
    생존의 새벽, 혹은 죽음의 서막.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을 흩뿌리는 그랑볼룸 앞에서, 차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 펼쳐진 붉은 카펫은 그녀의 낡은 검은색 구두와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3년 전,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을 때조차 그녀는 이런 종류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화려함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꿈을, 그녀의 기술을, 그녀의 열정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차지우 씨, 잠시만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키 큰 남자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눈에는 대놓고 경멸이 서려 있었다.

    “초대장 보여주시겠습니까? 이 행사는 초청받은 VIP만 입장 가능합니다.”

    지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VIP. 그녀의 아이디어를, 그녀의 피땀을 고스란히 훔쳐 자신들의 것으로 둔갑시킨 이선우와 강준혁이 지금 저 안에서 VIP 대접을 받고 있겠지. 그녀는 굳이 초대장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없다.

    “없습니다.” 지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럼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돌아가라고? 3년 동안 이를 갈고 버텨온 시간을 고작 저런 말 한마디로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나. 차지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돌아가기엔, 제가 좀 멀리서 왔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른하면서도 묘하게 끈적한 목소리.

    “저분이 멀리서 오셨다는데, 돌려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남자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지우 역시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회색 수트를 흠잡을 데 없이 차려입은 한 남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날렵한 콧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이었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경호원은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한… 한민준 대표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한민준 대표. 그 이름은 지우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업계에서 떠오르는 신성, 젊은 나이에 뛰어난 수완으로 여러 기업을 집어삼켰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

    한민준은 경호원의 말을 뚝 자르고 지우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만이네요, 차지우 씨. 설마 제 파트너를 못 알아보셨을 리가.”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파트너?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호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민준은 빙긋 웃으며 지우의 어깨를 살짝 밀어 문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에서 묘한 전율이 흘렀다. “괜찮아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제가 굳이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죠.”

    문이 닫히자마자, 지우는 한민준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지금 저한테 무슨 장난을 치시는 겁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라뇨. 아름다운 분이 입구에서 곤경에 처해 있길래, 잠시 도와드린 것뿐인데요. 그리고, 저 경호원분한테 제가 차지우 씨를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면 좀 곤란하잖아요? 제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격인데.”

    그의 능청스러움에 지우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고맙습니다.” 지우는 짧게 인사했다.

    “천만에요. 이제부터 시작될 일이 훨씬 더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볼룸 안쪽,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는 이선우와 강준혁에게로 향했다. “설마 그저 구경만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지우는 한민준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선우는 몸에 딱 붙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강준혁의 옆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혁신을 넘어, 미래를 담다’라는 거창한 문구가 쓰인 스크린이 보였다. 그녀의 프로젝트명이었다.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3년 전, 그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 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사랑했던 연인의 변절.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밤의 차지우가 아니었다.

    “구경이요? 저는 이 쇼의 주인공을 만나러 온 겁니다.” 지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한민준은 그녀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네요. 저도 이 쇼의 관객 중 한 명으로서, 당신이 어떤 쇼를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선우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볼룸 가득 울려 퍼졌다.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바로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혁신적인 프로젝트, ‘시그니처’를 선보이기 위함입니다!”

    ‘시그니처’. 그래, 그것도 그녀가 지은 이름이었다.

    선우의 말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지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USB를 꽉 움켜쥐었다. 이것이 오늘 그녀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시그니처 프로젝트의 핵심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담긴 USB. 물론, 선우가 발표할 그 파일과는 미묘하게 다른 파일이었다.

    “준혁 씨, 이제부터는 준혁 씨가 직접 저희 ‘시그니처’의 놀라운 기능을 시연해주시겠어요?” 선우가 강준혁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강준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준혁입니다. 저희 ‘시그니처’는 인공지능 기반의…”

    그가 시연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지우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틈을 타, 재빨리 연단 뒤편에 설치된 메인 콘솔 박스 쪽으로 움직였다. 복잡한 선들과 장비들 사이에서, 그녀는 능숙하게 손을 놀려 미리 준비해둔 USB를 연결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초 만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돌아오자 한민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벌써 끝난 건가요?”

    지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죠.”

    스크린에 강준혁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나타났다. 매끄러운 영상과 그래프들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지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작동할 시간이었다.

    강준혁이 ‘시그니처’의 핵심 AI 기능 시연을 위해 특정 버튼을 누르는 순간, 스크린이 갑자기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검은 화면 끝에, 엉뚱한 이미지가 깜빡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은 강준혁과 이선우가 아직 신입사원이었을 때, 회사 워크숍에서 만취해 서로에게 춤을 추며 장난치던 모습이 담긴, 촌스럽기 그지없는 옛날 사진이었다. 그것도, 당시 지우의 카메라로 찍힌 사진.

    사진은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스쳤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장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게 뭐야?”
    “프레젠테이션 오류인가?”
    “설마 저 둘이…”

    강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선우 역시 동그란 눈으로 스크린을 노려봤다. 둘 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그것도 가장 볼품없던 시절의 ‘흑역사’가 한순간 비쳤다는 사실에 경악한 듯했다. 다행히 바로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지만, 이미 분위기는 살짝 균열이 생긴 뒤였다.

    “음, 예상치 못한 기술적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강준혁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그의 손은 마이크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의심의 그림자를 읽어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차지우에게 닿았다.

    지우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마치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한, 조용하지만 단호한 선전포고.

    선우의 눈빛이 지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섬뜩한 분노가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한민준은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지우의 미소를 보며 옅게 웃었다.

    지우는 그들의 표정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아직은 아주 작은 조약돌 하나 던졌을 뿐인데, 저렇게 동요하다니.

    ‘선우야, 준혁아. 잘 봤니?’

    그녀의 눈빛은 불타는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이제 시작이야. 너희가 쌓아 올린 모래성은 내가 아주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무너뜨려줄 테니까.’

  • 심리 스릴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잿빛 숨결**

    창문 없는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눈을 떴다. 희미한 새벽빛이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무수히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들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고 있었다. 축축한 냉기가 뼈를 파고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며칠째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지 못했다. 위장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바싹 마른 입 안으로 퍼졌다.

    민준은 더러운 헝겊 조각으로 만든 임시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 기댄 벽은 한때 누군가의 안락한 보금자리였을 텐데, 지금은 그저 차갑고 거친 돌덩이에 불과했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허공에 맴도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옥죄어오는 고독이었다. 바깥세상은 더욱 냉혹했다. 어쩌면 그 어떤 유령보다도.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폐는 텁텁한 공기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보니, 거뭇거뭇한 흙먼지와 수염이 뒤섞여 피부를 덮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 멀쩡한 사람의 얼굴을 한 자신은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잔해였다.

    가방을 뒤적였다. 낡고 해진 배낭 속에는 겨우 손바닥만 한 깡통 하나와 절반쯤 남은 물통, 그리고 녹슨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이마를 짚었다. 오늘 점심은 또 무엇으로 때워야 할까. 아니, 오늘을 넘길 수나 있을까. 이 잿빛 도시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는 건 곧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창틀 밖을 내다봤다. 무너진 건물들의 실루엣이 스모그 낀 하늘 아래 웅장하면서도 스산하게 서 있었다. 멀리 떨어진 빌딩의 뼈대에는 기이한 형태로 자라난 철골들이 마치 거대한 괴물의 척추처럼 솟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찢겨진 현수막 조각들이 나부꼈고, 그 펄럭이는 소리는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은 자들의 도시가 보내는.

    “젠장.”

    민준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배는 고팠고, 목은 말랐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상황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자신의 의지였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멈출 수 없을 뿐이었다. 굶주림은 그 어떤 철학보다도 강력한 동기였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삐걱이는 쇠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길게 울려 퍼졌다. 혹시 모를 누군가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소리일까 봐,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먼지 섞인 침묵만이 그를 에워쌌다.

    바닥에 깔린 잔해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복도였을 이 공간은 이제 폐허 그 자체였다. 깨진 유리 조각, 부서진 가구의 파편들, 알 수 없는 얼룩들.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어떤 희망을 품었을까. 이젠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들의 흔적만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한 층, 또 한 층.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오직 감각에 의존했다. 손바닥으로 차가운 난간을 더듬고, 발바닥으로 삐걱이는 계단 층계의 균열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공포는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새롭게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올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섬뜩한 깨달음.

    마침내 1층 로비에 다다랐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외부의 황량한 풍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먼지로 뒤덮인 카운터와 부서진 의자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공간은 이제 죽은 듯 고요했다.

    “오늘은 저쪽으로 가봐야겠어.”

    민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제와는 다른 방향. 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나마 ‘덜’ 뒤져본 곳을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자원 고갈은 단순한 물자 부족을 넘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 그는 그 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콘크리트 조각과 뒤섞인 흙길을 걸었다. 텅 빈 거리에는 그의 발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날카롭고 건조한 소리였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한데 모아 터뜨리는 비명처럼.

    갑자기, 그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오래된 상가 건물. 여느 건물들과 다름없이 흉물스러운 폐허였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리 조각 사이로 비치는 붉은색.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 아니, 어쩌면 함정.

    민준은 손에 든 녹슨 칼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손아귀에서 불안하게 떨렸다. 저곳에 무엇이 있을까? 먹을 것? 아니면 또 다른 죽음?

    그는 숨을 죽이고, 건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색은 선명해졌다. 부서진 상점 간판 아래, 진열장이 통째로 엎어져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마네킹의 잘린 팔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 옆에, 찌그러진 캔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통조림 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지막 한 조각의 이성마저 놓아버릴 것 같은 충동.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쉽게 얻어지는 것은 언제나 가장 위험한 함정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묘한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썩어가는 단내. 오래된 통조림에서 나는 냄새일까, 아니면 이 근처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걸까.

    점점 더 가까이. 캔은 마치 그를 유혹하는 빛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막 움켜쥐려는 순간,

    *콰앙!*

    머리 위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마치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날아오는 파편들을 막기 위해 팔을 들었다.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무엇인가가 붕괴했다. 아니면… 공격받은 것인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지 속을 응시했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었다. 귓가에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먼지 구름이 조금 걷히자, 보였다.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린 자리, 그 검은 구멍 사이로 흐릿한 형체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그리고 그 형체가 지나간 뒤, 무너진 천장 잔해 위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

    굶주림에 지친 맹수의 눈빛.
    아니, 그보다 더 섬뜩하고, 광기 어린, 인간의 눈빛이었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캔은 여전히 바닥에 놓여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저 위,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그 존재에 집중되어 있었다.

    생존.
    그것은 곧 사냥꾼이 되거나, 사냥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명백히 후자였다.
    이 잿빛 숨결 속에서, 또 한 번의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니, 밤이 아니었다.
    이것은… 새벽이었다.
    생존의 새벽, 혹은 죽음의 서막.

  • 스팀펑크 만화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 웹툰 에피소드 스토리 대본: [증기 속의 칼날] 1화 – 재의 서곡

    **[장면 1: 어둠 속의 기계음]**

    **컷 1:**
    * **배경:** 지하 깊숙이 자리한 낡고 거대한 작업실. 천장에 뻗은 굵은 증기 파이프들은 녹슬어 있고, 바닥은 기름때와 먼지로 뒤덮여 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빛을 반사하는 정교한 황동 기계 부품들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톱니바퀴들이 기이한 생명력을 뿜어낸다. 공기는 기름 냄새와 뜨거운 증기 냄새가 뒤섞여 텁텁하다.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한 사내가 거대한 작업대 앞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하고 있다.
    * **인물:** 카인. 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한쪽 팔은 섬세하고 강력한 증기식 기계팔이다. 낡은 가죽 에이프런 위로 드러난 그의 어깨와 등 근육이 단단하다.
    * **효과음:** 칙- 칙- (증기 분출음), 쾅- 쾅- (망치 소리), 드르륵- 드르륵- (톱니바퀴 마찰음)

    **컷 2:**
    * **배경:** 카인의 손이 클로즈업된다. 금속으로 된 손가락들이 놀랍도록 정교하게 작은 스프링과 태엽들을 조립하고 있다. 손톱 끝에는 기름때가 검게 박혀 있지만, 움직임은 더없이 섬세하다.
    * **카인 (독백):** “재가 될 줄 알았던 이 몸뚱이가… 기어이 다시 심장을 울리는구나.”

    **컷 3:**
    * **배경:** 카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다. 깊게 패인 미간 주름과, 무엇보다 차갑게 타오르는 두 눈빛이 그의 고통과 결의를 동시에 보여준다. 한쪽 눈썹 위에는 오래된 듯한 흉터가 길게 그어져 있다.
    * **카인 (독백):** “네가 나를 진흙탕 속에 처박았을 때, 나는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지.”
    * **효과음:** 스윽- 스윽- (금속 부품을 다듬는 소리)

    **컷 4:**
    * **배경:** 작업대 위에 놓인, 이제 막 형태를 갖춰가는 정교한 기계장치. 주먹만 한 크기에 황동과 강철로 이루어져 있으며, 수많은 톱니바퀴와 증기 밸브들이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다. 마치 작은 새처럼 보이기도, 아니면 치명적인 무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 **카인 (독백):** “하지만 고통은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증오는 나를 일으켰어.”

    **[장면 2: 과거의 환영 (플래시백)]**

    **컷 5:**
    * **배경:** (회상)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밝고 활기찬 연구실. 지금의 카인 작업실과는 대조적으로 깨끗하고 미래 지향적인 분위기다. 거대한 설계도가 펼쳐진 탁자 주위로 온갖 기계 부품들이 즐비하다.
    * **인물:** 앳된 모습의 젊은 카인과 시온. 둘 다 미소 짓고 있다. 카인은 지금보다 훨씬 순수하고 열정적인 표정이고, 시온은 빛나는 눈으로 카인을 바라보고 있다.
    * **시온 (젊은):** “카인! 봐, 이 엔진이라면 정말 하늘을 나는 도시를 만들 수 있을 거야!”
    * **카인 (젊은):** “하늘의 지배자가 되는 거지, 시온! 우리 둘이 함께라면 불가능은 없어!”
    * **효과음:** 딩동댕- (밝고 희망찬 기계음)

    **컷 6:**
    * **배경:** 시온이 환하게 웃으며 카인의 어깨를 굳게 붙잡는 모습. 둘의 눈빛은 꿈과 야망으로 가득하다. 뒤편으로 ‘에테르 추진기’라고 쓰인 거대한 설계도가 보인다.
    * **시온 (젊은):** “우리가 세상을 바꿀 거야, 친구! 인류에게 새로운 시대를 열어줄 거라고!”
    * **카인 (젊은):** “그래, 시온! 영원히 함께!”

    **컷 7:**
    * **배경:** (급전환, 색감이 어둡게 변한다.) 번개처럼 빠르게 시온의 미소가 섬뜩한 야욕으로 뒤바뀐다. 그의 손에 쥐어진, 날카로운 금속 조각이 카인의 등으로 향하는 듯한 잔인한 이미지.
    * **시온 (속삭이듯):** “영원히? 아니, 나 혼자서.”
    * **효과음:**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 쩡-! (유리 깨지는 소리)

    **컷 8:**
    * **배경:** 불꽃이 사방으로 튀고,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굉음을 내며 파괴되는 혼돈 속. 카인이 피를 흘리며 깊은 구덩이 속으로 추락하는 모습이 빠르게 지나간다. 그의 눈동자에 배신감과 고통이 가득하다. 시온의 비열한 웃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떠오른다.
    * **카인 (비명):** “시… 시온…!”
    * **효과음:** 콰아아앙-! (폭발음), 으아아아악-! (카인의 비명), 지이잉- (잔혹한 기계음)

    **[장면 3: 복수의 서막]**

    **컷 9:**
    * **배경:** 다시 현재의 작업실. 카인이 완성된 기계장치를 묵묵히 응시한다. 그것은 마치 금속으로 빚어진 독수리 같기도 하고, 정교한 시한폭탄 같기도 하다. 빛을 받아 번쩍이는 황동 재질의 몸체와 날카로운 강철 발톱이 인상적이다.
    * **카인 (독백):** “네가 나를 산산조각 냈을 때, 너는 나의 꿈까지 함께 묻었다고 생각했겠지.”

    **컷 10:**
    * **배경:** 카인의 기계팔이 완성된 장치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칙- 하는 소리와 함께 장치 내부의 증기 밸브들이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은 렌즈 같은 부분이 섬뜩하게 빛을 발한다.
    * **카인 (독백):** “하지만 그 꿈은 죽지 않았어. 복수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을 뿐.”
    * **효과음:** 지이잉- (기계가 가동되는 섬세한 소리), 칙- (증기 흡입음)

    **컷 11:**
    * **배경:** 카인이 완성된 장치를 높이 든다. 그의 눈빛은 더없이 차갑고 단호하다. 작업실 천장의 작은 통풍구가 열리고, 외부의 어두운 도시 풍경이 희미하게 비친다.
    * **카인:** “시작이다, 시온.”
    * **효과음:** 스윽- (통풍구 열리는 소리), 휘이잉- (바람 소리)

    **[장면 4: 부유하는 도시, 시온의 영지]**

    **컷 12:**
    * **배경:** 밤하늘을 가르는 웅장한 부유 도시 ‘크로노스’. 수많은 증기선들이 도시 사이를 오가고, 건물들은 휘황찬란한 램프 불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높고 화려한, 첨탑 형태의 건물 ‘에테르 첨탑’이 독보적인 위용을 자랑한다. 도시 전체가 시온의 권력을 상징하는 듯하다.
    * **효과음:** 붕- (도시의 거대한 엔진음), 솨아아- (수많은 증기선 소리), 웅성웅성- (도시의 소음)

    **컷 13:**
    * **배경:** 에테르 첨탑 최상층, 시온의 개인 사무실. 황금과 황동으로 장식된 화려한 인테리어, 천장까지 닿는 거대한 통유리창 너머로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값비싼 서류들이 쌓여있는 거대한 원목 탁자, 푹신한 가죽 의자 등 모든 것이 부와 권력을 과시한다.
    * **인물:** 시온. 그는 지금 카인이 만들었던 설계도를 응용하여 만들어진 ‘에테르 비행선’ 축소 모형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다. 얼굴에는 성공한 자의 여유로움과 함께 감출 수 없는 냉기가 흐른다.
    * **효과음:** 드르륵- (모형 움직이는 소리), 사각사각- (서류 넘기는 소리)

    **컷 14:**
    * **배경:** 시온이 최고급 증기압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휘황찬란한 도시로 향하지만, 그 눈빛은 어딘가 공허하고 만족할 줄 모르는 갈증을 담고 있다.
    * **시온:** “신제품 ‘천공 요새’ 출시 준비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겠지? 이번엔 정말… 완벽해야 해.”
    * **비서 (말풍선 밖):** “네, 사장님.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 **효과음:** 꿀꺽- (커피 마시는 소리), 짤랑- (스푼 소리)

    **컷 15:**
    * **배경:** 시온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입가에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지만, 눈빛은 차갑고 계산적이며, 한편으로는 과거의 잔재를 짓밟으려는 듯한 잔혹함이 스쳐 지나간다.
    * **시온 (독백):** ‘이 도시 전체가… 내 손 안에 들어와야 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장면 5: 첫 번째 접촉]**

    **컷 16:**
    * **배경:** 어둠이 깔린 크로노스 도시 상공, 에테르 첨탑 외벽을 따라 정교한 기계장치들이 얽혀 있다. 그 사이로 카인이 보낸 소형 기계장치, 작은 기계새가 거의 소리 없이 날아오른다. 황동 날개가 증기압으로 움직이며 번뜩인다.
    * **효과음:** 쉬이익- (기계새 날아가는 소리), 칙- (작은 증기 분출음)

    **컷 17:**
    * **배경:** 기계새가 시온의 사무실 통유리창에 조용히 다가선다. 창문 너머로 시온의 뒷모습이 보인다. 그는 여전히 탁자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다.
    * **효과음:** 스윽- (기계새 착륙 소리)

    **컷 18:**
    * **배경:** 기계새의 눈(렌즈)을 통해 본 시온의 사무실. 시온은 아무것도 모른 채 거만한 표정으로 설계도를 보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과거 카인과 함께 나눴던 꿈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 **카인 (독백, 기계새의 시점과 함께):** “네가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너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고 있어.”

    **컷 19:**
    * **배경:** 다시 카인의 작업실. 어둠 속에서 카인이 복잡한 인터페이스가 장착된 고글을 쓰고 있다. 고글 속에는 기계새의 시야가 그대로 투영되고 있고, 시온의 모습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번진다. 기계팔이 천천히 다음 단계의 장치를 향해 움직인다.
    * **카인:** “이 모든 게 시작일 뿐이야, 시온.”

    **[장면 6: 떡밥 투척/클리프행어]**

    **컷 20:**
    * **배경:** 시온의 사무실. 시온이 문득 고개를 들고 창밖을 응시한다. 그는 도시의 밤 풍경을 훑어보지만,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인 듯 미간을 찌푸린다. 그는 기계새를 발견하지 못한다.
    * **시온:** (작게 읊조리듯) “왠지… 오늘따라 기분이 묘하군. 마치… 오래된 그림자라도 드리워진 것 같아.”
    * **효과음:** 스산한 바람 소리.

    **컷 21:**
    * **배경:** 카인의 작업실. 카인이 고글을 벗고, 옆에 놓인 거대한 천을 걷어낸다. 그 아래에는 지금껏 만든 기계새보다 훨씬 크고 강력해 보이는, 섬뜩한 모양의 증기 동력 드릴 장치가 드러난다. 날카로운 드릴 날들이 금속의 번쩍임을 뿜어낸다.
    * **카인:**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은… 나의 불꽃으로 재가 될 것이다.”
    * **효과음:** 지이잉- (거대한 기계의 저음), 콰직- (드릴이 돌아가는 소리)

    **컷 22:**
    * **클로즈업:** 카인의 기계팔이 드릴 장치를 꽉 움켜쥐는 모습. 황동과 강철이 맞물린 손가락들이 섬뜩하게 빛을 반사한다.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복수심만이 가득하다.
    * **내레이션:** “기억해라, 시온. 땅속에 묻었던 것은… 씨앗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 **[1화 끝]**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을 흩뿌리는 그랑볼룸 앞에서, 차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 펼쳐진 붉은 카펫은 그녀의 낡은 검은색 구두와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3년 전,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을 때조차 그녀는 이런 종류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화려함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꿈을, 그녀의 기술을, 그녀의 열정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차지우 씨, 잠시만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키 큰 남자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눈에는 대놓고 경멸이 서려 있었다.

    “초대장 보여주시겠습니까? 이 행사는 초청받은 VIP만 입장 가능합니다.”

    지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VIP. 그녀의 아이디어를, 그녀의 피땀을 고스란히 훔쳐 자신들의 것으로 둔갑시킨 이선우와 강준혁이 지금 저 안에서 VIP 대접을 받고 있겠지. 그녀는 굳이 초대장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없다.

    “없습니다.” 지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럼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돌아가라고? 3년 동안 이를 갈고 버텨온 시간을 고작 저런 말 한마디로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나. 차지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돌아가기엔, 제가 좀 멀리서 왔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른하면서도 묘하게 끈적한 목소리.

    “저분이 멀리서 오셨다는데, 돌려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남자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지우 역시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회색 수트를 흠잡을 데 없이 차려입은 한 남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날렵한 콧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이었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경호원은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한… 한민준 대표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한민준 대표. 그 이름은 지우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업계에서 떠오르는 신성, 젊은 나이에 뛰어난 수완으로 여러 기업을 집어삼켰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

    한민준은 경호원의 말을 뚝 자르고 지우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만이네요, 차지우 씨. 설마 제 파트너를 못 알아보셨을 리가.”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파트너?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호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민준은 빙긋 웃으며 지우의 어깨를 살짝 밀어 문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에서 묘한 전율이 흘렀다. “괜찮아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제가 굳이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죠.”

    문이 닫히자마자, 지우는 한민준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지금 저한테 무슨 장난을 치시는 겁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라뇨. 아름다운 분이 입구에서 곤경에 처해 있길래, 잠시 도와드린 것뿐인데요. 그리고, 저 경호원분한테 제가 차지우 씨를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면 좀 곤란하잖아요? 제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격인데.”

    그의 능청스러움에 지우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고맙습니다.” 지우는 짧게 인사했다.

    “천만에요. 이제부터 시작될 일이 훨씬 더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볼룸 안쪽,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는 이선우와 강준혁에게로 향했다. “설마 그저 구경만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지우는 한민준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선우는 몸에 딱 붙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강준혁의 옆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혁신을 넘어, 미래를 담다’라는 거창한 문구가 쓰인 스크린이 보였다. 그녀의 프로젝트명이었다.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3년 전, 그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 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사랑했던 연인의 변절.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밤의 차지우가 아니었다.

    “구경이요? 저는 이 쇼의 주인공을 만나러 온 겁니다.” 지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한민준은 그녀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네요. 저도 이 쇼의 관객 중 한 명으로서, 당신이 어떤 쇼를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선우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볼룸 가득 울려 퍼졌다.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바로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혁신적인 프로젝트, ‘시그니처’를 선보이기 위함입니다!”

    ‘시그니처’. 그래, 그것도 그녀가 지은 이름이었다.

    선우의 말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지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USB를 꽉 움켜쥐었다. 이것이 오늘 그녀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시그니처 프로젝트의 핵심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담긴 USB. 물론, 선우가 발표할 그 파일과는 미묘하게 다른 파일이었다.

    “준혁 씨, 이제부터는 준혁 씨가 직접 저희 ‘시그니처’의 놀라운 기능을 시연해주시겠어요?” 선우가 강준혁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강준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준혁입니다. 저희 ‘시그니처’는 인공지능 기반의…”

    그가 시연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지우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틈을 타, 재빨리 연단 뒤편에 설치된 메인 콘솔 박스 쪽으로 움직였다. 복잡한 선들과 장비들 사이에서, 그녀는 능숙하게 손을 놀려 미리 준비해둔 USB를 연결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초 만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돌아오자 한민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벌써 끝난 건가요?”

    지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죠.”

    스크린에 강준혁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나타났다. 매끄러운 영상과 그래프들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지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작동할 시간이었다.

    강준혁이 ‘시그니처’의 핵심 AI 기능 시연을 위해 특정 버튼을 누르는 순간, 스크린이 갑자기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검은 화면 끝에, 엉뚱한 이미지가 깜빡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은 강준혁과 이선우가 아직 신입사원이었을 때, 회사 워크숍에서 만취해 서로에게 춤을 추며 장난치던 모습이 담긴, 촌스럽기 그지없는 옛날 사진이었다. 그것도, 당시 지우의 카메라로 찍힌 사진.

    사진은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스쳤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장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게 뭐야?”
    “프레젠테이션 오류인가?”
    “설마 저 둘이…”

    강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선우 역시 동그란 눈으로 스크린을 노려봤다. 둘 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그것도 가장 볼품없던 시절의 ‘흑역사’가 한순간 비쳤다는 사실에 경악한 듯했다. 다행히 바로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지만, 이미 분위기는 살짝 균열이 생긴 뒤였다.

    “음, 예상치 못한 기술적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강준혁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그의 손은 마이크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의심의 그림자를 읽어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차지우에게 닿았다.

    지우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마치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한, 조용하지만 단호한 선전포고.

    선우의 눈빛이 지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섬뜩한 분노가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한민준은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지우의 미소를 보며 옅게 웃었다.

    지우는 그들의 표정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아직은 아주 작은 조약돌 하나 던졌을 뿐인데, 저렇게 동요하다니.

    ‘선우야, 준혁아. 잘 봤니?’

    그녀의 눈빛은 불타는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이제 시작이야. 너희가 쌓아 올린 모래성은 내가 아주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무너뜨려줄 테니까.’

  • 심리 스릴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1화: 잿빛 숨결**

    창문 없는 콘크리트 잔해 속에서 눈을 떴다. 희미한 새벽빛이 갈라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무수히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들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고 있었다. 축축한 냉기가 뼈를 파고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온몸의 근육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며칠째 제대로 된 한 끼를 먹지 못했다. 위장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바싹 마른 입 안으로 퍼졌다.

    민준은 더러운 헝겊 조각으로 만든 임시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웅크렸다. 등 뒤에 기댄 벽은 한때 누군가의 안락한 보금자리였을 텐데, 지금은 그저 차갑고 거친 돌덩이에 불과했다. 그의 유일한 동반자는 허공에 맴도는 먼지, 그리고 끝없이 옥죄어오는 고독이었다. 바깥세상은 더욱 냉혹했다. 어쩌면 그 어떤 유령보다도.

    숨을 길게 내쉬었다. 폐는 텁텁한 공기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쓸어보니, 거뭇거뭇한 흙먼지와 수염이 뒤섞여 피부를 덮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거울을 본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이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 멀쩡한 사람의 얼굴을 한 자신은 이미 죽어버린 과거의 잔해였다.

    가방을 뒤적였다. 낡고 해진 배낭 속에는 겨우 손바닥만 한 깡통 하나와 절반쯤 남은 물통, 그리고 녹슨 칼 한 자루가 전부였다. 이마를 짚었다. 오늘 점심은 또 무엇으로 때워야 할까. 아니, 오늘을 넘길 수나 있을까. 이 잿빛 도시에서, 먹을 것을 찾는다는 건 곧 죽음과 맞닿아 있었다.

    창틀 밖을 내다봤다. 무너진 건물들의 실루엣이 스모그 낀 하늘 아래 웅장하면서도 스산하게 서 있었다. 멀리 떨어진 빌딩의 뼈대에는 기이한 형태로 자라난 철골들이 마치 거대한 괴물의 척추처럼 솟아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찢겨진 현수막 조각들이 나부꼈고, 그 펄럭이는 소리는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살아남은 자들에게, 죽은 자들의 도시가 보내는.

    “젠장.”

    민준은 낮게 욕을 읊조렸다. 배는 고팠고, 목은 말랐다. 그러나 더 고통스러운 것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이 상황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자신의 의지였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그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다만, 멈출 수 없을 뿐이었다. 굶주림은 그 어떤 철학보다도 강력한 동기였다.

    문고리가 떨어져 나간 철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삐걱이는 쇠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길게 울려 퍼졌다. 혹시 모를 누군가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소리일까 봐, 그는 순간 숨을 멈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먼지 섞인 침묵만이 그를 에워쌌다.

    바닥에 깔린 잔해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복도였을 이 공간은 이제 폐허 그 자체였다. 깨진 유리 조각, 부서진 가구의 파편들, 알 수 없는 얼룩들.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었을까. 어떤 희망을 품었을까. 이젠 모든 것이 사라지고, 그들의 흔적만이 먼지 속에 묻혀 있었다.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갔다. 한 층, 또 한 층. 빛이 닿지 않는 어둠 속에서, 그는 오직 감각에 의존했다. 손바닥으로 차가운 난간을 더듬고, 발바닥으로 삐걱이는 계단 층계의 균열을 느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 공포는 익숙하면서도, 언제나 새롭게 느껴졌다. 어딘가에서 불쑥 튀어나올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 혹은 그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섬뜩한 깨달음.

    마침내 1층 로비에 다다랐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 있었고, 외부의 황량한 풍경이 그대로 들어왔다. 먼지로 뒤덮인 카운터와 부서진 의자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였을 공간은 이제 죽은 듯 고요했다.

    “오늘은 저쪽으로 가봐야겠어.”

    민준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제와는 다른 방향. 이 폐허가 된 도시에서, 그나마 ‘덜’ 뒤져본 곳을 찾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자원 고갈은 단순한 물자 부족을 넘어, 인간의 정신을 갉아먹는 치명적인 독이었다. 희망이 사라질 때, 인간은 무엇이 되는가. 그는 그 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콘크리트 조각과 뒤섞인 흙길을 걸었다. 텅 빈 거리에는 그의 발소리만이 메아리쳤다. 멀리서 들려오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날카롭고 건조한 소리였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한데 모아 터뜨리는 비명처럼.

    갑자기, 그의 눈이 한 곳에 멈췄다. 오래된 상가 건물. 여느 건물들과 다름없이 흉물스러운 폐허였지만, 희미하게 빛나는 무엇인가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리 조각 사이로 비치는 붉은색.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희망. 아니, 어쩌면 함정.

    민준은 손에 든 녹슨 칼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칼날은 그의 손아귀에서 불안하게 떨렸다. 저곳에 무엇이 있을까? 먹을 것? 아니면 또 다른 죽음?

    그는 숨을 죽이고, 건물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붉은색은 선명해졌다. 부서진 상점 간판 아래, 진열장이 통째로 엎어져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마네킹의 잘린 팔이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팔 옆에, 찌그러진 캔 하나가 빛나고 있었다.

    통조림 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지막 한 조각의 이성마저 놓아버릴 것 같은 충동.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주변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쉽게 얻어지는 것은 언제나 가장 위험한 함정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한 발짝씩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먼지 냄새와 함께 묘한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썩어가는 단내. 오래된 통조림에서 나는 냄새일까, 아니면 이 근처에 뭔가 다른 것이 있는 걸까.

    점점 더 가까이. 캔은 마치 그를 유혹하는 빛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막 움켜쥐려는 순간,

    *콰앙!*

    머리 위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렸다. 마치 건물이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였다. 민준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날아오는 파편들을 막기 위해 팔을 들었다.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무엇인가가 붕괴했다. 아니면… 공격받은 것인가?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먼지 속을 응시했다. 심장이 발광하듯 뛰었다. 귓가에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먼지 구름이 조금 걷히자, 보였다.

    천장 일부가 무너져 내린 자리, 그 검은 구멍 사이로 흐릿한 형체가 스쳐 지나가는 것이.

    그리고 그 형체가 지나간 뒤, 무너진 천장 잔해 위에서 번뜩이는 두 개의 눈동자.

    굶주림에 지친 맹수의 눈빛.
    아니, 그보다 더 섬뜩하고, 광기 어린, 인간의 눈빛이었다.

    민준은 얼어붙었다. 캔은 여전히 바닥에 놓여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의 모든 감각은 저 위,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그 존재에 집중되어 있었다.

    생존.
    그것은 곧 사냥꾼이 되거나, 사냥감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명백히 후자였다.
    이 잿빛 숨결 속에서, 또 한 번의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아니, 밤이 아니었다.
    이것은… 새벽이었다.
    생존의 새벽, 혹은 죽음의 서막.

  • 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제1장. 속삭이는 유적, 검은 심장**

    카엘은 낡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바스락거리는 덩굴을 헤치며 나아갔다. 수천 년 전, 위대한 마법사들의 문명이 정점에서 몰락했던 ‘침묵의 대지’ 가장자리에 위치한 이 속삭이는 유적은 대개 버려진 채였다. 이곳에 발을 들이는 이들은 대개 카엘처럼, 부서진 유물 조각이나 드물게 자라는 약초를 찾아 헤매는 고물상 아니면 목숨을 내던질 준비가 된 어리석은 모험가들뿐이었다.

    오늘 카엘의 목표는 ‘그림자 쐐기풀’이었다. 끓는 독성이 깃들어 있어 숙련된 약사만이 해독할 수 있는 치명적인 식물이지만, 제대로 가공하면 찰나의 마법적 능력을 증폭시키는 귀한 촉매가 되었다. 한 달치 식량을 벌기 위해선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할 가치가 충분했다.

    “젠장, 여기도 없군.”

    카엘은 땀으로 젖은 이마를 훔치며 중얼거렸다. 쐐기풀은 습하고 그늘진 곳을 선호했지만, 오늘따라 그의 감각은 어딘가 잘못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는 낡은 지도를 펼쳐 들었지만, 종이 위의 희미한 선들은 이 거대한 폐허 속에서 아무런 길잡이도 되어주지 못했다. 그의 눈은 저절로 지도의 가장자리에 흐릿하게 그려진, ‘경고’ 표식과 함께 ‘미답지’라 쓰인 구역에 닿았다. 그곳은 침묵의 대지에서도 가장 깊숙하고 위험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의 발걸음은 그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이끌리듯, 카엘은 부서진 돌기둥과 무너진 아치형 통로를 지나 걷고 또 걸었다. 이내 거대한 회색 암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암벽 한가운데에는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여 알아볼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런 곳에 이런 벽이…?”

    카엘은 돌벽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촉감 너머로 아주 희미하게, 맥박 같은 것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는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다가 문득 멈춰 섰다. 다른 돌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틈이 있는 곳이었다. 손가락으로 그 틈을 더듬어보니, 굳게 맞물려 있던 돌덩이 하나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호기심이 그의 경계심을 앞질렀다.

    “이거 설마…?”

    그는 온 힘을 다해 돌덩이를 밀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묵직한 돌덩이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고, 그 뒤로 어둠에 잠긴 통로가 드러났다. 안에서는 눅눅하고 오래된 흙먼지 냄새가 풍겨왔다.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곳. 카엘은 망설이다가, 허리춤의 작은 등불을 꺼내 불을 밝혔다.

    등불의 희미한 불빛이 통로의 끝을 밝히자,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예상 밖이었다. 작은 원형의 방. 그 방 한가운데에는 돌로 된 제단이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아무런 장식도 없이 투박하게 박혀 있는 검은 돌 조각 하나가 전부였다. 먼지조차 앉지 않은 듯 깔끔한 모습에 오히려 소름이 돋았다.

    카엘은 조심스럽게 제단에 다가섰다. 검은 돌 조각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현무암처럼 보였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가자, 돌 조각에서 아주 미약하게, 그러나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무언가처럼, 조용히 숨 쉬고 있는 듯했다.

    “이게… 뭐지?”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검은 돌 조각에 닿았다.

    그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등불의 불꽃은 길게 흔들리더니 이내 꺼져버렸다. 어둠 속에서 오직 검은 돌 조각만이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검은색 심장이 고동치듯, 맥박에 맞춰 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그 빛은 그의 손을 타고 팔을 지나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카엘은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차가움과 동시에, 끓어오르는 듯한 뜨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것은 고통이라기보다는, 차원 전체가 뒤틀리는 듯한 격렬한 감각이었다. 그의 머릿속으로 수많은 영상과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고대 언어의 속삭임, 별들이 폭발하고 은하가 탄생하는 장엄한 풍경, 그리고 무엇보다 강렬하게, 어떤 존재의 깊고 슬픈 울림이 전해져왔다.

    —*망각의 심연에서, 너는 깨어나리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의 의식 깊은 곳에서 울렸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환상은 검은 돌 조각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수많은 별들이 그의 몸을 통과해 지나갔다. 그리고 그 모든 혼란 속에서, 카엘은 한 단어를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에테르.*

    온몸의 세포가 새롭게 태어나는 듯한 느낌.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끝에서 희미한 검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그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그의 손을 감싸더니, 작은 빛의 구체가 되어 방 안을 유영했다. 그 구체가 제단의 돌벽에 닿자, 낡은 돌덩이들은 마치 물엿처럼 흐물거리더니 순식간에 재로 변해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카엘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작은 마법의 불꽃이, 수천 년 된 돌을 한 줌 재로 만들어버리다니.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이건 그가 알던 어떤 마법과도 달랐다. 원소를 다루거나 정신을 조종하는 마법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을 뒤흔드는 듯한 느낌.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제단에서 떼어냈다. 검은 돌 조각은 다시 빛을 잃고 평범한 현무암 조각으로 돌아간 듯 보였다. 하지만 카엘의 몸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의 피부 아래에서 희미한 검은 실핏줄이 돋아난 것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그는 손바닥을 들어 올려 유심히 바라봤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그 안에서 이전과는 다른, 거대한 힘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발견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고대 문명의 잊혀진 마법, 아니 어쩌면 그 근원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 힘은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너무나도 위험했다.

    갑자기, 방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돌 벽에서 쩌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엘이 검은 돌 조각에 손을 댔을 때 방출된 에너지 때문인 걸까? 아니면 이 힘의 각성이 주변의 잠들어 있던 기운을 깨운 것일까?

    천장에서 작은 돌멩이들이 떨어져 내렸다. 그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본능적인 경고를 느꼈다. 그는 마지막으로 검은 돌 조각을 바라봤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그 작은 조각이, 지금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음을 직감했다.

    “젠장… 이걸 어쩌면 좋지?”

    그는 검은 돌 조각을 제단 위에 그대로 둔 채, 무너져 내리는 통로를 향해 황급히 몸을 돌렸다. 방금 그가 경험한 것은 환상이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시작의 서막일까? 카엘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안고, 바깥세상의 빛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려 나갔다. 그의 등 뒤에서는 고대 유적이 거대한 포효와 함께 서서히 붕괴되고 있었다.

  • 타임슬립 (시간여행)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강렬한 섬광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낡은 시계추가 째깍이는 소리가 갑자기 거슬릴 정도로 증폭되더니, 모든 소음이 뚝 끊긴 듯한 착각에 빠졌다. 강민준은 삐걱이는 마룻바닥에 선 채 눈앞의 풍경이 잠시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마치 낡은 비디오테이프가 재생되다 순간적으로 멈춰 섰다가, 느리게 역재생되는 것처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정경위의 경직된 목소리가 현실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민준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뒤틀렸던 시야는 제자리를 찾았고, 멍하니 천장을 보던 정경위의 얼굴에는 여전히 당혹감이 가득했다. 시계는 다시 평범하게 째깍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가 멎자 실내는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밀실입니다.”

    옆에 선 이형사가 짧게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단정적인 어조가 섞여 있었지만, 그 안에 숨겨진 깊은 좌절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이형사와 다르지 않은 결론에 도달했다. 아니, 어쩌면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명확하게.

    거대한 저택의 서재는 그야말로 완벽한 밀실이었다. 창문은 안쪽에서 걸쇠로 굳게 잠겨 있었고, 육중한 나무 문 또한 안쪽에서 빗장이 내려져 있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선 경찰들에 의해 빗장은 이미 부서진 상태였지만, 최초 발견 당시의 증언은 일관적이었다. “안에서 잠겨 있었습니다.”

    방 한가운데, 호화로운 양탄자 위에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앙상하게 마른 박도준 씨의 시신이 엎드려 있었다. 그의 등에는 서재 장식용으로 쓰이던, 날카로운 은제 서신 개봉용 칼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칼자루에는 희미하게 박도준 씨의 지문이 남아 있었지만, 이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자살일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치명상을 스스로 찌른 후, 그 자리에서 바로 쓰러졌다면 몰라도… 칼이 너무 깊숙이 박혔습니다. 게다가 박도준 씨는 심장 질환을 앓고 계셨어요. 격한 움직임이나 고통을 감당할 몸이 아니셨습니다.”

    민준은 말없이 시신 주위를 맴돌았다. 눈은 허공을 응시하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방 안의 모든 것에 닿아 있었다. 앤티크한 책장들, 먼지 앉은 고서들, 벽난로 위의 낡은 도자기.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들.

    “방 안에는 다른 침입 흔적도 전혀 없습니다. 천장이나 바닥, 벽에도 아무런 구멍이나 통로가 없어요. 에어컨 환기구는 사람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좁고요. 완벽합니다. 범인이 어떻게 이 방을 잠그고 밖으로 나갔을까요?” 정경위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말했다.

    민준은 천천히 방문으로 다가갔다. 부서진 빗장 너머, 문고리에 대롱거리는 열쇠가 눈에 들어왔다. “열쇠는 어디서 발견됐습니까?”

    “저기에 걸려 있었습니다.” 이형사가 문고리를 가리켰다. “박도준 씨가 평소에 사용하시던 서재 열쇠입니다. 방 안에서 잠겨 있던 문에, 열쇠까지 안쪽에 걸려 있었다니… 도저히 말이 안 됩니다.”

    이형사의 설명을 들으며 민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문고리에 걸린 열쇠를 만져보았다. 묵직한 금속의 감촉.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열쇠 구멍 주변에 보이지 않는 먼지들이 제자리를 이탈하려는 듯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잠시만.’

    민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시야가 다시 한번 흐려지려는 찰나, 그는 필사적으로 정신을 집중했다. 모든 감각이 하나의 점으로 수렴하는 듯한 기분. 삐걱이는 마룻바닥 소리, 이형사의 거친 숨소리, 정경위의 웅얼거림. 모든 것이 희미해지고, 오직 서재의 문과 열쇠만이 선명하게 부각되었다.

    그리고 보았다.

    마치 시간이 반대 방향으로 되감기는 환영처럼, 그의 눈앞에서 아주 짧고, 찰나의 순간이 재생되었다. 열쇠 구멍에 무언가 길고 가느다란 것이 삽입되었다가, 번개처럼 빠르게 빠져나가는 모습. 그리고 그 순간, 안쪽에서 잠겨 있던 문이 스르륵,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장면. 너무나 빠르고 정교해서 보통의 시야로는 절대 포착할 수 없는 움직임.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에 시린 공기가 가득 찼다. 그의 능력이 순간적으로 보여준 ‘진실’은, 완벽한 밀실의 허점을 꿰뚫어 보게 했다.

    “박도준 씨는 살해당한 후, 범인이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잠근 것이 아닙니다.” 민준이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본 자의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정경위와 이형사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정경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민준은 천천히 문고리에 걸린 열쇠를 가리켰다. “열쇠는 범인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사용된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열쇠로 문을 잠그지 않았어요.”

    그는 문 옆에 서서, 이형사에게 손전등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문을 닫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자, 방 안은 더욱 고립된 느낌을 주었다.

    “이 문은 안에서 빗장으로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범인은 이 빗장을 밖에서 조작해 잠그고, 열쇠로 잠그는 척 했던 겁니다.”

    “네? 밖에서 빗장을요?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이형사가 눈살을 찌푸렸다.

    “불가능해 보이죠.” 민준은 창가로 다가섰다. 그는 굳게 잠긴 창문의 걸쇠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창틀의 아주 미세한 틈을 손전등으로 비췄다. “하지만, 사실 이 방의 창문은 완벽하게 잠겨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의 손전등 불빛 아래, 창틀과 창문 틈새에 아주 희미한 스크래치 자국이 보였다. 너무나도 옅고 가늘어서, 대충 보아서는 그저 낡은 창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흠집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민준의 눈에는 달랐다. 그의 뇌리에 스쳤던 그 ‘환영’이 스크래치의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었다.

    “이 스크래치는 안쪽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 밖에서 무언가를 밀어 넣어 생긴 흔적입니다. 아주 가늘고 단단한 물체. 아마도 와이어나 특수 제작된 도구였겠죠.”

    민준은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된 것을 확인하고는 말을 이었다.

    “범인은 이 창문의 아주 작은 틈새를 이용했습니다. 창문은 안에서 걸쇠로 잠겨 있었지만, 그 틈새로 충분히 얇고 긴 도구를 밀어 넣어 안쪽 빗장이나 걸쇠를 풀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은 있었을 겁니다. 아니, 풀기보다는… 조작할 수 있는 정도의 공간이요.”

    이형사가 창문으로 다가와 스크래치 자국을 면밀히 살폈다. 그의 눈이 이내 경악으로 휘둥그래졌다. “이건… 정말입니다. 아주 미세한 홈이 파여 있습니다. 외부에서 억지로 밀어 넣으려 한 흔적이에요!”

    “네. 범인은 밖에서 그 도구를 이용해 창문 안쪽 걸쇠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잠갔죠.” 민준이 덧붙였다.

    정경위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민준을 보았다. “아니, 그럼 다시 잠글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냥 열고 들어와 살해한 뒤, 나가면서 창문으로 도망치면 되지 않습니까?”

    “그랬다면 밀실이 아니었을 겁니다.” 민준은 피식 웃었다. “범인의 목표는 완벽한 밀실을 만들어 완전범죄를 가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살해 후 도망치는 데 급급했다면 이런 정교한 트릭을 쓰지 않았겠죠.”

    그는 다시 문 앞으로 돌아왔다. “범인은 먼저 박도준 씨를 살해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때, 문은 아직 빗장이 내려져 있지 않았겠죠. 밖으로 나간 범인은 문을 닫고, 열쇠 구멍을 통해 다시 특수 제작된 도구를 삽입했습니다.”

    민준은 허공에 손가락으로 가느다란 선을 그렸다. “얇고 탄성이 좋은, 예를 들면 강철 와이어 같은 것이었을 겁니다. 이 도구로 열쇠 구멍을 통해 안쪽 빗장을 조작했습니다. 빗장을 위로 올려 잠근 겁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열쇠 구멍으로 빗장을 조작합니까? 각도가 안 나올 텐데요!” 이형사가 소리쳤다.

    “보통의 빗장이라면 어렵죠. 하지만 이 서재의 문 빗장은 어떻습니까?” 민준은 이형사를 돌아보았다. “꽤 오래된 방식의 빗장입니다. 옆으로 슬라이드 해서 잠그는 형태가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 꽂는 형태의 빗장이에요.”

    이형사는 부서진 빗장 부분을 확인했다. 민준의 말대로, 빗장은 위에서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와 문을 잠그는 방식이었다.

    “그럼… 범인은 그 가느다란 도구를 열쇠 구멍으로 밀어 넣어, 위에서 아래로 내려 꽂는 빗장을 밀어 올려 잠그고, 다시 도구를 빼낸 뒤, 열쇠를 문고리에 걸어둔 채 도주했다는 말입니까?” 정경위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거의 비슷합니다.”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범인은 문고리에 열쇠를 걸어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설픈 방법으로 밀실을 꾸미지는 않았을 겁니다. 열쇠는 이 안에 있었습니다.”

    그는 탁자 위, 박도준 씨의 시신 옆에 떨어진 낡은 책 한 권을 발끝으로 가리켰다. 책 사이에는 얇은 틈이 보였다.

    “범인은 밖에서 도구로 빗장을 내려 잠근 후, 그 도구를 열쇠 구멍을 통해 다시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구의 끝부분으로 이 열쇠를 건드려, 마치 안에서 열쇠가 저절로 떨어진 것처럼 가장한 겁니다.”

    정경위와 이형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민준과 열쇠, 그리고 책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잠시만요.” 이형사가 말했다. “열쇠 구멍으로 도구를 넣고 빗장을 잠근 다음, 그 도구로 열쇠를 탁자 위에서 떨어뜨린다고요? 그리고 그 도구는 어디로 갔습니까?”

    “열쇠 구멍은 도구가 빠져나올 정도로 충분히 컸으니까요.” 민준은 빙긋 웃었다. “범인은 도구로 열쇠를 떨어뜨린 후, 그 도구를 다시 열쇠 구멍 밖으로 빼냈습니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라졌겠죠. 완벽하게 잠긴 밀실만을 남겨둔 채.”

    그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정경위와 이형사의 얼굴에는 경악과 함께 깊은 감탄이 서렸다. 그들은 지금껏 보지 못했던 방식으로, 완벽한 밀실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를 목도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 밀실 살인 사건의 트릭은 다음과 같습니다. 범인은 먼저 피해자를 살해합니다. 밖으로 나간 뒤, 특수 제작된 얇은 도구를 열쇠 구멍에 넣어 안쪽의 빗장을 잠급니다. 그리고 다시 그 도구로 열쇠를 건드려, 마치 안에서 떨어진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창문 역시 안에서 잠겨 있던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 이전에 풀었던 창문 걸쇠를 밖에서 다시 조작해 잠근 것입니다. 모든 것은 안에서 잠겨 있던 완벽한 밀실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치밀한 연극이었죠.”

    민준은 서재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혼란스럽게 엉켜 있던 조각들이 정확하게 맞춰졌다. 찰나의 환영이, 그의 ‘천재적인’ 통찰력을 완성시켰다.

    “범인은 아마 박도준 씨의 생활 습관이나 이 서재의 구조, 잠금장치의 형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인물일 겁니다. 그리고 이런 특수 도구를 제작하거나 구할 수 있는 능력도 갖추었겠죠.”

    정경위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형사는 허탈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민준 탐정님… 정말이지… 당신은 천재입니다.”

    민준은 그저 희미하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의 뇌리 속에서는, 다음 사건의 미스터리가 찰나의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그가 걸어가는 길 위에는 언제나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또다시 그 ‘특별한’ 눈으로, 감춰진 진실의 틈새를 찾아낼 터였다.

  • 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을 흩뿌리는 그랑볼룸 앞에서, 차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 펼쳐진 붉은 카펫은 그녀의 낡은 검은색 구두와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3년 전,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을 때조차 그녀는 이런 종류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화려함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꿈을, 그녀의 기술을, 그녀의 열정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차지우 씨, 잠시만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키 큰 남자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눈에는 대놓고 경멸이 서려 있었다.

    “초대장 보여주시겠습니까? 이 행사는 초청받은 VIP만 입장 가능합니다.”

    지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VIP. 그녀의 아이디어를, 그녀의 피땀을 고스란히 훔쳐 자신들의 것으로 둔갑시킨 이선우와 강준혁이 지금 저 안에서 VIP 대접을 받고 있겠지. 그녀는 굳이 초대장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없다.

    “없습니다.” 지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럼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돌아가라고? 3년 동안 이를 갈고 버텨온 시간을 고작 저런 말 한마디로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나. 차지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돌아가기엔, 제가 좀 멀리서 왔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른하면서도 묘하게 끈적한 목소리.

    “저분이 멀리서 오셨다는데, 돌려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남자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지우 역시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회색 수트를 흠잡을 데 없이 차려입은 한 남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날렵한 콧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이었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경호원은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한… 한민준 대표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한민준 대표. 그 이름은 지우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업계에서 떠오르는 신성, 젊은 나이에 뛰어난 수완으로 여러 기업을 집어삼켰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

    한민준은 경호원의 말을 뚝 자르고 지우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만이네요, 차지우 씨. 설마 제 파트너를 못 알아보셨을 리가.”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파트너?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호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민준은 빙긋 웃으며 지우의 어깨를 살짝 밀어 문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에서 묘한 전율이 흘렀다. “괜찮아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제가 굳이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죠.”

    문이 닫히자마자, 지우는 한민준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지금 저한테 무슨 장난을 치시는 겁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라뇨. 아름다운 분이 입구에서 곤경에 처해 있길래, 잠시 도와드린 것뿐인데요. 그리고, 저 경호원분한테 제가 차지우 씨를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면 좀 곤란하잖아요? 제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격인데.”

    그의 능청스러움에 지우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고맙습니다.” 지우는 짧게 인사했다.

    “천만에요. 이제부터 시작될 일이 훨씬 더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볼룸 안쪽,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는 이선우와 강준혁에게로 향했다. “설마 그저 구경만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지우는 한민준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선우는 몸에 딱 붙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강준혁의 옆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혁신을 넘어, 미래를 담다’라는 거창한 문구가 쓰인 스크린이 보였다. 그녀의 프로젝트명이었다.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3년 전, 그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 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사랑했던 연인의 변절.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밤의 차지우가 아니었다.

    “구경이요? 저는 이 쇼의 주인공을 만나러 온 겁니다.” 지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한민준은 그녀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네요. 저도 이 쇼의 관객 중 한 명으로서, 당신이 어떤 쇼를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선우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볼룸 가득 울려 퍼졌다.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바로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혁신적인 프로젝트, ‘시그니처’를 선보이기 위함입니다!”

    ‘시그니처’. 그래, 그것도 그녀가 지은 이름이었다.

    선우의 말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지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USB를 꽉 움켜쥐었다. 이것이 오늘 그녀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시그니처 프로젝트의 핵심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담긴 USB. 물론, 선우가 발표할 그 파일과는 미묘하게 다른 파일이었다.

    “준혁 씨, 이제부터는 준혁 씨가 직접 저희 ‘시그니처’의 놀라운 기능을 시연해주시겠어요?” 선우가 강준혁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강준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준혁입니다. 저희 ‘시그니처’는 인공지능 기반의…”

    그가 시연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지우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틈을 타, 재빨리 연단 뒤편에 설치된 메인 콘솔 박스 쪽으로 움직였다. 복잡한 선들과 장비들 사이에서, 그녀는 능숙하게 손을 놀려 미리 준비해둔 USB를 연결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초 만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돌아오자 한민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벌써 끝난 건가요?”

    지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죠.”

    스크린에 강준혁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나타났다. 매끄러운 영상과 그래프들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지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작동할 시간이었다.

    강준혁이 ‘시그니처’의 핵심 AI 기능 시연을 위해 특정 버튼을 누르는 순간, 스크린이 갑자기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검은 화면 끝에, 엉뚱한 이미지가 깜빡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은 강준혁과 이선우가 아직 신입사원이었을 때, 회사 워크숍에서 만취해 서로에게 춤을 추며 장난치던 모습이 담긴, 촌스럽기 그지없는 옛날 사진이었다. 그것도, 당시 지우의 카메라로 찍힌 사진.

    사진은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스쳤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장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게 뭐야?”
    “프레젠테이션 오류인가?”
    “설마 저 둘이…”

    강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선우 역시 동그란 눈으로 스크린을 노려봤다. 둘 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그것도 가장 볼품없던 시절의 ‘흑역사’가 한순간 비쳤다는 사실에 경악한 듯했다. 다행히 바로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지만, 이미 분위기는 살짝 균열이 생긴 뒤였다.

    “음, 예상치 못한 기술적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강준혁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그의 손은 마이크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의심의 그림자를 읽어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차지우에게 닿았다.

    지우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마치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한, 조용하지만 단호한 선전포고.

    선우의 눈빛이 지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섬뜩한 분노가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한민준은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지우의 미소를 보며 옅게 웃었다.

    지우는 그들의 표정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아직은 아주 작은 조약돌 하나 던졌을 뿐인데, 저렇게 동요하다니.

    ‘선우야, 준혁아. 잘 봤니?’

    그녀의 눈빛은 불타는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이제 시작이야. 너희가 쌓아 올린 모래성은 내가 아주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무너뜨려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