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시간의 틈, 잊힌 숲의 부름**
“젠장, 또 지각이야!”
서하는 휴대폰 액정을 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미 빨간색 경고등이 번쩍이는 지각 알림창이 그녀를 반겼다. 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이 볼에 달라붙었고, 발은 아스팔트 바닥에 닿는 순간마다 고통을 호소했다. 서른 살, 평범한 직장인. 매일 반복되는 야근과 회식, 그리고 이 빌어먹을 출근 전쟁. 서하의 삶은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에 갇혀 끊임없이 돌아가는 부품 같았다.
오늘따라 유독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어젯밤, 퇴근길 지하철에서 만난 고양이의 눈빛 때문일까. 잿빛 눈동자 속에는 왠지 모를 깊은 슬픔이 담겨 있었고, 그 눈빛은 퇴근 후 텅 빈 방에 홀로 남겨진 자신의 모습과 겹쳐지는 듯했다.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겨우 눈을 붙였건만, 알람 소리는 늘 야속하게 울려 퍼졌다.
사무실에 도착해 겨우 책상에 앉자마자 부장은 서류 더미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서하 씨, 이것들 오늘까지 끝내야 하는 거 알죠? 저녁에 회식 있으니 늦지 말고.”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비명을 억지로 삼키며 서하는 억지 미소를 지었다. ‘내가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 거지?’ 늘 마음속을 맴도는 질문이었다.
퇴근 후 회식은 지옥 같았다. 억지로 넘기는 술잔과 듣기 싫은 농담들. 간신히 비틀거리며 지하철역을 나왔을 때, 이미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도심의 불빛에 가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 문득, 어릴 적 할머니 댁 마당에서 쏟아질 듯 빛나던 별들이 생각났다. 그때의 자신은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한 아이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메마르고 지쳐버렸을까.
별이 보고 싶었다. 도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문득, 충동적으로 발길을 돌렸다. 늘 가던 집 방향이 아닌, 도시 외곽의 작은 야산 쪽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지만, 어릴 적 한 번쯤 친구들과 담력 체험을 갔다가 길을 잃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그곳이라면 어쩌면, 희미하게라도 별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가로등 하나 없는 숲길은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다. 휴대폰 플래시를 켜고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흙냄새, 풀냄새, 그리고 이름 모를 야생화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도시의 인공적인 냄새에 익숙해져 있던 서하의 폐는 숲의 신선한 공기에 금세 편안해졌다. 조금 더, 조금 더 깊이 들어갔다. 별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발밑에 밟히는 흙과 나뭇가지의 감각이 점점 더 익숙지 않은 느낌으로 변해갔다. 이 길은 분명 예전에 와본 적이 없는 길이었다. 숲은 더욱 울창해졌고, 나무들은 하늘을 가릴 듯이 거대했다. 저 멀리, 희미한 달빛 아래 무언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서하는 홀린 듯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헙 들이켰다.
고대 신전의 문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돌기둥 두 개가 솟아 있었고, 그 위를 육중한 돌이 이어 거대한 아치형 문을 이루고 있었다. 이끼와 넝쿨이 뒤엉켜 있었지만, 그 웅장함은 감출 수 없었다. 돌기둥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형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서하가 손을 대자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희미한 푸른빛을 내며 꿈틀거리는 듯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아니라, 미약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오묘한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이게… 대체 뭐지?”
누가 이런 곳에 이런 것을 만들었을까. 서울 근교에 이런 유적이 숨어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동시에,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이 서하의 발걸음을 문 안쪽으로 향하게 했다. ‘돌아가야 해’라는 이성이 경고했지만, ‘이 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호기심이 그녀를 지배했다.
한 발자국, 다시 한 발자국. 거대한 아치 문 안으로 들어섰다.
순간, 세상이 일그러졌다.
시야가 회오리치고, 모든 소리가 뒤섞이며 거대한 폭풍처럼 서하의 몸을 감쌌다. 눈앞에 펼쳐진 푸른빛은 너무나 강렬해서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치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격렬한 혼란. 온몸의 세포가 분해되었다가 다시 재조립되는 듯한 고통에 서하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시간이 찢어지고, 공간이 해체되는 듯한 아찔한 감각.
그리고, 모든 것이 멎었다.
몸을 가득 채웠던 고통과 혼란이 사라지고, 마치 깊은 물속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고요한 평온이 찾아왔다. 서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여, 여긴… 어디지?”
몸은 흙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머리 위로는 빽빽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사이로 비치는 햇살은 도시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황금빛으로 부서지는 빛은 마치 태고의 신비로운 힘을 머금은 듯했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 또한 달랐다. 눅진한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짙은 꽃향기가 강렬하게 폐부를 파고들었다.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은 멜로디처럼 아름다웠고,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는 서늘한 긴장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주변의 풍경이었다. 눈앞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마치 살아있는 탑처럼 솟아 있었고, 뿌리는 땅 위로 뱀처럼 엉켜 있었다. 나무줄기는 아름다운 무늬로 뒤덮여 있었고, 나뭇잎들은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법한 영롱한 빛을 뿜어냈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도 낯설고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행성에 불시착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세운 서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까 자신이 들어왔던 돌문은 온데간데없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돌문 자리에 거대한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말도 안 돼… 꿈인가?”
뺨을 꼬집었다. 아팠다. 명백히 현실이었다. 공포가 목구멍을 옥죄어왔다. 자신이 알던 세상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패닉에 빠져 사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문득 등골을 서늘하게 만드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 바람 소리조차 잦아든 고요 속에서, 멀리 떨어진 거대한 고목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키는 인간보다 훨씬 컸고, 어둠 속에서도 또렷이 빛나는 두 눈은 마치 맹수의 그것처럼 날카롭고 강렬했다. 밤하늘을 닮은 검은 머리카락은 길게 허리까지 흘러내렸고, 매끈하게 빠진 근육질의 몸은 간소한 가죽 옷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의 손에는 끝이 날카로운 창이 들려 있었는데, 그 창 끝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분명했다.
그의 얼굴은 조각상처럼 완벽했지만, 그 완벽함 속에는 인간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함과 오만함, 그리고 야생의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 굳게 다문 입술, 그리고 서하를 꿰뚫어 보는 듯한 금빛 눈동자.
그의 눈이 서하에게 고정되자, 서하의 심장은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맹수에게 포착된 작은 토끼처럼, 온몸의 근육이 경직되고 피가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낮은 목소리였지만, 숲의 모든 소리를 압도하는 듯한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인간… 감히 이 숲에 발을 들인 더러운 존재여.”
그의 목소리에는 차가운 경멸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서하는 온몸으로 그의 적대감을 느꼈다. 위험했다. 이곳은 자신이 알던 세상이 아니었고, 이 존재는 자신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힘을 가진 존재였다.
“누, 누구세요… 여긴 대체 어디죠?”
서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공포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을 찾아 대답을 갈구했다.
그는 피식, 하고 짧게 비웃었다. 그의 눈빛은 서하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이 숲의 주인에게, 감히 질문을 하다니. 너는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이물질이다.”
그가 한 발자국, 서하를 향해 다가왔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숲의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듯했다. 그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서하는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등 뒤로는 거대한 나무가 가로막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야. 감히 금지된 경계를 넘어선 죄, 네 목숨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그의 창 끝이 서하의 목을 겨눴다. 푸른빛이 더욱 선명하게 빛났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하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금빛 눈동자 속에는, 맹렬한 살기 외에 아주 희미하게, 서하 자신도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호기심일까, 아니면…
서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았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이상하게, 그녀의 시선은 그의 금빛 눈동자에 갇혔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면서도, 그 속에서 왠지 모를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
이 금지된 숲에서, 종족을 뛰어넘은 첫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직감했다. 이 만남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것을.
자신은 이제 결코, 원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