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거대한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신 빛을 흩뿌리는 그랑볼룸 앞에서, 차지우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발밑에 펼쳐진 붉은 카펫은 그녀의 낡은 검은색 구두와 어울리지 않는 사치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3년 전, 이 모든 것이 그녀의 것이었을 때조차 그녀는 이런 종류의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애초에, 화려함 따윈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그녀의 꿈을, 그녀의 기술을, 그녀의 열정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었을 뿐이었다.

“차지우 씨, 잠시만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짙은 남색 유니폼을 입은 키 큰 남자가 팔짱을 끼고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그의 눈에는 대놓고 경멸이 서려 있었다.

“초대장 보여주시겠습니까? 이 행사는 초청받은 VIP만 입장 가능합니다.”

지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VIP. 그녀의 아이디어를, 그녀의 피땀을 고스란히 훔쳐 자신들의 것으로 둔갑시킨 이선우와 강준혁이 지금 저 안에서 VIP 대접을 받고 있겠지. 그녀는 굳이 초대장을 꺼내지 않았다. 어차피 없다.

“없습니다.” 지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럼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죄송하지만, 돌아가 주십시오.”

돌아가라고? 3년 동안 이를 갈고 버텨온 시간을 고작 저런 말 한마디로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았나. 차지우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돌아가기엔, 제가 좀 멀리서 왔거든요.”

“무슨 말씀이신지…” 남자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나른하면서도 묘하게 끈적한 목소리.

“저분이 멀리서 오셨다는데, 돌려보내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남자가 놀라 뒤를 돌아봤다. 지우 역시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짙은 회색 수트를 흠잡을 데 없이 차려입은 한 남자가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머리카락, 날렵한 콧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꿰뚫어 보는 듯한 깊은 눈이었다. 그는 이 상황이 아주 재미있다는 듯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경호원은 그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허리를 90도로 숙였다. “한… 한민준 대표님! 어쩐 일로 이 시간에…”

한민준 대표. 그 이름은 지우에게도 낯설지 않았다. 업계에서 떠오르는 신성, 젊은 나이에 뛰어난 수완으로 여러 기업을 집어삼켰다는 소문이 자자한 남자.

한민준은 경호원의 말을 뚝 자르고 지우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오랜만이네요, 차지우 씨. 설마 제 파트너를 못 알아보셨을 리가.”

지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파트너? 이 남자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죄,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대표님!” 경호원이 식은땀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한민준은 빙긋 웃으며 지우의 어깨를 살짝 밀어 문 안으로 안내했다. 그의 손이 닿은 어깨에서 묘한 전율이 흘렀다. “괜찮아요.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 제가 굳이 따로 소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죠.”

문이 닫히자마자, 지우는 한민준을 향해 작게 속삭였다. “지금 저한테 무슨 장난을 치시는 겁니까?”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여전히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라뇨. 아름다운 분이 입구에서 곤경에 처해 있길래, 잠시 도와드린 것뿐인데요. 그리고, 저 경호원분한테 제가 차지우 씨를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면 좀 곤란하잖아요? 제 명성에 먹칠을 하는 격인데.”

그의 능청스러움에 지우는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덕분에 들어올 수 있었으니,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 고맙습니다.” 지우는 짧게 인사했다.

“천만에요. 이제부터 시작될 일이 훨씬 더 흥미로울 것 같은데요.” 그의 시선이 볼룸 안쪽, 화려한 조명 아래 서 있는 이선우와 강준혁에게로 향했다. “설마 그저 구경만 하러 오신 건 아닐 테고.”

지우는 한민준의 시선을 따라갔다. 이선우는 몸에 딱 붙는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강준혁의 옆에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는 ‘혁신을 넘어, 미래를 담다’라는 거창한 문구가 쓰인 스크린이 보였다. 그녀의 프로젝트명이었다.

가슴에서 불길이 치솟는 듯했다. 3년 전, 그들이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그 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 사랑했던 연인의 변절.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그 밤의 차지우가 아니었다.

“구경이요? 저는 이 쇼의 주인공을 만나러 온 겁니다.” 지우의 눈빛이 싸늘하게 빛났다.

한민준은 그녀의 말에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네요. 저도 이 쇼의 관객 중 한 명으로서, 당신이 어떤 쇼를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선우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볼룸 가득 울려 퍼졌다. “저희가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바로 3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혁신적인 프로젝트, ‘시그니처’를 선보이기 위함입니다!”

‘시그니처’. 그래, 그것도 그녀가 지은 이름이었다.

선우의 말에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 지우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작은 USB를 꽉 움켜쥐었다. 이것이 오늘 그녀가 준비한 작은 선물이었다. 시그니처 프로젝트의 핵심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담긴 USB. 물론, 선우가 발표할 그 파일과는 미묘하게 다른 파일이었다.

“준혁 씨, 이제부터는 준혁 씨가 직접 저희 ‘시그니처’의 놀라운 기능을 시연해주시겠어요?” 선우가 강준혁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강준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안녕하십니까, 강준혁입니다. 저희 ‘시그니처’는 인공지능 기반의…”

그가 시연을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지우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틈을 타, 재빨리 연단 뒤편에 설치된 메인 콘솔 박스 쪽으로 움직였다. 복잡한 선들과 장비들 사이에서, 그녀는 능숙하게 손을 놀려 미리 준비해둔 USB를 연결했다. 그리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빠르게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초 만에 이루어졌다.

그녀가 돌아오자 한민준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벌써 끝난 건가요?”

지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죠.”

스크린에 강준혁이 준비한 프레젠테이션 화면이 나타났다. 매끄러운 영상과 그래프들이 이어졌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였다. 지우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녀의 손길이 닿은 부분이 작동할 시간이었다.

강준혁이 ‘시그니처’의 핵심 AI 기능 시연을 위해 특정 버튼을 누르는 순간, 스크린이 갑자기 지지직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초간의 검은 화면 끝에, 엉뚱한 이미지가 깜빡하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그것은 강준혁과 이선우가 아직 신입사원이었을 때, 회사 워크숍에서 만취해 서로에게 춤을 추며 장난치던 모습이 담긴, 촌스럽기 그지없는 옛날 사진이었다. 그것도, 당시 지우의 카메라로 찍힌 사진.

사진은 너무나 짧은 시간 동안 스쳤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도 장내에는 미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내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저게 뭐야?”
“프레젠테이션 오류인가?”
“설마 저 둘이…”

강준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렸다. 선우 역시 동그란 눈으로 스크린을 노려봤다. 둘 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 그것도 가장 볼품없던 시절의 ‘흑역사’가 한순간 비쳤다는 사실에 경악한 듯했다. 다행히 바로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지만, 이미 분위기는 살짝 균열이 생긴 뒤였다.

“음, 예상치 못한 기술적 오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강준혁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사과했지만, 그의 손은 마이크를 꽉 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의심의 그림자를 읽어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저 멀리 사람들 틈에 서 있는 차지우에게 닿았다.

지우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을 향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섬뜩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마치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한, 조용하지만 단호한 선전포고.

선우의 눈빛이 지우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혼란스러움과 함께 섬뜩한 분노가 그녀의 눈동자를 물들였다.

한민준은 이 모든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는 지우의 미소를 보며 옅게 웃었다.

지우는 그들의 표정에서 만족감을 느꼈다. 아직은 아주 작은 조약돌 하나 던졌을 뿐인데, 저렇게 동요하다니.

‘선우야, 준혁아. 잘 봤니?’

그녀의 눈빛은 불타는 복수심으로 가득했다.

‘이제 시작이야. 너희가 쌓아 올린 모래성은 내가 아주 천천히, 조용히, 그리고 아주 처절하게 무너뜨려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