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의 서막 (균열의 서막)
밤은 차가웠지만, 이 공간만큼은 뜨거웠다. 샹들리에의 황금빛이 수십 개의 크리스털을 타고 쏟아져 내리는 연회장은 성공과 환희로 가득했다. 잘 다려진 최고급 정장들이 촘촘히 박힌 보석처럼 반짝였고, 잔잔한 재즈 선율 위로 가식적인 웃음소리가 꽃잎처럼 흩어졌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박태준이 있었다.
나는 샴페인 잔을 든 채, 그림자처럼 연회장 한구석에 서 있었다. 사람들은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나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나 이지훈은 이제 그들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태준은 단상 위에 서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성공한 사업가의 자신감과 젊은 경영인의 패기가 번들거렸다. 오늘 밤은 그가 설립한 IT 기업 ‘제우스 엔터프라이즈’가 창립 10주년을 맞이하는 동시에, 새로운 글로벌 투자 유치에 성공했음을 알리는 축하연이었다. 억 소리 나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그의 모습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 모든 영광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지난 10년간 함께 땀 흘려준 우리 제우스 엔터프라이즈의 모든 임직원 여러분, 그리고 언제나 저를 믿고 지지해준 소중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스포트라이트가 태준의 눈부신 미소를 비췄다. 그의 빛나는 모습이 내 눈을 찔렀다. 10년. 그래, 정확히 10년이었다. 그의 성공의 밑바탕에는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 연회장에 있는 단 한 명의 인간도 알지 못했다. 아니, 태준 자신조차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을 터였다.
나는 손 안의 잔을 꽉 쥐었다. 차가운 유리가 손바닥에 파고드는 감각이 몽롱하게 피어나는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주었다. 내 눈빛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오직 태준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너의 빛나는 제국에 균열을 내는 일. 나는 10년 동안 이 순간만을 위해 이를 갈아왔다. 너의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나 자신까지 기꺼이 진흙탕에 던져 넣었다.
귓가에 샴페인 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잔을 천천히 기울여 달콤쌉싸름한 액체를 목으로 넘겼다. 그 맛은 마치 내 10년 전 청춘의 쓰디쓴 잔재 같았다.
나는 태준의 연설이 끝나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을 타 움직였다. 군중 속으로 스며들어, 그의 주변을 맴도는 몇몇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태준의 성공담, 뛰어난 수완, 천재적인 비전. 온통 칭찬 일색이었다. 역겨웠다.
그때, 저 멀리서 한 중년 남성이 태준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그는 대기업 ‘한성 그룹’의 실장이었고, 이번 투자 유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태준은 능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그에게 웃어 보였다.
“최 실장님, 오늘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제우스가 날개를 달게 되었습니다.”
“박 대표님이야말로 대단하십니다. 이 젊은 나이에 이런 기업을 일궈내시고. 그런데 혹시, 예전에 제가 박 대표님께 드렸던 자료, 아직 가지고 계십니까?” 최 실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말씀드렸던… ‘넥서스 프로젝트’ 관련해서 말입니다.”
태준의 얼굴에 스쳐 지나가는 아주 미세한 경련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넥서스 프로젝트’. 그래,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너는 잠시 흔들렸구나.
태준은 이내 능숙하게 미소를 되찾았다. “아, 네. 물론입니다. 최 실장님께서 주셨던 소중한 자료는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언제든 다시 검토할 시간이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최 실장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사실 요즘 업계에서 그 프로젝트가 다시 화두에 오르고 있더군요. 오래된 이야기지만, 워낙 파급력이 컸던 건이라… 박 대표님이라면 그 잠재력을 충분히 끌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둘은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졌다. 태준은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웃음을 지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 속에서 방금 전 스쳐 지나간 불안감을 똑똑히 보았다. 내 첫 번째 씨앗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것이다.
‘넥서스 프로젝트’. 그건 10년 전, 내가 밤낮없이 매달렸던 꿈이었다. 태준과 내가 함께 만들었던, 우리의 미래였다. 우리는 그 프로젝트를 들고 여러 투자사를 전전했고, 마침내 한성 그룹의 최 실장에게서 작은 희망을 보았다. 그는 우리의 열정에 공감하며, 관련 자료와 함께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 태준은 나를 버렸다. 나의 모든 아이디어를 훔쳐 달아나, 마치 자신의 것인 양 포장하여 사업을 시작했다. 그게 지금의 ‘제우스 엔터프라이즈’였다. ‘넥서스 프로젝트’는 그의 성공을 위한 발판으로 찢겨 흩어졌고, 나는 철저히 이용당하고 버려졌다.
나는 그날 이후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사람들은 내가 실패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태준조차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을 뿐이었다. 추락한 폐허 속에서, 나는 너의 제국을 무너뜨릴 설계도를 밤낮으로 그려나갔다.
이제, 최 실장은 우연찮게, 혹은 내가 만들어낸 작은 우연 속에서 잊혔던 단어를 다시 꺼냈다. ‘넥서스 프로젝트’의 재조명. 그게 태준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아마도 불안과 과거의 그림자겠지.
나는 조용히 연회장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태준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나는 그의 시야에 닿지 않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한 인물에게 다가갔다. 그는 이정우 변호사였다. 태준의 회사 법률 고문을 맡고 있는 인물로, 태준과는 대학 동창이기도 했다.
“이 변호사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 변호사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실례지만…?”
“10년 전, 잠시 박 대표님과 사업을 함께 했던 이지훈입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10년 전의 나는 초라한 대학생이었다. 지금의 나는…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었다. 잘 재단된 슈트, 절제된 표정, 그리고 이제는 깊이를 알 수 없게 된 눈빛.
“아… 이지훈 씨. 정말 오랜만이네요.” 그는 어색하게 웃었다. “박 대표도 오랜만에 이지훈 씨를 보면 정말 반가워할 겁니다. 어쩌다 여기에…?”
“최근에 제가 작은 투자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이번에 제우스와 협력할 가능성이 있을까 해서요.” 나는 거짓말을 태연하게 지껄였다. “근데 아까 박 대표님께서 최 실장님과 ‘넥서스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아직도 그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계셨나 보네요. 제가 알기론 상당히 난해하고… 당시에는 좀 무모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했는데.”
이 변호사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그 프로젝트요… 사실 태준이가 그 프로젝트 때문에 꽤나 마음고생이 심했습니다. 결국 잘 되진 못했지만… 그때 태준이가 이지훈 씨 일 때문에도 충격이 컸던 걸로 압니다. 갑자기 사라져버려서 말이죠.”
나는 속으로 비웃었다. ‘마음고생’? ‘충격’? 가증스러운 위선이었다.
“아… 그랬군요. 저는 그때 개인적인 사정이 좀 있어서. 죄송하게 됐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데 제가 당시 태준이가 그 프로젝트를 위해 준비했던 자료들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도움이 될 만한 부분이 있을까 해서요. 물론, 전부 제 개인적인 생각과 아이디어가 담긴 자료들이지만요.”
이 변호사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내 말의 의미를 단번에 파악했을 터였다. 오래된 자료, 개인적인 아이디어. 태준이 제우스 엔터프라이즈를 세우는 데 발판이 되었던 ‘넥서스 프로젝트’의 ‘원본’ 자료들. 그건 태준의 기업 정체성, 나아가 그의 도덕성 전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위험한 증거였다.
“이… 이지훈 씨. 그 자료들을… 혹시 아직도 가지고 계신 겁니까?” 그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섞였다.
“네. 제가 직접 작성한 것들이라, 워낙 아끼던 것들이어서요. 혹시 태준이가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공유할 의향이 있습니다.” 나는 친절하게 웃어 보였다. 마치 아무런 악의도 없는, 순수한 의도로 말하는 것처럼.
이 변호사는 얼굴이 굳어졌다. “아… 네. 제가 태준이에게 한번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나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즐거운 밤 보내십시오, 변호사님.”
나는 이 변호사에게서 등을 돌려 다시 군중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과 당혹감이 뒤섞인 시선이었다.
이윽고, 태준이 이 변호사에게 다가가 말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이 변호사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태준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태준의 얼굴에서 조금 전까지의 여유가 일순간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에 동요가 번졌다. 나를 발견한 것도 아닌데, 그의 눈은 불안하게 연회장 곳곳을 훑었다.
나는 태준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 그러나 그를 똑똑히 볼 수 있는 곳에 멈춰 섰다. 내 입술에는 한 줄기 차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10년 전, 너는 나를 짓밟고 일어섰다. 내 꿈을 찢어 발기고, 내 존재를 지워버렸다. 하지만 이제, 네가 애써 묻었던 과거의 그림자가 다시 너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네가 쌓아 올린 이 빛나는 성은 이제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균열이 가기 시작할 테니까.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네가 한순간의 실수로 나를 잊어버린 대가. 이제부터 네 모든 것을 빼앗아 갈 나의 정교한 복수극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나는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제 곧, 태준의 빛나는 미소는 거짓된 가면 아래 숨겨진 공포로 변할 것이다.
나는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태준아, 이제야 놀이가 시작되었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