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복판이었다. 창밖으로는 솜털처럼 부드러운 눈송이들이 쉴 새 없이 내려앉아 세상을 온통 순백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지붕 위에도, 마당의 늙은 감나무 가지 위에도, 그리고 오래된 돌담에도 차곡차곡 쌓인 눈은 숨 막힐 듯 고요한 아름다움을 선사했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하늘의 마음은 폭풍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손에 든 낡은 편지봉투 때문이었다.
편지는 준에게서 온 것이었다. 십 년,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더 긴 세월 동안 이름조차 입에 올리지 못하고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름이었다. 마지막 기억은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바로 이 창가에서, 어린 준과 하늘이 서로의 작은 손을 마주 잡고, 처음 내리던 눈꽃을 바라보며 속삭였던 약속.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 다시 꼭 만나자.” 어린아이의 순진한 맹세였지만, 그 약속은 하늘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단단한 기둥이었다. 그리고 그 기둥이, 지금 이 편지 한 장으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열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필체. 준은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글씨체에는 붓을 다루는 예술가의 섬세함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 하늘은 숨을 들이켰다. ‘하늘아, 이 편지가 네게 닿을 때쯤이면, 나는 아마…’
할머니는 부엌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생강차를 내어 오셨다. 따뜻한 찻잔이 하늘의 차가운 손에 닿았다. 할머니는 아무 말 없이 하늘의 옆에 앉아 창밖의 눈을 응시했다. 무릎에 놓인 편지를 힐끗 보시더니, 가늘게 떨리는 하늘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왔구나. 올 것이 왔어.” 할머니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속에는 오랜 기다림과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너는 그 아이가 너를 잊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을 게다. 그 약속을.”
하늘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할머니의 말은 언제나 옳았다. 준이 그 약속을 잊었을 리 없었다. 문제는 준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했는지, 그리고 하늘 자신이 그 약속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는지였다.
편지 속 준의 문장들은 마치 눈밭에 새겨진 발자국처럼 선명했다. 그는 병을 앓고 있었다. 오랫동안 숨겨왔던 병이었다. 예술가로서의 삶, 자유로운 영혼을 사랑했던 준이기에, 그 병은 그에게 죽음보다 더한 족쇄였을 터였다. 그는 자신을 옭아맬 병마로부터 하늘을 보호하기 위해 사라졌다고 했다. 이제야,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되어, 마지막 용기를 내어 편지를 썼다고.
‘나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오래 걸어왔어, 하늘아. 하지만 단 한순간도 너를 잊은 적 없어.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 그 약속만이 나를 살게 했어.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었지만, 너는 행복해야 해. 나를 미워해도 좋아. 아니, 제발 나를 미워하고 잊어줘. 그래야 네가 더 잘 살 수 있을 테니까.’
하늘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미워하라고? 잊으라고?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인가. 그의 편지는 용서를 구하는 대신 이별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것은 준다운 이기적인 배려이자, 하늘에게는 가장 잔인한 상처였다.
“그 아이는 항상 그랬지. 자기 방식대로 너를 보호하려 들었어. 비록 그것이 너를 더 아프게 할지라도.” 할머니는 하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네가 선택할 차례다. 그의 말대로 잊을 것인지, 아니면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할 것인지.”
하늘은 품에서 오래된 은목걸이를 꺼냈다. 작은 눈꽃 모양의 펜던트. 준이 직접 깎아서 준 것이었다. ‘다음에 눈이 오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그 약속은 준에게는 마지막 메시지였고, 하늘에게는 영원한 족쇄였다. 그녀는 이 목걸이를 품고 수많은 겨울을 보냈고, 수많은 눈을 맞았다. 매번 눈이 내릴 때마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준도 자신을 기억할 것이라 믿었다.
이제야 알았다. 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홀로, 외롭게.
편지의 마지막 문장이 하늘의 눈에 들어왔다. ‘나는 지금, 우리가 약속했던 그 숲 속 오두막에 있어. 마지막 눈꽃이 내리는 날까지, 너를 기다릴게. 다만, 오지 않아도 돼. 그저 네가 편안하기를 바랄 뿐이야.’
하늘은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 오지 말라고 말하면서 기다리겠다는 이 모순적인 말. 그것은 준의 마지막 희망이자, 하늘에게 던지는 간절한 구원이었다. 숲 속 오두막. 그곳은 어릴 적 두 사람만의 비밀 장소였다. 처음으로 손을 잡고 눈을 맞았던 곳. 약속을 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가야겠어요.” 하늘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할머니, 저 가야겠어요.”
할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해라. 후회는 만들지 않는 것이니.”
하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랜 시간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일순간 사라지는 듯했다. 혹은, 그 짐을 기꺼이 다시 짊어질 준비가 된 것일지도 몰랐다.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눈은 계속 내리고 있었다. 어쩌면 준이 말한 ‘마지막 눈꽃이 내리는 날’이 바로 오늘일지도 몰랐다.
그녀는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를 둘렀다. 장갑을 끼고, 신발 끈을 단단히 묶었다. 모든 움직임이 결연했다. 십 년 동안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듯했다. 약속은 깨지지 않았다. 약속은 다만, 그 의미를 바꾸어 더 깊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발아래 쌓인 눈은 푹신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한결같이 곧았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멀리 숲으로 난 길은 희미했지만, 그녀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었다. 마음속에 새겨진 지도가 있었으니까. 그 길 끝에는 겨울 눈꽃이 내리던 날의 약속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왔던 한 남자가.
하늘은 눈발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의 발걸음마다 새로운 눈꽃이 그녀의 흔적을 덮었다. 마치 과거의 모든 슬픔을 지우고, 새로운 약속을 향해 나아가는 듯했다. 숲이 가까워질수록, 그녀의 심장은 더욱 격렬하게 울렸다. 준이, 그곳에 있을까? 그 약속을 아직도 붙들고 있을까? 아니, 설령 준이 그곳에 없더라도, 하늘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약속을 지키러 가는 중이었으니까. 그녀만의 방식으로.
눈발은 더욱 거세졌다. 세상은 온통 하얀 휘장으로 덮였다. 그 휘장 너머에서, 어떤 운명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하늘은 이제 더 이상 도망치지 않을 것이었다. 준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도 자신의 운명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숲 속 깊은 곳, 작고 낡은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 그녀는 멈추지 않고 걸어갔다. 약속의 끝자락, 혹은 새로운 시작을 향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