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 제224화

밤의 장막이 서울을 고요히 감싸고, 도시의 불빛은 하늘의 별들을 삼키려 애썼다. 하지만 이 밤, 여기 지상 22층에 자리한 작은 스튜디오 안에서는 또 다른 우주가 펼쳐지고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헤드폰, 따뜻한 온기를 내뿜는 믹싱 콘솔, 그리고 그 앞에 앉은 남자의 잔잔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밤하늘 아래 수많은 이들의 귓가에 닿았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지우입니다. 오늘도 잠 못 이루는 당신의 밤을 밝혀줄 작은 불빛이 되기를 바라며, 첫 곡에 앞서 오랜만에 한 통의 편지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밤의 여행자’님께서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지우는 옅은 미소를 띠고 마이크를 조절했다. 그의 목소리는 늘 그랬듯, 지친 영혼을 감싸는 부드러운 담요 같았다. 서서히 편지의 내용이 스튜디오를 채우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지우 DJ님. 저는 ‘밤의 여행자’입니다. 매일 밤 DJ님의 목소리에 위로받으며 잠들곤 합니다. 오늘은 용기를 내어 저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를 꺼내볼까 합니다. 어쩌면 DJ님도, 아니면 이 밤을 듣는 다른 누군가도, 저와 비슷한 기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은 거슬러 올라,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의 여름밤입니다. 그때 저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저는 아주 특별한 친구와 함께 ‘밤골 천문대’라는 버려진 곳에 올랐습니다. 더 이상 별을 관측하지 않는 낡은 천문대였지만,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별들이 쏟아질 듯 맑게 보이는 곳이었죠. 우리는 망가진 망원경에 매달려, 눈으로 은하수를 헤치며 견우성과 직녀성을 찾았습니다.

그 아이는 유독 견우성과 직녀성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일 년에 단 한 번, 칠월 칠석에만 만날 수 있는 그들의 애틋한 사랑이 꼭 자신들의 운명 같다고 말했죠. 우리는 농담처럼, 15년 뒤 오늘, 다시 이 천문대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그때는 각자의 꿈을 이루고, 지금보다 더 멋진 어른이 되어 이 밤하늘 아래에서 다시 만나자고요. 만약 오지 못하더라도, 이날 이 시간에 이 하늘을 보며 서로를 기억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그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DJ님. 다음 주 토요일이 바로 그날이에요. 그 아이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을 떠났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소식을 알 수 없지만, 15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그날의 약속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 아이도 이 밤, 어디선가 저와 같은 하늘을 보며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이미 잊었을까요?

저는 그날 밤, 낡은 천문대에서 함께 들었던 노래를 신청합니다. 그 아이가 흥얼거렸던, 오래된 팝송 ‘Starry, Starry Night’입니다. DJ님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들려주시면, 제 마음속 밤하늘이 조금이나마 선명해질 것 같습니다. 밤의 여행자 드림.

편지 낭독이 끝나자, 스튜디오 안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우는 헤드폰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밤골 천문대’.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정확히는, 그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감정들이 낯설지 않았다. 약속, 헤어짐, 그리고 잊히지 않는 밤하늘.

그 역시 어린 시절, 여름밤의 별똥별 아래에서 소중한 사람과 함께 꿈을 꾸고 약속을 했던 기억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희미해진 얼굴, 잊힌 약속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마음속 깊은 곳에 꽁꽁 숨겨둔 채 꺼내지 못했던 기억들이었다. ‘밤의 여행자’님의 편지는 그 숨겨진 상자를 기어이 열어젖혔다.

“‘밤의 여행자’님, 그리고 이 밤, 당신과 비슷한 추억을 품고 계신 모든 분께 이 곡을 바칩니다.” 지우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소보다 더 깊은 울림이 섞여 있었다. “어린 날의 약속은 때로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키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하고, 시간의 흐름 속에 잊히기도 하죠.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밤하늘의 별들이 변치 않는 것처럼, 어떤 약속들은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빛나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재생 버튼을 눌렀다. 스튜디오를 감싸는 ‘Starry, Starry Night’의 잔잔한 멜로디는 듣는 이의 마음을 아련하게 어루만졌다. 고흐의 그림처럼, 밤하늘의 소용돌이치는 별빛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지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밤골 천문대가 그려졌다. 어쩌면 ‘밤의 여행자’님이 이야기했던 그 천문대일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과 함께, 그의 기억 속 그 아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15년 뒤,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

그때 그 아이는 무척이나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그에게도 그 약속은 마치 영원히 잡히지 않는 별빛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었다. 지금껏 자신은 그 약속을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그 약속은 언제나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갑고도 아름다운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빛은 그를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DJ라는 자리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음악이 서서히 끝을 향해 갈 무렵, 지우는 다시 마이크를 당겼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결심 같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밤의 여행자’님, 그리고 어딘가에서 이 방송을 듣고 있을, ‘밤의 여행자’님과 함께 그 약속을 했던 그분께.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우리의 마음속 밤하늘은 언제나 그날의 별빛으로 가득합니다. 어쩌면 약속의 장소에서 만날 수 없을지라도, 같은 하늘 아래 같은 별을 보며 우리는 늘 연결되어 있을 겁니다.”

지우는 창밖의 어둠을 응시했다. 서울의 밤하늘은 희뿌연 미세먼지와 불빛으로 흐렸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선명한 별들이 박혀 있었다. 견우성과 직녀성, 그리고 그 아래에서 꿈을 꾸던 어린 두 그림자. 다음 주 토요일, 그는 그 밤골 천문대에 갈 것인가. 아니면 그저 스튜디오에서, 약속의 시간을 기억할 것인가.

“다음 주, 우리는 그날의 하늘에 어떤 메시지를 보낼 수 있을까요? 저는 다음 주 이 시간에도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밤골 천문대든, 아니면 당신의 침대 맡이든, 어디에서든 별을 올려다볼 당신을 위해.”

지우의 목소리는 밤공기 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약속은 기억이 되고, 기억은 다시 별빛이 되어 밤하늘을 수놓는,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였다. 그리고 이 밤, 또 하나의 약속이 전파를 타고 새로운 빛을 찾아가고 있었다.

“별이 빛나는 밤의 라디오, 지우였습니다. 편안한 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