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고요했고, 창밖으로는 희미한 달빛이 기우뚱 기울어진 나뭇가지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지우는 익숙하게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을 펼쳤다. 묵직하고 거친 종이 질감,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옅은 갈색 얼룩들이 매번 그녀의 손끝에 닿을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오늘따라 유난히 마음이 무거웠다. 어머니와의 사소한 언쟁이 끝내 풀리지 않은 실타래처럼 가슴 한복판에 엉켜 있었다. 늘 그랬다. 어머니는 단단한 바위 같았고, 지우는 그 바위를 어루만지다 상처만 입는 파도 같았다.
몇 날 며칠을 건너뛰어, 지우의 손가락은 어느 한 페이지에 멈췄다. 종이 틈새에 말라붙은 작은 제비꽃 한 송이가 눈에 들어왔다. 꽃잎은 바스러질 듯 얇고 연약했지만, 그 빛바랜 보랏빛은 여전히 강렬한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아래로 할머니, 명자 씨의 글씨가 유독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마치 잉크마저도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울어버린 것처럼.
1953년 늦가을, 차가운 바람이 허리께를 스치던 날. 그날은 유난히 하늘이 낮고 흐렸다. 전쟁의 상흔이 아직 아물지 않아 모두가 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던 시절, 작은 언덕배기 너머 초가집에 불을 지피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열 살배기 순이가 언니, 언니 하며 내 치맛자락을 붙잡고 매달렸다. “언니, 나도 학교에 가고 싶어. 책 읽고 글씨 쓰고 싶어.”
순이의 작은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였다. 그때마다 내 가슴은 칼로 베어내는 듯 아팠다. 어머니는 이미 병세가 깊어 자리에 누워 계셨고, 아버지 홀로 지게를 지고 나가봐야 하루 벌어 하루 먹기 바빴다. 우리 집 형편에 둘 다 학교에 보낼 수는 없었다. 그건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순이를 위해 그 작은 소망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니, 포기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납득시켜야만 했다.
그날 밤, 나는 밤새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흐느낌이 새어나갈까 입을 막고,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 없는 울음을 토해냈다. 나의 꿈은, 내가 배우고 싶었던 세상은, 그때부터 저물어가는 노을처럼 아스라한 기억이 되었다. 대신 나는 순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순이야, 언니는 네가 학교 가는 걸 보는 게 제일 좋아. 언니가 대신 열심히 일해서 너 공부시켜 줄게.” 순이는 내 말을 이해했을까. 그 어린 마음에 언니의 희생을 감히 헤아릴 수 있었을까.
시간이 흘러 순이는 도시로 떠나 공부를 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나는 평생을 이 땅에서 흙을 일구며 살았다. 하지만 내게 단 하나의 후회도 없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어쩌면 그 후회는 나를 평생 따라다니는 그림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그림자 속에서도 순이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내 딸, 미숙이(지우의 어머니)는 내가 순이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이 받을 사랑과 보살핌마저 순이에게 빼앗겼다고. 미숙이는 내가 순이의 편만 든다고 늘 토라졌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내 딸에게도 미안했지만, 순이를 향한 나의 마음은 다른 종류의 절박함이었다. 억울하다고 설명할 수도 없었고, 그저 세월이 흐르면 알아줄까 했다. 하지만 미숙이의 마음속 깊이 박힌 오해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그 아이의 눈에는 내가 항상 순이만을 바라보는 엄마로 비쳤을 테지. 그 오해가 평생의 서운함으로 남을 줄이야.
일기장을 읽던 지우의 눈가에 뜨거운 것이 맺혔다. 할머니의 글씨가 춤추듯 번져 보였다. “미숙이의 마음속 깊이 박힌 오해는 쉬이 풀리지 않았다.” 이 구절이 지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의 눈앞에 서 있던 어머니의 단단한 바위가 갑자기 금이 가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이모(순이)에 대한 알 수 없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모가 오면 유난히 말이 없고, 이모가 떠나면 한숨을 쉬곤 했다. 지우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이모를 질투한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할머니가 이모를 더 예뻐한다고 느끼는,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라고 치부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할머니의 일기장은 어머니의 오랜 서운함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그 뿌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린 미숙에게는 엄마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동생에게 모든 걸 내어주는 모습이, 자신에게는 소홀한 것처럼 보였을 터였다.
그때의 할머니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모두가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 한 명이라도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애끓는 모정. 그리고 그것을 희생으로 실천한 언니의 마음. 그 속 깊은 감정들을 어린 딸이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오히려 그 희생이, 어린 딸에게는 사랑의 부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지우는 일기장을 가만히 덮었다.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오늘 아침, 어머니가 “너는 나를 한 번도 이해하려 하지 않아!”라고 내뱉었던 말이 귓가에 다시금 맴돌았다. 지우는 바보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자신도 어머니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그 단단함 뒤에 숨겨진 깊은 상처와 오랜 오해를 말이다.
창밖의 달빛이 조금 더 밝아진 것 같았다. 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머니의 방은 이미 잠들어 고요했지만, 지우는 왠지 모르게 지금 당장이라도 어머니에게 가고 싶었다. 아무 말 없이 어머니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오랜 세월 할머니가 품었을 후회와 설명할 수 없었던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오해했던 어머니의 어린 시절까지, 이 모든 것이 한데 뒤섞여 지우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셨다. 바위 같던 어머니의 마음에도, 분명 여린 속살이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 속살은 어쩌면, 오랜 세월 할머니가 해명하지 못했던 이야기로 인해 굳어진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낡은 일기장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간의 강을 건너 세대를 잇는 다리였고, 잊힌 목소리들을 되살리는 주문이었다. 지우는 조용히 어머니의 방문 앞에 섰다. 당장 모든 것이 해결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우는 안다. 이해의 첫걸음은, 듣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리고 때로는 침묵 속에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의 표현임을. 지우의 마음속에, 작은 희망의 불꽃이 조용히 피어올랐다.
